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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 / 결혼식 / 오페레타 ㅣ 제안들 8
비톨트 곰브로비치 지음, 정보라 옮김 / 워크룸프레스 / 2015년 1월
평점 :
“곰브로비치의 작품들에는 언제나 칼이 들어있다.”
많은 비평가들이 작가와 작품을 직접 연결하는 것을 비판하지만, 비톨드 곰브로비치의 희곡이건 소설이건 그의 작품은 작가 개인의 신상과 신념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다. 그는 1967년 인터뷰 《대화》에서 “나의 모든 이야기와 희곡에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인물이 하나씩 있는데, 그 인물을 감독이라 해도 좋을 것”이라 말했듯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그의 직접의 현신이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 / 결혼식 / 오페레타』는 곰브로비치의 희곡 작품 전체를 수록한 희곡집이다. 표제에 명기된 세 편의 작품 외에 희곡 《오페레타》의 초기 원고로 추정되는 미발표 희곡인 《역사-이야기》와 평론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콘스탄티 옐렌스키(Kostanty A. Jelenski ;1922~1987)의 평설인 〈맨발에서 나체까지〉가 더해져 비톨드 곰브로스키를 잘 알지 못하는 독자들에게는 더없이 완결된 작품집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에 더해 번역자 정보라의 〈앵무(鸚鵡)는 포유류에 속하느니라〉라는 〈오감도〉의 “정립된 의미를 파괴하는” 터무니없는 모더니스트의 시 문장을 제목으로 하는 일종의 해설은 곰브로비치의 부조리극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대변하기도 한다.

【콘스탄티 옐렌스키(좌), 비톨드 곰브로비치(우)】
아무튼 몹시 “비정상적이고 비뚤어져 있으며 병들고 타락한”, 더욱이 유치찬란하며 조롱과 위악이 버무려진 이야기 속에 숨겨진 ‘번뜩이는 칼날’을 발견하는 쾌감은 콘스탄티와 정보라 두 문인의 덕택이다. 이 야릇하고 기이한 희곡을 해독하느라 진이 빠져 정작 작품의 재미를 잃어버리는 우를 피하기 위해서 두 사람의 글을 먼저 읽고 각 희곡 작품으로 나가는 것은 큰 도움이 되어준다. 두 글에서 곰브로비치의 기질 등 개인사와 시대의 정황, 그의 작품 전반의 시종일관하는 일련의 연계성, 각 작품마다 드러나는 비톨드의 현현, 나아가 나름의 인물 해석은 분명 종잡을 수 없게 전개되는 희곡들을 읽어나가는 데 중요한 방향 잡이가 된다. 물론 하나의 단서로서, 또는 작품 배경이 되는 시대상과 주제라는 커다란 틀에 대해서 말이다.
그 밖에 해당 작품을 읽는 이의 인상에 따라 읽는 것은 부조리극의 특성상 다종다양할 것이다. 이를테면 희곡 《결혼식》의 주인공인 프랑스에 주둔하는 폴란드 군인 헨리크는 꿈속에서 자신의 집이 여관으로 변한 것을 본다, 그리곤 어느새 여관은 궁정으로 변모하고 자신은 왕자가 되어 옛 연인 마니아와의 결혼식 거행을 준비한다. 불모성으로 가득한 이 연극에서 헨리크가 주절거리는 대목이 있는데, 나는 이 장면에서 대뜸 여느 정치 담론가의 비아냥거리는 영 쓸데없는 목소리의 본질을 들었다. 그 대사는 이렇다. “불쌍한 주정뱅이의 암시는 사실 꽤나 분명해서 그 더럽고 미끈거리는 혓바닥으로 희생자를 낼 수도 있었거든, 하 하 하!”
“우리 모두 안감에 어린아이가 꿰매져 있다.”
