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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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소설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읽기 위해 나이지리아의 지리와 역사, 정치를 공부했다. 아프리카 대륙의 서부에 자리한 나라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최대의 부국 중 하나다. 이유는 석유 때문이다. 아프리카 제1의 석유 생산국인 나이지리아는 천연가스 또한 풍부하게 갖고 있어 경제적으로 여유롭다. 그러나 그 풍부한 자원이 바로 이 나라의 정치적 혼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민족 및 종교의 복잡성과 얽혀서이다.

나이리지아는 250개가 넘는 다양한 민족이 혼합되어 세워진 국가인데 특히 가장 다수를 차지하는 3부족인 하우사족, 요루바족, 이보족 이 3 부족이 각각 20% 내외로 비슷한 인구 구성비를 차지하고 있어 서로간의 세력 다툼이 팽팽하다. 또한 국토의 구성이 북쪽은 사막지대, 남쪽은 비옥한 평야지대이며, 그에 맞게 북부는 유목민-하우사족이 많고 남부는 농경민-이보족이 많은 형편이다. 종교 또한 달라서 북부-유목민-하우사족은 무슬림, 남부-농경민-이보족은 기독교도가 다수다. 지리적으로도, 생활 유형으로도, 종교로도, 민족 구성으로도 하여튼 뭐 하나 원만히 섞이기가 어려운 나라가 나이지리아인데 지하자원은 풍부하기까지 하니 경제적 이권을 두고 종교와 민족 간의 다툼이 끊일 날이 없다. 뉴스에 종종 등장하는 이슬람 무장단체 ‘보코하람’도 나이지리아에 근거하고 있으며 (IS처럼 서구에 직접적 위협을 덜 가해서 상대적으로 조명이 덜 된 것이지 납치나 살인 같은 악성 범죄는 IS보다 보코하람 쪽이 압도적이다) , 1960년대의 쿠데타 및 이보족 대학살 같은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도 이런 복잡한 사회적 상황 속에 일어난 일들이다.

한 권의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이런 컨텍스트적인 이해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응구기 와 시옹오의 소설 ‘피의 꽃잎들’을 읽기 위해 케냐와 기쿠유족와 마우마우단을 공부했고,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소설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읽기 위해 나이지리아와 이보족과 종교 갈등에 대해 공부했다. 두 나라 모두 영국의 식민지배를 일찍부터, 오래 겪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말런 제임스의 맨부커상 수상작인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메이카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 지리를 샅샅이 공부해야 하고, 킹 오브 맨부커인 살만 루슈디의 걸작 ‘한밤의 아이들’ 역시 인도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의 역사를 낱낱이 알기 전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다. 좋은 책은 책 자체만으로 훌륭한 것이 아니라 그 책을 읽기 위한 준비운동을 하는 것만으로도 독자를 훈련시키고 지적으로 풍부하게 만들며, 특히 좋은 제3세계 문학을 읽는 것은 서구 열강에 가려져 있던 식민지 출신 국가들의 역사와 고통을 환기시키고 독자에게 더 넓고 깊은 시야를 갖게끔 만든다 - 이 세계는 유럽 백인 남자애들이 말랑말랑하게 속삭이는 ‘낭만적 사랑과 그 후의 일상’ 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깨달음 같은 것 말이다.

서론이 길었는데 하여튼 앞부분의 ‘쿠데타’ 언급을 읽고 나서,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나이지리아의 역사를 공부했고 주인공 캄빌리의 가족이 어떤 사회적 위치 속에 있는지를 파악했다. 캄빌리의 아버지는 부유한 계급 출신이 아니었지만 영국 가톨릭 선교사의 눈에 들어 미션 스쿨을 다녔고, 역시 가톨릭의 지원으로 영국 유학을 다녀온 인물이다. 1966년의 쿠데타와 이보족 독립 운동, 이후의 잔인한 대학살이 있던 시기 그는 영국 유학 중이었고 자신의 속한 민족과 계급의 피흘림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전형적인 식민지 지식인이며 우리 나라식으로 말하면 ‘제국대 출신의 친일 조선 유학생’이었던 자다. (이들에 대해 다룬 좋은 책이 최근 출간되었다. 정종현 저 ‘제국대학의 조센징’을 참조하라)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신문사와 식료품 회사를 차리고 거부로 발돋움한다. 정치적으로는 매우 진보적이며 앰네스티가 선정한 시대의 양심으로 알려진 자이지만, 종교적으로는 신실함을 넘어 근본주의적이며 (철저한 가톨릭인 그는 심지어 오순절교회 식의 방언과 부흥회 행사조차 몹시 싫어한다), 가정에서는 폭압적이고 잔인한 아버지다. 요컨대 그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하느님과 같은 존재다. 정치적으로는 이교도들에게 핍박받는 신이며, ‘전능한 하느님’으로서 지역 사회에 군림하고, ‘두려운 하느님’으로서의 지위를 가정 내에서 누리고 있는, 영국에서 돌아온 나이지리아의 하느님이다.

