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학자의 현대 한국 답사기 1 - 남겨진 것과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기억록 문헌학자의 현대 한국 답사기 1
김시덕 지음 / 북트리거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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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보는 순간 독자의 머릿속엔 〈대동여지도〉를 그린 조선시대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떠올랐다. 교통이나 먹을 것도 부족하던 시대에 일일이 우리나라의 산수를 걸어다니며 지도를 만들었던 분이다. 조선시대 지도는 아무나 만들 수 없는, 국가가 관장하는 국책사업이었다고 한다. 국방이나 교통을 위해 지도를 만들었던 시대라서 그럴 것이다. 이 책 『문헌학자의 현대 한국 답사기』는 1, 2권으로 출판됐다. 이 책에는 김정호의 지도 못지 않게 저자 김시덕이 일일이 걸어서 찾아다니며 기록한 소중한 우리의 근현대사가 담겨 있다. 근대화되면서 변하고 사라진 옛 모습도 일부 남은 것을 토대로 자료나 사료 등을 보충해, 될 수 있는 한 우리의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아냈다. 그의 노력이 책 전편에 흐르고 있어 감동까지 준다. 요즘 흔한 말로 영혼을 바쳐 답사한 기록물이다. 답사기록은 역사학자로서의 사명감도 있어야 하고, 우리 문화에 대한 애정도 남달라야 시작할 엄두가 날 일인데 문헌학자가 왜 이런 힘든 답사 기록을 위한 출발선에 섰을까. 체력도 만만찮게 필요한 일인데 말이다.

2017년 여름부터 ‘도시 답사’를 결심한 저자는 그렇게 엄청난 일일 줄은 미처 물랐다고 털어놓는다. "답사 기행을 결심할 무렵 농촌 마을 어귀의 이장(里長) 공덕비를 읽고, 간척지의 제방 위를 걷고, 산길을 헤치며 화전민의 흔적을 찾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고백한다. 답사 시작했을 때는 가벼운 마음이었지만 실천에 옮겨 시작하다 보니 사명감도 생기고 우리 삶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욕심도 생겼다는 설명이다. 거기에는 중간 중간 저자의 계획에 응원을 보내고 힘을 보태준 많은 사람이 있었다고 책을 내면서 겨우 감사의 말을 전하게 된다고도 밝힌다. 여담이지만 운전면허도 없는 분이라는 데 현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는 조금은 특이한 분이라는 느낌이다. 운전면허를 취득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답사를 계획하는 데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저자는 책의 앞 부분에 「대서울의 경계를 넘어 한국으로」란 제목의 〈들어가며〉를 통해 "전국 답사 이야기는 물론 자신만의 답사 방법론도 담았다. 답사는 각 개인마다 방법이 다르다. 자신은 답사를 통해 얻은 것과 사전 계획에서 마주한 것은 대략 50 대 50의 비율로 어느 한쪽에 치우칠 수 없어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한다"고 밝힌다. 서울과 경기도라는 도시지역에 관심을 두고 출발한 저자의 답사는 어느덧 전국 곳곳의 도시는 물론 농촌, 산촌, 어촌 지역에까지 이르러 일종의 ‘문명론 탐구’라는 성격을 띠게 되었다고 한다. 급변하는 21세기 초 한국의 모습, 오늘날까지 이 땅에 발 딛고 살아온 시민들의 다채로운 삶을 김시덕은 생생히 포착해 낸다. 오롯이 두 발로 뚜벅뚜벅 걸으며, 이 책을 완성하기까지 모든 곳을 샅샅이 누비고 깨닫고, 배우고 느낀 모든 것을 담았다. 이 책이 소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저자 김시덕은 문헌학자다. 답사 기행을 위해서는 세밀한 계획과 철저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고 한다. 문헌과 역사자료는 물론 지도 애플리케이션의 위성사진과 로드 뷰 등 도움이 되는 최근의 자료도 이용한다. 국토 답사 여행이나 국토대장정처럼 기간을 정해놓고 어디서 어디까지 걸어서 종주한다는 의미와 또 다르다. 산을 넘어야 할 때도 있을 것이고, 골목을 돌고 돌아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위성사진으로 실시간 상황의 지도를 언제든지 원하면 살펴볼 수 있는 시대에 걸어서 우리 국토 곳곳을 찾아다닌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정호가 떠오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저자 김시덕은 문헌학의 방법론을 적용해 현대 한국의 ‘현재사’를 들여다본다. 거의 눈여겨보는 사람 없는 고문헌 뭉치 속에서 역사의 흔적을 발굴하듯, 전국 곳곳의 골목을 걸으며 집과 비석 등에 숨은 시민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풀어낸다. 도시문헌학자가 바라보는 현대 한국의 모습은 어떨까? 가난하지만 허술하게 살아가지 않겠다는, 어떻게든 아름다운 삶을 꾸려 보겠다는 의지가 낳은 동네 여기저기의 포인트가 빛이 나는 이유는 그것을 발견하고 깨닫는 저자의 영혼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리라.

