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신 혈통 팔아 먹고살 길이 열리면 백번 천 번 충성하겠지. 망조 뻔한 나라에 충성이 가당키나 하냐?"
대장을 놀리려다 오히려 대장이 정말 충신의 후손일지도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넌 그걸 믿었냐?라고 하는 대신 충심이 왜 소용없는가를 말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대장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충신의 후손도 이렇게 만드는 나라라면 대장 말대로 새 세상을 도모하는 게 당연한 것이다. 나는 하늘의 뜻을 믿지 않고, 따라서 태평도를 믿지 않고, 그러므로 황건군에도 마음이 없었으나, 어쩐지 대장은 믿었다. 너는 사람을 잘 믿어서 탈이다. 대장도 때로 그렇게 말했다. 내가 그런가? 모든 사람을 다 믿는 것은 아닌데. - P23

사람이 되려고 우리는 성문을 나섰다.

겨우 사람이 되려고. - P25

"정 눈물이 나거든 그냥 울어라. 그래도 내가 앞으로 너를 어찌 부르면 좋을까를 생각하며 울거라."
이름을 지어 부른다는 것은 가까이 오라는 뜻이다. 멀리가지 말라는 뜻이다.
곁에 있겠다는 말이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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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감은 벌어지지도 않을 일을 대비하는 방식으로 나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 P241

"루크, 넌 나를 공격한 애들과 함께 있었잖아. 불을 피우면서 웃고 있었잖아. 삼촌을 잃은 내 앞에서도 그렇게 행동했잖아. 사이먼, 너는 셀마를 때렸어. 그걸 아무도 모를 줄 알았어? 셀마가 저렇게 돼서 정말로 슬프긴 해? 클로이가 사고를 당했을 때도 슬펐어? 그래서 한다는 게 고작 추모 사이트에 댓글이나 다는 거였어? 네 여자친구였잖아. 그런데 전혀 모르는 사람 일인 것처럼 굴었잖아. 나한테 괜찮으냐고 물어봤잖아. 그게 내 문제인 것처럼, 네 일은 아닌 것처럼 행동했잖아." - P265

세상에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법이다. 잘못된 생각, 엇나간 선택이 사람들 사이로 퍼져나가면 브레이크를 밟기에 너무 늦은 순간이 온다. 어, 어, 하고 소리를 지르다 쾅. 경찰이 달려오고, 앰뷸런스가 사이렌을 울리고, 보험사 직원이 계산기를 두드리는 걸 본 뒤에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을 것이다. - P265

앞서 나열한 어떤 멜라닌도 생명체에 파란색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아메리카 원주민이 인디언으로 불리던 것처럼 블루멜라닌이라는 작명은 근거 없는 편견과 고집의 결과물이었다. 우리는 원하지 않는 이름을 얻었고 그 결과 계층의 일부가 되었다. 오랜 시간이어질 시련이 내 앞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싸우고있는 건 사람이 아니었다. 지정할 수 있는 대상이나 인물이 아니었다. 나는 시스템과 싸워야 했다. 인식에 대항해야 했다. 그런 걸 어떻게 이기나 주먹을 휘둘러도 닿지 않는 존재를. 말을 해도 듣지 않는, 귀가 없는 존재를.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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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면 자전거를 타고 채석장에 갔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어둠이 내게는 안식처가 되었다. 빛이 없는 세상에는 색깔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물이 검게 채색된 시간, 물에 잠겨 있는 동안 나는 투명했다. 호수에 둥둥 떠 있으면 어둠은 정수리 위로 시커먼 입을 벌렸다. - P170

"차별은 그 시스템의 피해자만 인지할 수 있는 독가스 같은 거니까. 수십 번의 경힘이 필요한 게 아니야. 몇 번, 어쩌면 딱 한 번의 끔찍한 경험이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폐에 남기는 거야. 그리고 숨을 쉴 때마다 그 기억이 되살아나는 거지. 사람들은 그걸 몰라. 차별이 강물처럼 흘러야지만 차별인 줄 안단 말이야. 사실 차별은 곳곳에 놓인 지뢰밭 같은 거야. 딱 한 번의 폭발에도 우린 불구가 된다고." - P185

