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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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으로 기대감을 주는 작가들이 있다.

나의 리스트엔 베르나르 베르베르도 올라와 있다.


<개미>로 이 작가를 처음 알게 된 다음, 

그의 상상력이 닿을 다음 지점이 어디인지 궁금했고

엄청나게 치밀하게 쌓아가는 세계관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기대감을 주는 작가라고 해놓고서, 

읽은 작품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도 좀 우습긴 하지만 

'프랑스의 천재 작가'이며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초대되어

작가의 작품 말고 작가로서 더욱 노출이 되고난 다음의 기분이 약간.. 뭐랄까...

'너무 유명해지셨군요' 하는 어색함(?!)과 약간의 거리두기? ㅎㅎㅎ


그래서 베르베르가 희곡으로 두번째로 <심판>이라는 작품을 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인간>이라는 첫번째도 찾아보게 될 것 같다)


천국에 있는 법정이 배경이고 주인공은 폐암 수술 중 사망한 아나톨이다.

주인공이자 피고인이 된 아나톨, 

그를 변호해서 '다음 생'을 유리하게 이끌어 줄 변호사 카롤린

그렇게 쉽게는 안된다며, 삶을 탈탈 털어내는 검사 베르트랑

그리고 음.... 뭐지? 싶을 정도로 우왕좌왕인 재판장 가브리엘이

이 희곡의 등장인물이다.


총 3막으로 구성된 <심판>

제1막 : 천국 도착

제2막 : 지난 생의 대차 대조표

제3막: 다음 생을 위한 준비


**지금부터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서양인들에게 '내세'는 곧 천국으로 끝.

다음 생이라는 것, 즉 '환생'의 개념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동양(혹은 불교)의 환생 개념을 적극적으로 끌고 오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 영화 <신과 함께>가 생각나기도 한다.

(변호사/검사/판사의 느낌으로 망자의 죄를 다루는 법정 느낌이 난다는 점에서도!)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품의 여러 매력 중에서 가장 끌리는 것이

독특하고도 구체적이며 치밀하게 짜여진 색다른 세계관인데

그런 측면에서 이번 <심판>은 신기함보다는 익숙함으로 다가왔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그것을 메우는 작가의 힘은 바로,

유머러스하고 능청스럽게 현실을 소설 속에 옮겨두는 것.


네 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의 등장인물이 대사를 찰지게 주고 받는 것은

정말 이 책은 무대에서 배우가 만들어가는 새로운 세계를 위해 만들어진

'희곡'이라는 점을 곳곳에서 새삼스레 느끼게 한다.


지금은 피고인으로 심판을 받지만 사실 아나톨은 지상에서 '판사'였다.

아나톨을 두고 비아냥대기도 하며 감정적으로 격돌하는 변호사와 검사인

카롤린과 베르트랑은 전생에 부부였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대사에는 오롯이 아나톨만 있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아나톨은 마치, 슬램덩크의 '왼손은 거들 뿐' 처럼, 혹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그저 옆에 있을 뿐 -혹은 재료로 사용될 뿐- 전생에서부터 얽혀 온

카롤린과 베르트랑의 앙금과 소회가 담기게 되는데

그것이 또 절묘하게 프랑스 -혹은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건드리게 된다.

교육, 결혼 제도, 남자와 여자로 삶을 살아가는 다른 무게감과 경험,

법조계나 의료계에서 사람이 사람처럼 존중받지 못하고 일거리로 전락하는 것,

의도와는 다르게 결과를 만들어내는, 그러나 속을 더 파보면

남이야 어떻든 자기의 편안함과 안위를 위해 모르는 척 했던 이기심 등등


천국의 법정에서 다루는 지극히 인간적인 문제들을 따라가다보면

점점 몰입하게 되어 재판장 가브리엘이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 지

흥미진진하게 기다리게 되고야 만다. 



여기서의 포인트는 가브리엘.

저자는 가브리엘의 입을 빌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운명과 삶, 자유의지에 대한 생각을 풀어놓기도 한다.


천국의 심판을 받는 영혼이 환생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엄청난 임무를 맡고 있는 가브리엘은 <신과 함께>의 염라와는 

조금 다르고 많이 닮았다.


환생은 가끔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별로 그럴 케이스는 없다는 시니컬함을 품고 

지옥의 평안을 지키는 것과 법도에 맞는 판결을 중요하게 여기는 근엄한 염라와

피고인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그 입장을 고려하며 하나씩 죄의 경중을 따지며

판단하는 와중에도 '미안하지만'과 말줄임표, 작은 목소리를 사용하는

가브리엘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확실히 다르지만,

피고인으로 올라온 영혼에 대한 연민과 

더 좋은 기회가 있다면 달라진다는 희망과 긍정이 가득한 따뜻한(!) 저승의 존재다.

 


책을 읽으면서 현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천국의 시간에 대해 상상해보게 된다.

물론, 아무도 겪지 않아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모르겠지만

'천국에서의 심판'이라는 상황을 무대에 올려 관객에게 보여줌으로써,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삶도 

자신이 주인공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연극과 다름이 아니며

주인공이 아닌 관객의 입장으로 한 발짝 떨어져 봤을 때,

나름의 이유로 덮어두고 넘어가고 소홀히 했던 삶의 반짝이는 조각들과

어떠한 경우라도 지켜야하는 가치를 흐리게 하는 인생의 비루함을 생각하게 만든다.


죄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그러나 천국의 재판장에서 다루어진 죄들에 대해.

우리는 뭐라고 자신을 변호할 수 있을 것인가?


유쾌하고 즐겁게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특히나 타성에 젖어 굴러가던 삶을 어떻게 가꾸어 나가야 할 지

다양한 방식과 색깔로 계속 질문을 던지는 베르베르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진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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