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눈물은 닦지 마라
조연희 지음, 원은희 그림 / 쌤앤파커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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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어서인지 시적 표현이 한층 감칠 맛이 난다. 저항적 분위기를 표현하는 내용에서도 감성을 느끼는 것은 독자 한 사람만의 느낌일까. 이 산문집 『흐르는 눈물은 닦지 마라』에서는 저자의 표현 너머에 있는 감성적 회고 분위기의 회한이 느껴지기도 하고, 애달픈 고뇌와 방황의 맛이 나기도 한다.

이 책은 암울했던 군부독재 시절 함께 아파하며 청춘을 보낸 저자의 회한과 독자의 감성이 잘 맞아 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유난히 계절의 아름다움이 더 느껴지는 올 가을에 이 책은 오래된 사진첩에서 빛바랜 소중한 사진 한 장을 발견한 기분이다. 시대를 아파한 사람들의 무게감이 모두 똑같았을 리는 없겠지만 공감하며 함께 고민했던 청춘의 일부분은 공유했음을 쉽사리 알 수 있다. 몇 개의 표현과 단어만 보아도 그렇다. '산동네' '서민' '군부독재' '대규모 시위' '시위 진압' '소주 한 잔' '공장 여공' '가난과 눈물'...





대한민국은 70년대 산업화와 80년대 개발독재 등으로 점철된 군부 집권 시대를 지나왔다. 이 때를 사회학자들은 '암울한 시대'로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무차별적인 개발이 진행되고 빈곤의 격차를 키우는 산업화 시대 기업의 팽창을 지켜보면서 말없이 '일'만 죽어라 했던 일꾼들의 피땀의 과실은 독재자와 그의 추종 세력, 기업과 경영진들의 몫이었다. 일꾼들에게는 굶지 않을 만큼의 밥과 옷이 주어질 뿐 더 이상의 몫은 "나라를 위하여" "장래를 위하여" 착취당했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1970-90년대. 서울 산동네 서민 아파트에서 한 여성 시인이 청소년기와 대학 시절을 보내며 느꼈던 절절한 응시의 기록이 이 책에 담겨 있다. 그 시절엔 독재가 당연한 군부가 집권하던 시기이고, 최루탄이 있었고 눈물이 있었고, 막걸리와 소주가 있었다. 하지만 서서히 움트는 민주화 기운 못지 않게 버릴 수 없는 청춘과 사랑이 있었다. 시인 조연희는 독재와 폭력이 난무하는 시대를 겪은 삶을 시와 산문으로 풀어내 책으로 펴냈다.



1970년대 시인은 서울 산동네 서민 아파트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자랐다. 군무원인 아버지는 정리해고가 된 후 파친코에 빠져 전 재산을 탕진하게 되고 어머니는 이를 악물고 돈을 벌어 세 자매를 키웠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감수성 깊은 소녀는 자랄수록 절망만 더해갔다.

그녀에게 아버지의 일탈과 가난은 하나의 폭력이었던 셈이다. 자신만은 그런 삶을 살지 않겠다고 입술을 깨물지만 연약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갑자기 죽음의 유서를 썼고 삭발을 시도한다. 그리고 마음을 고쳐먹은 뒤 그녀는 마침내 작가가 되기를 결심하고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하고 여대생이 되지만, 그녀 앞에는 가난보다도 더 위험한 독재와 폭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바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최루탄이 난무하는 거리 속에서도 청춘들은 막걸리를 마시며 문학을 이야기했고 사랑을 했으며 불의와 싸웠다. 학업보다 소중했고 당면 문제였다.



같은 시대 같은 청춘을 보냈던 시인 이산해의 추천사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애잔한 저녁 강물처럼 흐르는 이 글은 에세이 형식의 시적 성장소설이자 내면일기이다. 너무 애잔해서 난 그 강물에 빠져 오래 허우적거렸다. 가장 최적화된 어둠 속의 골목은 세상으로 나가는 문이 모두 닫혀 희망의 한도가 없다. 헤르만 헤세를 좋아하지만 가방 속에는 유서가 들어 있는 여고생, 30살이 되기 전에 죽고 싶어 '야매미장원'에서 삭발하고 석양에 목을 매달겠다는 여대생의 그녀는 늘 외로운 꼭짓점이었다. 아버지 없는 아이가 부럽고, 상처는 더 큰 상처로 치유된다는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소녀에게 세상은 일찍부터 위선이고 부당하고 불공정한 거래였다. ‘유서사건’으로 ‘파란 플라스틱 슬리퍼’를 신고 학교에 불려온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1부의 ‘휘어진 시간’은 너무 감동적이며, 이 책의 백미중의 백미다. 덤으로 동식물의 생태학적 지혜와 잊을 만하면 문장 곳곳에서 빛나는 시와 잠언들은 이 책을 보는 독자들만의 특권이다."



며칠 후 6.10일 호헌조치가 발표되었다. 거세지는 불길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다. 박종철의 죽음과 호헌조치에 분노하며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런데 이번엔 연세대 이한열이 뒤통수에 최루탄인 SY-44탄을 맞아 사망하고 말았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도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위와 최루탄이 범벅 된 채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서울역 광장에서 시청 광화문, 신촌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홍수를 이루었다. 자동차들은 지나가며 경적을 울리며 동참했고 승객들은 흰 손수건을 흔들면서 지지를 보내주었다.

P229~230, 「머리를 밀다」 중에서

이 책에 담긴 내용은 오늘날 한국 사회를 이끄는 386 세대가 암울한 독재 시대를 살면서 어떻게 ‘지성과 사랑’만으로 극복했는가에 대한 슬픈 고백이자 기억의 산물이라는 생각은 독자 한 사람만의 독후 감정은 아닐 것이다. 그 시절엔 누구나 가난했으며 암울했다. 1970년-1980년대 군사정부 시대를 살면서 민주와 자유의 중요성을 뼈아프게 느끼며 살았던 한 여성 시인이 바라본 이 응시의 기록들은 ‘우리에게 삶이란 진정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가난이 삶의 근본적인 경쟁력에서 차이를 가져온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원래 인생이란 그처럼 부당하고 불공정한 거래였다. 출발점이 다른 경주였다. 가난이 유전적으로 대물림될 수 있다는 사실만큼 불공평한 일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내 현재의 모습이 과거의 연장 선상이고, 앞으로도 계속될 내 미래라는 사실만큼 절망적인 것이 또 있을까.

- 「가난의 알고리즘」 중에서

저자 : 조연희

서울에서 태어나 추계예술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10년 ‘사각뒤주의 추억’ 외 4편이 『시산맥 신인상』에 당선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이번 산문집은 386 세대인 시인이 암울했던 독재의 시대를 살면서 ‘삶의 고뇌’에 대한 철저한 응시의 기록이다. 동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정녕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강한 질문을 던져준다.





<예스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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