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의 ‘아이히만’들 - 실미도 사건 50주기에 부쳐
안김정애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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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실미도의 ‘아이히만’들』은 이른바 '실미도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2000년대 초 정부가 설치한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위원으로 참여했던 저자 안김정애가 당시 사건의 책임이 있는 사람들의 무책임한 침묵과 부인으로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데 따른 기록을 남기고자 쓴 보고서 성격의 책이다.

실미도 사건에 '아이히만' 이름이 왜 들어갔을까. 실미도 사건의 명백한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진상규명위원회 활동에 성실한 증언은커녕 "윗사람이 시켜서 한 일", "기억에 없다', "나는 그런 위치에 있지도 않은 사람"이라는 등 모두 허위 거짓 증언으로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데 따른 것이다. 이들의 거짓 증언과 침묵이 역사에 얼마나 큰 죄를 짓는 것인지 밝히는 것도 진상 규명 못지 않은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 우리가 사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에 다시는 실미도 같은 사건들이 일어나서는 안 되기 때문에 경각심과 경계심을 주기도 한다. 이 책의 발간 의의이다.






책 제목에 들어가 있는 아이히만은 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 학살에 참여한 독일군 장교다. 종전 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에 숨어 살다가 붙잡혀 종전 15년만에 예루살렘 재판정에 새워졌다. 이때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실미도 사건의 책임자들처럼 침묵, 부인, 윗사람 탓으로 미루었기 때문에 당시 유대인을 학살한 죄뿐만 아니라 '역사의 죄인'이 된 점을 이 책에서 제목에 끌어쓴 것으로 보인다. 실미도 사건 진상에 앞서 간략하게 아이히만의 죄를 살펴보는 것은 실미도 사건의 방관, 침묵,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크나큰 역사의 죄인으로 비유함으로써 그들의 잘못을 꾸짖는 데 그 목적이 있다.

1961년 이스라엘 예루살렘. 온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50대 중반의 평범한 남자가 법정에 섰다.

“도대체 무엇을 인정하란 말입니까?”

잡혀 올 당시 그가 하던 일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의 자동차 공장에서 기계를 고치는 일이었다. 몸에 지니고 있던 신분증에 적혀 있던 이름은 리카르도 클레멘트였다. 그러나 그의 원래 국적은 독일이고 이름은 아돌프 아이히만, 군인 출신이다. 그는 법정에서 항변했다.

“저는 지시받은 업무를 잘 처리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했을 뿐입니다. 제가 제작한 ‘열차’ 덕분에 우리 조직은 시간 낭비 없이 일을 처리할 수 있었죠.”




그가 고안해 낸 것은 가스실이 설치된 열차다. 수많은 유태인이 열차에 설치된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았다.

“자신의 죄를 인정합니까?”

“저는 잘못이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제 손으로 죽이지 않았으니까요. 죽이라고 명령하지도 않았습니다. 제 권한이 아니었으니까요.저는 시키는 것을 그대로 실천한 하나의 인간이자 관리자였을 뿐입니다.”

수백만 명의 죽음을 방관하며 가스실이 달린 열차를 개발한 아돌프 아이히만은 “양심의 가책을 느낀 적은 없었나요?”란 판사의 질문에 “월급을 받으면서도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입니다.” 결코 죄를 인정할 수 없다는 그의 답변이었다. 재판을 지켜본 6명의 정신과 의사들은 “그는 나보다 더 정상이며 준법 정신이 투철한 국민이었다.”고 판정했다. 그러나 8개월간 계속된 지루한 재판······ 하나 둘 자리를 떠나는 방청객들 속에서 끝까지 재판을 지켜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말했다.

