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덕을 했다. 헤어진 연인의 험담은 되도록 하지 않는게 좋듯 탈덕의 이유도 굳이 밝힐 필요는 없겠다. 왜 마음이 식었는지를 설명하다 보면 얼마큼 좋아했는지 필연적으로 고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속상하게 덕질과 연애는 물론 전혀 다른 형태의 사랑이지만, 누군가를 오랫동안(때로는 어떤 연애보다도 장수하며) 열렬히 좋아했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이 나를 설명하는 하나의 장치가 돼버린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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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학(Suicidology)의 창시자이자 오랜 시간 동안 자살자의 마음을 연구했던임상심리학자 에드윈 슈나이드먼(Edwin S. Shneidman) 박사는 자살은 내적 대화의 결과라고 했다. 우리 마음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을 훑어보며 탐색하고, 그중에 자살이있지만 자살을 거부하고, 다시 자살을 훑는다. 자살이 거기에 있고 자살이 다시 거부된다. 그러다가 자살이 최종해결책으로 선택된 후에는 자살을 계획하고 이제 자살이 고통의 해답으로 고정된다는 것이다. - P174

자살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멈추려는 정신적 과정이라는 것 외에 남겨진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하지만 사별자들은 자살로 향하는 고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겪었을 고통의 종류와 정도를 가늠하려 한다. 미친듯이 알고 싶지만 알 수 없어서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사별자들은 그 사람이 겪었을 역경을 더듬어가야만 한다. 우회로도 지름길도 없다. 나는 그저 그 길을걷는 사별자 곁의 동반자일 뿐이다.
사별 기간이 길지 않은 경우 사별자들은 고인의 물건을처리하는 것에 대해 고민한다. 물건을 보는 것 자체가 너무 괴로워 가까이 가지 못하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고인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고인의 마지막에 머물렀던 사별자의 시선이 그 사람의 삶 전체를 향할 수 있을 때쯤, 그만큼 시간이 흐른 뒤에는 고인의 물건을 볼 수 있는 용기가생긴다. 그러니 고인의 물건을 그대로 두고 싶어 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빨리 정리하고 잊으라‘고 재촉하지 말고 정리하지 못하는 그 사람의 이유를 들어주는 편이 낫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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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서럽고 가장 외로운 순간에 나타나 준 그가 너무도 고마워, 마음이 몸으로 전해지기 시작했다. 성숙해지기 위해 애쓰는사람들끼리 손을 맞잡고 인생이 주는 고통에서 탈출해야 한다.
그것이 아무리 위험한 일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고집부리며 떨쳐 내야 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 찬란한 감정들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인간을 조롱하는 삶에 오히려 침을 뱉었다. - P118

그러고는 홀로 여행을 가기 위해 짐을 쌌다. 사랑을 절제하고 감정을 통제하기 위하여, 돈주머니를 흠모하고 부패를 숭배하기 위하여, 만일 자신 안에 영혼이란 것이 아우성치며 돌아다닌다면 그것을 깊은 바다에 내던지고 돌아오려고………… - P125

"조선의 여자로 태어난 게 한스러워. 저 무서운 가부장제 때문에 여자는 아무리 배워도 소용이 없어. 나보고 기가 세다느니 어쨌다느니 앞으로도 얼마나 말이 많을지 안 봐도 훤해.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무대에 서는 것도 두려워져. 그래서 혼자 있을 때면가끔 이렇게 중얼거린다?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디냐. 이래도 한평생 저래도 한평생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이 말이 한숨처럼 입에 붙어 버렸어." - P199

"기자들은 윤심덕이라는 한 여성을 집중 사냥함으로써 가난하고 희망 없는 대중들의 마음을 달래고자 하는 거예요. 공부를많이 하고 성악을 해 봤자 여자는 여자일 뿐이라는, 저 한없이 고루해 빠진 민중의 심사에 영합해 보려구요. 그러나 그것은 민중을 편협한 마음으로 보려는 지식인들의 오만입니다. 민중을 언제나 토라져 있는 존재로만 보는 건 또 다른 우월주의예요. 일제가 대놓고 주입시켜 온 ‘조선인 열등주의‘에 암묵적으로 동조해 스스로 제 살을 깎아 먹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도 모른 척하는 거지요…." - P249

함께 있어야 한다. 둘만의 보금자리는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지만 살아있고 싶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끝없이 파고드는 가족에 대한 죄책감과 성공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초조함, 그런 것들은 모두 잊을 것이다. 언젠가일본에서 우진과 처음 입맞춤을 했던 순간처럼 다시 또 그런 결심을 하고 있는 심덕이었다. - P252

보름 후에도 한 달 후에도, 언론은 결코 윤심덕을 절대 동정하지 않았다. 언론은 발정난 암캐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사랑에 대해 분별없는 감상이니, 탕자의 교만이니, 낭만일 뿐인 공상이니, 세상에 떠도는 말을 다 갖다 붙이며 멸시했다. - P272

그러나 두 사람에게 있어 사랑은 성찬이었고, 위대했고, 간절했다. 사랑은 고통이지만 즐거움이었고, 슬프지만 치열했고, 위험했지만 탐스런 것이었다. - P273

심덕에게는 대응할 그 어떤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언젠가는 결백이 밝혀지겠지만 아마도 그런 일은 사후에나 있을 법한 일이다.
이제,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 사랑도 노래도……………심덕은 송충이만도 못한 이 사람들의 곁을, 성숙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이 바닥을, 어서 빨리 벗어나는 것만이살 길이라 생각했다. 두려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옥임의 예감대로…………. - P290

