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일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비블리오마니아 게임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했다.
"좋아, 게임 방법은 모두 알다시피 아주 간단해. 회전판을 돌려서 나온 숫자만큼 각자의 말을 이동시키면 돼. 그렇게 도서십진분류법에 따라 나뉜 열 개의 열람실을 차례로 돌면서 책 관련된 문제를 푸는 거야. 만일 오답을 말하면 다른 사람에게 기회가 넘어가고, 다음 차례 때 같은 열람실에서 새로운 문제를 풀어야 하지. 그런데 문제가 그렇게 까다롭지는 않을거야. 대부분 객관식이거든. 어쨌든 각 열람실에서 책 열권을 획득한 뒤 제일 먼저 도서관 밖으로 나가는 사람이 이기는거야."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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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열렬한 팬이에요."
"그래? 고맙다. 그런데 네 이름이 뭐였지?"
"카일이에요. 카일 킬리."
"아! 내가 항상 진리로 생각하는 말을 실제로 증명해 보인 그 아이로구나. ‘게임은 끝날 때까지 결코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말." - P61

찰스는 실실 웃고 있었다. 순간 카일은 찰스가 야스민을 속인것을 깨달았다. 녀석은 비상구로 나가면 탈락이라는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복도를 내달려서 야스민이 자신의 행동을 확신하게 만든 것이다. 찰스는 게임에서 이기려고 일부러 그런 속임수를 썼다. 상대가 누구든 짓밟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 게임을 하면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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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책임감 있는 덕질‘도 바로 이런 마음에 기인한다. 끝없이 꿈꾸도록 설계된 시스템에서 개성이 다치지 않기를, 데뷔 이후에도 주어지는 공백기 동안 불안에 잠식되기보다 홀가분한 쉼표를 찍을 수 있기를, 춤과 노래 말고도 스스로의 성장을 목격할 수 있기를 바라며 아이돌에게 마음을 열고 지갑도 연다. 인생이 고단할 때마다 여러 아이돌을 보며 노력 없이 웃고 기력을 얻은 만큼, 내 행복을 바라듯 그 애들의 행복을 바라 마지않는다.
이런 애틋한 마음은 걸그룹을 향할 때 좀 더 구체성을 띤다. 대중에게 꿈과 희망을 노래하는 아이돌산업은 어느 기자의 말마따나 ‘연령주의와 유리천장이 뒤엉킨 정글 같은 쇼 비즈니스 업계‘라는 불편한 얼굴도 갖고 있어서, 그 세계의 한 축을 지탱하는 ‘어린’+‘여성’의 조합으로 이뤄진 아이돌 그룹을 생각하면 유난한 안부를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건 평소의 내가 무사한 삶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또래 여성들을 지지하는 일의 연장선과도 같아서, 자매애의 심정으로 모니터를 사이에 두고 걸그룹들과 촘촘히 눈을 맞추게 된다. 그래서일까, 내가 사랑하는 신에서 여성이 숨 쉬듯 대상화되고 사회적 약자로서 차별받는 모습이 고스란히 오버랩될 때면 참으로 복잡한 마음이 든다. - P193

아이돌들이 건강하게 살아남는 데에 팬인 내가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자주 생각하는 요즘이다. 단지 그곳에서 더 오래 머물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듯 사랑을 더하는 것 뿐일까? 때때로 무력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걸그룹들에게 개개인의 매력과 실력이 입체적으로 도드라지는 기회가 지속해서 주어지기를바란다면 결국 돌판의 지박령이 되어 그 방향성에 대해 꾸준히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다는 단순한 결론에 다다랐다. 나는 아이돌이, 특히 여성 아이돌이 프로가 되는 과정에서 저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자신들의 꿈이었던 바로 그 아이돌이라는 직업 때문에 훼손되지 않았으면 좋겠으니까.
비록 이런 외침과 고민이 아이돌들에게 불리하고 불편한 시스템을 당장 바꾸거나 앞서 우스갯소리로 말한 밈처럼 아이돌의 인생 2막을 책임져줄 수는(물론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 적어도 아이돌을 꿈꾸는 어린 소녀들을 보다 안심하고 응원할 수 있는 덕후로 나이 드는 데에는 유효한 씨앗이 되겠지. 그렇게 바랄 뿐이다. - P194

분명한 목소리를 담아내는 시도가 더 많은 걸그룹들에게도 이어지기를 바랐다. 너무 늦지 않게 말이다(나는 누구라도 이 영상을 본다면 많은 걸그룹을 향해 "예쁘면 됐지, 무슨 불만이 있겠어" "예쁜데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라는 말들을 이제 속으로도 쉽게할 수 없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이런 감각과 자각은 걸그룹이 아니라도, 아이돌이 아니라도 모두에게 유효한 말이다. 물론 상대의 고통을 제대로 알아봐주기란힘든 일이지만, 적어도 너무 쉽게 반응하여 왜곡된 응답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 - P196

