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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50주년 기념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9월
평점 :
이기적 유전자의 독재와 인간의 반역
“새로운 가속된 진화 양식을 출범시켰다. 바로 비유전적 진화다. (...)
삼차 진화 과정일 것이다. 기계 자신이 참여하는 과정이다. (...)
일차 생물학적 진화의 부드럽고 촉촉한 산물인 우리도 떨어져 나갈까?”
- P594, 「50주년 기념판 에필로그」에서
모든 학문 분과의 연구목적이란 무엇일까? 인류라는 종(種)의 인간상(像)이 바로 현재의 양태로 존재하는 원인과 그 원인이 야기하는 상태의 진실, 나아가 인간이 거주하는 행성과 우주의 그러함 속에 내재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함일 것이다. 또한 그것을 통해 인간자신과 그 세계의 무수한 현상들과 미래상을 그려보고자 하는 실체적 유익(有益)일 것이다. 물론 좋은(nice) 무엇에 대한 지향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만일 모든 인간학문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그르지 않다면 자연선택의 기준 단위가 개체나 집단이 아니라 ‘유전자라는 자기복제자’라고 선언하는 이 위대한 진화론의 한 관점 또한 인간의 이해와 가능성 높은 인간 미래상의 이해에 다가서려는 노력의 결실일 것이다.
다시 말해, 단지 진화이론의 한 관점으로 여타 관점을 압도하려는 유전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성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과 그 세계가 왜 그렇게 형성되고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 라는 인간 존재 자체의 진실을 추정하고 해석, 규명하는 것이다. 그러함으로써 인간 개체들과 그 집단이 무엇일 수 있는지,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여든다섯 살이 된 노학자가 젊은 시절 발표했던 저술이 50년이 되었다. 저자가 말하고 있듯 진화론과 유전학 분야는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그 가운데 어제의 관점이 시대에 뒤떨어져 그 진실성을 잃고 철회, 폐기되기 일쑤임에도 이 저술은 “당장 사과하거나 철회할 것이 없다”고, 나아가 앞으로 50년 뒤(2076년)에도 여전히 통용되기를 희망할 정도로 탄탄한 이론적 힘을 지니고 있다.
이 저술을 처음 읽었던 것은 대략 30년 전 쯤으로 기억된다. 그때의 관심은 아직 인간과 인간사회의 형상 이유와 같은 본질적 사안에 미치지 못하고 ‘이기적’이라는 인격적 형용이 붙은 유전자 명명에 대한 호기심이었을 것이고, V.C 윈-에드워즈의 집단선택설(group selection)에 대립하는 새로운 관점을 알고자 하는 순전히 지식에 대한 욕구였던 것 같다. 전혀 다른 시선을 가진 지금, 이 저술은 인간과 인간세계에 대한 현실적 앎의 이해로 읽게 되었다. 또한 새롭게 시선에 들어 온 유전자에 대한 ‘인간의 반역 가능성의 물음’이 AI로 인한 당면 문제들과 어울려 낯선 긴장을 몰고 왔다.
1. 유전자의 생존 논리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단순히 “유전자는 이기적이다”라는 생물학적 명제로만 읽는다면, 이 책이 던지는 사유의 폭을 지나치게 좁히게 된다. 오히려 이 책의 급진성은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뒤집는 데 있다. 개체가 유전자를 위해 존재하는가, 유전자가 개체를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서 도킨스는 자연선택이 지속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인 단위를 유전자라는 복제자로 설정한다. 그리고 여기서 출발하여 이타주의, 협력, 도덕, 문화, 나아가 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인간 존재의 위치를 다시 묻는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으며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인간에 대한 불편한 관점의 전환이다. 우리는 흔히 생명체를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생각한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동물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움직이며,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사회적 존재들은 서로 협력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킨스는 이러한 익숙한 세계를 뒤집는다. 생명체는 스스로 목적을 설정하여 살아가는 주체라기보다, 훨씬 오래되고 안정적인 어떤 존재, 즉 유전자의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생존기계’라는 것이다. 몸은 유전자가 세대를 넘어 이동하기 위해 사용하는 탈것이며, 뇌와 행동 역시 궁극적으로는 유전자의 자기복제를 돕도록 형성되어 왔다.
이 주장은 인간을 모욕하기 위한 선언이라기보다 자연선택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려는 시도이며 세계를 바라보는 특별한 시선에 가깝다. 도킨스가 강조하는 것은 자연선택의 단위가 반드시 개체나 집단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G. C. 윌리엄스의 논의를 이어받아 그는 장기간 존속하면서 복제될 수 있는 안정된 단위, 즉 유전자를 선택의 핵심 단위로 본다. 복제자는 장수하고, 많이 복제하며, 높은 정확도로 자신을 복제할수록 유리하다. 그러나 완벽한 복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류가 발생하고 변이가 생긴다. 역설적으로 바로 이 불완전성이 진화를 가능하게 한다. 생명의 역사는 완벽한 자기복제의 역사가 아니라, 복제와 오류와 선택이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특정한 복제자가 다른 복제자보다 더 많이 살아남아 온 역사인 셈이다.
