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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의 뿌리를 찾아서, 민주주의가 경제다
이병훈 지음 / 굿모닝미디어 / 2025년 3월
평점 :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2024년 12월 3일 밤 대한민국 서울. 갑자기 TV에서 청천벽력의 말이 들려왔다.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TV 방송 계엄령 선포는 낯설었지만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전쟁이 났나 보다"라는 불안감을 억누른 채 알 만한 지인들에게 정확한 소식을 알아내기 위해 전화기에 매달렸다. 방송을 켜 놓은 채다. 늘 북한으로부터의 전쟁 위협에 시달려온 국민들은 '진짜 전쟁?' 하며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눈으로는 연신 TV를 주시했다.
아까 식구들과 저녁 식사를 할 때까지는 TV 뉴스에서는 전쟁은커녕 어떤 조짐도 없었다. 그저 일상의 저녁이었다. 국가 비상 사태로 계엄령을 내릴 이유는 분명 없었다. 전쟁이 아니라면 이에 준하는 사태가 벌어질 낌새는 전혀 없었다. 아닌 밤중에 웬 계엄령? 지피는 데가 전혀 없었기에 어리둥절하고 불안한 마음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차분하게 가족들과 대화를 도란도란 나누거나, 아니면 혼자만의 시간을 조용히 즐기는 시민들이 대부분이었을 텐데... 자정이 못된 시간이었기에 12월 유흥가나 식당 밀집지역엔 송년회 등으로 불야성이겠지만 일반 가정은 모두 잘 준비를 서두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시민들이 진위를 파악하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조금 진정된 후 TV에서 다시 계엄령 선포 순간이 리플레이되어 나왔다. 이번에는 이유가 무엇인지 확실히 듣겠다고 귀를 쫑긋 집중했다. 대통령의 계엄 선포 이유에는 북한의 남침 이야기가 없었다. 폭동 이야기도 없었다. TV는 선포문에는 적힌 '종북 반국가 세력'을 척결하기 위해 계엄을 선포한다고 격한 어투로 적시하고 있었다. 전쟁이 아니란 점에 우선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숨을 돌린 후 "그렇다면 왜 계엄을 선포했을지" 궁금해졌다. TV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TV는 곧 이어 국회의사당으로 비추었다. 비상계엄 선포에 국회의원들과 시민들이 국회 진입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시민들과 섞인 전투복 차림의 경찰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렇게 그날의 비상계엄은 시작됐다. 비상계엄이란 단어를 들은 지 40년이 훌쩍 넘은 터라 아직도 실감하지 못한 시민들이 많았다.

TV 화면은 국회 본청 안과 밖을 번갈아 비추고 있었다. 국회 앞 광경을 TV가 방영하고 있었다. 일부 국회의원들이 담을 넘는 모습도 보였다. 국회의원이 국회에 들어가려는데 막는 경찰이 어딨느냐?는 어느 국회의원의 호통에 머쓱한 경찰의 모습도 TV에 잡혔다. 진입하려는 사람과 제지하는 공권력은 한참동안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이었다. 잠시 후 헬리콥터에서 내리는 군인들이 의사당 본청 건물로 진입하려는 듯 본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본청을 사수하던 국회 내 직원과 의원 보좌관 및 비서관들과의 몸싸움에 밀려 진입에 실패하자 건물 옆으로 돌던 계엄군은 급기야 유리창을 깨고 진입을 시도했다.
국회의사당 본회의실에는 저지선을 뚫고 들어온 국회의원 상당수가 계엄 해제 의결을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며 삼삼오로 모인 채 계엄 해제 의결을 준비하고 있었다. 주로 야당 의원들이지만 몇몇 여당 의원들도 보였다. 의결 정족수가 차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계엄군이 유리창을 깨고 의사당 본회의실 쪽으로 뛰어들어가다 일단의 저지력에 맞섰다. 물리력으로 제지선을 뚫으려던 게엄군은 세 부족을 느꼈는지 다른 출입문을 찾는 듯 뒤로 물러났다. 막으려던 사람들은 소화기 분말을 분사하기도 했다. 국회는 자정을 넘긴 1시를 막 넘어설 무렵 계엄 해제를 의결하고 국회의장이 해제할 것을 선포했다. 즉시 해제 의결안은 대통령실로 보냈다.
