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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빙하 같지만 그래서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 - 소설가가 책상에서 하는 일
한은형 지음 / 이봄 / 2021년 2월
평점 :
절판





돌아온 브론스키는 말한다. 우리의 사랑은 강해졌으며, 우리는 영원히 행복할 것이라고. 이렇게 적어보니 가소롭기 짝이 없지만, 사랑이라는 게 그렇다. 사랑의 말들은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유치하고 졸렬하기 그지없다. 이 사랑의 맹세 때문이었을까? 안나는 회복된다. 이 ‘유사 죽음’의 체험이 안나에게 남긴 교훈은 이렇다. ‘사랑이 위험해졌을 때는 죽음을 이용하라.’ 그러나 불행히도, 사랑은 다시 식는다. 예견된 일이다. 동화가 아닌 소설의 세계에서 ‘공주님과 왕자님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따위의 알량한 플롯은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p.25)
요코를 보면서 사람의 성격이라는 게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난폭은 격정이 될 수도 있고, 어두움은 은밀함이 될 수도 있고, 험상궂은 기운은 용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성향이 어떤 상황을 만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버티기도 하고, 폭발하기도 한다. 폭발을 제대로 할 수도 있고, 불발되기도 하는데, 어떤 폭발은 ‘히스테리’라고도 불리고 또 어떤 폭발은 ‘기개’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p.112)
바로 이게 베이커의 매력이다. 자세가 꼿꼿하고, 자신감이 있고, 사근사근하지 않고, 단단하다. 나는 이런 인물에게, 특히 이런 여성 인물에게 매료되는 편이다. 한국 사회에서 여자들은 애교나 사랑스러움을 가지라는 식의 내면화된 교육을 받고 자라게 되는데, 내가 “왜 이렇게 애교가 없어?”라며 종종 비난받았던 사람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걸 그녀들을 통해 느꼈고, 그런 그녀들로부터 지지받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p.122)
“그녀들의 이야기를 읽는다면 인생에 도움이 될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는 것. 하지만, 인생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겁먹을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는 대신 재미가 있으니까. 그녀들은 정말 재미있는 사람들이며, 내 글도 꽤나 재미있기 때문에. 아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재미는, 잠시나마 인생을 괜찮게 보이게 해준다.”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로테, 엠마의 엠마, 도깨비불의 리디아, 순수의 시대의 엘렌, 더버빌가의 테스, 프랑스 중위의 여자의 논 사라, 속죄의 브리오니,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 등 인간의 삶을 날카로운 문장으로 담아내는 작가 한은형이 채집한 세계문학 속 29명의 여자들.
저자의 말처럼 재미있다. 정말 순식간에 읽혀진다. 그녀들을 향한 작가의 크고 끈끈한 애정에 찌릿찌릿. 우리가 알고 있는 고전문학, 세계문학 속 각각의 인물에 한은형 작가의 입김이 더해지니 세상에 의해 부정적인 성격의 인물로 폄하되었던 여성들의 삶에 활기가 더해진다. ‘나는 이렇게 느껴요.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거침이 없다.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시원하게 또 솔직하게! 남성 소설가의 시선을 통해 탄생한 전형적인 유형의 여성들의 모습에서 허위의식을 과감히 덜어내고 자신이 생각해왔던 것들을 그녀만의 방식으로 재해석되어 여성들은 자유로워지고 또 매력적인 여성으로, 또 다른 가치를 만들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