“그는 아주 근면한 인간이다. 그리고 이런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유죄인 명백한 이유는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한나 아렌트는 강조한다.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그리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우리나라에서 실미도 사건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제기된 이유는 한 편의 영화 때문이었다. 지난 2003년 크리스마스 이브의 서울 영화관엔 영화 〈실미도〉가 개봉됐다. 이 영화는 1968년 창설된 ‘실미도 684부대’에 관한 영화이며, 영화 속 훈련병들의 출신 성분이나 상황 설정이 과거 혹은 현재의 북파공작부대나 북파공작원과는 무관함을 자막을 통해 알린다. 표현의 자유는 있지만 진상 규명엔 한계가 따라 상상력을 동원해 영화를 제작했음을 밝힌 것이다. 북으로 간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에 걸려 사회 어느 곳에서도 인간대접 받을 수 없었던 강인찬(설경구 분) 역시 어두운 과거와 함께 뒷골목을 전전하다가 살인미수로 수감된다. 그런 그 앞에 한 군인이 접근, '나라를 위해 칼을 잡을 수 있겠냐'는 엉뚱한 제안을 던지곤 그저 살인미수일 뿐인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는데... 누군가에게 이끌려 사형장으로 향하던 인찬, 그러나 그가 도착한 곳은 인천 외딴 부둣가, 그곳엔 인찬 말고도 상필(정재영 분), 찬석(강성진 분), 원희(임원희 분), 근재(강신일 분) 등 시꺼먼 사내들이 잔뜩 모여 있었고 그렇게 1968년 대한민국 서부 외딴 섬 '실미도'에 기관원에 의해 강제차출된 31명이 모인다. 영문 모르고 머리를 깎고 군인이 된 31명의 훈련병들, 그들에게 나타난 의문의 군인은 바로 김재현 준위(안성기 분), 어리둥절한 그들에게 "주석궁에 침투, 김일성 목을 따 오는 것이 너희들의 임무다"는 한 마디를 시작으로 냉철한 조중사(허준호 분)의 인솔하에 31명 훈련병에 대한 혹독한 지옥훈련이 시작된다. '684 주석궁폭파부대'라 불리는 계급도 소속도 없는 훈련병과 그들의 감시와 훈련을 맡은 기간병들... "낙오자는 죽인다, 체포되면 자폭하라!"는 구호하에 실미도엔 인간은 없고 '김일성 모가지 따기'라는 분명한 목적만이 존재해간다. 조국의 부름에 목숨을 걸고 응답한 청년 기간병들과 분단 조국이 내몰았던 사지의 땅에서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 울부짖으며 죽어간 서른 한 명 훈련병들의 영혼 앞에 이 영화를 바친다며 막은 내린다.



영화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과거사 진상규명 위원회'가 꾸려져 활동에 들어갔다. 이 책은 당시 신문 기사 및 언론 보도, 부대 창설 및 운영 관계자들, 부대원들의 유가족 등 모든 증언과 증인을 확보하기 위한 다각도의 노력 끝에 밝혀낸 사건의 실체이다. ‘1971년 8월 23일 서울 영등포로터리’에서 저지되었던 실미도 부대원들의 ‘중앙청으로 가는 길’과 그 이후 이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발표나 언론 보도, 그리고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2000년대 초의 진상규명 과정에서 일관되게, 전형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진상에 대한 축소, 조작, 은폐, 왜곡이었다. 이 사건은 원인을 규명하려면 ‘북한군 특수부대에 의한 1·21사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民族保衛省) 정찰국 소속인 124군부대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한 사건이 일어난다. 청와대를 기습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한 북한군 침략 행위이다.

이에 따라 남한의 보복 차원에서 평양 주석궁에 파견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 준비된 특수부대를 창설한다. 이른바 '684부대'다. 1968년 4월 창설된 부대여서 북한 특수부대 식의 이름을 따 명명했다. 이들은 청와대 기습을 위해 파견된 무장침투조와 똑같은 31명으로 구성돼 인천 앞바다에 있는 무인도인 실미도에서 훈련에 들어간다. 이로 인해 '실미도 부대'란 명칭으로도 불리웠다.