 


 

곳곳에서 문명 충돌이 일어나며 남겨지고 사라진 것들이 전하는 이야기. 『문헌학자의 현대 한국 답사기 1』은 우리 앞에 살아온 존재들을 되짚고, 우리 뒤에 살아갈 존재들을 호명하며 지금 우리가 선 자리를 비춘다. 이 책은 1, 2권 총 4부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1권 1부 〈산책하며 발견하는 현대 한국〉에는 답사 방법론에 대한 설명이다. 대부분 내용은 2022년 한 해 동안 『고교독서평설』에 실은 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정기 간행물인 그 책에 〈문헌학자의 도시 산책〉이라는 코너의 연재물이다. '고교생'들을 위한 책이기에 비교적 평이하게 기술했다고 한다. 2부 〈현대 한국에서 일어난 문명 충돌〉부터 2권의 1, 2부는 본격 답사 기행물이다. 특히 저자가 전국을 누비며 직접 찍은 풍부한 사진 자료가 돋보인다. 각 장의 도입부에는 주요 답사지를 구글 지도에서 볼 수 있는 QR 코드를 배치해, 가까운 곳부터 하나하나 걸어 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 책을 들고 동네 곳곳을 답사해 보면 어떨까? 혼자서도 좋고, 여럿이면 더 좋다. 그리고 저자처럼 내 지역의 이야기를 사진과 글로 기록한다면 금상첨화다. 다음에 올 ‘미래 한국’의 독자를 위해.

서울, 부산, 인천, 대구, 대전, 광주, 수원, 울산, 용인, 고양…. 대한민국 어디든지 살고 있다면 그곳에 저자는 반드시 한 번 이상 간 곳이다. 울릉, 영양, 장수, 양구, 진안, 무주, 구례, 청송, 화천, 양양…. 독자들이 태어난 곳이 아니면 한 번도 가보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곳이 이 책에 상세히 담겨 있다. 전자는 대한민국의 군 단위 이상 지방자치단체 중 인구수 상위 10개 도시이고, 후자는 하위 10개 지역(2022년 11월 인구 기준)이라고 저자는 밝힌다. 어디에 살든 어디를 가든, 현대 한국을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은 별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출퇴근과 등하교, 돈벌이와 살림살이의 고단함 가운데 눈 돌릴 틈도 없이 하루하루 바삐 ‘목적지’를 향해 가기 일쑤니까.

 


 

그렇다면 독자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아파트’로 상징되는 안락한 보금자리인가? 또는 ‘인스타’를 도배하는 꿈의 휴양지인가? 꼭 시간을 내어 멀리 떠나야만, 돈을 많이 들여야만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몸소 증명한다. 문헌학자의 시선으로 도시 곳곳을 들여다보는 저자는 우리에게 ‘답사’를 즐길 거리의 하나로 제안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 그는 일상을 바꿔 놓을 '탐험의 비법'을 속속들이 알려 준다. 답사라니, 어디 유적지라도 가서 안내판 읽고 기념사진 찍고는 주변 맛집을 찾아 주린 배를 채운 뒤 막힌 길을 되돌아오는 여행과 다르다.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유적은 바로 내 곁에, 우리 동네에 있다.

