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는 ‘책임감 있는 덕질‘도 바로 이런 마음에 기인한다. 끝없이 꿈꾸도록 설계된 시스템에서 개성이 다치지 않기를, 데뷔 이후에도 주어지는 공백기 동안 불안에 잠식되기보다 홀가분한 쉼표를 찍을 수 있기를, 춤과 노래 말고도 스스로의 성장을 목격할 수 있기를 바라며 아이돌에게 마음을 열고 지갑도 연다. 인생이 고단할 때마다 여러 아이돌을 보며 노력 없이 웃고 기력을 얻은 만큼, 내 행복을 바라듯 그 애들의 행복을 바라 마지않는다. 이런 애틋한 마음은 걸그룹을 향할 때 좀 더 구체성을 띤다. 대중에게 꿈과 희망을 노래하는 아이돌산업은 어느 기자의 말마따나 ‘연령주의와 유리천장이 뒤엉킨 정글 같은 쇼 비즈니스 업계‘라는 불편한 얼굴도 갖고 있어서, 그 세계의 한 축을 지탱하는 ‘어린’+‘여성’의 조합으로 이뤄진 아이돌 그룹을 생각하면 유난한 안부를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건 평소의 내가 무사한 삶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또래 여성들을 지지하는 일의 연장선과도 같아서, 자매애의 심정으로 모니터를 사이에 두고 걸그룹들과 촘촘히 눈을 맞추게 된다. 그래서일까, 내가 사랑하는 신에서 여성이 숨 쉬듯 대상화되고 사회적 약자로서 차별받는 모습이 고스란히 오버랩될 때면 참으로 복잡한 마음이 든다. - P193
아이돌들이 건강하게 살아남는 데에 팬인 내가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자주 생각하는 요즘이다. 단지 그곳에서 더 오래 머물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듯 사랑을 더하는 것 뿐일까? 때때로 무력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걸그룹들에게 개개인의 매력과 실력이 입체적으로 도드라지는 기회가 지속해서 주어지기를바란다면 결국 돌판의 지박령이 되어 그 방향성에 대해 꾸준히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다는 단순한 결론에 다다랐다. 나는 아이돌이, 특히 여성 아이돌이 프로가 되는 과정에서 저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자신들의 꿈이었던 바로 그 아이돌이라는 직업 때문에 훼손되지 않았으면 좋겠으니까. 비록 이런 외침과 고민이 아이돌들에게 불리하고 불편한 시스템을 당장 바꾸거나 앞서 우스갯소리로 말한 밈처럼 아이돌의 인생 2막을 책임져줄 수는(물론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 적어도 아이돌을 꿈꾸는 어린 소녀들을 보다 안심하고 응원할 수 있는 덕후로 나이 드는 데에는 유효한 씨앗이 되겠지. 그렇게 바랄 뿐이다. - P194
분명한 목소리를 담아내는 시도가 더 많은 걸그룹들에게도 이어지기를 바랐다. 너무 늦지 않게 말이다(나는 누구라도 이 영상을 본다면 많은 걸그룹을 향해 "예쁘면 됐지, 무슨 불만이 있겠어" "예쁜데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라는 말들을 이제 속으로도 쉽게할 수 없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이런 감각과 자각은 걸그룹이 아니라도, 아이돌이 아니라도 모두에게 유효한 말이다. 물론 상대의 고통을 제대로 알아봐주기란힘든 일이지만, 적어도 너무 쉽게 반응하여 왜곡된 응답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 - P196
과연 삶은 계속되고 있었다. 어린 죽음들 뒤에도 나는 여전히 아이돌을 좋아하고 있다. 그리고 애도의 흔적은 이러한 불가항력적인 마음의 영속성이 올바르게 흐르도록 주시한다. 누군가가 영영 떠나고 나서야 그이의 무덤을 이정표 삼는 것은 확실히 염치없는 일이다. 끝없는 혐오와 폭력을 생산하는 세계가 언제까지 여성을 향한 애도에 빚져야만 간신히 변화할 의지를 가질 작정인지 모르겠다. 나도 한동안 그세계에 편승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설리와 하라에게 부리나케 도착하는 늦은 사랑을 보면서 홧홧 깨닫는다. 아이돌은 물론 대중에게 인정받아야하는 직업이지만,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 P201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지금‘을 놓치지않는 연습이겠지. 여성에게 ‘지금‘ 너그러워지기, 다양한 여성의 존재를 ‘지금‘ 수용하고 존중하기. 이 글을 쓰는 나의 ‘지금‘도 이제 막 시작된 훈련이라는 걸 밝혀둔다. 과거를 애도하고, 미래를 희망하기 위해서는 나에겐 아주 많은 새로운 지금들이 필요할 테다. 바라건대, 그 길에 더는 어떤 여성도 제 존재가 함부로 모욕당하거나 거부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발화점이 내가 사랑해온 아이돌 세계에서라면 더더욱 말이다. 내가 여성 아이돌들의 가려진 외로움까지 쓰다듬을 수는 없겠지만, 투쟁이 필요하다면 그 목소리만은 쓸쓸하지 않도록 힘을 더할 것이다. - P202
아이돌은 언제나 나라는 인간의 우울을 가뿐히 휘발시켜주고, 괴로운 현실 한편에서도 기꺼이 명랑한 세계를 구축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가끔 덕후인 나는 참 이기적으로 사랑하는 사람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선미의 <주인공>을 듣고 싶은 밤. 후렴구에 꼭 내 마음 같은 가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 "show must go on… the show must go on…그런데 이 쇼는 누구를 위해 계속돼야 할까? 덕후의 즐거움을 위해서? 아이돌의 자아실현을 위해서? 미처 이어지지 못한 두 아이돌들의 무대가 잔상처럼 번진다. 여성들이 제 삶이 계속돼야 하는 이유를 찾기에 좀 더 온기있는 무대를, 안전한 사회를 꿈꿔본다. 그리고 이 바람이 유효한 한 내 삶이 앞으로 어떻게 흘러가든 덕질을 멈추는 일은 없을 것이다.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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