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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주부입니다만 - 지금, 여기에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라문숙 지음 / 엔트리(메가스터디북스)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전업주부' 라는 단어가 주는 애잔함이 있다.
끝이 없고, 종류도 많고, 시간과 자잘한 품이 많이 들지만, 티가 나지 않는
매일 해야하는 일이지만 건너뛰면 금새 커다란 구멍이 생겨버리고 마는
시지푸스의 형벌처럼 꾸역꾸역 해내야 하는 기이한 집안일.
게다가 집안의 식구들은 그런 집안일을 하는 사람은 '나'라고 정해놓았는지
그들은 집안일의 수혜를 담뿍 누리며 사소하고 하찮은 일상적인 그 일들을
자신의 '할 일' 목록에는 올려놓지 않는다.
간혹 마음이 내키거나 기분이 동할 때, 선심쓰듯 베풀어주는 '도움'을 줄 뿐.
하지만, 성인으로 삶을 살아가며
찬거리를 사와서, 준비하고 조리해서 밥을 차려 먹고, 그릇을 씻어 정리하는 일
입은 옷을 분류하여 빨래하고 햇빛에 뽀송하게 말린 뒤, 옷장에 잘 개켜두는 일
시원하게 샤워하고 물 때가 끼지 않도록, 지저분한 것이 남지 않도록 욕실을 정리하는 일
예쁘다고 사 모은 장식품들이나 읽으려고 꽂아둔 책들 위에 어느덧 쌓여가는 먼지를 터는 일
바닥을 쓸고 닦고, 얼룩을 제거하는 일
공과금을 내고 부족한 물품을 사두거나 고장난 것들을 고치는 일
계절에 맞게 옷을 정리하고 꺼내거나 넣어두는 일
을 매일, 매주, 매달 하지 않고 있다면
이는 분명 '전업주부'라는 전문가가 출퇴근없는 24시간 재택근무를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무보수라는 것에 그 슬픔이 있다.
지은이 라문숙은 어쩌다보니 원치않게 전업주부가 되었지만
자신이 있는 지금, 여기에서 자신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잊지 않은 사람이어서 매력적이다.
<전업주부입니다만>을 읽으며 애잔한 마음보다는 멋지다는 마음이 든다.
그녀의 '전업주부'라는 직업인의 삶은 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진 않지만
그녀 개인의 색깔이 담뿍 묻어나는 생활과 삶의 이야기는 읽을 수록 재미나고 웃음이 번진다.
작업공간이 '집'과 분리되지 않는 터에 출/퇴근이 자유롭지 않지만
그래서 지루할 수 있는 매순간을 오히려 깊이 사색하고 탐험하는 작가의 일상.

좋아하는 영화가 툭 튀어나와 반가운 마음에 읽었을 때 '밤조림'을 한번 더 생각하게 되었고

책을 읽고난 다음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고, 그럴 수 없는 나의 처지에 부러움은 느끼지만
이집트, 스핑크스, 사막, 계곡의 공격에 우울함과 실망감으로 허덕이지 않고,
초록초록한 스무디를 만들어 마시며 이 순간도 한 장의 테피스트리로 남을 거라 희망하는 모습.

처음 음식을 만들 때, 각종 도구를 잔뜩 사모으고 식재료를 탐구하며
책에서 읽은 그 요리의 맛을 궁금해하는 호기심이 넘치는 모습까지
작가의 하루하루에서 담담히 건져 올린 일상의 이야기들과 키워드들이
어느 정도의 나의 생활에도 있기에 훨씬 더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다.
삶의 터를 직장으로 가진 전문가이자,
매일의 일상에서 언뜻 지나치기 쉬운 사소하지만 반짝이는 순간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는 세상에서 제일 많은 일을 하는 사람 '전업주부'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툭툭 내뱉는 말에 화도 나고 상처도 받지만
자기가 지금, 여기서 누리는 자기자신의 모습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작가의 모습이
정말 아름답고, 멋지고, 반짝반짝 빛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