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으로 읽는 로마사 - 1,000년을 하루 만에 독파하는 최소한의 로마 지식
윤덕노 지음 / 더난출판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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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건국을 바라보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견해는 로마의 건국 세력이 다른 국가의 추방세력으로부터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대부분이 독신 남성으로 이루어졌던 로마의 건국 세력은 여인들을 충원하기 위해 인근의 사비니족 여인들을 납치하게 된다. 이의 굴욕을 갚기 위해 사비니족과 로마인이 전쟁을 벌였지만, 이미 사비니족의 딸이자 로마인의 아내가 되어버린 여인들이 전쟁을 중재하여 두 민족이 합쳐지게 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여기서 '로마는 어떻게 지중해의 패권자가 되었는가?'에 대한 답의 시작을 엿볼 수 있다.

로마인은 사실 그렇게 특출난 민족은 아니다. 게르만이나 노르만족에 비해서 신체적/전투적 우월함이 돋보이지도 않고, 에트루리아인이나 그리스인에 비해서 문화적으로 발달한 국가도 아니었다. 다만 로마인은 '겸손한 민족'이었다. 자신들의 부족한 점은 크개 개의치 않는다. 민족적 열등감이나 우월감에 사로잡혀 복속시킨 민족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복속시켰으면 단지 '로마인'으로 편입시킨다. 이를 통해 자기 국가의 부족한 점을 기꺼이 메꾸게 된다. 이것의 시초가 사비니족과 라틴족의 융합이다. 사비니족 여인의 중재로 인해 융합하게된 로마인과 사비니족은, 그 어느쪽에게도 사회적 지위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 사실상 로마인에게 사비니족이 편입된 것이지만, 사비니족 장로들도 배정받는 시민권이나 원로원 의석에 만족할 수 있었고, 로물루스와 사비니족 왕의 공동 왕 체제를 통해 동등한 위치임을 보장받았다. 이를 통해 다민족 국가의 기틀을 두게 된 로마는, 그 이후로도 수많은 민족을 '로마인'으로 편입시키며 성장하게 된다.

무려 1,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존속했던 로마 제국의 흥망성쇠는 정치인, 사회학자, 역사학자 등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TV 드라마나 영화, 소설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로마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도 '로마' 하면 콜로세움에서 벌어지던 검투사들의 경기, 도시를 불태웠던 네로 황제의 기행,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말을 남기고 죽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대한 일화를 어렴풋이 떠올릴 정도로 로마 역사는 우리에게 친숙한 소재다. 조금 더 들어가보면 예수도 그때의 사람이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이 서구 사회에 깊이 뿌리박혀 있지만 로마 제국 건국 무렵 예수는 별 영향력 없는 유대인의 한 사람이었다. 로마 제국의 복속국이던 예루살렘의 한 시민일 뿐이다. 당시 로마는 이민족의 종교를 탄압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종교가 유일신의 종교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뒤늦게 미국에 의해 전격적으로 서구 문화를 받아들인 우리로서는 로마 제국에 대한 관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조그만 도시국가가 세계를 지배한 제국을 건설했나부터 로마인들이 남긴 법 체계, 건축물, 군대 운용 방식에 이르기까지 관심을 가질 만한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니다. 더욱이 그때 로마 제국에 의해 정복 당한 주변의 독일, 프랑스, 스페인은 물론 영국 등 주변 나라와 민족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오랫동안 로마 제국이 정복자의 위치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로마인의 포용과 균형은 정신적으로 이어진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은 세계의 중심이라 하는 그들 서구 사회도 로마 제국의 자부심을 견제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로마 제국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의 각종 제도와 법을 그대로 지속거나 변형해 쓴다. 그러다 보니 로마에 관한 일련의 정형화된 이미지들이 로마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는 데 오히려 장벽이 되기도 한다. 또한 정복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이나, 황제와 원로원의 대립 구도 등 정치사적 관점을 통해 로마사를 이해하자니 방대한 역사 앞에 막막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음식으로 읽는 로마사』는 이처럼 로마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만으로 더 깊이 파헤쳐볼 엄두가 나지 않는 이들이나, 이미 로마사를 나름의 경로로 이해하고 있는 이들에게 로마 역사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로마인이 먹었던 ‘음식’을 통해 로마 시대를 조명하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역사란 결국 사람이 살아간 흔적에 대한 기록인데, 로마인들이 살았던 시대의 의식주, 그중에서도 ‘식’에 초점을 맞춘 접근은 지금껏 로마사를 조명했던 여타의 관점들과 차별화를 이룬다. 이 책의 저자 윤덕노는 여기에 착안해 글을 썼다.

