노란색이었어.
색이 남아 있다는 건 창에서 들어오는 햇빛에 색이 바래지 않았다는 거야. 어릴 때 창가에 놓아둔 책들을 떠올렸어. 몇 년 가지 않고 표지가 하얗게 바랬었는데.
종이를 커튼에서 떼어냈어. 잘 안 떨어지더라. 접착제가 아직 남아 있다는 뜻이었어. 작년이었을까? 한달전? 어제?
방금?
해가 기울며 창에 걸쳐졌어. 창에 걸쳐진 해가 은빛커튼을 드리우며 안에 있는 것들이 다 모습을 드러냈어. 비질을 한 바닥, 새로 종이를 얹은 제단, 제단에 놓인 꽃병, 누군가 불을 피운 흔적이며 그 위에 얌전히 놓인 양은냄비까지. 사람이 밟고 오간 발자국이며 이부자리 흔적까지. - P95

바람이 불어와 삭고 낡은 종이가 우수수 떨어졌어.
햇빛이 내려앉아 글씨를 황금빛으로 비추었어.

기다리고 있어
내가 여기 있어 - P96

배에 있으면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바람도 소리도 없어. 별빛은 기울어져 눈앞에 전부 쏠려 있어. 온 우주의 별이 다 한데 모여 섬광처럼 빛나. 여기 있다보면 빛의 속도로 나를 스쳐 가는 것은 온 우주고, 지구며, 내 집과 친구들이고, 나는 여기에 서 있다는 기분이 들어. 그래서 내 시간도 서는 거라고.
공간과 시간이 같은 것이라는 말을 누가 했는데.
다른 시간대로 가는 건 다른 장소에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지.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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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런이 제대로 소란을 피운다면 히어로는 변화를 결심하고 타성에서 벗어나 행동을 취하게 될 것이다. - P35

살인마를 보여주라는 뜻은 아니다. 빌런 캐릭터에 어떤 특성을부여하든 그 특성이 분명하고 확 두드러져야 한다는 뜻이다.
마치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면서 조용한 주택가를 질주하는 빨간 소방차처럼.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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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열심히 노력하는 여름을 칭찬해 주었지만 돌아서면 다른 아이를 사랑했다. 그때마다 여름은 사랑받지 못하는 껍데기를 벗고 대본 속의 새인생으로 영혼을 갈아입었다. 새로운 캐릭터, 새로운 성격, 새로운 인생! 마법을 기다리기만 하는 신데렐라로 살고 싶지 않았다. 대본이 마법 지팡이가 돼 깨지지 않는 유리 구두를 만들기를. 발밑의 모든 것이 마차가 돼 자신을 소망대로 이끌기를. 여름에게 연기는 곧 변신이었다. 사람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역할을 드레스처럼 입고, 연극이 막을 내리면 그 옷 안에 있는 알맹이가 수빈이 아닌 타오르는 ‘여름‘임을 온 세계에 보여 주고 싶었다. - P88

이유는 간단했다. 대본의 세계가 요구하는 아름다움이란 눈과 코, 입과 턱의 모양에만 머물 정도로 얄팍하지 않았다. 성공이란 녀석은 언제나 보다 다충적이고 집요한 과정을 요구했다. 예쁜 캐릭터가 아니라 캐릭터 그 자체가 되는 것. 손 위의 알약들이 절대 만들어 주지 못할 궁극적인 미였다. - P95

겨울은 사랑이라는 단어 위에 감히 여름을 겹쳐보았다. 그 아이의 실력을, 노력을, 열정을 훔치고 싶었다. 빼앗아 제 것으로 만들고 싶은 한편, 그 아이의 찬란함이 보존되길 바랐다. 격이 다름을 인정하여 우러러보면서도 그 마음을 부정하고 싶어지는 참으로 괴이한 욕망. 그 감정은 언제나 사랑과 미움 사이의 모호한 선 위를 얄밉게 오가는 바람으로 겨울에게 불어닥쳤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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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보다 외모로 주목받는 여자아이들의 행동은,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외모를 이용한 계략으로 곡해되기 쉽다는 걸 겨울은 깨달았다. 사랑받기 위해서는 사랑을 받아도 필사적으로 모른 체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향한 남자아이들의 마음이 순수한 우정으로 지속되기 어렵단 걸 알게 된 후로 곁을 여자아이들로만 채웠다. 남학생을 배척하고 여학생을 우선으로 대우해 주자 친구들은 겨울을 ‘털털하고 예쁜아이‘로 인정하며 반겼다. - P29

"넌 있는 집 딸이라서 간절하지 않은 거야."
겨울은 지긋지긋했다. 사람들은 풍족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를 늘 부러워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 ‘부잣집‘이라는 틀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마음을 거세당한 채 살아야 했던가. 겨울은 잘하고 싶었다. 남들처럼 노력이란 걸 했다. 그런데도 여름만큼 연기를 잘하진 못했다. 가진 자가 무능할 경우 세상은 당사자를 더욱 가혹하게 비난했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랐음에도 마음은 시멘트사이의 잡초였다. 세계는 건조한 사막이라 물방울 하나 내려 주지 않았다. - P41

현실에서 달아나게 해 줄 낙원은 대본 속에, 현실을 바꿔 줄 마법진도 대본 속에, 현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지옥도 모두 대본 속에 있었다.
흰 종이는 세계요, 검은 글자는 영혼이니 이 순간 여름에게는 얇은 문서 뭉치만이 전부였다. - P47

안쓰럽지 않은 기특함은 없는 걸까, 노인은 그리 생각하며 손녀가 좋아하는 무지갯빛 컵에 우유를 가득 채워뒀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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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리바를 사랑했지만 더이상 좋아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대학 때부터 친구로 지냈는데, 그간의 시간이 지나고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공통점은 함께한 역사뿐이며, 그것은 원망, 추억, 질투, 부정, 그리고 그녀가 내게서 빌려 가며 드라이클리닝해서 돌려주기로 약속했지만 그러지 않은 옷 몇 벌로 이루어진 복잡한회로였다. - P118

그녀를 떼어낼 수 없었다. 리바는 나를 숭배하면서 동시에 미워했다. 내가 불행 속에서 허우적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불운을 잔인하게 패러디한다고 여겼다. 나는 고독하고 목적이 없는 상태를 자발적으로 선택했지만 리바는 그토록 노력하는데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 남편도 아이도, 화려한 경력도, 그래서 내가 종일 잠만 자기 시작했을 때, 자기 바람대로 내가 무능한 게으름뱅이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며 꽤 흡족해했던 것 같다. 나는 리바와 경쟁할 마음이 없었지만, 따지고 보면 그녀가 괘씸했고 그래서 우리는 언쟁을 했다. 자매가 있으면 이렇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내 모든 결점을 지적할 만큼 나를 사랑하는 사람.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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