‘사랑’을 빙자한 아버지의 폭력 하에 억압받으며 자라고 있던 오빠 자자, 주인공 캄빌리는 어느 해 크리스마스 찾아 온 고모 이페오마 - 국립대학의 교수이자 과부이며 자유주의자인 그녀 덕분에 대학과 고모 집이 있는 은수카에 며칠 머물게 된다. 성모의 발현을 직관하기 위함이라는 핑계로 떠나온 달콤한 휴가다. 아버지에게 매를 맞아 늘 다치고 자주 아기를 유산하는 엄마를 남겨두고 오긴 했지만 고모 집에서 누리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생활은 자자와 캄빌리를 매혹시키고, 일단 자유의 맛을 보고 난 인간이 누구나 그러하듯 아이들은 에누구의 아버지 집에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한다.

이 소설은 흔히 ‘나이지리아 상류층 소녀의 성장기’라고 이야기된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고 싶은 건, 이 소설에는 ‘성장’ 이 없다는 거다.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주인공 캄빌리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데 사실 이 시점을 주인공 시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캄빌리의 적극적 행동이나 사고의 변화가 소설 속에 드러나지 않는다. 캄빌리는 1인칭 주인공이라기 보다는 1인칭 관찰자에 가깝고 사실 사고의 변화를 겪고 행동하는 인물, 그리하여 소설의 시작과 끝에서 변화와 성장을 성취한 인물은 오빠 자자이지 캄빌리가 아니다. 아버지의 반복되는 학대를 못 이긴 엄마는 홍차에 독을 타서 아버지를 살해하고, 소설 시작부터 엄마를 지켜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아들 자자는 자신이 아버지를 살해했다고 자백하여 감옥으로 끌려간다. 감옥에서 힘든 몇년간을 견디고 정치적 이유로 출감되는 자자는, 많은 신화와 전설과 소설 들에 흔히 등장하는, 아버지-신에 맞서 저항한 아들이며, 아버지를 살해하고 (혹은 살해했다고 천명하고) 아버지의 독점적 지위를 계승(혹은 찬탈)하는 후계자가 된다. 나아가 자자는 고통받는 가족들을 구하고 성모와 같은 어머니의 죄를 대속하여 수감 생활의 고난을 겪고 온몸에 성흔을 지닌 채 부활하는, 예수의 모습으로 소설 끝에서 묘사된다. 즉 구약성서 속의 하느님은 죽고, 성모의 몸에서 태어나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 다시 돌아온 예수의 모습을 성취하는 것으로, 자자의 성장은 완결된다. 이 소설은 자자의 성장기이지 캄빌리의 성장기라고 볼 수는 없다. 캄빌리는 행동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다. 아버지를 살해하지 않으며, 심지어 아버지를 살해할 의도조차 품지 않는다. 소설 속에 지속적으로 묘사되는 캄빌리는 아버지의 규약을 오빠보다 훨씬 더 충실하게 받아들이고 이행하며 사랑하는 존재다. 제단 앞에 무릎 꿇고 십자가에 입 맞출 때 눈물흘리고, 아버지를 살해한 자자를 때리고 분노하며, 아버지의 사후에도 그를 지속적으로 그리워한다. 캄빌리의 종교는 아버지의 그것처럼 뿌리 깊게 그녀의 영혼을 쥐고 있다. 그녀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아버지는 곧 하느님이다. 꿈 속의 아버지는 하느님의 모습과 중첩되며, 캄빌리가 사랑하게 되는 아마디 신부 역시 하느님의 다른 버전 - 엄격하고 무서운 신으로서의 아버지 반대편에 서 있는 다정하고 자상한 신 버전이다. 캄빌리는 신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고 그것이 그 자체로 옳다는 것, 신은 그 자체로 말미암은 자라는 사실을 의심없이 받아들인다. 캄빌리의 변화는 그녀의 내적 변화와 성장이 아니라 그저 그녀를 둘러싼 ‘상황’의 변화일 뿐이고 따라서 나는 이 소설을 캄빌리의 성장기로 해석하는 것에 반대한다.