1부에서 저자는 크게 12가지 답사 포인트를 제시한다. 간판, 문화주택, 화분과 장독대, 민가, 공동주택, 아파트, 상업 시설과 공공시설, 철도, 버스 정류장 등이다. 이것들은 우리가 길을 오가며 매번 접하면서도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풍경으로 여기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잠시 걸음을 늦추고 거기에 눈길을 던져 보면 '다름'이 보인다. 전혀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전국 곳곳의 사물과 동네가 독자들에게 말을 걸어온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1장 「간판 : 일상에서 도시 읽기」, 2장 「문화주택 : 중심에서 주변으로, 한 세기를 풍미하다」, 3장 「시민 예술 : 아름다운 삶을 꾸려 가려는 주체적 태도」, 4장 「화분과 장독대 : 불굴의 텃밭 정신을 찾아서」, 5장 「냉면과 청요리와 누룩 : 한식의 어제, 오늘, 내일」, 6장 「민가 : 한반도 주거의 다양한 세계」, 7장 「개량 기와집 : ‘한옥’을 둘러싼 모순」, 8장 「공동주택 : 느슨하게 함께 사는 모습」, 9장 「아파트 : 베고 짓고 기억하다」, 10장 「상업 시설과 공공시설 : 우리 곁의 문화유산」, 11장 「철도 : 서울에서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12장 「버스 정류장 : 붙은 이름, 남은 이름」 등이다.

우리나라는 세계 역사 상 시대별 구분과 잘 맞지 않는다. 세계와 문 닫고 귀 막고 산 탓이다. 세계의 흐름에 뒤처졌다. 이로 인해 일제 강점기를 거쳤다. 식민지 시대 일본이 먼저 개화한 탓에 무력을 앞세워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아 더 큰 야욕을 드러내는 사이 우리의 '근대'는 지나갔다.

 


 

도시 안에 숨은 답사 포인트를 충분히 즐겼다면, 이제 도시의 경계를 성큼 넘을 차례다. 해방 후부터가 우리나라 역사로는 '현대'에 해당한다. 거기에 민족상잔의 전쟁도 겪었다. 이어지는 권력자들의 독재 시대를 맞았다.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잘사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생각은 실천에 옮겼다. 국민들의 엄청난 노력과 희생을 밑바탕으로 산업화를 불과 반 세기도 안 돼 이뤄냈다. 개발독재 시대에 맞춰 반정부, 즉 민주화 운동도 엄청난 희생을 딛고 결실을 어느 정도 달성했다. 지금은 경제 대국이라 불리울 만큼 세계 경제 10위권의 살 만한 나라라고 칭송 받고 있다. 그러나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겪은 아픈 희생들이 국토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그 흔적 곳곳에 우리의 '의식주', 삶의 모습에 그대로 배어 있다. 그것을 찾아내는 저자의 눈은 더 날카롭게 빛났을 것이다. 그 결실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겼다. 2부 8개 장(章)으로 나뉘어 남겼다. 1장 「농민과 어민 : 바다에 논을 만들다」, 2장 「화전민과 농민 : 울창한 산림의 뒷면」, 3장 「도시와 공장에 흡수된 농촌 : 지워진 길, 토막 난 마을」, 4장 「공업 도시 울산의 탄생 : 망향비를 따라 걷다」, 5장 「제주 탑동로 : 제주도의 과거, 현재, 미래」, 6장 「조치원 : 도농 복합 도시 세종의 정체성」, 7장 「부천 역곡동 고택 : 알 박기 혹은 ‘이곳만은 꼭 지키자!’」, 8장 「영남대로 : 사라져 가는 길을 발로 잇다」 등이다. 농민 대 어민, 화전민, 도시 대 농촌 등 이 땅에서 치열히 부딪친 두 집단 혹은 세력을 들여다본다. 공업 도시 울산의 망향비들, 열차가 달리던 섬 제주도, 세종시를 둘러싼 지역민의 정체성 문제, 택지 개발과 전통 마을, 옛길의 흔적을 따라 걷는 도시 안팎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사는 지역의 기억을 기록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끼게 한다.

