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모든 자살 사별자들은 한동안 그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는가에 대한 이유를 쫓는다. 그리고 죽음 직전 사별자들에게 보냈을 어떤 ‘도움의 신호‘가 있었는지 끊임없이 생각한다. 그때는 알아채지 못한 고인의 말과 행동들은 지금 곱씹어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경고신호였다는 생각에 후회하거나 자책하기도 한다.
이 과정은 어쩔 수 없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며 하면 할수록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 P71

사별자들이 고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보의 조각들이라는 것은 아주 작고 적다. 물론 어떤 이는 작지만 죽음과 관련된 결정적인 영역의 조각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죽음의 이유와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 조각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별자는 자신이가지고 있는 조각이 어떤 것인지, 얼마만큼인지 계속 생각하는데, 이 과정은 멈출 수 없으며 멈춰서도 안 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낸 그 사람의 죽음 이야기가 사실과 다를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그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했던 사별자들의 분투, 그것이 애도 과정에서 중요하다. - P73

죽음을 향해 가는 사람은 때로 주변 사람들이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어떤 난공불락의 막에 휩싸이는 것 같기도 하다. 일단 그 세계로 들어가면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자신의 결심을 지지하는 증거로 삼아 자살을 결행하게끔 만드는 동력이 되는 것이 아닐까? - P83

적응과 회복의 축만 작동하는 사별자는 고인의 죽음이 사별자에게 남긴 감정을 보고 그 감정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며, 상실의 아픔에 싸여 자신의 삶을 돌보지 않으려는 사별자에게는 회복과 적응의 축이 작동되어야 한다. 애도는 이 두축이 맞물려 함께 돌아가는 과정이다. 처음에는 삐걱댈 것이다. 애도 상담은 삐걱대는 곳에 기름을 칠하는 일인 것 같기도 하다. - P106

나는 가족 구성원을 자살로 잃고 남겨진 가족들이 각자의 방에서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시간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시간이 흐르고 문을 열고 나와, 나는 이런 아픔이 있었노라 터놓을 수 있다. 사별 직후에는 자신의 고통이 고인 때문인지, 고인을 잃고 아픈 나 때문인지, 누구 때문인지 온통 엉켜 있다. 홀로 있는 시간 동안 누구도 아닌 고인과 나의 관계에만 집중할 필요가 있다. - P115

가족 구성원의 죽음으로 완전히 정지해버린 것 같은 가족들의 역사는 다시 흘러가야 한다. 그리고 고인의 이름을 지우지 않고도 가족의 이야기는 계속될 수있다. - P121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죽음 직전 며칠, 몇 주의 모습에 몰두하다 보면 그 사람의 삶에 있었던 흐름을 잊곤 한다. 사망 직전의 모습에서 고인의 삶 전체로 시야를 넓히는 것도 사별자의 중요한 애도 과업이다. - P145

괜찮은 상태라는 것은 사별자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애도에 관한 여러 이론에서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다.
사별 경험을 사별자 자신이 겪었던 삶의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어떤 윤색도 하지 않으며 고인을 기억하고 말하는 것이 여전히 슬프지만 고통스럽지 않은 상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별자가 자신의 삶을 다시 사랑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상태 말이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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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도 사적인 것이니 우정을 용해제 삼아 녹여도 될 것 같았다 - P165

"이 모든 것은 처참하게 원래의 계획과 어긋날 겁니다. 그리하여 제 마음에 아주 쏙 들 겁니다." - P177

끝없이 성장하던 시대가 끝났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다. 아무것도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윗세대가 오해하듯이 나른한 패배주의에 빠진 것이 아니고, 그저 팩트들이 가리키는 지점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속지 않으면서, 속이려는 모든 시도들이 실없다고 여기면서. 이 작은 행성에서 무언가가 무한하게 성장할 거라고 주장했었다니, 그런걸 예전엔 잘도 믿었구나 싶었다. 20세기의 진취적이고 무책임한 표어들이 힘을 잃어갈 때 태어난 걸뭐 어쩌라고? 잘 속지 않는 세대에 속했다는 것에만큼은 자부심이 있다. 참지 않는 세대에 속했다는 것에도. - P184

쿠키를 먹고 물을 마신 다음, 현정은 과감한 행동을 했다. 쓰러진 책꽂이 너머로 팔을 깊숙이 넣어 다른 책꽂이에서 떨어진 책들을 이쪽으로 끌어온 것이다. 기운 책꽂이가 아예 무너질까 봐 걱정하면서도 손을 멀리 뻗었다. 바로 뒤쪽의 책꽂이는 청소년 소설이 꽂혀 있었던 모양이다. 현정은 기쁘게 로알드 달, 알키 지, 루이스 새커의 책을 찾아냈다. 로알드 달의 책은 《마틸다》였다. 다시 읽어도 재밌었다. 책의 말미에 로알드 달이 자주 했던 말이 써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친절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것 중 최고의 자질이다. 용기나, 관대함이나 다른 무엇보다도 더. 당신이 친절한 사람이라면, 그걸로 됐다." 그의 책은 친절한 사람을 얼마나 많이 만들었을까? 현정은 울다가, 사후 세계가 있다면 로알드 달이 먼저 건너간 세계일 거라고 생각했다. - P207