이 소설은 굉장히 재미있다. 가독성이 높고 뒷 내용을 궁금하게 만드는 힘이 탁월하다. 십대 소녀가 자기 이야기를 한다는 설정부터 대중성을 획득하기에 좋은 조건이고, 더군다나 감정 이입하기 쉬운 1인칭 시점이라 독자가 몰입하기에 좋다. 인물들은 모두 스테레오 타입이라 이해하기 아주 편하다. 밖에선 존경받지만 집에서는 폭력적인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 순종하며 꼼짝 못하고 당하는 어머니, 아버지에게 저항하는 아들, 움츠린 채 모든 것을 지켜보는 딸. 이 가족과 상반된 집단이 있어야 하므로 존재하는 고모네 가족. 억압적인 아버지와는 다른 다정한 인물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아마디 신부. 이 인물 설정들은 전형적이다 못해 상투적이고 이런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또한 새롭거나 전복적일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이 책은 초보 독자에게도 전혀 어렵지 않다. 이 점 때문에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잘 씌어진 청소년 소설은 될 수 있겠지만 인간과 세계의 복잡성에 대한 심오한 성찰을 전달하는데-즉 훌륭한 성인용 소설이 되는데는 못 미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오직 두 종류의 인간 - 선한 인간과 악한 인간만이 존재하며 내레이터 소녀 캄빌리는 그들을 조용히 관찰하고 그저 가만히 상황에 순종한다. 변화는 남성의 몫이다. 이페오마 고모네의 중심이 둘째이자 외아들인 오비오라였듯 캄빌리네의 중심 또한 아버지였고, 그 다음에는 아들 자자로 넘어간다. 이 소설에서 여성은 주도권이 없고 심지어 남편을 살해할 권리조차도 갖지 못한다 - 아비 살해의 영광은 아들의 몫이다. 캄빌리는 삼종지도를 따라는 한국의 여인네처럼 처음엔 아버지-그 다음엔 자자-마지막은 아마디 신부의 길을 따른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이 책이 '잘 씌어진 청소년 소설'이기는 한 것인지의 의문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은 시작부터 끝까지 그냥 '착한 소녀의 이야기'일 뿐이다.

여러 모로 아쉽지만 작가의 첫 책이라는 점을 감안해 다음 소설까지는 읽어봐야 평가를 제대로 할 수 있지 싶다. 마지막으로 하나 덧붙이자면, 이페오마 고모는 정말 그녀의 오빠-캄빌리의 아버지와는 다른 인물인가? 어떤 방식으로 자식을 키우든, 자식을 바라보며 잘 훈련된 축구 선수들을 바라보는 감독 같은 마음을 갖는다면, 결국은 같은 것 아닌가? 엄격한 아버지 혹은 다정한 어머니, 결국 그들의 피조물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평가하는 신의 두 얼굴일 뿐.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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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사람
윤성희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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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성희의 소설 ‘상냥한 사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그 시절 그 사람들’ 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녹화장 이야기, 후반부는 녹화장에서 뛰쳐나온 형민의 회사 생활과 주변 사람들 이야기다. 


  형민은 인기 장수 드라마 ‘형구네 고물상’에 일찌감치 철든 아이, 동생을 잘 돌보는 아이 ‘진구’로 출연했다. 드라마가 끝난 후에도 그는 ‘진구’였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진구가 연기했던 다정하고 묵묵한 소년의 모습을 그에게 기대했다. 형민의 내면은 오랫동안 진구와 형민 사이를 떠돌았지만, 치매에 걸린 이모까지 그를 진구라고 부르자 형민은 마침내 진구와 형민 사이의 갈등을 정리한다. 무슨 상관인가,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하지만 내 눈에 그건 화해가 아니라 체념 내지는 타협으로 보인다. 


  이 소설은 진구와 형민 사이의 이야기, 즉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되고 싶은 나와 그렇게 될 수 없었던 나 사이’의 이야기다.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하고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하지, 나쁜 사람이 되기를 어려서부터 희망하는 사람은 없다. 대체로 미래를 낙관하고 인생의 큰 결정 앞에서는 다 잘 풀릴 것이라고 믿으며 그럭저럭 살아간다. 그저 소소하고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 남에게 상처주지 않는 무던한-굿맨이 되어 세상 살다 가고 싶은 것.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갖는 자그마한 소망이자 너무나 거대한 희망인 이것을 ‘상냥한 사람’ 속의 인물들도 품고 살아간다. ‘진구’를 연기하며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거기까지였던 남자 형민은 더 이상 배우로서의 미래를 갖지 못하고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 평범한 결혼을 한다. 딸을 낳고 키우며 그럭저럭 살다 어느 날 아내와 이혼한다. 이혼 후에도 삶은 그런대로 또 이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딸 하영의 비행은 형민을 무던한-굿맨으로 살아갈 수 없게 한다. 