책에 따르면 로마인의 식탁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특히 우리네 밥상과 로마의 식탁을 비교해봤을 때 둘의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한국인의 식탁은 주로 우리 땅에서 재배한 곡식과 채소, 나물이 올랐다. 가축과 생선 역시 우리 산과 강, 바다에서 키운 것들이었다. 하지만 2,000년 전 로마인의 식탁은 달랐다. 이집트, 아프리카, 스페인, 포르투갈 등 인접한 지역에서 수입해온 밀, 보리, 와인, 올리브 등의 이국의 식재료들로 채워졌다. 마치 현대를 사는 우리가 노르웨이산 고등어를 먹고 칠레산 와인, 중국산 김치로 식사를 하듯, 로마는 2,000년도 훨씬 이전에 식탁에서 이미 세계화(globalization)를 실현한 것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흔히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로마인의 식탁도 하루아침에 다 채워지지 않았다. 철저하게 로마 제국의 영광과 발전의 궤도를 같이 밟았다. 늑대 젖을 먹고 자랐다는 로마 건국신화의 주인공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후손들은 처음에 로마의 일곱 언덕에서 양을 치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당시 이들이 먹었던 음식은 기껏해야 양젖과 치즈에 보리죽이었다.

로마인의 음식만큼이나 인상적인 것은 바로 로마인들의 식문화다. 이 책에는 제국의 로마인들이 왜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를 했는지, 먹고 난 뒤에 음식물 쓰레기를 그대로 바닥에 던져버렸던 이유는 무엇인지, 저녁 식사인 케나(cena) 자리에서 어떻게 중대한 정치적 결정이 내려졌는지 등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로마인의 식생활을 해부한다. 또한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화려했던 황제의 연회를 묘사하면서 청나라의 ‘만한전석’을 압도하는 ‘미네르바의 방패’나 ‘조디악’ 등 전설의 요리를 소개하고 있다.



로마인의 소울푸드는 뭐니 뭐니 해도 빵, 와인, 올리브다. 로마인들은 하루 평균 한 병가량의 와인을 마셨다고 한다. 거의 알코올 중독 수준이다. 하지만 로마인에게 와인은 술이 아니라 식수였으며, 대부분의 경우 와인에 물을 타서 희석시킨 채로 마셨다. 이에 대해서는 식습관이나 인구의 증가를 이유로 꼽기도 하지만 상하수 시설이 미비한 관계로 물을 그냥 마실 수가 없어서 와인을 섞어서 마셨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와인과 마찬가지로 올리브 역시 로마인의 생활과 더없이 밀접한 식재료였다. 빈민층은 올리브 열매로 부족한 칼로리를 보충했고, 샐러드나 소스의 재료로서 우리의 김치와 버금가는 용도로 활용했다. 식사뿐만 아니라 목욕을 할 때도 올리브 오일을 뒤집어쓰고 스트리길(strigil)이라는 도구로 땀과 때로 범벅이 된 몸을 벗겨냈다. 또한 등잔불을 밝히거나 찌꺼기를 건축 마감재로 사용하기도 했으니 올리브를 제외한 채 로마인의 생활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다.

이처럼 음식은 로마인의 일상과 로마 사회의 단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매개체가 된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아닐까. 무엇을 먹었는가 하는 주제는 로마 사회의 단면을 살피는 데는 적합하지만 굵직한 역사 공부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단지 로마인이 즐겨 먹던 음식들을 살펴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음식으로 읽는 로마사』에는 의식주의 한 부분으로서의 음식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에서 로마의 흥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식재료가 하나 소개된다. 그것은 바로 ‘빵’이다. 도대체 빵이라는 게 로마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기에 저자는 로마를 들어 ‘빵으로 흥하고 빵으로 망한 제국’이라고까지 표현했을까?

우리가 밥심으로 사는 것처럼 로마인들은 빵심으로 살았다.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 주식으로 먹었는데, 그 무렵 동양은 밀가루가 귀해서 중국의 황제도 간신히 만두를 먹었던 시기에 로마의 평민들은 매일 같이 빵을 먹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로마 시민들은 시장의 제빵소, 오늘날로 따지면 제과점에서 빵을 사다가 먹었다. 노예 또는 해방 노예 출신의 제빵업자들은 시민들로부터 곡식을 받고 빵을 만들어주었다.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로마의 무상 식량배급 제도인 ‘큐라 아노나(cura annona)’ 때문이었다.