이 세계의 인간들이 쏟아내는 언행들이란 허위, 위선, 미성숙과 유치함이 혼란스레 얽힌 한 편의 촌극이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던 것이다. 《결혼식》은 모든 상황이 꿈과 환상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기에 헨리크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아도 되고, 자기 꿈속이니까 자기 멋대로 행동해도 되며, 스스로 다음 줄거리를 만들어갈 자유까지 주어진다. 오늘 우리들의 세계에서 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주어진 담론 권력을 휘둘러 아무 말 대잔치로 정치여론을 휘젓고는 책임으로부터는 벗어나 부하뇌동하는 우중을 세력으로 악의를 더해가는 모습과 아주 닮아있다. 아버지 왕을 배신하고 자신이 왕이 되어 결혼식을 강행하려는 행위는 실패함에도 이 환상의 후과는 아주 더럽다. 이미 절친이 헨리크 자신의 협박, 아니 위협에 의해 자살하였으니 그 무책임한 세 치의 혓바닥은 정말 추하다. 이 부조리극을 나는 내 의지에 의하여 이야기의 진행에 따라 나만의 의미를 부여하며 오직 나의 이해로 삼았다. 텍스트가 이처럼 독자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부조리극의 독특한 맛 아니겠는가. 그러나 비톨드와 내 의지가 구상하며 읽어가는 텍스트의 의지는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다,
비톨드는 1904년 폴란드 동남부 산도미의 부유한 귀족 가문의 막내로 출생하였다. 그의 첫 소설 『페르디두르케(Ferdydurke)』가 발표된 것이 1937년이었으니 서른네 살 늦깎이 데뷔랄 수 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8년 희곡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를 발표했다. 이보나는 못생긴 얼굴에다 그녀의 숙모들의 표현에 따르면 “몸이 부어오르고, 곰팡내가 나며, 콧물이 흐르고, 두통”을 달고 다니는, 때문에 그 어떤 남자도 거들떠도 보지 않는 아가씨다. 왕자 필리프는 이렇게 세상에서 소외된 여자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그 하찮음 때문에 아무렇게 대해도 무관한 존재로 여긴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그는 자신이 이 여인을 구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결혼 대상자라고 선언한다.
극은 해프닝과 말도 되지 않는 진행과정들로 꾸역꾸역 이어진다. 사실 대사들은 천박하고 유치하며 종잡을 수 없는, 맥락도 없는 대화들이다. 하지만 그 어린아이의 유치함 속에 놀라울 정도로 똑똑한 진실의 사유들이 빛나고 있음을 제아무리 눈치 없는 독자도 읽어낼 수 있다.
왕자: 너희들을 이 비뚤어진 여왕님(이보나)에게, 이 오만한 빈혈증 환자에게 소개하겠다!
이자: 이 무슨 바보짓이에요! 그 아가씨를 놔두세요! 뒷맛이 안 좋아질 것 같다고요.
왕자: 그럼 언제는 뒷맛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보나를 친구들에게 자신의 신부로 소개하는 장면이다. 이러한 방자하고 치졸한 대화들은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진다. 급기야 궁정에서 이보나를 맞이하는 왕과 왕비의 태도는 이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인물의 무반응에 쩔쩔매다 상하가 역전되어 알랑거리는 자신들의 모습에 경악하기도 한다. 이보나는 거의 대부분의 물음에 침묵하거나 어쩌다 맥락 없는 짧은 한 마디를 뱉는 둥 마는 둥 한다. 자신의 면전에서 궁정 귀족들의 행태는 무례하고 비이성에 차있으며 미성숙함의 극치를 보여주지만 그녀로서는 대항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극의 전편은 오직 왕과 왕족, 궁정귀족들의 비루하고 천박하고 유치하고 추악하고 우스꽝스럽지만 폭력적인 모습들의 적나라한 해부랄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측면에서 역설적? 혹은 반어적 뉘앙스를 느끼게 된다. 아마 소설 『페르디두르케』의 노골적으로 유치한 인물이 어처구니없는 모험과 부조리한 사건들에 휘말리면서 드러나는 신분, 연륜, 지위를 가진 자들의 허위, 위선, 미성숙과 유치함이 이 극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비톨드 곰브로비치는 바로 이 미성숙의 유치함 속에서 인간 본연의 솔직함과 고정되지 않은 무한한 가능성, 순수성을 대비시키려 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 미성숙함, 엉뚱함, 유치함이 세상의 가장 깊은 진실에 맞닿아 있음을, 아니 얽혀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다. 그것은 저속하고 비열한 인간이며, 동시에 연민과 포용과 온화한 관대함을 지닌 인간이다. 이처럼 인간이란 무한한 모순 덩어리 자체다. 어떤 직면한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물들이 즐비하게 등장하는 《결혼식》과 더불어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 또한 마치 비현실, 광기, 특이할 정도의 인위성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존재하고 있다는 이 당혹스러운 현실은 그야말로 인간 세계의 부조리 그 자체의 표상일 것이다.
