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꺼진 모니터 화면에, 사람들의 시야 모서리에, 소문과 잘못된 정보와 복사에 복사를 거듭하여 열화된 이미지에 존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다들 그렇지 않은가요? 그렇지 않은 사람을 찾는 게 더 어렵지 않을는지요. 모두 언제든지 말라버릴 물웅덩이에 흐리게 반사된 얼굴들일 뿐이란 걸 받아들인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가까운 이들은 말하곤 했어요. 너는 환생을 아주 여러 번 했나 봐, 한 번 살아서는 얻을 수 없는 시니컬함이네. 그런 말에 수긍하는 날도 있고 전혀 수긍할수 없는 날도 있습니다. 어쨌든 갤러리의 유리 위로 - P125
아름다운 타이포가 가득했을 때, 그것에 겹쳐 한쪽으로 머리를 기울인 그림자가 번졌을 때, 나는 잠시완전하게 존재했습니다. 당신들 사이를 걸었습니다. 8월의 지글거리는 거리에서 팸플릿을 차양 삼아 쓰고 눈을 가늘게 떴습니다. 인사하고 포옹하며필요하고 불필요한 디테일로 꽉 찼습니다. - P126
"언니는 진짜 중요한 말만 적절하게 하잖아요. 물론 그게 면접에서 유리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몇 겹의 필터를 우아하게 빠져나오는 말들 쪽이 좋아요." - P143
한빛이 장난스럽게, 목 뒤에서 스위치를 떼어내 내미는 동작을 했다. 경쾌한 혀로 무언가 부속이 분리되는 소리도 흉내 내면서. 아라는 크게 웃고 말았다. "목 뒤에, 목 뒤에 달렸던 거야?" "어쩐지 목 뒤일 것 같지 않아요?" 아라도 어이없는 한빛의 마임을 받아주며, 비어있는 손의 보이지 않는 스위치를 건네받아 목 뒤에다는 척을 했다. 한빛이 또 부속이 철컥 들어가는소리를 내주었다. "나한테는 받고 싶은 거 없어요?" "그럼 아까 말했던 것처럼 여과 필터?" 여과 필터는 어디에 달렸으려나? 아라는 대충 명치에서 필터 꺼내는 흉내를 냈다. 에어컨의 작은 필터를 꺼내듯이 꺼내 먼지 터는 시늉을 하고 건넸다. 한빛이 좋아라 하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아싸아. 좋은 물물교환이었네요." - P145
아라는 그런 한빛을 보며 마음과는 별개로 아마도 친구로 남지 못할 거라고 달고 슬프게 생각했다. 지금껏 스터디가 끝나고도 개인적으로 가까워진 경우는 거의 없었고, 솔직히 한빛에겐 친구가 차고 넘칠 테니까. 우리는 세상으로 흩어져 나가겠지. 그래도 방금 전의 교환에 대해 나는 자주 떠올릴 것 같아, 아라는 미소 지었다. 말할 차례가 되었고, 선물 받은 스위치를 올렸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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