  이 소설 속의 인간들은 상황을 선택하는 개인이 아니라 상황 속에 그냥 내던져진 존재들이다. 형민이 ‘진구’가 된 것도 그의 선택은 아니었고 어느 날 ‘진구’ 역할에서 떨어져 나간 것도 형민의 선택은 아니었다. 귀엽고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소설 곳곳에 포진해 있지만 우리 삶은 그렇게 사랑스럽기만 하지는 않다. 불행은 예고 없이 들이닥치고 죽음도, 배신도, 뼈아픈 이별과 오랜 회오도 우리가 선택해서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름을 짓는데 한달 넘게 걸렸던 외동딸 하영이 ‘별 생각 없이’ 친구를 사지로 밀어넣은 것는 아이가 된 것도 형민의 의도나 예상 밖의 일이었다.  아파트의 담배 친구인 할머니들이 새벽에 밖에서 담배를 피우게 된 것도 그녀들이 원해서 그렇게 풀린 것은 아니었다. 소설 속의 세상은 정체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그 속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의도나 의지를 용인하지 않는 무정한 곳으로 보인다. 언제나 인간의 삶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고, 최선을 다해 뭔가를 선택하고 매 순간 성실했다고 생각하지만 지나고 보면 모두 부질없었을 뿐이다. 그걸 깨달은 후 소설 속의 인간들은 ‘나와 버리는 것’을 택한다. 집을 나오고,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와 헤어지고, 상황을 회피하고 그저 불확실한 미래에 ‘어쩌면’ 을 걸면서 고개를 숙이고 걸어간다. 그래서 이 소설엔 결국 옳은 자리, 적당한 자리에 도달하는 이들이 없다. 누구나 적당히 좋은 사람이지만 그 뒷면에는 저마다의 부끄러운 잘못들이 있으며 다들 그걸 모른 척, 짐짓 태연한 척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이들은 모두 우연에 ‘떠밀리듯’ 살아간다. 요컨대 ‘상냥한 사람’ 속의 인물들은 의지적 인물이라기 보다는 상황에 의해 만들어진 인물들이고 그래서 이들은 대개 무력해 보인다. 그들은 끝까지 부딪히기 보다는 체념하거나 우회하는 길을 책한다. 잘못이 있다는 느낌이 들어도 ‘미안하다’는 말은 어깨를 부딪힌 낯선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며, 형민은 심지어 ‘지나치게 드러내고 사과하는 다른 부모’에게 역겨움을 느끼기까지 한다. 인물들은 스트레이트 하게 달려들기를 피하고, 회피 이외의 어느 것도 이들의 선택지가 아니다. 그래서 이 소설의 이야기는 언제나 곁가지로 빠진다. 쉴새없이 다른 인물, 다른 시간, 다른 공간대의 이야기로 미끄러지는 이야기는 ‘회피’ 방어 기제의 표현물로 보인다. 결국 여기엔 수없는 우연과 부딪힘만 있을 뿐, 어느 것도 다물어지지 않은 채 인생은 그렇게 흘러간다. 이 얼마나 참혹한 무력함의 현장인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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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첼바 - 1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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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이 아주 좋고 새콤해요. 여름에 딱 맞는 아이스커피용 원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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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장할 우리 가족 - 정상 가족 판타지를 벗어나 '나'와 '너'의 가족을 위하여
홍주현 지음 / 문예출판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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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프롤로그에서부터 ‘나는 조금 까다롭다고 할 수 있는 나름의 기준을 정하고 이것저것 따졌다. 외모, 직업, 학벌, 집안, 성격. 이렇게 다섯 가지 항목이었다.’ 라는 문장으로 나를 당혹시켰다. ‘누가 보면 저런 속물이라고 거부감이 들 태도지만 솔직히 그 때 내 속마음에는 그런 기준이 중요했다’ 라며, 마치 내 생각을 읽은 듯 문장이 이어지는데 앞으로 이 책을 더 읽어야 하나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작가분은 결국 자기의 ‘조금 까다로운’ 정도가 아닌 기준을 만족시키는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그 남자는 결혼 2년도 지나지 않아 말기 암 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이어지는 나의 당혹은 ‘투병 생활도 힘들었고 죽음이 엄습하는 것도 무서웠으며 미래를 잃는다는 불안도 괴로웠지만 나 자신이 루저가 된 기분이 들었다’ 라는 문장 때문이었다. 첫째, 투병 생활은 환자 본인이 제일 힘들지 않은가? 하지만 뭐… 간병인도 환자 본인만큼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지. 넘어가자. 둘째, 죽음이 두려운 것 역시 환자 본인이 제일 크지 않은가? 음… 어떻게든 그럴 수 있겠다고 이해하고 넘어가자. 셋째, 미래를 잃는다는 불안? 음… 음… 아픈 사람은 남편이고 최악의 경우에도 아내인 작가는 나이도 젊고 건강하고 직업도 있는데 왜 불안할까…? 결정적으로 넷째, 왜? 왜? 왜? 나 자신이 루저가 된 기분이지? 작가는 말했다. 가족의 불행을 함께 겪어야 하는 상황이 나를 디그레이드 (가치 하락)시키는 것 같았다.’ 아, 더 읽기가 힘들었다. 책 속 인물에게 감정이입 안하려고 노력하지만, 육체적 고통과 죽음의 공포 앞에 떨고 있는 말기 암 환자 남편분이 ‘가족 가치 하락의 원흉’으로 꼽히는 거 같아 너무나 짠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 아플 때 내 남편도 이렇게 생각할까? 나 때문에 자기가 루저가 된 것 같고, 나 때문에 우리 가족의 가치가 떨어지는 거 같다고? 그럼 정말 슬플 거 같다.