그날의 기억을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는 것은 이날 계엄 선포부터, 1호 포고령, 국회 의사당 해제 의결, 선거관리위원회 침탈 모습, 선관위 직원들에게 고압적 자세를 보이는 계엄군의 모습이 생중계되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실이 계엄 해제를 발표한 것은 새벽 4시 반쯤으로 기억된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밤새 잠을 한숨도 못 잤을 것이다. 계엄군의 진입 시도와 철수 등이 생중계되었다. 이후 국회는 여야 별로 조사단을 구성하고 계엄 선포 자초지종에 특별위원회 조사에 들어갔다. 많은 증인들이 불려나왔다. 대부분 계엄군의 장성들이었고, 실무 영관급도 눈에 띄었다. 그런데 국회 특별조사단의 분위기는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여당 국회의원들이 계엄 선포를 감싸고 나선 것이다.

대통령의 계엄 이유를 담화가 발표됐다. 짤막한 내용에 사과는 없었다. "밤에 국민들을 놀라게 한 점은 미안하다"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계엄령 선포 이유를 강변했다. 위헌 ·위법의 계엄령이 아니라 정당한 계엄령 선포였고, 야당의 정도를 넘치는 탄핵소추, 중요 정책 예산안 삭감 일괄 통과 등 거대 야당이 국정 운영을 방해하는 정도가 아니라 국회를 통해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세력으로 보았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이는 계엄령 당시를 생중계로 지켜보았던 국민들에게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그렇다고 협상이나 협의도 하지 않고 군대를 동원해 물리력으로 야당 의원의 운영을 마비시키고, 일부 극렬(?) 의원들은 체포하려 했다니. 민주 국가에서 해서는 안 될, 그래서 헌법에도 적시한 위헌 행위가 분명한데도 계엄령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 고도의 통치 수단으로 말하고 있었다. 야당 의원들은 말도 안 되는 궤변이라고 했다. 증거로 TV 중계한 내용과 포고령을 내밀었다. 뿐만 아니라 국회 운영을 침탈했고 국회의원을 체포하려 했으며, 헌번 기관인 선관위도 침탈했다는 점을 내세웠다. 또 선관위는 부정선거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점검했으며 국회의원 체포는 지시한 적 없다고 발뺌했다.
이건 무슨 소린가? 여당 의원들은 야당의 몽니와 국정 운영을 못하게 할 정도로 탄핵소추를 남발해 계엄의 원인을 야당 의원들의 횡포로 계엄령을 내렸다니. 이건 위헌·불법 행위임을 자인하는 것 아닌가. 협치의 대상인 야당을 종북 반국가 집단이라고 규정하고 정부 전복의 시도로 매도하다니. 아무리 앞뒤를 꿰맞춰도 잘 들어맞지 않는 궤변의 연속이다. 당연히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탄핵소추안은 가결되었다. 이젠 탄핵 인용에 절차가 잘 이뤄지리라고 서서히 자신감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변수가 발생했다. 11차례의 변론기일을 마칠 때까지 민심을 거스리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에 찬물을 끼얹는 사태가 발생했다. 구속 재판을 받언 윤석열 대통령에게 구속 취소 결정이 중앙지법에서 내려졌다. 즉시 항소권이 있는 검찰은 항고하지 않았고, 일주일 내에 항고하는 권한마저 포기했다. 검찰에 대한 불신이 다시 되살아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재대로 된 재판마저 기대하기 어려운 게 아닌가. 허술한 기소는 곧바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판결도 나오는 것 아닌가? 우려와 불안의 눈들이 일제히 윤석열 구치소 석방 모습에 쏠렸다.