큐라 아노나는 로마 공화정 초기에도 존재했는데, 흉년으로 인해 식량 사정이 어려워지고 물가가 치솟을 때 시민들에게 곡식을 싼값에 나누어주던 제도였다. 처음에는 원로원에서 담당했던 아노나는 전체 인구의 10퍼센트 수준에서 점차 수혜 대상자를 확대해, 기원전 75년부터 기원전 58년 사이에 이루어진 법 개정을 통해 로마 시민의 절반가량인 32만 명이 공짜로 식량을 배급받게 되었다. 빈민 구제 수단이었던 아노나가 포퓰리즘에 의한 선심성 정치제도로 변질된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아노나 제도를 손보기 위해 무료 식량 배급의 대상자를 15만 명으로 절반 가까이 줄였으나, 초대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다시 20만 명으로 늘어난다. 로마 시내를 관통하는 티베르강의 홍수로 상당수의 식량 저장 창고가 강물에 떠내려갔기 때문이다. 그래도 로마 제국이 전성기를 구가할 무렵, 아노나는 별다른 부작용 없이 유지되었다. 하지만 정통성이 부족한 인물이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아노나는 또다시 선심성 포퓰리즘의 수단이 된다. 193년에 황제가 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곡식뿐만 아니라 와인과 돼지고기, 올리브 오일과 소금까지 더해서 나누어주었으니, 로마 시민의 식생활 일체를 정부에서 책임진 셈이었다. 더불어 로마 후기로 갈수록 아노나 집행의 권리를 황제가 장악하게 되면서 아노나는 점점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어간다. 결국 국고를 털어 환심을 사려 했던 황제와 귀족, 그리고 공짜를 좋아하고 폐해에 둔감했던 로마 시민의 도덕 불감증이 얽히고설켜 로마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됐다.

"그랬던 로마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재배하던 작물을 보리에서 밀로 바꾼 뒤 빵을 구워 먹고, 이탈리아의 포도밭에서 포도를 따다 와인을 만들고, 마을 입구의 나무에서 올리브 열매를 따서 피클을 담고 기름을 짜서 요리를 했던 것이 아니다. 로마인의 식탁은 자급자족을 통해 채워진 것이 아니라, 400년이 넘는 기나긴 세월 동안 이루어진 전쟁과 탐험, 개척을 통해 얻은 결과물로 채워졌다. 즉 외국에서 가져온 전리품과 열매들이 하나둘 식탁 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빵과 와인, 올리브와 젓갈 등…. 지금의 기준으로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음식들이지만 로마인들은 이 음식을 얻기 위해 개인의 목숨과 국가의 운명을 걸고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 물론 전쟁을 통해 얻은 영토 및 자원과 음식들이 승리와 함께 부수적으로 따라온 전리품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반대의 관점에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로마가 치렀던 각종 전쟁은 자원 확보를 위해 싸운 경제 전쟁이기도 했다.

결정적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 제국이 세력을 넓혀갈 때마다 로마인들의 식탁에 오르는 음식의 가짓수가 늘어났고, 식생활이 풍요로워졌으며 로마 경제도 그만큼 윤택해졌다."

p. 18, 제1장 「모든 음식은 로마로 통한다_식탁에서 찾은 로마 제국 번영의 열쇠」 중에서



"로마인들은 빵에 대해 무척 민감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빵의 재료인 밀을 비롯한 갖가지 곡식을 실은 배가 로마의 관문인 오스티아 항구에 들어오곤 했는데, 그 시기가 좀 늦어지기라도 하면 로마 시내에는 곧 뒤숭숭한 소문이 나돌았다. ‘폭풍우를 만나 수송 선단이 몽땅 바다에 가라앉았다더라’, ‘아니다, 그냥 운항에 차질이 생겨서 예정보다 늦어지는 것일 뿐이다’ 등 이른바 ‘카더라 통신’이 난무했다.

이집트 곡식뿐만이 아니었다. 로마 제국의 또 다른 빵 창고인 시칠리아에 흉년이 들었다는 소식이 돌면 시민들은 공황에 빠졌다. 그로 인해 빵 공급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으면 우선 빈민들이 거리에 나앉아 굶주렸고 평민들은 동요했으며 폭동이 일어날 조짐마저 보였다. 그러니 시칠리아의 흉년 소식에, 이집트의 수송 선단 사고 뉴스에, 시민들은 곡물 사재기를 시작했고 빵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로마 시민들이 이처럼 이집트를 비롯해 시칠리아, 북아프리카의 곡물 작황과 곡물 운송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로마는 시민들이 먹을 식량을 전적으로 해외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했는데, 외부로부터의 식량 공급이 끊기는 일이 종종 발생했기 때문이다.

전쟁이나 흉작이 원인이 되거나, 수송 선단이 폭풍우로 침몰하거나 해적들한테 곡물을 털리게 되는 일이 생기면 로마 시민들이 빵 부족으로 인해 힘들어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그러면 빵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빈민들, 평민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사회가 불안해졌다.