곰브로비치의 모든 극을 읽다보면 불편하고 억지스러운 웃음이 독자의 낯을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부조화로 일그러지게 한다. 아마 발견하지 않으려해도 상대적 약자를 향해 조롱과 무례와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이 어느 순간 스스로가 바로 그 업신여긴 위치로 전락해 조롱과 풍자의 대상이 되었음을 보게 된다. 그는 시종 날카로운 비수를 이들 사회 엘리트라 자부하는 자들의 목을 겨냥한다. 내겐 희곡 《오페레타》가 가히 최고 걸작이다. 이 작품은 정말 예리한 칼날이 도처에서 번뜩인다. 아마 미완성 희곡인 《오페레타》의 초고이지만 이야기의 전개와 등장인물이 다른 《역사-이야기》의 생생한 날 것의 이야기, 즉 작가가 쓰고자하는 희곡에 부여하려 했던 주제가 그대로 드러난 것이었기에 이를 통해 선(先)지식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극은 제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1910년 무렵을 시대배경으로 하고 있다. 물론 시대배경이 극 속에 드러나지 않으나 1막 대본에 앞서 희곡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작가의 작품 해설에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희곡을 연극 대본이라기보다는 소설처럼 읽히는 텍스트로 썼다. 이후 연극 연출자들의 불평에 따라 점점 무대 대본으로 극 형식의 완결미를 갖춘 듯 하지만, 그의 작품이 연극으로 상연되는 걸 보지 못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겐 이야기로 읽는 것이 편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여기선 가면이 가면을 고문하는구나! 모두들 가면을 벗으시오! 보통의 인간이 되시오!”
사실 극 자체만으로도 우스꽝스럽다. 모든 일에 무심하고, 망나니이자 난봉꾼인 히말라이 대공이란 자의 아들 샤름 백작이 아가씨 중의 으뜸인 알베르틴카를 유혹할 계획을 세우고 그녀를 유혹하려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물론 이는 무수한 시대적 은유를 내포하고 있다. 이야기 발단의 한 장면이 중요한 데, 샤름은 알베르틴카를 유혹하는 우연한 사건을 만들어내기 위해 도둑을 자신의 개로 이용한다. 백작의 신분이니 자신이 직접 여인의 앞에서 알짱거리는 것은 귀족다운 행동이 아닐 뿐 아니라, 시종을 시켜 먼저 전갈하는 것도 체통에 맞지 않기에 몰래 도둑을 시켜 그녀가 졸 때 그녀의 소지품을 훔쳐 내고, 그러한 도둑을 자신이 잡아 그녀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쓴다. 도둑은 그녀가 잠이 들었을 때 다가가 그녀의 몸을 한동안 더듬는다. 알베르틴카는 꿈결에 그 손의 감각이 가져온 쾌락을 간직한다.