국민들의 집회가 지지자 측과 탄핵 찬성 측으로 갈려 연일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극우가 주도하는 탄핵 반대 집회에서는 도가 넘고 있다. 집회 참가자들의 막말뿐 아니라 여당 국회의원들이 "헌재를 때려부수자"는 있을 수 없는 지지 연설을 거듭하고 있다. 또 헌법재판관의 이름을 거론하며 비속어 등으로 인격 살인마저 서슴지 않는다. 그들이 집회 현장에서 쏟아내는 막말은 언론에서도 스크린 처리를 하느라 애쓸 정도로 지나치다. 지난 구속영장 발부 때 서부지법으로 몰려간 폭도들의 난동의 기억이 생생한데, 이젠 그 분노는 헌재로 향하고 있다. 헌재의 평의가 예전에 비해 늦어지고 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는 대다수 국민들은 다시 혼란 속으로 몰리고 있다. 이번 주에는 평결을 끝낼 것이란 의견이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지만 어떤 평결이든 상대적으로 판단하는 말만 난무할 뿐 국민들은 혼란스러운 만큼 불안감만 커지고 있다. 특히 전례없는 경제 추락에 외교적 저평가, 많은 악재에 시달릴 게 뻔한데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게 일반 국민들의 생각일 터다. 어떻게 쌓아올린 경제이고, 국방이고, 외교인가. 폐허 위에서 전 국민이 한마음으로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에 매진한 결과다. 70년 세월을 말이다.
이 책 『내란의 뿌리를 찾아서, 민주주의가 경제다』는 12·3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내란의 뿌리, 내란 숙주 세력을 파헤친다. ‘더 단단한 민주주의’,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해서다. 책의 저자 이병훈은 윤석열 정부 2년 8개월, 수십 년 동안 쌓아 올린 것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기 직전이라고 지적한다. 탄핵심판 변론기일이 끝나고 최종 평결만 남은 상태인데 내란은 형식적으로 종식된 듯 보이지만 내란 숙주 세력이 자행하고 있는 역사쿠데타는 현재진행형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현정부에서 요직을 차지한 채 식민사관에 절어 있는 역사쿠데타 세력은 일제 강점기를 한국 근대화의 필수 과정으로 미화하고, 일제 통치가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는 논리로 역사 왜곡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일본에 대한 저자세 외교를 꼬집는 대목이다. 이를 이끄는 세력은 바로 뉴라이트 세력이라고 저자는 밝힌다.

경제 부문에서도 윤석열 대통령 재임 중 경제 성장률은 1% 미만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부자 감세 정책을 밀어붙여 나라 살림은 빚더미에 앉았다는 것이다. 국가 채무는 1000조 원을 넘어섰다.(이 대목은 윤석열 정부 재임 중 쌓인 부채 전부는 아니라 누적 적자인 것으로 독자는 알고 있다) 빚내서 나라 살림 막으려다 공적 기금을 마이너스 통장처럼 썼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부분은 독자로서 잘 알지 못하는 내용이라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물가 상승률에 대해서는 '살인적'이란 표현에 동의한다. 독자는 그 시기를 지금 어렵게 넘기고 있는 소시민이기 때문이다. 이후 경제 문제, 특히 국민 경제 부분은 서민층에서 절감하고 있다. 실질임금이 줄어들었는데 최저임금은 찔끔 올랐다. 자영업자들이 무너지고 각 가정의 부채도 심각하게 늘었다. 자살률과 노인 빈곤율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고, 소득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출산율도 바닥 수준이다. 청년들은 미래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왜 한국의 성장 엔진이 꺼져가고 있는가?