과연 삶은 계속되고 있었다. 어린 죽음들 뒤에도 나는 여전히 아이돌을 좋아하고 있다. 그리고 애도의 흔적은 이러한 불가항력적인 마음의 영속성이 올바르게 흐르도록 주시한다. 누군가가 영영 떠나고 나서야 그이의 무덤을 이정표 삼는 것은 확실히 염치없는 일이다. 끝없는 혐오와 폭력을 생산하는 세계가 언제까지 여성을 향한 애도에 빚져야만 간신히 변화할 의지를 가질 작정인지 모르겠다. 나도 한동안 그세계에 편승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설리와 하라에게 부리나케 도착하는 늦은 사랑을 보면서 홧홧 깨닫는다. 아이돌은 물론 대중에게 인정받아야하는 직업이지만,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 P201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지금‘을 놓치지않는 연습이겠지. 여성에게 ‘지금‘ 너그러워지기, 다양한 여성의 존재를 ‘지금‘ 수용하고 존중하기. 이 글을 쓰는 나의 ‘지금‘도 이제 막 시작된 훈련이라는 걸 밝혀둔다. 과거를 애도하고, 미래를 희망하기 위해서는 나에겐 아주 많은 새로운 지금들이 필요할 테다.
바라건대, 그 길에 더는 어떤 여성도 제 존재가 함부로 모욕당하거나 거부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발화점이 내가 사랑해온 아이돌 세계에서라면 더더욱 말이다. 내가 여성 아이돌들의 가려진 외로움까지 쓰다듬을 수는 없겠지만, 투쟁이 필요하다면 그 목소리만은 쓸쓸하지 않도록 힘을 더할 것이다. - P202

아이돌은 언제나 나라는 인간의 우울을 가뿐히 휘발시켜주고, 괴로운 현실 한편에서도 기꺼이 명랑한 세계를 구축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가끔 덕후인 나는 참 이기적으로 사랑하는 사람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선미의 <주인공>을 듣고 싶은 밤. 후렴구에 꼭 내 마음 같은 가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 "show must go on… the show must go on…그런데 이 쇼는 누구를 위해 계속돼야 할까? 덕후의 즐거움을 위해서? 아이돌의 자아실현을 위해서? 미처 이어지지 못한 두 아이돌들의 무대가 잔상처럼 번진다. 여성들이 제 삶이 계속돼야 하는 이유를 찾기에 좀 더 온기있는 무대를, 안전한 사회를 꿈꿔본다. 그리고 이 바람이 유효한 한 내 삶이 앞으로 어떻게 흘러가든 덕질을 멈추는 일은 없을 것이다.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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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처럼 트위터를 켜 방송 내내 마음으로 그어둔 밑줄을 옮기려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재영이 타인의 고민에 귀 기울이며 제 안에 목소리를 확인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을 전하며 스스로를 희망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트위터에 남긴 무수한 사랑의 말들이 세계를 부유하다 마침내 내게 도착하는 상상을 해본다. 나는 언제나 스스로를 가장 마지막에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두었는데, 그 시간은 어쩌면 내가 세상에 전송한 사랑의 총합을 기다리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기다림이라면 기꺼이 할 만한 게 아닐까. 이 사랑의 결과로 앞으로의 나는 자신을 더 잘 사랑하는 사람이 될 테니 말이다. - P166

깜빡했는데, 앞선 덕질존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아이템을 빼먹었다. 바로 온앤오프 앨범 커버에다 박완서 선생님의 에세이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의 띠지를 둘러놓은 것인데, 그 띠지에는 이렇게 써 있다.
"다이아몬드에는 중고라는 것이 없지. 천년을 가도 만년을 가도 영원히 청춘인 돌."
영원히 청춘인 ‘돌‘이라 ・・・ 이건 ・・・ 아이돌‘이잖아? 선생님께는 송구스럽지만 처음 이 문장을 보았을 때 나는 아이돌을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완벽한 말은 앞으로도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이돌 덕후로 산다는 건 가슴 깊은 곳에 밝고 환한 돌멩이 하나를 품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그러고 보니 영원히 청춘인 건 아이돌 그 자체보다는 아이돌을 언제까지나 아이돌로서 대하는 덕후인지도 모르겠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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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광기어린 이 마음을 자타공인 ‘윤상 덕후‘인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보다 우아하고 지적인 언어로 표현해주었다.

이런 ‘나‘는 내가 가장 덜 싫어하는 ‘나’들 중 하나다. 덕질, 즉 어떤 대상을 최선을 다해 사랑해 보는 이 드문 경험은 왜 귀한가. 일본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는 우리가 자신의 전부를 좋다고 말하기는 어려워도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의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한다. (…) 나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능력, 덕질은 우리에게 그런 능력(덕)을 준다. 자꾸만 나를 혐오하게 만드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면서, 이 세계와 맞선다. - P140

한번은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다다른 결론은 좀 요상하지만, 나는 최초로 송출되는 필름에서 남다른 생명력이랄까 현장성을 느끼는 것 같다.
당연히 생방송일 리 없는데도, 이미 과거 시점에서 몇 번이나 녹화되고 편집된, 근사한 조각 모음이라는걸 아는데도 마치 그 서사가 그 순간에 탄생해 그 시간에만 고유하게 존재한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본방송이 괜히 ‘본(本)‘ 방송이 아닌 것이다). 이 같은 과몰입의 끝은 스스로를 그 서사에 편입시키는 것이다. 온에어가 켜져 있는 동안엔 그게 무엇이든, 나는 드라마의 일부가 되어감을 느낀다. 나는 몰입하고자하는 대상의 시작과 발전, 부침과 소멸을 ‘함께 겪는‘게 중요한 사람인 것이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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