박정희와 중앙정보부의 지시에 의해 공군이 책임을 맡아, 공군 내에 대북 보복으로 ‘김일성의 목을 따기’ 위한 특수임무부대가 684부대이다. 1968년 말 베트남 전쟁 종결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우며 등장한 닉슨이 37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닉슨이 미ㆍ중, 미ㆍ소 화해정책을 채택하면서 냉전체제의 최전선에 놓여 있던 동북아 정세에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이다. 1969년 미국이 제시한 '괌 독트린'은 대중 화해 정책을 통해 미국이 동맹국인 대한민국에 대한 안보 책임을 줄여 가겠다는 닉슨 정부의 정책이었으며, 구체적으로 주한미군 철수가 가시화되기에 이르렀다. 박정희 정권은 닉슨 정권에 의해 대북 화해를 강요받았고, 이 과정에서 실미도 부대의 창설 목적과 임무는 폐기되었다. 중정과 공군의 무책임한 방기가 진행되면서 예산 전횡과 부대 관리 소홀이 이어졌고, 공작원들은 허기와 무력감을 느끼며 불만을 쌓아 가고 있었다.





훈련을 시작한 지 3개월 후 국제 정세는 변화해 실미도 부대의 존재를 비밀로 붙인 당국의 →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용도 폐기되고 잊힌 부대가 된 실미도 부대 → 부당한 처우 → 중앙청으로 가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자 봉기 → 군경의 저지에 막혀 대치 중 폭사 →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고, 생존자들을 비밀 재판 후 처형, 일부 사망자들은 암매장 → 50주년이 될 때까지 축소, 조작, 은폐, 왜곡이 이 사건의 기본 골격이다.

남북한 간의 대치 상황만으로는 이 사태가 설명되지 않는다는 저자는 한국 정부 뒤의 미국 정부, 베트남 전쟁, 그리고 박정희 독재 정부의 광기 어린 대응, 무엇보다 국가가 그 존재 이유를 망각하고 국민들의 인권을 유린하는, 근본적인 사태가 이 사건에 내포돼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이 사태의 본질은 아니다. 강대국의 논리에 의해 강제로 분단된 나라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삶이 국가폭력에 의해 어떻게 뒤틀리는지를 극명히 풀어냄으로써 현재의 역사에서도 되풀이되지 않도록 경각심과 경계심을 일깨우기 위해 집필했다고 진상 규명 활동에 참여했던 저자는 강조한다.






'실미도 사건'이 올해 50주년을 맞았다. 당시 28명이 사망하고 4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는 등 수많은 민ㆍ경ㆍ군이 사망한 이 사건의 진상은 정확하게 규명되지 않은 채 반세기의 세월만 흘렀다. 이 책 『실미도의 ‘아이히만’들』은 2000년대 초 '실미도 사건 진상규명'에 참여했던 저자 안김정애가 조사 과정에서 면담했던 당시 사건 관계자들의 증언 등을 통해 실미도 부대 창설 과정, 즉 창설의 배경과 부대원 모집 과정을 재구성했다. 특히 진상규명 과정에서 보여준 그들의 무책임한 태도와 목소리를 그대로 전함으로써 이 사건의 축소, 조작, 은폐, 왜곡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또 실미도 부대원들의 최후 폭사 현장에서 살아남은 4명의 심문 기록, 그리고 그들이 사형장에서 남긴 최후 유언도 그대로 담아냈다.

저자 : 안김정애

월남민과 이산가족이라는 가족사를 배경으로 한반도 분단사를 공부하고 있다. 한반도 분단은 여전히 한반도 평화, 국가폭력에 의한 인권 침해, 여성인권과 군사주의의 폐해, 외세의 분단 규정력 등의 주제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나(다할 미디어), 『한반도의 외국군 주둔사』(도서출판 중심), 『세계화와 여성안보』(한울아카데미), 『한국여성평화운동사』(한울아카데미), 『女性·戰爭·人權』(京都, 行路社), 『끝나지 않은 국가의 책임: 산청·함양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선인) 등의 공저가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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