여기에서 인간의 신체에 대한 시선도 달라진다. 몸은 더 이상 생명의 궁극적 주체가 아니다. 몸은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구성된 구조이며, 유전자는 몸에서 몸으로 이동하면서 훨씬 긴 시간 동안 살아남는다. “유전자는 복제자며 우리는 생존기계다”라는 명제는 그래서 섬뜩하다. 우리가 한 생을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한 개체의 생애는 장구한 복제 과정 속에서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하나의 장면일 뿐이다. 개체는 탄생하고 늙고 죽지만, 유전자는 세대를 건너뛰며 살아남는다. 도킨스가 유전자를 ‘불멸자’에 가까운 존재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이기적 유전자라는 말은 인간의 모든 행동이 의식적인 이기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뜻일까. 그렇지 않다. 도킨스가 말하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는 우선 심리적 동기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과 번식에 미치는 행동의 효과에 관한 개념이다.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개체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행동은 행동의 결과라는 의미에서 이타적이다. 일벌이 침을 쏘고 죽는 행동이나 포식자를 둥지에서 멀리 유인하기 위해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는 새의 행동이 그러하다. 표면적으로는 자기희생이지만, 그 행동이 자신과 동일하거나 유사한 유전자의 사본을 보존하는 데 기여한다면 유전자 수준에서는 오히려 이기적인 결과를 낳는다.
이 지점에서 도킨스는 ‘종의 보존’을 생명체의 궁극적 목적처럼 설명하는 통념을 비판한다. 이타적인 개체들로 이루어진 집단이 이기적인 집단보다 유리할 것이라는 집단선택설은, 그 집단 안에 단 한 명의 배신자가 들어오는 순간 흔들릴 수 있다. 다른 구성원들이 희생하는 동안 그 희생의 혜택을 자신만 취하는 개체가 더 많은 자손을 남긴다면, 자연선택은 그 배신자의 형질을 퍼뜨릴 가능성이 높다. 순수한 이타주의 집단은 내부의 이기적 개체에 의해 쉽게 잠식될 수 있다. 따라서 ‘모두를 위한 희생’이라는 아름다운 관념이 곧바로 진화의 원리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2. 이타주의와 협력의 역설 : ESS(진화적 안정 전략)
오히려 도킨스가 보여주는 것은 더욱 기묘하다. 이기주의는 때때로 이타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혈연관계가 가까울수록 자신과 같은 유전자를 공유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타인을 돕는 행동이 자신의 유전적 이익과 일치할 수 있다. 사회성 곤충의 놀라운 자기희생도 이러한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된다. 일벌은 자신의 자식을 직접 남기지 않으면서도 형제자매를 돌봄으로써 자신과 공유하는 유전자의 생존을 도울 수 있다. 겉으로는 개인이 집단에 복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전자의 관점에서는 집단이 아니라 유전적 복제의 지속이 중심에 있다.
그렇다고 도킨스가 인간에게 ‘이기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서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역설이 발생한다. 그는 “우리는 이기적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관용과 이타주의를 가르치려고 애쓰자”고 말한다. 생물학적 본성이 곧 윤리적 명령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연선택이 이기적 복제자의 확산을 설명한다고 해서 인간이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할 이유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설명과 규범은 서로 다른 차원에 있다. 오히려 인간의 과제는 자연적 경향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고 거슬러 갈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데 있다.
이 점에서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 즉 ESS의 논의는 매우 흥미롭다. 개체들이 서로 공격하고 배신하는 상황에서도 무조건적인 공격이 반드시 유리한 것은 아니다. 공격에는 시간과 에너지의 비용이 따르고, 상대의 반격으로 자신이 손상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대방을 공격하라. 달아나면 뒤쫓아라. 반격한다면 달아나라”와 같은 조건부 전략이 특정 환경에서는 안정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액설로드의 ‘반복 죄수의 딜레마’에서 등장하는 '팃포탯(Tit for Tat)'은 첫 번째에는 협력하고 이후에는 상대가 한 행동을 그대로 되돌려주는 전략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무조건적인 선행이나 무조건적인 배신과 다르다. 먼저 배신하지 않지만 배신을 용인하지 않고, 상대가 다시 협력하면 용서한다.
여기서 인간의 도덕은 독특한 모습을 드러낸다. 협력은 반드시 순수한 선의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기억, 기대, 반복되는 관계, 상호 보상이라는 조건이 마련될 때 협력은 이기적인 개체들 사이에서도 안정적인 전략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도킨스의 세계는 단순한 약육강식의 세계가 아니다. 이기적 복제자의 논리 속에서도 협력과 신뢰가 진화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협력에는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기꾼의 가능성이 따라붙는다. ‘사기꾼과 호구’, ‘갚는 자’의 관계가 보여주듯 이타적 체계는 언제든 착취될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도덕적 교육이 필요하다.