사람들은 선한 얼굴로 살을 벤다. - P195

사람들은 새로운 사실이 알려질 때마다 면밀하게 타격할 대상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 P197

미안해. 사랑해. 잊지 않을게. 숙제를 해치우듯 비슷한 문장이 반복됐고, 그래서 진심으로 애도하는 것 같지 않았다. 사이먼과 루크, 에밀리의 이름도 보였다. 모두 클로이를 사랑하고,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했다.
셀마와 나는 추모 사이트에 아무 글도 올리지 않았다. 대신 도니스헬에서 만나 햄버거 세 개를 주문했다. 구석 테이블에 마주앉은 우리는 조용히 클로이를 추억했다. - P199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어쩌면 나는 캔스워시에서 종일 게임만 하는 나를 삼촌이 봐주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집이나 도서관에 숨어 있지 않고 캔스워시로 왔던 것이다. 종일 게임을 하며 애처럼 투정을 부렸던 것이다. 내가 평안이 아니라 해결책을 찾기 위해 캔스워시를 찾았다는 사실을, 나는 몰랐고 삼촌은 알았다.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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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셰인빌 주민 한 명이 리앤더의 남부연합기를 프라이드 플래그로 몰래 바꿔놓았다. 오스틴 부인이 벌인 일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오스틴 가족은 독실한 감리교 신자들이었고 성소수자에 대해 마냥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리앤더 씨는총천연색 무지개 깃발을 뒷마당에서 태워버린 뒤 다시 남부연합기를 내걸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남부연합기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깃대에는 프라이드 플래그 두 개가 걸려 있었다. 그런 날이 며칠 반복됐다. 아침마다 자신의 집에 걸린 무지개 깃발을 발견하고 고함을 내지르던 리앤더 씨는 결국 남부연합기를 포기했다. 마지막으로 프라이드 플래그를 태우던 날 리앤더 씨는 씩씩거리며 어차피 대통령은 트럼프야, 이 자식들아, 하고 소리쳤다. - P126

백악관의 새로운 주인은 사회가 감당하던 비도덕적 행위의 한계치를 높여놓았고, 그래서 누구도 내게 위협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때조차 나는 은근한 위압감과 불안에 시달렸다. 집단으로 린치를 가하던 중학생들이, 나를 강도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했던 질리언 베일리가, 프랜시스 후버가 미치 램버트가 두려웠다. 버젓이 남부연합기를 내걸고 프라이드 플래그를 태우던 휴고 리앤더가 두려웠다. 내게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잠재적 가해자가 두려웠다. - P127

"넌 똑똑해. 난 그걸 알아. 그러니까 공부해. 공부해서 대학에가. 변호사가 되건 의사가 되건 그렇게 해. 그러면 아무도 널 무시하지 못할 거야. 결국 미국은 돈이거든. 사람들이 너한테서 파란색을 보게 만들지 마. 녹색을 보게 만들어. 달러 말이야. 널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 안면에 그린백(greenback)을 꽂아주라고."
삼촌이 말하는 동안 내 눈은 줄곧 호수를 향해 있었다. 깊이를가늠할 수 없는 웅덩이는 검고 막막해 보였다. 그 끝을 확인하고싶었다. - P144

다음 날 학교 복도에서 사이먼을 봤다. 캐비닛 앞에서 루크를•비롯한 여러 애와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이먼은 이별하지않은 사람처럼 밝게 웃었다. 서글서글한 눈으로 내게 손을 흔들어주기까지 했다. 나는 사이먼이 쓸모없어진 클로이를 폐기 처분한 것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반짝이는 트로피, 자신이 선량한 이웃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명찰, 파란 피부의 친구라는 타이틀, 한때 그러했던 기록. - P156