읽기 힘든 프롤로그를 지나면, 이어지는 글에서 작가분은 ‘한국인의 의식 속 기본 단위는 가족이며, 그래서 나는 속물적 기준으로 배우자를 골라 그와 나를 동급으로 취급받고 싶었다. 개인을 가족 집단과 동일시하는 한국의 현실 때문이었다.’ 라고 한다. 이 일로 인해 작가 홍주현은 삶의 태도가 크게 변했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의 ‘덩어리적’ 집단주의 문화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다.



미국의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집단의 존엄과 존재 이유를 집단적 동일성에 둘 때 그 집단 구성원은 갈등을 견디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공동체 질서를 이루는 토대가 공동체의 동일성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집단 구성원 주류 혹은 다수와 ‘다름’은 그것을 배제하거나 억압하는 방법으로 그 다름이 유발한 갈등을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불편한 상황에 처할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다름이나 갈등을 아예 금기시 한다. (p.63~64)


한국인의 ‘우리’는 연대의 공동체가 아니다. 연대하려면 ‘너’와 ‘나’가 있어야 하는데, 구성원이 ‘우리’ 안에서 분리되지 않은 채 서로 동일시하다 보니 그저 한 덩어리 상태에 가깝다. 존중은커녕 다르다는 건 있을수 없는 일이다. ‘너’와 ‘나’ 사이 경계가 없는 ‘우리’ 속에서 다름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일 뿐만 아니라, ‘비정상’이 되기 쉽다. (p.78)


진짜 내 욕구는 남편의 투병 생활을 책임지지 않으려는 회피였다. 혹여 투병이 부정적 결과로 이어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무척 두려웠다. 위기 상황에 처하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마련이고, 부정적인 생각이 들면 두려운 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남편의 불행을 염려하거나. 혼자될지 모르는 내 처지를 걱정한 데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그때 벌어질 일, 즉 온갖 원망과 비난의 화살 등 결과에 대한 책임을 내가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에 벌벌 떨었다. (중략)

이 고난은 ‘나’에게 생긴 일이란 느낌이 들었다. 이 가족은 내 뜻에 따라, 내 의지로 꾸리지 않았는가. 주인임을 증명하는 최고의 방법은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나는 남편의 투병을 (시댁 식구에 포함된 나로서의) ‘우리’ 일이 아니라 내가 해결해야 할 ‘개인’의 일로 인식했다. (p.107~108)


배려하고 양보해야 할 첫번째 대상은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먼저 배려하고, 자기 에고는 자기 내면의 진짜 욕구에게 양보하는 일이야말로 강요하듯 강조해야 할 일이 아닐까? 타인에 대한 무심함은 대개 자신을 소외하는 데서 비롯하지, 자신을 잘 챙기고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에게 좀처럼 무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p.210)