저자는 이 모든 원인이 정권 내내 ‘(가짜) 자유민주주의’라는 깡통을 소란스럽게 두드리며 철 지난 이념으로 이념전쟁을 일삼은 세력에게 있다고 강조한다. 이에 따라 ‘더 단단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12·3 내란의 뿌리를 캐내야 한다. 그래야 경제가 산다. 민주주의가 경제다. 한국 정치에서 보수가 멸종을 직감하는 공룡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자신들의 목에 스스로 혁신자의 방울을 달아야 할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현재 국제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고 현명하게 대처해야 할 때임을 강조하는 데 있다. 민주주의는 사실 정치체제의 하나로 생겨나고 기능했지만 경제 부분에서도 서민들의 부의 성장을 목표로 한다. 그래야 나라가 강해지고 민주주의 목적에 가깝게 다가선다. 공산주의 원조이자 모국이었던 소련이 무너진 것은 민주주의와의 경제 제도 차이에서다. 노예 신분이나 다름없는 노동자·농민들에게 땅과 일자리를 공평하게 나눠주고 똑같이 분배해서 먹고 사는 사회라는 선전은 그럴 듯하다. 이 선전은 어쩌면 지금도 먹혀 들어가고 있을 정도로 솔깃한 이야기들 아닌가. 그러나 공산주의가 100년을 넘지 못하고 붕괴된 이유는 정치적 잘못이 아니라 경제 제도로서의 허점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경제 성장의 촉진제다. 민주주의가 단단할수록 통치의 투명성은 높아지고 부패가 설 자리는 좁아진다. ‘더 단단한 민주주의’가 작동할 때 정치가 투명해지고 기업 환경도 투명해진다. 투자자들이 안심하고 투자 가능성도 높아진다. 보수 정권은 입만 열면 ‘자유민주주의’ 타령을 해왔고 지금도 여전하다. 도대체 누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정한단 말인가. 매국적 극우 권력이 민주주의에 ‘자유’를 덧칠한다. 정권 안보를 위한 명분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이념 상품으로 잘 포장되어 반대 세력 탄압용으로 유통되고 정당화된다. 극우 지지층은 그런 상품에 열광하며 수호해야 한다고 외친다. 반대 진영을 향해선 증오와 혐오의 애국심을 키운다. 반대 진영에겐 반국가세력이란 낙인 딱지가 붙는다. 이때의 자유민주주의는 반공주의다. 한국 정치사에서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유보하고, 정적을 제거하고, 인권을 박탈하는 형태로 진행돼왔다. 극우사대주의 세력이 권력 중독에 빠질 때 내란은 불가피하다. ‘자유’를 입버릇처럼 말하던 자들이 ‘자유’를 가두는 일이 발생한다.
새로 등장하는 정치 지도자는 국민이 ‘더 많은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게 고뇌하고 또 고뇌해야 할 것이다. 우리 헌법은 사회적 기본권인 ‘사회권’을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명시적이다. 그래서 역대 보수 정권은 사회권을 국민에게 베푸는 시혜 정도로 여겼다. 이제는 우리 국민이 사회권을 직접 요구하고 요구한 만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더 많은 민주주의’일 것이다. 저자의 논리에 일부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지만 그것은 아마 독자가 처음부터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다. 대체적으로 독자에게 민주주의와 경제 부분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
저자 : 이병훈
대학 시절에 독문학, 철학, 사회과학을 공부했으며, 20대 후반 《미제국주의 침략사》를 써냈다. 시민단체 ‘환경운동연합’이 발간하는 생태환경잡지 《함께 사는 길》의 기자로 활동한 후, 줄곧 인문사회과학 분야 출판사에서 편집장을 지내며 백여 종의 책을 기획 출간했다. 2017~2022년 네이버(주)로부터 <네이버 지식백과사전> 콘텐츠 제작을 의뢰받아 ‘세계 대학 사전’, ‘세계 기업 사전’ 부문의 공식 필자로 활동해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