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난파는 이날 심덕을 찾아온 이유에 대해 입을 열었다. "사실 내가 다시 일본에 온 데에는 특별한 일이 있어서야. 누굴좀 만나 줘." 무아 "누구?" 그렇게 말을 꺼낸 난파는 마침 뭔가가 생각난 듯 환하게 웃었다. "참, 심덕 씨 호가 수선(仙)이지? 그 친구 호는 수산(水山)이야. 이거 우연치고는 기가 막힌 인연이네. 두 사람 다, 물을 좋아하나봐?" 김우진의 호가 수산이었다. 심덕 또한 비를 좋아했고 물만큼은언제나 변함이 없다 생각해 수선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그 친구 만나 보면 아마 낯이 익을걸? 이따금씩 유학생 모임에 나왔으니까." "무슨 일인데?" "만나 보면 알아." "총각은 아니겠지?" "딸이 하나 있어." "호호, 연애설에 휘말리지는 않겠네?" 그러나 그때는, 김우진과 윤심덕 두 사람이 물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물의 한가운데로 두 사람의 시간이 영원히 정지해 버릴 거라는 생각은 그 누구도 하지 못했다. - P65
늘 난파의 아픔을 꼼꼼히 헤아리는 그녀였다. 그러나 심덕도 초조한 사람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유학생 모임에 가끔 등장하는심덕은 유난히 활발하고 때로는 도발적이기까지 했다. 그리하여누구도 그녀의 아픔을 눈치챌 수 없었지만 그건 반드시 성공해야한다는 강박감을 떨쳐 내려 몸부림치는, 고통의 또 다른 일갈이었다. - P61
길고양이 같은 인생들. 그중에서도 그 여자는 어느 길 어디쯤에서 방황하던 사람일까요. 불안, 분열, 공포, 추위, 슬픔…. 가출자이며 피난자이고 폐쇄자가 되어 버린 그녀는 자신이있었을까요. 한때는 식민지 조선의 작은 위안이 되길 소망하며 꽃으로 노래를 파 내어 세상에 흩뿌리던 그 여자. 그러나 이제 와서는 더이상 아무것도 아닌 채 썩은 낙엽이 되어 뒹구는 그 여자. 윤심덕. 그녀는 조선 전체가 처음으로 경험하는 특별한 별이었습니다. 그녀의 노래에 열광하던 사람들은 뭔가 결핍되어 있는 자아를 해방시키고 싶었고, 삶의 공복감을 그녀에게서 채우려 했으며, 숨 막히게 옥죄어 오던 권위와 억압을 다 내던져 버리고자 애썼습니다. 그들에게 윤심덕은 하나의 동경이며 비상구였으니까요. 그녀로 하여 마침내 조선의 흑백 사진은 봄 햇살로 피어난 천만 ‘가지 꽃으로 새롭게 물들어 갈 준비를 마쳤던 겁니다. 가부장제와 식민지의 아픔이 뒤엉킨 이 땅에서, 봄을 맞은 그들은 낡고 칙칙한 외투를 훌훌 벗어 버리고 들뜬 외출을 준비하기까지 했지요.
나도 그랬으니까요.
그런데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태도가 조금씩차가워져 갔어요. 그들은 웬일인지 이 세상이 조금만 더 있다 바뀌길 바라는 것처럼 굴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구습의 높은 담장을 넘어설 용기가 부족했던 겁니다. 뭐가 무서웠는지 자꾸만 머뭇거렸어요. 아니, 머뭇거리다 못해 뒷걸음질까지 쳤어요. 그게 문제였지요. 새로운 문화를 거부하고 외면할 때 더 이상의 나아감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조선인으로 살아왔기에, 그 완고하고 차갑기만 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거예요. 그래서, 그녀에게 희열을 느끼던 이들은 날이 갈수록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려 놓기에 바빴습니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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