독자는 이젠 중년의 나이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사건이나 흔적들을 직접 부딪쳤던 것도 있다. 버스 정류장의 풍경도 어렴풋이 기억나고, 아파트 시대의 '알박기'라는 말도 당시 처음 들어서 이제까지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저자의 지적대로 개발 시대 이해 집단간의 충돌이 잦았다. 시위가 일상이고, 민주화 시위와 함께 대한민국은 시위가 일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정부에서도 시위대 막는 경찰 이외에 전담 무술 경찰로 이루어진 부대를 따로 창설했다는 이야기도 들리던 때다.

 


 

지금 생각하면 아련한 추억처럼 생각되지만 그때로 돌아간다면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화전민'에 관한 기억과 아파트 투기 기억은 뚜렷이 머릿속에 남아 있다. 화전민을 직접 보거나 사는 모습을 보진 못했지만 70년대 산업화가 한참일 때 화전민이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화전민들이 농민들의 농사에 방해가 된다는 주장들이 자주 보도됐다. 식량이 모자랄 시기지만 산지녹화 사업은 박정희 정부의 '조국 근대화' 슬로건의 하나였다. 화전민들은 화재에 늘 노출되어 있기에 산을 태우기 십상이라고 했다. 이 책 2부 2장 「화전민과 농민 : 울창한 산림의 뒷면」에 자세히 나와 있다. 독자가 기억하던 바와는 다소 다른 점이 있다. 아마 독자는 당시 보도 등으로만 접했기에 화전민의 어려움을 몰랐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우리가 어려웠던 시절 "농사 지을 땅도 없고, 집도 없는 유랑민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라는 이 책의 내용에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한다. 그런 가여운 상태의 사라들을 농민들의 농사를 방해한다는 주장은 어디서 나왔을까.

이 책의 내용이 아련한 것은 다같이 가난했던 시절 악다구니 쓰고 더 가지려고 싸우고 했던 시절엔 그나마 사람 사이에는 온정(溫情)이란 게 있었는데 더 잘살고 먹을 것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넘쳐나는 세상인데 왜 온정은 점점 식어가는 것일까. 그런 흔적은 분명히 남겨져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 동네부터 찾아볼까 하는 생각이다.

 

저자 : 김시덕

 

일주일에 서너 번은 동네 근처에서 먼 지방까지 다니며 도시 곳곳을 촬영하고 기록하는 도시 답사가이자, 도시에 남아 있는 지나간 시대의 흔적과 자취를 추적하며 도시의 역사와 현재를 탐구하고 예측하는 도시문헌학자다. 고려대학교 일어일문학과 학부와 석사과정을 거쳐, 일본의 국립 문헌학 연구소인 국문학연구자료관(총합연구대학원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학교 일본연구센터 HK연구교수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를 역임했다.

주류의 이야기가 아닌 서민들의 삶에 초점을 맞춰 서울이라는 도시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한 ‘서울 선언’ 시리즈 『서울 선언』(2018 세종도서 선정), 『갈등 도시』(2020 세종도서 선정), 『대서울의 길』을 통해 언론과 대중의 주목을 받았고 관악구의 과거와 현재를 여러 각도에서 조망한 『관악구 문화 예술 기초 자료집: 관악 동네 역사』를 출간하며 지역 문화 발전에 이바지한 공을 인정받아 2021년 제70회 서울특별시 문화상(학술 부문)을 수상했다. 그 밖의 주요 저서로는 『우리는 어디서 살아야 하는가』,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2015 세종도서 선정), 『일본인 이야기 1·2』, 『양천 동네 이야기』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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