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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 With Frida Kahlo ㅣ 활자에 잠긴 시
박연준 지음 / 알마 / 2018년 5월
평점 :
밤의 감성이 먹물처럼 퍼지는 멋진 에세이를 만났다.
프리다 칼로를 사랑하는 시인이 쓴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어떤 예술가는 한 인간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한걸음에 다가온다.
특별한 경우에는 한 존재의 내부를 통과해
어떤 식으로든 그를 변화시킨다.
더욱 특별한 경우에는 변화된 인간을
예술의 바다로 인도한다.
p. 10
엄청나게 멋진 작품을 만나서 얻은
감동과 잔상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고 압도적으로 머무르다가
다시, 일상에 매몰되어 한 켠에서 먼지를 쌓아가는줄로만 알았는데
어느새 흠뻑 그 '예술'의 세계에 젖어있었던 경험을
말로 표현해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작가 박연준님의 이 말로, 생각이 틀을 만나 눈에 보이게 된 기분이다.
자신의 인생을 화폭에 담은 프리다 칼로.
넘치는 에너지 만큼이나 열정적이고 독특한 그녀의 창조성이
삶이 주는 신체적, 정신적 굴곡을 맞닥뜨렸을 때,
슬픔과 좌절, 분노와 괴로움으로 빠져 스스로를 연민하지 않고
오히려 아픔과 상처를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인
그녀의 그림을 보고 있자면,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고 마음으로 읽는 기분이 들었었다.
작가의 언어와 해석이라는 또다른 시선을 통해 만난
프리다 칼로와 그림, 시가 주는 느낌은 역시 '다채롭고 풍부'했다.

목차를 이렇게 열심히 읽은 적도 오래간만이다.
내용이 궁금했지만, 막상 책장을 쉽게 넘기기는 조심스러웠다.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는
다분히 물에 떨어진 네이비 잉크가 퍼지는 것 같은,
처음에는 밝았다가 눈 깜빡하는 순간 어둠에 잠기는,
밤의 정서에 담긴 사랑, 상처, 고독, 집착, 아름다움,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인간 본연의 외로움에 대한 글이다.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갈망하고
나를 이해해주기를 바라지만
'나'라는 틀에 결국 갇혀버린 인간의 한계와 더불어
그럼에도 짧은 순간, 찰나처럼 느끼는 '함께'라는 기분의 소중함을
곱게곱게 쓰다듬는 시인의 글들이 책 곳곳에 담겨있다.

그리고 프리다 칼로.
그녀를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할까.
활화산같은 그녀의 감성과 넘치는 사랑,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겪을 수 밖에 없는 채워지지 않은 갈망과 외로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심지어 그의 '배아'라고 자신을 지칭하는-
남편 디에고에게 끊임없이, 씻을 수 없이 상처를 입고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은 그녀의 강인함은
그 모습을 그림으로, 기록으로 접하는 사람에게 많은 감정을 일으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 그러나 서로 함께 서는 '두 명의 프리다'.
이 그림과 글이 한참의 시간을 지나게 했다.
....
가끔 울고 오래도록 구불구불 글씨를 쓰다가,
그림을 그리고 그림 속에서
넘어지고 일어나고 넘어지다
저녁이 되면
다른 심장을 통해 사라집니다.
멀쩡한 우리와 멀쩡하지 않은 우리가
얌전히 앉아 기다립니다.
아픈 곳을 찾을 수 없어 두리번거립니다.
...
p. 134

프리다 칼로와 함께 나에게 말을 거는 시인 박연준의 에세이.
읽을 때마다 조금씩 그 느낌이 달라지는 그림같은 에세이와
에세이 같은 칼로의 그림을, 앞으로도 잠이 오지 않은 밤에
여러 번, 꼭꼭 곱씹듯 읽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