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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마크하기 [자유] ‘위험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말하는 ˝자유란 무엇인가?˝ (공감0 댓글0 먼댓글0)
<자유>
2025-03-03
북마크하기 [티노씨 핫플레이스 드로잉] 꿈꾸던 해외여행 명소 내 손으로 그린다 (공감0 댓글0 먼댓글0)
<티노씨 핫플레이스 드로잉>
2025-03-02
자유 - 치유할 수 없는 질병
슬라보예 지젝 지음, 노윤기 옮김 / 현암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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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사랑'과 '자유'는 다소 이질적 느낌을 주는 말이지만 인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 이유가 되기도 한다. '사랑'은 생존과 번영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이후 '사랑'이 없었다면 지금까지의 번영은 물론 생존마저 가능했을지 의심해야 할 정도로 인류에게 없어서는 안 될 감정, 또는 '그 무엇'으로 존재해 왔다. 이에 비해 '자유'는 인류 모두에게 주어지는 신(神)의 선물이지 실제 모든 인간이 '자유'를 가진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처럼 인류에게 고귀한 가치이자 존재의 이유로도 설명되지만 명확한 의미를 설명한 명제는 아직 확립하지 못한 것 같다. 유사 이래 인류는 '사랑'에 대해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문자가 발명된 이후 기록된 것만 따져도 학문적으로 정의를 내리지도, 예술적으로 표현하기도 어렵다는 사실만 남겼을 뿐 실체에 접근하지 못한 채 결국 종교의 몫으로 넘어간 것으로 독자는 이해하고 있다. 예수 탄생 이후 '사랑'은 인류 문명의 핵심 키워드의 자리잡았다. 서양 문명의 근원이고 시발점이라는 그리스(아테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수많은 학자들이 사랑의 정의 대신 '종류'로 분류해 남겼다. 서양 문명뿐 아니다. 동양에서도 중국, 인도 문명은 사랑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렸지만 완전한 '사랑'에 대한 이해로는 판단되지 않는다. 

자유 역시 주로 정치적 의미로 많이 사용돼 왔지만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일은 근대 이후부터이다. 이 책 표제어는 단 한 단어, 바로 『FREEDOM(자유)』이다. 대체 자유란 무엇일까.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란 별칭을 얻은 동유럽의 세계적 석학 슬라보예 지젝은 이 책에서 말하는 자유는 뭘까? 우선 자유를 수식하는 어떤 낱말이 붙는지에 따라 자유의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누군가는 인간의 자유, 사랑의 자유를 위해 평생을 바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편에 있는 이들은 권력의 자유, 자본의 자유를 외치며 사람들을 억압하고 선동한다. 그만큼 자유는 매혹적이고 숭고하면서도 때로는 위험한 개념이라고 이해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저자 지젝은 이 책에서 프로이트와 구조 심리학, 근현대 철학을 망라한 이론으로 신(神)과 자유의지와 욕망의 문제를 분석하여 자유의 가치와 개념을 이야기한다. 이를 통해 개인의 자각과 시민 공동체의 연대를 강력히 촉구한다.

최근 대한민국은 정치적 이유로 '자유'라는 단어가 부쩍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정치 권력에서 자유는 그닥 반갑지 않은 단어일까? 지첵의 이 책이 한국에서 출간을 준비하는 동안 ‘자유’라는 단어는 한국 언론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키워드이었다. 얼마 전 체포된 윤석열 대통령의 연설과 언론을 분석한 기사를 보면 그가 가장 많이 쓴 단어가 '자유'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였다고 한다. 지난 12월 3일 느닷없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이적 집단을 처단하기 위해서였다고 밝혔다. 계엄령일지라도국회나 선관위 등의 헌법기관의 침탈을 해서는 안 된다는 헌법과 관련 법률에 명시돼 있는데도 계엄을 선포하고 국회 의결을 방해하려 했고, 부정선거를 방관한 선관위에 증거 수집차 계엄군을 보내 위협하고 목적 달성을 위해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 