김희경의 ‘이상한 정상가족’은 아동학대에서 시작하여 한국 사회의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으로 논의가 전개되는데, 홍주현의 ‘환장할 우리가족’은 가족의 간병 문제에서 시작하여 한국 사회의 집단주의를 비판하고 자기 중심성에 기반한 철저한 개인주의를 내세운다.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김희경은 국가의 복지와 적극적 개입, 공동체의 적극적 간섭을 한국식의 폐쇄적 가족주의를 분쇄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한 반면, 홍주현은 위에 말했듯 대화와 토론에 기반한 철저한 개인성의 함양, 공동체를 위한 배려와 양보 보다 자기 자신의 이익와 편안함을 추구하는 적극적 자기중심성을 핵심으로 제시한다. 즉 한국식 가족주의와 집단주의에 대해 두 사람이 제시하는 대안은 완전히, 거의 정반대로 다르다. 개인이 아닌 가족 단위로 바라보고 평가하는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인의 삶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두 작가의 공통점이지만, 국가의 적극적 개입과 사회 시스템적 접근 및 해결을 요구하는 김희경과 달리 홍주현은 공동체의 역할보다 개인의 인식 전환에 방점을 찍는다. 국가의 개입보다 개인의 발전 및 이익 추구를 옹호한다는 점에서 홍주현이 아담 스미스를 인용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워 보인다. 홍주현은 인용 마무리에서 ‘모두가 자기실현을 할 의지와 책임이 있는 평등한 상태에서 각자 자기 능력과 의지에 따라 역할을 맡고 그에 따라 책임을 다하는 개인이 되고, 그 개인의 협력이 연대고 연대로 형성된 것이 공동체다’라고 주장한다. 즉 공동체는 개인의 합으로 존재하며 모든 개인은 평등하기 때문에 배려보다는 각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다 보면 저절로 뛰어난 개인들이 저마다 이기적인 동기에서 출발해 이룩한 행복을 얻게 된다는 논리인데… 음, 난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홍주현의 논리에서 최대의 약점은 ‘모두가 평등하다’는 전제를 현실 세계에 적용시킨다는 점인데 일단 ‘모두가 평등해야 하는 것’ 과 ‘모두가 평등한 것’ 은 같지 않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실은 모두 ‘동등’ 하지 않고, 나는 홍주현의 주장과 달리 더 많은 돌봄이 필요한 (예컨대 그녀의 남편 같은 중증 환자)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상당히 많이 존재하며 어떤 사회의 수준과 행복도는 그런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을 얼마나 케어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평등하지만 운동장은 기울어져 있고 그런 땅 위에서는 모두가 동등한 높이로 서 있지 못한 것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낮은 자리에 서 있는 자들에게 발받침을 제공해주지 않고,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는 전제 하에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도록 짓눌려져 있는 자에게 기득권자와 똑같은 양의 빵과 마이크만 제공하는 것이 올바른 일인가?



홍주현의 이 책은 가족, 집단, 민족 등등의 이름 하에 개인의 개별적 차이를 무화시키고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문화를 비판하는 취지는 좋았으나 그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고작 ‘개인성의 강화’ 라는 인식의 전환 요구 수준에 그치는 것은, 현실의 문제점을 해결하기에는 그 힘이 너무 약하다. ‘생각을 바꾸자’, ‘독서 토론을 하자’ 하는 얘기로는 개호가 필요한 약자들을 사회 안으로 끌어 들어오기도 어렵고, 일단 이런 얘기만으로 사람 생각이 쉽게 바뀌지도 않는다. 나는 언제나 ‘제도가 인식을 만든다’ 고 생각하지 개인들이 생각을 고쳐 먹으면 우리 사회가 저절로 좋아진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리고 약자에 대해 배려하는 것은, 나도 배려라는 말을 굉장히 싫어하는데 그것은 배려가 아니고 성숙한 시민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이기 때문에 배려라는 시혜적 단어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는 거지, 필요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가 나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을 하면 우리 사회가 저절로 좋아질 것이라는 아담 스미스 식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고, 개인이든 가족이든 특정인의 불행과 고통을 ‘개인’의 수준에서 해결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개인주의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는다. 삶의 주체는 개인이지만 그 주체적 개인의 삶이 불행에 빠졌다고 할 때 그 해결은 그 사람 개인의 몫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집단의 몫이어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한번 이상 불행에 빠진다. 그리고 그 때 누군가는 부와 건강과 정신적 여유를 바탕으로 개인의 삶을 자력 구제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더 자주 더 깊이 불행에 빠지는 이들에게는 부도 건강도 정신적 여유도 없고 심지어는 가족도 없는 경우도 많다. 이런 사람들은 외부의, 집단의 힘이 아니고는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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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들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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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무시하게 내 취향인 책이었다. ‘현기증, 감정들’을 그닥 재미있게 읽지 못해 제발트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었는데, 첫 페이지의 풍경 묘사에서부터 내 마음을 완전히 앗아갔다. 카메라로 찍어놓은 듯, 정밀하면서도 감정에 젖어 축축해지지 않는 제발트의 시선은 압권이었다.


디아스포라. 고국을 떠나 흩어진 사람들을 가리키는 그리스어다.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관습과 규율을 지키며 살아가는 유대인을 지칭하던 이 말의 의미는 오늘날 확장되어, 본토를 떠나 타지에서 흩어져 살아가는 이들을 가리키는 단어로 널리 쓰인다. 제발트의 ‘이민자들’은 제목에서 쉽게 유추할 수 있듯 디아스포라 문학이다.