타인의 미래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이먼, 루크, 에밀리, 네이트, 레이철, 미치・・・・・・ 모두의 궤적을 이을 수 있었다. 수년 후의 윤곽선을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내 미래를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내게는 1년 후도 불투명했다. 인천을 떠나 조지아로 향할 때처럼, 여전히 불확실한 인간이었다. 가지를 치던 생각이 엄마에게 닿았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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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중앙에 위치한 식당은 학생 모두를 수용하기에 너무 작았다. 학생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시간에 식사를 했는데, 사실 절반을 수용하기에도 충분한 크기는 아니었다. 빈자리에 식판을 내려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맞은편에 에밀리 라슨이 앉았다. 셰인빌고등학교 10학년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학생이었다. 너드(nerd), 긱(geek), 드윕(dweeb), 도크(dork) 사이에 확실하고 선명한 작(jock)이었다. - P94

"오바마는 하와이에서 태어났어. 기독교인이고, 설령 네 말이 사실이라도, 무슬림을 모두 이 나라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말은 아니겠지?"
"물론 아니지. 하지만 필요하다면 걸러낼 필요는 있어."
"나치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 "
"와, 비약이 심하네."
"너 대체 뭘 신봉하는 거야. 소속을 확실히 해. 알트라이트(alt-lite)? 네오파시즘? 인셀? 집에서 <에잇챈(8chan)>이랑 <스톰프런트(Stormfront)> 게시판만 들여다보는 거 아냐?"
"트럼프 지지자가 모두 대안 우파는 아니야"
후버 선생님은 둘에게 자중하라는 듯 헛기침을 했다. 레이철은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 넌 아이시스(ISIS)가 오바마와 힐러리 때문에 결성됐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트럼프는 그렇게 주장하던걸 여성의 성기를 잡았다며 자랑하고 장애인 기자 흉내를 냈던 그 인간말이야. 이라크에서 전사한 무슬림게 군인의 부모까지 조롱하던 그 후보"
"그 후보가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워주겠지. 그 사람들 돈으로. 위험한 사람들이 입국하지 못하게 막아줄 거야. 그중에는 아이시스도 포함될 테고. 좌파들이 왜 지는 줄 알아? 가난한 사람들이 어째서 보수정당에 투표하는지 모르거든." - P103

"한 인종이 다른 인종을 멸시하고 억압하면서 지배 계층이라는 우월감을 느끼는 거야. 정작 본인이 계급의 아래에 놓여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면서 말이야. 가난한 백인 노동자가 흑인을 멸시하는 모습을 상상해봐. 그런데 한때는 이 나라에서 백인도 차별받았다는 거 아니? 하얀 흑인으로 불리던 아일랜드계 이민자가 있었지. 비숙련 노동자였고 가톨릭 신자였던 사람들. 그보다 더 오래전에는 슬라브계 사람들이 노예였고, 노예(slave)라는 단어의 어원이 슬라브(slav)지. 그러니까 이건 흑인과백인 사이의 문제만이 아니야. 모든 인종이 이 구조의 영향을 받고 있으니까. 명예 백인으로 불리는 아시아인을 봐. 성공한 소수민족 신화 덕에 이 계급사회에 저항하지 않고 섞여들었잖아. 백인이 던져준 먹잇감이지. 백인이 아시아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있을 때 옆에서는 굶주린 흑인이 으르렁거리는 거야. 자기들이 체스판 위에 있다는 걸 아무도 몰라. 이 시스템은 열등한 타자를 등장시켜 차별을 합리화하고 있는데, 서로를 공격하느라 진짜 적이누군지 생각하지 않아. 분리 정복 전략의 효과를 다시 한번 입증한 셈이지. 효과가 있다니까. 언제나."
해먼 선생님은 흥분한 것 같았다. 나는 선생님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린 뒤 말했다.
"죄송해요. 방금 하신 말씀은 못 알아듣겠어요."
"모르는 단어가 있었어?"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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