지금은 그날 즉각 계엄해제를 의결한 국회에서의 계엄군을 투입하고도 목적 달성에 실패해 오히려 국회로부터 탄핵소추를 당했다. 이를 두고 헌법재판소에서 일정 기간 탄핵심판을 위한 재판을 속행해 이번 달 최종 선고를 앞두고 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그는 계엄령 선포 이유와 대한민국의 정체성인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있어서 계엄을 선포했다고 변론하고 있다. 잠시 잠잠했던 보수와 진보의 극단의 진영 싸움으로 번지고 있는 형국이다. 그렇다면 윤석열 대통령이 생각하는 자유란 무엇일까? 국민으로서 섣불리 판단하기 어려운 고도의 정치 행위란 주장에는 나름의 논리로 변호인단을 통해 정당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은 계엄 선포 당일도 그렇지만 지금까지 계엄의 필요성에는 크게 공감하지 않는 모습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인류는 언제나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의 참상 속에서 가장 큰 자유를 실행해 왔다."는 전제들 두고 있다. 상식과 제도와 자유(리버티)가 무너진 사회에서 우리는 자유의 최저치(프리덤)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총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중이 각성하여 투표장에 들어서는 때는 이미 민주주의가 허물어진 뒤고, 그제야 우리는 투표를 통해 유의미한 자유를 실현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없을 때 정말로 자율적이다. 혹은, 이미 결정된 사실을 알면서도 무엇을 할지 결정해야 하는 공포스러운 상황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자유는 운명과 일치한다고 저자 지젝은 말한다.

독자는 『아노크라시』의 제목으로 쓰인 책을 얼마 전에 읽은 적이 있다. 낯선 단어이다. 이 표제어는 민주주의 체제의 나라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아노크라시(Anocracy)'는 독자들이 쉽게 접하지 못한 단어라는 점을 인지해서인지 책 본문을 시작하기도 전 가장 앞자리에 단어의 뜻을 새겨넣었다. "아노크라시는 민주주의(데모크라시, Democracy)와 독재(아토크라시, Atutocracy)가 혼합된 상태"를 말한다고 적었다. 인터넷을 통해 이 단어의 쓰임새를 찾아냈다. 2021년 12월 22일자 서울신문 칼럼이다. "옛 소련의 몰락을 학술적으로 예측해낸 것으로 유명한 노르웨이 정치학자 요한 갈퉁은 2016년 12월 언론 인터뷰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선출이 미국의 쇠퇴를 가속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 후 5년이 지난 요즘 미국의 후퇴를 확인시켜주는 사례들이 속출하고 있다. 지난 11월 스웨덴 싱크탱크 IDEA는 미국을 ‘퇴보한 민주주의국가’ 목록에 올렸고 바버라 월터 미국 UC샌디에이고 정치학과 교수는 내년 초 출간하는 책 ‘어떻게 내전이 시작하나’에서 미국 민주주의가 ‘아노크라시(anocracy)’ 수준으로 후퇴했다고 진단했다." 

이 칼럼에서도 아노크라시는 민주주의(democracy)와 독재(autocracy)의 중간쯤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우간다·캄보디아 등이 이에 해당된다고 적시했다. 1946년 유태계 독일 철학자 마르틴 부버가 쓴 ‘유토피아의 협로’를 영문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아노크라시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우리말로는 부분적 민주주의, 혼합제, 중간 상태 등으로 번역된다. 시리아·레바논 등 내전국을 연구해온 월터 교수는 아노크라시로 접어든 미국에 내전 발발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도 트럼프 이후의 미국이 ‘초기 충돌’ 단계를 지나 위험 상황으로 진입했다고 분석했다."고 용어 풀이를 덧붙였다. 놀랍게도 오늘날 대한민국의 상황과 재선의 트럼프 행정부를 예견하는 글이 이 칼럼에 올라 있다. 

모든 인간에게 자유가 실현될 때는 근대 이후라고 말했지만 사실 자유란 개념은 인류가 학문을 가질 때부터 존재해 온 개념이기도 하다. 로마제국 시대에도 자유는 있었고, 춘추전국시대에서도 자유는 존재했다. 다만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을 뿐이다.

민주주의(Democracy)는 고대 그리스 어의 민중을 뜻하는 '데모스(demos)'와 지배 또는 권력을 뜻하는 '크라토스(kratos)'의 합성어로서, 민주주의란 곧 '민중에 의한 지배'를 말한다. 즉,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하여 정치를 행하는 제도 또는 그러한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을 말한다고 고등학교 다닐 때 배웠다. 이를 토대로 '카키스토'의 뜻만 알면 어떤 단어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단어다. 신조어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답답하다. 제목 밑에 '잡놈들이 지배하는 세상'이란 부제를 달았으니 어떤 뜻인지 윤곽이 잡힌다. 다행히 출판사 측에서 책에 끼워넣은 책 안내서에 친절하게 설명이 돼 있다. 또 '카키스토크라시'란 단어도 있다. 이는 부패한 기업가들과 지도자들이 기울어진 사회의 지형을 형성한 것을 지칭하는 단어다. 아마 도널드 트럼프의 출현이 예견된 것이라고 말하기 위해 생겨난 신조어일지도 모르겠다. 한 저자는 『카키스토크라시』란 책을 썼다. 이미 '잡놈'형 인간이 번창할 환경이 마련되어 있던 미국 사회를 고찰하기 위해서다. 이 책은 또 대한민국 사회가 이러한 미국 사회의 병폐를 빼닮았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우리 '정상인'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 카키스토크라시 시대를 살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건전한 시민들이 어떻게 해야 '잡놈'들의 지배에 저항하고,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지배하는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지 비전과 논거를 제시하려 한다. 가치 체계가 무너진 세상에서 자유인이고 주권자인 국민이 나서야 한다는 지젝의 주장과 자연스럽게 일치는 것으로 독자에게는 읽힌다. "이미 결정된 사실을 알면서도 무엇을 할지 결정해야 하는 공포스러운 상황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자유는 운명과 일치한다고 저자 지젝은 말한다."