네 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헨리 쎌윈 박사 - 기억은 최후의 것마저 파괴하지 않는가’, ‘파울 베라이터 - 어떤 눈으로도 헤칠 수 없는 안개무리가 있다’,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 내 밀밭은 눈물의 수확이었을 뿐’, ‘막스 페르버 - 날이 어둑해지면 그들이 와서 삶을 찾는다’. 처음부터 엄청나게 마음을 사로잡았고 ‘암브로스 아델바르트’의 절정에 이르면 이게 이 책에서 최고의 소설일 거라고, 이 이상은 나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놀랍게도 ‘막스 페르버’는 그걸 뛰어 넘었다. 헨리 쎌윈 박사는 영국으로 떠나왔고, 암브로스는 스위스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이었고 그의 친우 코즈모는 미국으로 옮겨간 부유한 유대인이었다. 막스 페르버는 영국으로 도망쳐온 유대인이다. 파울 베라이터는 프랑스로 피신했다가 돌아왔으나 결코 온전한 독일인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헨리 쎌윈 박사는 영국으로 이민온 후 이름과 성을 바꾸고 케임브리지 의과 대학을 최상위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는 혈통 세탁에 성공한 것 같았다. 그러나 제1차세계대전 직전 스위스 베른에서 보낸 한 때, 그가 ‘푹 빠졌던’ 등산안내인 요한네스 네겔리와의 만남과 이별은 그에게 깊은 슬픔을 안긴다. 이후 네겔리가 크레바스에 빠져 추락사 하자 헨리는 깊은 우울증에 빠진다. 이후에 만난 아내와 보낸 사치스러운 시절은 우울증의 다른 표현이다. 그는 ‘무엇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는지, 돈 대문인지, 결국 발각되고 만 혈통의 비밀 때문인지, 그저 사랑이 식은 것인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나는 그가 네겔리를 잃은 순간 모든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고 생각한다. 헨리 쎌윈은 베르테르처럼 총으로 머리를 쏘아 자살한다.


연인에 가까운 것으로 짐작되는 또 하나의 관계는 암브로스 아델바르트와 그의 주인 코즈모 쏠로몬의 관계다. 아슬아슬한 곡예 비행과 거침없는 도박으로 명성을 날렸던 코즈모 쏠로몬은 심한 우울증과 정신분열로 고통 받았다. ‘전쟁이 점점 확산되고 파괴의 규모가 미국인들에게도 알려질수록 코즈모는 별로 변한 것도 없는 미국생활에 다시 적응하지 못했다. (중략) 코즈모는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화재와 죽음과 들판에 뻗어 있는 시체 들이 햇살 아래에서 썩어가는 광경을 자기 머릿속에서 본다고 주장했다.’(p.120) 미국에 뿌리내리는 데 실패하고 유럽에서의 참화를 남의 일로 생각하지 못했던 코즈모는 결국 정신병원에서 죽었다. 암브로스는 쏠로몬 집안이 몰락한 후 코즈모의 뒤를 따르듯 심한 우울증에 빠졌고 역시 코즈모가 숨진 정신병원에서 죽음을 맞았다.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상실된 기억을 자기가 만들어낸 환상으로 보충하는 것’(p.129)처럼 보였던 암브로스. 그 비현실적인 기억들은 그에게 무거운 오버코트와 같은 것이었고 그에 짓눌려 암브로스는 허약하고 불안하게 점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내면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두 번의 세계대전 사이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목격한 아름다운 것들과 파괴된 것들, 코즈모의 죽음, 몰락의 뚜렷한 징후들, 그 모든 것이 결코 잊히지 않고 머리 속에 새겨졌다는 것 그 자체가 암브로스를 파괴시켰다. ‘기억이란 때로 일종의 어리석음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머리를 무겁고 어지럽게 한다.’(p.185) 반복해서 전기충격치료를 받았던 암브로스의 선택 역시 자살이나 다름 없다.


또 한 명의 자살자는 교사 파울 베라이터다. 일흔네번째 생일 일주일 후 그는 철로에 누워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1/4만 유대인이었던 그는 고향에서 교사가 되기를 열망했지만 제3제국 치하에서 해임되었고 그의 집안은 붕괴되었다. 놀랍게도 파울은 그 폭력과 굴욕의 와중에 1939년 독일로 돌아와 독일 병사로 입대한다. 끝까지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입증받고 싶었던 파울, 그래서 1935년과 1936년 사이에 있던 일들은 거들떠보고 싶어 하지 않았던 파울. 그는 생애 마지막 십년 동안에야 비로소 당시의 일들을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그는 매일 문서를 들추고 메모하며 생애 마지막 십년을 보냈고, 긴 시간 고통 받다가 결국 자살했다. 그의 실명은 그의 안에 어둠이 퍼져 나가는 것을 상징하며, 파울은 그것을 ‘지극히 평온한 마음으로 받아들렸고, 바야흐로 자신이 접어들게 될 새로운 세계는 이전보다는 좁겠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편안할 것이라고 말했디’.(p.77)



