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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환야 1~2 - 전2권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0년 3월
평점 :

이름만으로 독자들의 기대를 반쯤 차지해 버리는 작가들이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그런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인 그는 인물들의 감정을 치밀하게 풀어내면서
그 인물들이 겹겹이 짜여진 스토리에서 어떻게 결말을 맞이할지에 대해
독자들이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도록 하게 만드는 뛰어난 재능이 있다.
게이고가 아니고서는 각 권이 500페이지, 440페이지에 육박하는
2권 세트인 책을 부담감이 아닌 기대감과 아쉬움을 갖고 읽게 하지 못할 것이다.
이번 <환야>는 그의 전작 중 <백야행>을 떠올리게 한다.
<백야행>도 매운맛이었는데 <환야>는 앵그리맛이다.
등장하는 캐릭터에게 마음을 주며 책을 읽어나가는 스타일인 독자라면
이 책을 읽는 것이 고통스러우면서도 끊을 수 없는 마라탕일지도...
<환야>의 주인공은 마사야와 미후유이다.
경영난을 이기지 못해 자살한 마사야의 아버지의 빈소.
자살한 아버지도 충격이지만 빈소에 와서 빚 독촉을 하는 고모부에게
분노와 환멸을 느낀 마사야는, 다음 날 새벽 엄청난 지진을 만나
가족과 삶의 터전, 그리고 이성이나 온전한 판단력을 모두 잃어버린다.
대재난의 혼란 속에서 공장 잔해에 깔린 고모부를 충동적으로 살해한 마사야.
그리고 그 장면을 고스란히 목격한 젊은 여자 미후유를 만나게 된다.
이 책의 배경이 된 시기는 1995년 1월에 일본을 강타한 한신 아와이 대지진이다.
그 해 3월에는 일본 지하철에서 그 유명한 사린가스 사건이 일어났다.
승승장구하던 일본의 경기가 침체되고,
일본이 우월감을 갖고 우습게 여기던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앞서 나가고 있다는
우울감과 패배감이 지배하던 일본을 지배하는 정서가 되었던 시절이다.
게다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지진에 더하여
인간성을 말살하여 희망마저 꺾어버린 사린가스테러는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그 암울한 정서가 이 작품에는 진하게 녹아들어 있다.
다음 독자들이 충분히 추리/미스터리 소설의 특성과 재미를 만끽하도록
먼저 읽은 사람의 예의를 지키고 리뷰에서 많은 내용을 드러내면 안 될 것 같다.
심지어 이 심플한 차례는,
독자가 조금이라도 어떠한 생각과 선입견을 가지고 페이지를 넘기지 않도록
오로지 두터운 점과 페이지 표시로만 되어 있다.

하지만 <백야행>을 본 사람들이라면 마사야와 미후유가
어떤 어둠 속을 걸어가고 어떤 '환야'를 보내게 될 지 어느 정도 짐작을 할 것이다.
사실, 게이고의 팬들은 이 흡인력있는 작품이 일본에선 이미 베스트셀러이며
무려 10년 전, 8부작의 TV드라마로 방영된 사실을 알 것이다. 시청했을 수도 있고.^^
책을 읽고 난 다음에 표지를 보면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
새까만 어둠 속에 오로지 서로만을 의지하고 있는 듯 보이는 남자와 여자의
하얀 그림자.
1권에서는 이렇게 손을 잡고 있던 두 사람이,

2권에서는 하얗고 창백하게 어둠을 밀어내는 둥근 달 아래에서
따로 떨어져 있다.
여자의 그림자는 방향성이 있지만 남자는 우두커니 서서 어찌할 줄 몰라 보인다.

이것이 마사야와 미후유이다.
타고난 미모와 재능을 갖춘 미후유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녀는 목표지향적이고 자신이 욕망하는 것은 반드시 얻고야 말도록
거짓말과 지략, 자신이 쓸 수 있는 모든 방법과 기술(?)을 서슴없이 쓸 정도이다.
순도 100%의 욕망 덩어리라고 볼 수 있다.
그녀의 승승장구와 성공의 달콤함은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충실하게 치워주는
마사야의 헌신과 사랑 덕분이다.
마사야의 사랑은, 미후유가 어떠한 선택을 해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다.
미후유는 마사야가 곤경과 위험에 빠질 때마다 그를 구해내는 구원이 된다.
그녀는 끊임없이 이 세상의 어둠 속에서 서로가 의지할 존재는 서로일 뿐이라고
주문과 세뇌처럼 마사야에게 말한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가차없이 달리는 미후유는
그녀와 마사야의 주변에 수상한 사건들을 연쇄적으로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경시청 형사 카토는 사건들을 좇으며 두 사람의 관계를 끈질기게 추적한다.
독자는 주로 마사야와 카토의 시선으로 스토리를 읽어나가게 되고
'희대의 악녀' 수준으로 욕망의 폭주기관차를 몰던 미후유의 비밀이
그동안 차곡차곡 쌓여왔던 에피소드와 복선들을 한꺼번에 폭발시키며 드러날 때,
두꺼운 분량의 페이지를 넘기며 올려왔던 긴장감과 감정이 함께 터지는
'히가시노 게이고' 세계를 맛보게 된다.
헌신적인 사랑을 하는 남자와 욕망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여자.
밝은 낮에는 함께 할 수 없는 두 사람이 어두운 밤이 그들을 감싸기를 기다린다는 점.
그리고 필연적으로 불행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비극적이고 비틀린 관계를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라는 속삭임으로 지속시킨다는 점.
이 둘과 둘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끈질기게 추적하는 형사가 있다는 점은
여러모로 <환야>와 <백야행>을 연결시키게 한다.
작가는 두 작품을 통해 '행복'과 '사랑' 그리고 '헌신'에 대해 탐구하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