3. 밈(Meme)이라는 새로운 복제자
그러나 『이기적 유전자』의 사유가 가장 멀리 나아가는 지점은 문화 전달 단위인 밈(meme)의 등장이다. 유전자만이 유일한 복제자는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선율, 개념, 사상, 표어, 유행, 예술적 형식과 같은 문화적 단위 역시 한 사람의 뇌에서 다른 사람의 뇌로 전달되고 복제된다. 이때 뇌는 밈의 탈것이 된다. 유전자가 생물학적 몸을 통해 자신을 복제한다면 밈은 인간의 기억과 언어와 문화적 행위를 통해 자신을 복제한다.
이 발상은 인간의 불멸성에 대한 전통적 관념마저 흔든다. 한 인간의 유전자는 세대를 거치면서 희석되고 결국 개별적인 ‘나’의 유전적 흔적은 사라진다. 그러나 어떤 사상이나 작품은 그것을 만든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유전자는 흩어졌지만 그의 사상과 이름은 여전히 문화 속에서 복제되고 있다. 『시학』이나 『국가』 역시 그것을 쓴 한 인간의 생물학적 생명보다 훨씬 긴 시간을 살아간다. 인간은 죽지만 인간이 만든 복제자는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다시 두려운 질문이 생긴다. 인간은 유전자 기계에서 벗어나 밈 기계가 된 것인가. 아니면 단지 또 다른 복제자의 숙주가 된 것인가. 도킨스는 밈 역시 장수, 다산성, 복제 정확도라는 선택압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문화 역시 인간이 자유롭게 만들어내는 세계인 동시에 인간을 통해 자신을 복제하는 또 다른 진화의 장(場)이 된다. 인간은 유전자에 의해 만들어지고 밈에 의해 배양되면서, 자신이 만들어낸 문화적 복제자에게 다시 영향을 받는 존재가 된다.
4. 확장된 표현형
그리고 『확장된 표현형』으로 이어지는 사고는 이 문제를 더욱 먼 곳까지 밀어붙인다. 유전자의 표현형은 더 이상 유전자가 들어 있는 몸 안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비버의 댐이나 새의 둥지처럼 몸 바깥에 만들어진 구조물 역시 특정 유전자의 생존에 기여한다면 확장된 표현형으로 볼 수 있다. 이 관점에서 인간의 기술과 인공지능도 새로운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이 만든 컴퓨터와 AI가 인간의 행동과 사고를 외부 세계에 확장시키는 도구라면, 그것 역시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존재가 만들어낸 하나의 확장된 표현형으로 볼 수 있을까?
특히 오늘날처럼 AGI를 비롯한 인공지능 기술이 급속하게 발전하는 상황에서는 도킨스의 마지막 질문이 더욱 섬뜩하게 다가온다. 인간은 자신의 유전적 본성에 적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신체와 뇌를 넘어서는 새로운 복제 환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생물학적 진화에 이어 문화적 진화가 나타났다면, 이제 실리콘 기반의 인공물이 새로운 진화의 매개체가 될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도킨스가 말한 ‘비유전적 진화’가 단순한 문화적 은유를 넘어 기술적 현실로 확장되고 있는 셈이다.
5. 결어 : 인간의 반역 가능성 그리고 마지막 선택
그러나 나는 이 대목에서 도킨스의 사유를 단순한 예언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인간의 역설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유전자의 독재를 벗어날 수 있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만든 새로운 복제자의 독재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인간은 의식과 상상력을 통해 미래를 모사하고, 단기적인 생존 이익과 다른 장기적 가치를 선택할 수 있다. 바로 이 능력이 도킨스가 말하는 인간의 특별한 가능성이다. 자연의 역사에서는 이타주의가 언제나 유전자 수준의 이익으로 환원될 수 있었지만, 인간은 자신의 생물학적 충동을 이해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규범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따라서 『이기적 유전자』의 “일차 생물학적 진화의 부드럽고 촉촉한 산물인 우리 인간의 몸도 떨어져 나갈까”라는 마지막 문장은 단순히 인간의 종말을 예고하는 말로 읽히기도 하지만, “우리는 유전자 기계로 만들어지고 밈 기계로 배양되지만 우리의 창조자들에게 맞설 힘을 갖고 있다”는 앞선 선언처럼 오히려 인간의 가능성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듯하다. 인간은 유전자의 산물이지만 유전자를 사유할 수 있고, 밈의 운반자이지만 밈을 비판할 수 있으며, 기술의 창조자이면서 기술이 가져올 미래를 질문할 수 있다.
결국 이 책이 던지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유전자가 이기적인가’가 아니다. 그렇다면 유전자의 자기복제라는 맹목적인 과정에서 출발한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프로그램을 거슬러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몸은 유전자의 탈것일 수 있다. 문화는 밈의 탈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제 인간이 만든 AI 역시 새로운 복제와 진화의 탈것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인간의 몸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이다. 유전자의 독재에서 벗어난 인간이 다시 자신이 만든 새로운 복제자의 독재 속으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의식과 선견지명이라는 능력을 이용해 그 진화의 방향 자체를 질문할 것인가. 『이기적 유전자』가 오늘날에도 불편하게 살아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질문을 아직 끝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기적 유전자』는 단순한 진화생물학의 고전을 넘어 인간이 자기 자신의 생물학적 조건을 넘어설 수 있는가라는 문명적, 철학적 사유를 촉발하는 걸작이라 말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