영국 맨체스터로 건너와 화가로 성공한 막스 페르버의 삶은 그의 어머니의 기록과 중첩되어 나타난다. 게르만의 일원으로 아름답고 화목한 가정을 꾸미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루이자(막스의 모친)는 전쟁으로 두 번의 사랑을 모두 잃고 그녀 자신도 죽다 살아난다. 그리고 그 대가처럼 독일의 훈장을 받는다. 유대인이 아닌 게르만 남자와의 사랑을 꿈꾸었던 그녀는 결국 유대인의 관습대로 중매 결혼을 하고 막스를 낳아 기른다. 1941년 막스의 부모인 프리츠와 루이자는 강제수용소로 옮겨져 거기서 죽는다. 막스는 말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지금도 그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였다고 자신할 수는 없네. 하지만 돌이켜보면, 당시의 일들이 내 삶의 구석구석까지 결정해놓았다는 느낌이 들어. (중략) 부모님이 겪은 고통과 나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보려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노력도 많이 했고, 이렇게 은둔생활을 하는 가운데 간혹 영혼의 안정이 유지되는 때도 없지 않았지만, 학창시절에 나를 덮쳤던 그 불행이 내 안에 박아놓은 뿌리는 너무나 깊었네. 그 불행은 거듭 땅을 꿇고 나와 사악한 꽃을 피우고 독기 품은 잎으로 내 머리 위에 천장을 만들었지. 그 천장은 지난 몇년 동안에도 내게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나를 어둠으로 덮었네.’(p.241~242) 막스는 자살이 아닌 폐기종으로 죽었지만, 그를 공업도시 맨체스터의 아뜰리에에 은둔하게 만든 것은 그 뿌리 깊은 불행, 학살당하고 내몰린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기억이었으며, 헨리 쎌윈처럼 사랑하는 누군가를 뒤에 남기고 홀로 떠나왔다는 것에 대한 회한이었다.


제발트의 ‘이민자들’은 화자가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인생에서 만났던 타자들-고향을 잃고 마음의 안식처를 잃고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당하고 내몰렸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점이 ‘이민자들’을 다른 디아스포라 문학과 구별짓는다. 자신의 이야기를 내세우지 않고 역사의 격랑에 휘말렸던 타인들의 이야기를 관찰하고, 채록하고, 답사하고, 사진을 붙여 설명하는 기록문학적 성격. 그리고 놀랍도록 섬세하고 치밀한 풍경 묘사들. 제발트는 이런 서술 방식으로 대상과의 적절한 거리감을 만들고, 다큐멘터리적인 시선을 획득하며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담담한 태도를 유지한다. ‘이민자들’은 분명 비극적인 이야기고, 어둡고 우울한 흑백의 정조를 띄고 있음에도 결코 잔인해지거나 슬픔에 매몰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제발트가 세세하게 그려내는 자연의 풍광들은 마냥 아름답기만 하다. 쇠락해가는 유럽 소도시-왕년에는 흥청거렸으나 이제는 누구도 찾지 않는 몰락의 장소들이 변함없는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자연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면서, 안락함과 부유함이 있었던 유럽의 전성기가 소멸했음을 더 강하게 보여준다. 중간 중간 삽입된 사진들은 기록으로서의 문학, 개인의 삶과 역사의 증언을 동시에 해내는 ‘단편적인 기억의 영상들’(p.229)이다. 이것은 일종의 강박관념이라고 막스 페르버는 말한다. ‘시간은 믿을 만한 기준이 못될뿐더러 영혼의 소음일 뿐’(p.229)이기 때문에, 제발트는 시간에 저항하듯 계속 해서 인물들이 살고 죽은 장소를 찾고 그들이 남긴 글과 사진 들을 모아, 작가 스스로 말하듯 ‘값싼 허구화의 형태’ 바깥의 책으로 엮는다. 이러한 그의 작법 속에서 인물들의 삶은 픽션 속 개인의 우울과 절망에서 한 시대의 무챗빛 풍경이자 지금 눈앞의 고통으로 승화된다. 무엇보다 그 자신도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았기에, 이산자들의 고단한 삶과 뼛속 깊은 우울을 채록해 전수하는데는 제발트만한 인물도 없었을 것이다.





덧붙임) p.15의 사과 종 beauty of bath는 '목욕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영국 서머셋 주의 휴양도시 Bath 에서 유래한 사과 품종이다. 헨리 쎌윈은 이 사과 이름을 통해 영국의 야생적 자연이 갖는 아름다움을 예찬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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