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추 때문에 우리가 ‘그날 오후‘에 도착한 시각은 서산으로해가 기울 무렵이었다. 바람은 서늘했고, 노을은 아름다웠다. 가장아름다운 오후 시간에 우리는 제대로 ‘그날 오후‘에 도착한 것이었다. 몇 시 몇 분까지 시내로 들어가 몇 시 몇 분에 시작하는 영화를 봐야 하고 몇 시에 저녁을 먹어야 하는 시간표를 상비하고 다니는 사람들한테는 찾아오기 어려운 우연이었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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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란 나이는 무언가에게 사로잡히기 위해서 존재하는 시간대다. 그것이 사랑이든, 일이든 하나씩은 필히 사로잡힐 수 있어야 인생의 부피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이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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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치 크라우더는 전 세계의 디아스포라 한인 커뮤니티와 접촉해 교포 자녀들이 쓰지 않고 방치해둔 ㄱ을 취합했다. 돈으로 풀리지 않는 협상에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했다. 영주권이라든가, 취업 알선, 영구 귀국에 따른 병역문제 등을 깔끔하게 처리해줬다. 그때부터 배치 크라우더는 한낱 장사치가 아니게 됐다. 전 국민이 백 년 동안 쓰기에 넉넉한 ㄱ이 확보된 이후 열린 기념식에서 그는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 P21

"오늘 받은 주문이 어떻게 되나, 천구? 한번 읊어보라고."
"신라면 다섯 박스랑 복수요."
"정확해. 내가 기억하는 것과 틀림없이 일치하는구먼."
"복수 쪽은 아무래도 사장님이 처리하셔야 할 것 같네요.
저는 신라면 담당할게요."
"무슨 소린가 천구. 사장이라면 마땅히 복잡하고 고된 일을 도맡아야지. 라면은 내가 처리하겠네."
"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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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아십니까? 홍학은 동성애가 굉장히 많이 발견되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수컷과 암컷이 새끼를 낳으면 다른 수컷이 암컷을 밀어내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수컷과 수컷 사이에서 큰 새끼는 더욱 강하게 크기 때문에 생존의 문제와도 직결되죠." - P325

"가능합니다. 남학생이니까요." -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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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이혼은 없어요."
"난 당신의 완벽한 인생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냐."
"난 당신 사랑해요."
"나도 사랑했어." - P265

준후는 영주를 똑바로 응시했다. 상처를 주고 싶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영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울려는 거다.
준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것에 흔들릴 일은 없지만 우는여자를 보는 건 귀찮다고 생각했다.
"다현이가 아니었어도 이혼할 거였어."
"난 당신을 잘 알아요."
영주가 준후를 따라 벌떡 일어섰다. 준후는 말끄러미 그녀를 보았다. 다현도 그랬다. 선생님을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안다고 말했다. 왜 ‘안다는 것‘에 그렇게들 집착하는 걸까. 자신을 가장 잘 안다던 다현은 알까? 다현의 죽음에 자신이 그렇게 슬프지 않다는 것을. - P266

차라리 다현을 죽인 것이 영주였다면 좋았을 것을.
다현이 죽지 않았다면, 하고 생각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준후는 조금 놀랐다.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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