이를 막기 위해 빵값이 오르면 당장 굶주린 채 거리에 나앉아야 할 사람들을 대상으로 처음에는 싼값에, 나중에는 무료로 곡식을 나누어주는 제도가 생겼다. 훗날 로마 제국이 무너지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고 지적받는 무료 배급제도다."

p. 209~210, 제4장 「로마, 빵으로 흥하고 빵으로 망하다_로마 시민 절반이 공짜 식량을 먹다」 중에서



"로마인들은 평균 하루에 0.5리터, 그러니까 하루에 와인 한 병쯤을 마신 것으로 추정한다. 물론 이런 추정치에는 성인 남성들이 마신 분량만 해당되는지 여성과 아이도 포함되는지 등 여러 측면에서 논란이 있다. 어쨌든 하루 한 병의 와인이라면 주량에 따라 다르겠지만 은근히 취할 수 있는 정도의 양이다. 게다가 매일 한 병씩 거르지 않고 와인을 마셨다면 거의 알코올 중독 수준이다. 그렇다면 로마 제국이 강대해짐에 따라 로마 시민들이 매일 흥청망청 와인을 마시며 사치와 향락에 빠져 살았다는 소리인가 싶지만 그런 것은 또 아니다.

이 무렵 로마인에게 와인은 쾌락을 위해 마시는 기호품인 술이 아니라 물과 함께 일상적으로 마시는 음료수였다. 그렇기에 현대인처럼 와인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물을 타서 희석해서 마셨다. 와인을 왜 물에 타서 음료수처럼 마셨는지, 그리고 기원전 1세기 이후에 와인 소비량이 왜 그렇게 급속도로 늘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다. 우선 물을 대신해 와인을 마신 배경으로는 오염된 식수를 꼽는다. 지금도 유럽 상당수의 나라는 물에 석회질이 섞여 있어 자연 상태의 물을 그대로 마시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 유럽에서 생수나 탄산수가 발달한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도 그런데 로마 시대에는하수 시설의 미비 등으로 마시는 물이 상당 부분 오염된 상태였다."

p.238~239, 제5장 「와인이 만든 로마의 전성시대_물 탄 와인을 물 대신 마셨던 로마인」 중에서




"1세기 때 활동한 로마의 미식가 아피키우스의 요리법에는 약 500 종류의 요리 레시피가 실려 있는데 찬찬히 살펴보면 대부분의 음식에 올리브 오일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올리브 오일은 모든 로마인이 평등하게 먹는 필수 식품이었다. 품질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구분 없이 식사 때마다 올리브 오일을 쓰지 않는 날이 없었을 정도였다. 식품학자들은 올리브 오일이 특히 저소득층의 영양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본다.

로마에서 가난한 계층은 부자나 평민과는 달리 고기를 별로 먹지 못했는데 옛날에도 고기값이 저렴하지는 않았을 뿐만 아니라 냉장 시설이 없었던 만큼 보존하기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상으로 곡식과 빵을 배급받지 못했던 진짜 빈민의 경우는 빵도 먹지 못하고 대부분 죽으로 끼니를 때웠는데 대신에 올리브 오일로 부족한 칼로리를 보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부 학자들의 경우는 로마에서 저소득층은 하루 섭취 칼로리의 3분의 1을 올리브 오일로 먹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p. 276, 제6장 「올리브 기름 독에 빠진 로마 시민들_로마인의 의식주를 책임지던 올리브」 중에서




저자 : 윤덕노


신문기자를 거쳐 현재는 음식문화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매일경제신문 중국 베이징 특파원과 미국 클리블랜드 주립대 객원 연구원을 지냈으며 매일경제신문 사회부장, 국제부장, 과학기술부장, 중소기업부장과 부국장을 역임했다.

25년의 신문기자 생활과 장기간의 방대한 자료조사를 토대로 음식의 기원과 유래 그리고 관련 스토리를 발굴해 음식 유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음식잡학사전》 발간을 계기로 음식의 역사와 문화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되면서 조선시대의 각종 문헌과 중국 고전에서 원문을 확인하고 그리스 로마 고전에서 근거를 찾아 음식의 유래와 속설을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음식으로 읽는 중국사》 《음식이 상식이다》 《전쟁사에서 건진 별미들》 《음식으로 읽는 한국생활사》 《장모님은 왜 씨암탉을 잡아주실까?》 《붕어빵에도 족보가 있다》 《신의 선물밥》 《음식잡학사전》 《중국권력대해부》 《중국벗기기》 《차이나쇼크》 《베이징 특파원 중국경제를 말하다》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월가의 황제, 불룸버그 스토리》 《유럽의 세계 지배》 《장자의 내려놓음》 《나쁜 세계사》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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