남자에게서 버림받고 사회에서 외면당한 한 여자를 자신만큼 잘 표현할 수는 없으리라…. 참으로 모순된 상황이었다. 우진과의 애절한 사랑을이용하고 있다는 자책감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 삶의 아픔을 모두감정선 안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 P309

영화는 며칠도 못 가 간판을 내렸다. 사실, 영화 하나로 인생의과오를 세탁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무모한 짓이었다. 그러나 신문기사의 한마디 한마디는 이전에 당했던 모멸감의 배가 되어 심덕을 더욱더 괴롭혔다.
이제 당신, 윤심덕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윤심덕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거대한 함성들이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환청으로 들렸다. -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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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생
‘현재 인생‘의 줄임말. 말 그대로 내게 주어진현실 그 자체를 뜻한다. 현생은 대체로 외면하고 싶은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영영 이탈해버리지 않도록 붙잡아줄 덕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게 덕후의 지론이다.

덕생
‘덕후 인생‘의 줄임말. 현생과 공생하는 관계라고 정의하고 싶다. 덕생은 자칫 현생을 무너트리는 것처럼 보이기 쉬운데, 현생에 아무런 기력도 남아있지 않을 때 내 멱살을 잡아 끌고 가는 역할을 할 때가 더 많다. 그러므로 현생이 덕생에 잠시 잠식당할때도 두렵지 않다. 그저 이렇게 중얼거릴 뿐이다. "괜찮아. 어차피 그 힘으로 사는걸…."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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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난파는 이날 심덕을 찾아온 이유에 대해 입을 열었다.
"사실 내가 다시 일본에 온 데에는 특별한 일이 있어서야. 누굴좀 만나 줘."
무아
"누구?"
그렇게 말을 꺼낸 난파는 마침 뭔가가 생각난 듯 환하게 웃었다.
"참, 심덕 씨 호가 수선(仙)이지? 그 친구 호는 수산(水山)이야. 이거 우연치고는 기가 막힌 인연이네. 두 사람 다, 물을 좋아하나봐?"
김우진의 호가 수산이었다. 심덕 또한 비를 좋아했고 물만큼은언제나 변함이 없다 생각해 수선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그 친구 만나 보면 아마 낯이 익을걸? 이따금씩 유학생 모임에 나왔으니까."
"무슨 일인데?"
"만나 보면 알아."
"총각은 아니겠지?"
"딸이 하나 있어."
"호호, 연애설에 휘말리지는 않겠네?"
그러나 그때는, 김우진과 윤심덕 두 사람이 물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물의 한가운데로 두 사람의 시간이 영원히 정지해 버릴 거라는 생각은 그 누구도 하지 못했다. - P65

늘 난파의 아픔을 꼼꼼히 헤아리는 그녀였다. 그러나 심덕도 초조한 사람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유학생 모임에 가끔 등장하는심덕은 유난히 활발하고 때로는 도발적이기까지 했다. 그리하여누구도 그녀의 아픔을 눈치챌 수 없었지만 그건 반드시 성공해야한다는 강박감을 떨쳐 내려 몸부림치는, 고통의 또 다른 일갈이었다. - P61

길고양이 같은 인생들.
그중에서도 그 여자는 어느 길 어디쯤에서 방황하던 사람일까요. 불안, 분열, 공포, 추위, 슬픔…. 가출자이며 피난자이고 폐쇄자가 되어 버린 그녀는 자신이있었을까요.
한때는 식민지 조선의 작은 위안이 되길 소망하며 꽃으로 노래를 파 내어 세상에 흩뿌리던 그 여자. 그러나 이제 와서는 더이상 아무것도 아닌 채 썩은 낙엽이 되어 뒹구는 그 여자.
윤심덕. 그녀는 조선 전체가 처음으로 경험하는 특별한 별이었습니다. 그녀의 노래에 열광하던 사람들은 뭔가 결핍되어 있는 자아를 해방시키고 싶었고, 삶의 공복감을 그녀에게서 채우려 했으며, 숨 막히게 옥죄어 오던 권위와 억압을 다 내던져 버리고자 애썼습니다. 그들에게 윤심덕은 하나의 동경이며 비상구였으니까요.
그녀로 하여 마침내 조선의 흑백 사진은 봄 햇살로 피어난 천만
‘가지 꽃으로 새롭게 물들어 갈 준비를 마쳤던 겁니다. 가부장제와 식민지의 아픔이 뒤엉킨 이 땅에서, 봄을 맞은 그들은 낡고 칙칙한 외투를 훌훌 벗어 버리고 들뜬 외출을 준비하기까지 했지요.

나도 그랬으니까요.

그런데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태도가 조금씩차가워져 갔어요. 그들은 웬일인지 이 세상이 조금만 더 있다 바뀌길 바라는 것처럼 굴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구습의 높은 담장을 넘어설 용기가 부족했던 겁니다. 뭐가 무서웠는지 자꾸만 머뭇거렸어요. 아니, 머뭇거리다 못해 뒷걸음질까지 쳤어요.
그게 문제였지요. 새로운 문화를 거부하고 외면할 때 더 이상의 나아감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조선인으로 살아왔기에, 그 완고하고 차갑기만 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거예요. 그래서, 그녀에게 희열을 느끼던 이들은 날이 갈수록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려 놓기에 바빴습니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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