동양에서도 '자유로운 삶'의 가치를 이미 2,500년 전부터 설파한 사람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장자이다. 그는 올바른 삶에는 절대적·객관적·사회적 기준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적용되는 혹은 적용되어야 하는 기준이다. 하지만 좋은 삶에는 애초에 그런 기준이 없다.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상대적·주관적·개인적 기준일 뿐이다. 또 올바른 삶은 자신의 가치와 기준을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하려고 한다. 그래서 올바른 삶의 가치와 기준을 자기에게는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강요하고 또한 무한히 확대 복제하려고 한다. 반면 좋은 삶은 자신의 가치와 기준이 고유하듯이 다른 사람의 가치와 기준 역시 고유하다고 여긴다. 어떤 삶을 원하는가?

앞서 언급한 올바른 삶과 자기 삶의 가치와 기준은 다르다. 올바른 삶은 세상(천하)의 올바른 가치와 기준을 위해 개인의 개별적 가치와 기준은 희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사회의 관습과 도덕 또는 규범과 규칙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자유와 생명은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좋은 삶은 세상의 올바른 가치와 기준을 위해 개인의 개별적인 가치와 기준이 희생당하는 것을 거부한다. 세상을 위해 희생당해도 괜찮은 개인의 살과 생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을 위하는 삶이 '올바른 삶'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세상을 위해 개인의 삶과 생명을 희생하는 것을 큰 명예이자 영광으로 여긴다. 장자에게는 공자나 묵자처럼 세상 사람들이 숭배하는 이른바 성인군자 혹은 도덕군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것은 장자가 유가나 묵가의 철학을 비판하는가장 큰 이유이라고 저자는 역설한다. 장자가 공자의 유가에서 말하는 인의 도덕과 삼강오륜 같은 관습, 도덕, 윤리, 규범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비판하는 이유다.

도덕적이고 관습적인 올바른 삶은 소외층 피지배층 등 사회적 약자에게는 희생을 강요하는 지배계층의 논리고 힘있는 자의 기준에서 내세운 사상이고 철학이라고 장자는 꼬집는다. 일반 백성, 여성, 가난한 사람 등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좋은 삶'이란 자신이 원하는 삶, 즉 다시 자신의 행복과 사랑을 찾는 삶이다. 도덕이나 규범 또는 그 밖의 어떤 것에 종속된 삶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고 바라고 갈망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좋은 삶이란 장자의 철학은 설득력을 갖게 된다. 이처럼 올바른 삶이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적용되어야 할 보편적·절대적·객관적·사회적 가치와 기준이라면, 좋은 삶이란 자기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개별적·상대적·주관적·개인적 가치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고 장자 연구가들은 강조한다. 장자는 올바른 삶의 가치가 지배하던 시대 좋은 삶의 가치를 역설한 거의 유일한 철학자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민주주의에 해를 끼치는 단어 중 우리가 잘 아는 '독선'과 '편견'이 있다. 두 단어는 정반대의 개념처럼 보이지만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있다. 잘못 인식된 개념, 즉 편견 자신의 의식에 들어가 고착화되면 그 개념 이외의 어떤 주장이나 의견도 자신보다 못하다고 인식하게 된다. 독선이다. 독선은 독재로 가는 지름길이다.

지젝은 언제나 그래왔듯 권력자들을 통렬히 비판한다. 이 책에서도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트럼프 재선이나 대한민국 최근 정치 상황은 최근 일어난 일이어서 칼럼니스트나 시사평론가들이 비판을 위해 낸 의견이지만, 이 책은 이런 현상이 미국과 대한민국이란 '완전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어나리라고 상상도 못한 시기에 쓰여졌다. 지젝에 따르면 독재자들은 강박 신경증 환자와도 같아서 자신이 하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발각되지 않도록, 혹은 중요한 질문이 제기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사건과 구설수를 만든다. 그들은 무언가를 타파해야 한다며 ‘거세’를 자신의 공적 이미지로 활용하는데,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 뒤에 숨어 정말로 중요한 행정 절차들을 진행시킨다. 지젝은 또한 이 책에서 불평등의 문제도 지적한다. 돈이 많을수록 사회가 빈곤해지는 부의 역설이 생기는 이유는 인간이 더 많이 가질수록 더 큰 결핍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것은 슈퍼에고의 역설과도 같아서, 사람들은 타인의 명령을 더 많이 따를수록 더 큰 죄책감을 느낀다. 결국 부패 권력은 부를 확대하여 시민을 가난하게 하고, 명령의 범위를 넓혀서 시민을 죄인으로 만든다.