나, 특별한 사람은 전혀 아니었지, 하고 현정은 잠결에 중얼거렸다. 그래도 매일매일 안쪽은 아름다운 인용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책에는 밑줄도 안긋고, 접지도 않았지만 문장들을 한껏 흡수했다. 나쁘지 않았다고 스스로 평가할 만했다. 움츠릴 대로 움츠려 무릎을 껴안은 지금의 자세 그대로 인용 노트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접히고 맞닿은 부분까지 체표 면적을 계산한다면 몇 쪽짜리 노트일까?
뒷부분이 남아 있는 노트일 것이다. 현정은 그런 엉뚱한 상상을 하며 잠들었다. 잠들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체온이 내려가고 현정의 의식도 깊은 곳으로 미끄러져서 듣지 못했다. 전화기에서 페이지가 갱신 될 때 나는 사각, 소리가 나는 것을. 통신이 복구되었던 것이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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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꺼진 모니터 화면에, 사람들의 시야 모서리에, 소문과 잘못된 정보와 복사에 복사를 거듭하여 열화된 이미지에 존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다들 그렇지 않은가요? 그렇지 않은 사람을 찾는 게 더 어렵지 않을는지요. 모두 언제든지 말라버릴 물웅덩이에 흐리게 반사된 얼굴들일 뿐이란 걸 받아들인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가까운 이들은 말하곤 했어요. 너는 환생을 아주 여러 번 했나 봐, 한 번 살아서는 얻을 수 없는 시니컬함이네. 그런 말에 수긍하는 날도 있고 전혀 수긍할수 없는 날도 있습니다. 어쨌든 갤러리의 유리 위로 - P125

아름다운 타이포가 가득했을 때, 그것에 겹쳐 한쪽으로 머리를 기울인 그림자가 번졌을 때, 나는 잠시완전하게 존재했습니다. 당신들 사이를 걸었습니다. 8월의 지글거리는 거리에서 팸플릿을 차양 삼아 쓰고 눈을 가늘게 떴습니다. 인사하고 포옹하며필요하고 불필요한 디테일로 꽉 찼습니다. - P126

"언니는 진짜 중요한 말만 적절하게 하잖아요. 물론 그게 면접에서 유리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몇 겹의 필터를 우아하게 빠져나오는 말들 쪽이 좋아요." - P143

한빛이 장난스럽게, 목 뒤에서 스위치를 떼어내 내미는 동작을 했다. 경쾌한 혀로 무언가 부속이 분리되는 소리도 흉내 내면서. 아라는 크게 웃고 말았다.
"목 뒤에, 목 뒤에 달렸던 거야?"
"어쩐지 목 뒤일 것 같지 않아요?"
아라도 어이없는 한빛의 마임을 받아주며, 비어있는 손의 보이지 않는 스위치를 건네받아 목 뒤에다는 척을 했다. 한빛이 또 부속이 철컥 들어가는소리를 내주었다.
"나한테는 받고 싶은 거 없어요?"
"그럼 아까 말했던 것처럼 여과 필터?"
여과 필터는 어디에 달렸으려나? 아라는 대충 명치에서 필터 꺼내는 흉내를 냈다. 에어컨의 작은 필터를 꺼내듯이 꺼내 먼지 터는 시늉을 하고 건넸다.
한빛이 좋아라 하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아싸아. 좋은 물물교환이었네요." - P145

아라는 그런 한빛을 보며 마음과는 별개로 아마도 친구로 남지 못할 거라고 달고 슬프게 생각했다. 지금껏 스터디가 끝나고도 개인적으로 가까워진 경우는 거의 없었고, 솔직히 한빛에겐 친구가 차고 넘칠 테니까. 우리는 세상으로 흩어져 나가겠지.
그래도 방금 전의 교환에 대해 나는 자주 떠올릴 것 같아, 아라는 미소 지었다.
말할 차례가 되었고, 선물 받은 스위치를 올렸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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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 헝클어져 있는 머리엔 어째선지 종종 나뭇잎이나 날벌레가 붙어 있었다. 어디 풀숲에라도 누워 있다 온 걸까 상상하게 되었다. 다른 애들은 머리에 벌레 붙었다고 놀리기 바빴는데, 내겐 왜 그 모습이 그렇게 예뻤을까.
어느 날, 그 애의 머리카락 사이에서 무당벌레 한마리가 날아올랐고, 나는 그 애를 사랑한다고 느꼈다. - P104

호오

도트 무늬의 도트는 작고
사이는 멀며
일렬이 아니어야 해요
점들이 좀 일렁이며 흩어지면 좋겠어요

당신이 모든 것을 대수롭지 않아 해서 좋아해요
지루해하고 시시해하는 표정이 좋아요
감동 같은 걸 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전집을 버리고 잡지를 모으는 사람이라서

도시 전체가 정전된 꿈을 꾸었어요
꿈 이야기를 하면 반칙인가요
버스를 기다리는데 차창의 전광판도 꺼져서
몇 번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어요

하지만 그건 정전과는 상관없지 않나요

수조의 멍게가 너무 커서 심장처럼 보이네요
당신이 내 앞에서 상처를 열면
물의 냄새, 유리의 냄새
혹 내가 쥐고 있는 것이 날카로운가
손을 내려다봐요

우리 괜찮게 살다가 좋은 부고가 되자,
그렇게 말하곤 웃었지요
당신이 견디면서 삼키는 것들을
내가 대신 헤아리다 버릴 수 있다면,
유독하고도 흡족할 거예요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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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박탈당한 세대였고, 세계는 우리에게서 박탈한 것을 영원히 돌려 주지 않을 것이며, 그 단호한 거부로 결국 무너져내릴 것이다. 그것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안개 속에서 감각만이 반짝이다 사라질 것이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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