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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절기에 온 편지
김래임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19년 12월
평점 :





누군가는 그러겠지. 넌 일흔일곱이 아니라 스물일곱이다. 얼마든지 다시 일어서고 또 일어설 수 있다. 그래, 그 말이 뭔진 알겠다. 수아도 누군가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말해줄 것 같으니까. 젊음은 절망적인 인생의 가장 강력한 항산화제라고.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엔 동네 정자에 모인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말만 떠올랐다. ‘이제 좀 살 만하니 곧 죽을 날이네.’ 겁나는 건 그거였다. 인생의 시련과 절망을 열심히 걷어내고 걷어내다가 늙어버리는 것. 인생은 원래 그런 거라고, 원래 즐거운 날보다 힘든 날이 더 많은 거라는 말에 묻어가는 인간이 되고 싶진 않았다. (p.18)
수아는 자신의 삶이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는 걸 새삼 느꼈다. 물론 그런 삶에 의문이나 불만 같은 것도 없었다. 그거 즐겼을 뿐. 전진하고 있다는 느낌은 즐거웠다. 예전의 수아의 전진은 차분했고, 가끔 빨랐다. 그러나 지금의 후진은 단 한 번의 쉼 없이 초고속 진행 중이었다. 이 무서운 속도의 후진에 어떻게든 제동을 걸어야 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제동을 걸고 핸들을 바꿔서 다시 전진한다는 거지? 수아의 머릿속은 아직 한낮처럼 쨍쨍했다. 정신 차려, 봉수아. 지금은 한밤중이야. 수아는 스스로를 진정시켜야 했다. 그렇게 계속 그늘도 없는 한낮의 쨍쨍함 속에 있다간 타죽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어쨌거나 지금은 잔뜩 지치고 힘든 날인데도 잠이 오지 않는 밤의 한가운데였다. 이 노트를 덮어버리지 않을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p.53)
문득 궁금해진다. 지금 너는 행복한지. 만일 행복하다면 너의 행복은 내 희생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란다. 그건 네가 행복한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이야. 하지만 만약 불행하다면··· 그건 나의 불찰이다. 행복한 사람으로 태어난 널 불행하게 만들었으니 말이야. 행복하지 않아도 돼. 다만 불행하지만 말아줘. 세상에 행복은 많단다. 우리 마음은 아주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낄 수가 있지. 하지만 세상에 별거 아닌 불행은 없거든. 행복하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는 사람보단 그저 불행하지 않은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p.305)
주인공인 수아는 평범한 집안에, 평범한 외모에, SKY출신은커녕 IN서울 안에도 들지 못한 학벌에, 나이마저 스물일곱인 스펙의 소유자. 그래서 뛰어난 능력을 두고서 실력보다는 시기와 질투, 의심이 그녀를 물고 늘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이 터졌다. 잘 될꺼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업이 삐걱거리기 시작하더니 한순간에 저 아래로 곤두박질을 쳤다. 이걸 어째?! 남은 건 빚밖에 없고, 아무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더 견디기 힘든 건,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감. 그런 그녀가 우연한 기회에 외할머니의 육필 원고를 전달받는다. 그것도 3선 국회의원인 임성혜 전 의원으로부터 말이다. 이때 까지만 해도 그녀에게 외할머니는 빛바랜 사진 속에서나 존재하는 분이었다. 명절이나 집안 행사에서 모두에게 공공의 적으로 분류되는 사람. 하지만 이후 외할머니는 그녀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수면제가 되기를 기대하며 읽어 내려간 그 편지는 수아의 해열제였고, 진통제였다. 그 정성 어린 약 때문에 수아는 그 길목에서 주저앉지 않고 무사히 지나올 수 있었다.
실패한 스물일곱, 인생의 환절기에서 신음할 때 한 통의 편지가 해열제처럼 찾아왔다! 외할머니의 육필 원고. 그땐 몰랐다. 이것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외할머니의 원고는 그녀의 상상을 넘어선다. 성공한 청년 CEO에서 한순간에 쫄딱 망해버린 그녀에게 따뜻한 위로와 용기와 웃음을 전하며 차가워진 그녀의 마음에 조금씩 삶의 온기를 불어넣는다. 잔잔하게 밀려오는 울림. 그 위로의 말들, 이 말은 비단 그녀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삶에 지쳐 잠시 주저앉아 쉬고 이들에게 좌절하지 말고 힘을 내어 앞으로 나아가라고 힘차게 등을 떠밀어준다. “얘. 사는 게 죽을 만큼 힘들 땐, 누구도 위하려 들지 말고, 누구에게도 약해지지 마라. 너만 생각하고 너만을 위해 움직이렴. 그래야 그 힘든 순간으로부터 너를 지켜낼 수가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