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도 사적인 것이니 우정을 용해제 삼아 녹여도 될 것 같았다 - P165
"이 모든 것은 처참하게 원래의 계획과 어긋날 겁니다. 그리하여 제 마음에 아주 쏙 들 겁니다." - P177
끝없이 성장하던 시대가 끝났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다. 아무것도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윗세대가 오해하듯이 나른한 패배주의에 빠진 것이 아니고, 그저 팩트들이 가리키는 지점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속지 않으면서, 속이려는 모든 시도들이 실없다고 여기면서. 이 작은 행성에서 무언가가 무한하게 성장할 거라고 주장했었다니, 그런걸 예전엔 잘도 믿었구나 싶었다. 20세기의 진취적이고 무책임한 표어들이 힘을 잃어갈 때 태어난 걸뭐 어쩌라고? 잘 속지 않는 세대에 속했다는 것에만큼은 자부심이 있다. 참지 않는 세대에 속했다는 것에도. - P184
쿠키를 먹고 물을 마신 다음, 현정은 과감한 행동을 했다. 쓰러진 책꽂이 너머로 팔을 깊숙이 넣어 다른 책꽂이에서 떨어진 책들을 이쪽으로 끌어온 것이다. 기운 책꽂이가 아예 무너질까 봐 걱정하면서도 손을 멀리 뻗었다. 바로 뒤쪽의 책꽂이는 청소년 소설이 꽂혀 있었던 모양이다. 현정은 기쁘게 로알드 달, 알키 지, 루이스 새커의 책을 찾아냈다. 로알드 달의 책은 《마틸다》였다. 다시 읽어도 재밌었다. 책의 말미에 로알드 달이 자주 했던 말이 써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친절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것 중 최고의 자질이다. 용기나, 관대함이나 다른 무엇보다도 더. 당신이 친절한 사람이라면, 그걸로 됐다." 그의 책은 친절한 사람을 얼마나 많이 만들었을까? 현정은 울다가, 사후 세계가 있다면 로알드 달이 먼저 건너간 세계일 거라고 생각했다. - P207
나, 특별한 사람은 전혀 아니었지, 하고 현정은 잠결에 중얼거렸다. 그래도 매일매일 안쪽은 아름다운 인용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책에는 밑줄도 안긋고, 접지도 않았지만 문장들을 한껏 흡수했다. 나쁘지 않았다고 스스로 평가할 만했다. 움츠릴 대로 움츠려 무릎을 껴안은 지금의 자세 그대로 인용 노트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접히고 맞닿은 부분까지 체표 면적을 계산한다면 몇 쪽짜리 노트일까? 뒷부분이 남아 있는 노트일 것이다. 현정은 그런 엉뚱한 상상을 하며 잠들었다. 잠들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체온이 내려가고 현정의 의식도 깊은 곳으로 미끄러져서 듣지 못했다. 전화기에서 페이지가 갱신 될 때 나는 사각, 소리가 나는 것을. 통신이 복구되었던 것이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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