현대사회의 가장 큰 논쟁인 차별의 문제도 현대 심리학 이론을 통해 설명한다. 여성에 대한 차별은 여성이 적절히 통제되지 않으면 과도한 쾌락이 그녀들을 앗아갈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비롯된다고 지젝은 지적한다. 인종차별도 마찬가지로 타자의 즐거움에 대한 일종의 질투인데, 타자가 우리 삶의 일부 즐거움을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철학과 사회학, 대중문화를 넘나들며 우리 사회의 현상들을 분석하는 지젝답게 영화 〈매트릭스〉를 이야기하며 묻는다. 당신은 매트릭스의 살아있는 배터리로 계속 머물 것인가? 그는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 진정한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매트릭스〉의 주인공이 그러했듯 아이러니하게도 각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아를 버려야 한다. 그리고 말초적인 욕망 대신 자유의 객관적인 도구가 되어야 한다. 혁명도 마찬가지다. 혁명을 주도하는 운명적인 주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각자가 스스로 혁명 주체이자 도구가 되어야 한다. 지젝이 통렬하게 비판하는 부분을 우리 일반 시민들은 물론 비판의 대상자들도 읽어 실천하기를 독자로서 희망한다. 

자유는 때로 먼 길을 우회하기도 한다. 자유와 죽음, 멸망을 오가는 이 논리가 우리의 현실과는 너무나도 멀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 지젝의 문장은 칸트와 헤겔은 물론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 구조주의, 해체주의 등의 토대 위에 얹혀있기 때문에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독자로서 번역번을 처음 읽지만 이조차도 쉽지 않다. 아직도 많은 부분은 이해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하지만 끝까지 읽어내는 과정에서 느끼는 점은 우리의 현실과 미국의 현재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일을 위한 자유의 의미를 끌어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철학, 예술, 현실을 넘나드는 문화의 향연에 참여한 느낌이다.

이러한 위기에 대응할 분명한 해법은 이것이다. 어떤 형태의 권위도 국민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국민 각자가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포퓰리즘 정치인들은 대중을 이야기하며 음침한 외설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들이 지칭하는 ‘대중’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포퓰리즘이란 본질적으로 권력의 가면이다. 이 새로운 양상의 지배자들은 스스로를 ‘대중의 하인’으로 포장하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가상의 존재를 불러온다. 이를 통해 자신에게 반대하는 이들을 ‘대중의적’으로 매도할 수도 있게 된다. 포퓰리즘이 처음 등장한 것은 여러 세기 전이었고, 전통적인 권위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왕이 스스로를 하인이라고 선언하며 권위를 공고히 한 것인데, 프리드리히 대제의 경우 자신을 “왕국의 첫 번째 하인”이라고 선언했다. 이처럼 주인들은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스스로를 하인으로 포장했다.(p.431~432) - 「마치는 말」 중에서


저자 :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


오늘날 가장 논쟁적인 철학자이자 ‘동유럽의 기적’이라 불리는 세계적 석학.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서 태어나 류블랴나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파리8대학교에서 정신분석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컬럼비아대학교, 프린스턴대학교, 파리8대학교, 런던대학교 등 대서양을 넘나들며 세계 주요 대학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슬로베니아 류블랴냐대학교 사회학연구소에서 선임연구원, 버크벡연구소 인류학 소장을 역임하고 있다.

1989년 국제적 명성을 안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세상에 내놓은 이후, 급진적 정치이론, 정신분석학, 현대철학에서의 독창적 통찰을 바탕으로 인문학, 사회과학, 예술, 대중문화를 자유롭게 꿰어내며 전방위적 지평의 사유를 전개하는 독보적인 철학자로 자리매김했다.

저서로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새로운 계급투쟁』 등이 있고, 공저로 『거대한 후퇴』, 『지속 가능한 미래』, 『나의 타자』 등이 있다.


역자 : 노윤기


건국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공기업에서 국제관계와 기업 홍보 업무를 보았으나 좋은 책을 읽고 소개하는 번역가의 업에 매료되어 바른번역글밥아카데미를 수료하고 번역가가 되었다. 옮긴 책으로는 『군중의 망상』 『이 진리가 당신에게 닿기를』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 『옥스퍼드 튜토리얼』 『구글은 어떻게 여성을 차별하는가』 『남자의 미래』 『단순한 삶의 철학』 『커피의 모든 것』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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