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서문
버크.베카리아.니체 외 27인 지음, 장정일 엮음 / 열림원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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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장정일이 독자로서 오래 마음에 남거나 특별하다고 생각한 서문을 모아 

<위대한 서문> 펴냈다.


'마감이라는 채찍을 맞으며 노역을 하는' 작가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내 힘으로 한 글자도 더하거나 뺄 필요가 없었던 일'에 

순수한 기쁨을 느꼈다는 솔직한 고백에 웃음이 살풋 나오기도 했다.


나는 활자중독(?)까지는 아니어도, 책에 실린 모든 글자들은 한번씩은 

눈에 담고 싶은 마음에 마치 영화의 예고편처럼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담은

서문도 즐겨 읽고 기대감과 설렘으로 본문을 펼친다. 


장정일 작가는 이처럼 서문에 탐닉하는 이유와 당위성을 

역시나, 작가다운 짜임새와 설득력을 갖춘 언어로 표현해내었다.


제목이 압축 파일이라면 서문은 그것을 푸는 암호다.

서문은 이 책이 쓰여진 동기와 방법론을 설명해주며,

저자가 다루고 있는 질문의 윤곽과 주제를 명료하게 해준다.

.....

내가 읽고 있는 책을 해설해주는 최고의 참고서는

비평가의 해설도 서평가의 독후감도 아닌,

서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

p.12-13 /책표지 뒷면


서문은 마치 항해지도처럼, 

앞으로 내가 향하게 될 새로운 책의 바다에 대한 실마리를 주며

독자에게 던지는 도전장처럼,

작가가 만들어 낸 우주와 세계관에 어떤 스탠스를 취할 것인지 질문한다.

때론 안타깝게도 서문의 창대함을 본문이 따라잡지 못해

'속았다'란 분함이 들게 하기도 한다.

서문을 통해 작가의 가려진 면모나 의외의 인맥도 알게 된다.



내가 30개에 달하는 서문을 읽으면서 가장 빵- 터졌던 것은

5. 독자들은 만족을 얻을 것이다. - 조너선 스위프트 편이다.


저자 이름을 외우는 데는 영 서툰 나는 <걸리버 여행기>가

'레뮤엘 걸리버'라는 저자의 이름을 걸고 처음 출판되었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알았다. ^^;;;


이쯤에서 똑똑하고 암기력이 뛰어난 독자는 

"어? <걸리버 여행기>는 조너선 스위프트 작 아니야?" 라고 할 테고

그 비밀은 이렇다.


조너선 스위프트는 아일랜드의 소설가이자 성직자이다.

풍자소설의 꽃이라고 불리는 <걸리버 여행기>는 민감한 내용 탓에

저자도 신분을 숨기고 출판을 의뢰했으며

당시 출판업자도 저자의 허락 없이 내용 일부를 변경하고 축소해 출간했다.

p.105


아래는 그가 자신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에 쓴 서문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고

'->' 다음은 빵-터진 나만의 감상/해석이다. 


이 <걸리버 여행기>의 저자인 레뮤얼 걸리버는 나의 오래되고 친근한 벗이다.

-> 인터넷에 '이건 내 친구 이야기인데~'로 시작하는 것과 비슷 ㅎㅎ


... 그곳에서 걸리버는 은둔 생활을 하고 있으며, 주변에 살고 있는 이웃들에게서 존경을 받고 있다.

-> 자신의 바람을 집어넣음. 슬슬 이입이 시작됨.


...걸리버는 자신이 쓴 여행기의 원고를 나에게 주고 갔다. 그것들을 내가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는 권리와 함께 말이다.

-> 저작권 문제와 각종 시비거리 해결! ㅎㅎ 똑똑한 조너선씨.


... 여행기의 문체는 매우 평이하면서도 간결하게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의 결점이 있다면 여행자들의 행동 뒤에 나오는 작가의 설명이 지나치도록 상세하다는 것이다.

-> 셀프디스를 통해 주작(?)논란에서 한걸음 벗어남


(윗 줄과 바로 이어서) 걸리버는 대단히 성실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 작품 전체에 조용하게 흐르는 분명한 진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숨길 수 없는 자기애와 자기 작품에 대한 자부심.


...걸리버가 약간 불만스러워할 것이라고 염려되나 독자들의 일반적인 능력에 어울리도록 작품을 맞추기로 결정했다.

-> 와... 평소 생각을 남의 이름을 빌어서 이렇게 적나라하게 노출하다니.

익명성의 힘이 마구마구 느껴진다.


... 이제, 책의 첫 페이지에서부터 독자는 만족을 얻을 것이다.

-> 조너선씨. 뻔뻔한 사람이었네! 


'출처 및 주'와 책에 수록된 작가와 작품을 정리해주어

그 시대의 분위기나 문화를 모르는 독자(=나)의 이해를 도운 것도

사려깊은 '先독자' 장정일씨의 센스가 아닐까 한다.



누군가가 서문을 모아서 책으로 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위대한 서문>는 깜짝 선물처럼 다가와 

내가 읽었던 책을 조우하는 반가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책덕후들에게 던지는 구절과 문장을 필사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새해를 맞아 자기만의 서문집을 만들어보는게 어떠냐는 흥미로운 제안, 

덥썩 받아들이고 싶게 하는 <위대한 서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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