여기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하는데, 알베르틴카는 자신의 소지품을 되찾아준 행위보다는 꿈결의 감각에 머물러 있다. 또한 샤름은 그녀를 화려한 패션과 장식으로 치장하여 귀족적 만족감을 더하려하지만, 알베르틴카는 오히려 나체를 꿈꾼다. 이것은 《오페레타》의 초고인 《역사-이야기》 속 ‘맨발’에 가닿는데, 이 헐벗음은 머슴, 하녀, 노동자 등 낮은 사회적 위상으로 꾸밈없는 아름다움이자 무엇이든 가능한 맨(naked) 것의 무한한 가능성의 상징적 표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높은 사회적 위상인 대공과 그의 처인 공주, 아들 샤름과 귀족 나부랭이 고관대작들의 잔혹함이라는 구세계의 질서와 대립되어 이들의 속물주의와 유치함, 폭력성, 비굴함, 비겁함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아마 내 기질과 닮은 모습의 발견이 나를 기쁘게 했던 것 같다.
아마 구세계의 귀족들의 너절함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 패션쇼, 아니 가면무도회가 된 히말라이 성이 혁명의 놀음에 의해 폭탄으로 파괴된 이후의 장면은 그야말로 여느 코미디를 능가한다.
피오르(패션의 거장): 여기 누구 있소?
대공: 전등입니다.
피오르: 누구?
대공-전등: 전등이요.
피오르: 대공 아닙니까!
대공-전등: 쉬이잇....쉬이잇...., 제발 부탁이니! 조심하세요!
피오르: 웬 바람이 이렇게!
대공-전등: 이건 역사의 바함(바람)입니다.
여기 옆에요, 선생은 못 알아보시나요? 탁자인 척하고 있어요.
피오르: (탁자에서 펄쩍 뛰어 뒤로 물러난다. 탁자는 사실 네발로 엎드려 화려한 식탁보를 덮고 숨은 공주다) 아! - 『오페레타』 3막 중에서
국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여기 코 막힌 프랑스어 발음으로 듣기조차 거북한 말을 하는 귀족계급과 상류 계층의 인사들은 자신들의 안위만 지킬 수 있다면 기꺼이 치욕적 모습으로 ~인 척 하는 변장으로 숨기에 바쁘다. 비겁한 엘리트에 대한 조소와 그들의 거대한 희화화(戱畵化)된 소극(笑劇)이자 비극(悲劇)이다. 이것은 《역사-이야기》의 맨발로 화신한 비톨드의 목소리와 공명하여 울려 퍼진다.
“아무도 절대로, 결단코 절대로 내 목소리를 빼앗지 못해요.... 나의 벗은 맨발이 내 입을 동반할 거야.....여기, 아래쪽에서. 내 인성을 드러나게 하고 난 맨발로 말할 거야, 맨발로...., 난 세상을 책임지고 있다...”
그는 모든 종류의 변화에 대해 두려움을 안고 있는 속물주의 근성의 귀족들, 구세계 질서는 물론 그 어느 것이든 굳어버려 더 이상 새로운 사상을 수용할 그릇이 없는 형태들에 대해 신랄한 칼을 갖다 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곰브로비치는 오로지 인간이란 존재에겐 하나의 질서만이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에게는 늘 이러한 유치 졸렬함과 유아성과 더불어 고귀한 진실, 순수한 지성과 사랑의 질서가 함께한다고 믿었던 듯하다. 그래서 세상은 항상 부조리하고 괴물 같이 표상된다고.
그러나 그는 인간의 질서 쪽에 서서 삶이 끝나는 날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기도 했으니, 귀족의 그 우아하고 잔혹한 신발을 벗어던지고 맨발이기를 자처한 이 전간기(戰間期:1919~1939) 모더니즘 거장의 글에 산재한 그 반골기질의 후예로서 경의를 보낸다. 반복되는 대사, 무의미한 소리들의 아우성, 비현실적, 혹은 초현실적 분위기 속의 난데없는 슬랩스틱 코미디까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역전의 역전을 거듭하는 의미의 뒤섞임 속에서 그저 이야기 자체의 논리를 따라 가다보면 독자 고유의 의미들이 새록새록 부여될 것이다. 이것이 부조리극의 참 묘미이다. 아마 곰브로비치의 까탈스럽고 이 이상야릇한 이야기에 한 번 빠지면 그의 전작을 찾지 않을 수 없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