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소설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읽기 위해 나이지리아의 지리와 역사, 정치를 공부했다. 아프리카 대륙의 서부에 자리한 나라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최대의 부국 중 하나다. 이유는 석유 때문이다. 아프리카 제1의 석유 생산국인 나이지리아는 천연가스 또한 풍부하게 갖고 있어 경제적으로 여유롭다. 그러나 그 풍부한 자원이 바로 이 나라의 정치적 혼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민족 및 종교의 복잡성과 얽혀서이다.

나이리지아는 250개가 넘는 다양한 민족이 혼합되어 세워진 국가인데 특히 가장 다수를 차지하는 3부족인 하우사족, 요루바족, 이보족 이 3 부족이 각각 20% 내외로 비슷한 인구 구성비를 차지하고 있어 서로간의 세력 다툼이 팽팽하다. 또한 국토의 구성이 북쪽은 사막지대, 남쪽은 비옥한 평야지대이며, 그에 맞게 북부는 유목민-하우사족이 많고 남부는 농경민-이보족이 많은 형편이다. 종교 또한 달라서 북부-유목민-하우사족은 무슬림, 남부-농경민-이보족은 기독교도가 다수다. 지리적으로도, 생활 유형으로도, 종교로도, 민족 구성으로도 하여튼 뭐 하나 원만히 섞이기가 어려운 나라가 나이지리아인데 지하자원은 풍부하기까지 하니 경제적 이권을 두고 종교와 민족 간의 다툼이 끊일 날이 없다. 뉴스에 종종 등장하는 이슬람 무장단체 ‘보코하람’도 나이지리아에 근거하고 있으며 (IS처럼 서구에 직접적 위협을 덜 가해서 상대적으로 조명이 덜 된 것이지 납치나 살인 같은 악성 범죄는 IS보다 보코하람 쪽이 압도적이다) , 1960년대의 쿠데타 및 이보족 대학살 같은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도 이런 복잡한 사회적 상황 속에 일어난 일들이다.

한 권의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이런 컨텍스트적인 이해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응구기 와 시옹오의 소설 ‘피의 꽃잎들’을 읽기 위해 케냐와 기쿠유족와 마우마우단을 공부했고,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소설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읽기 위해 나이지리아와 이보족과 종교 갈등에 대해 공부했다. 두 나라 모두 영국의 식민지배를 일찍부터, 오래 겪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말런 제임스의 맨부커상 수상작인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메이카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 지리를 샅샅이 공부해야 하고, 킹 오브 맨부커인 살만 루슈디의 걸작 ‘한밤의 아이들’ 역시 인도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의 역사를 낱낱이 알기 전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다. 좋은 책은 책 자체만으로 훌륭한 것이 아니라 그 책을 읽기 위한 준비운동을 하는 것만으로도 독자를 훈련시키고 지적으로 풍부하게 만들며, 특히 좋은 제3세계 문학을 읽는 것은 서구 열강에 가려져 있던 식민지 출신 국가들의 역사와 고통을 환기시키고 독자에게 더 넓고 깊은 시야를 갖게끔 만든다 - 이 세계는 유럽 백인 남자애들이 말랑말랑하게 속삭이는 ‘낭만적 사랑과 그 후의 일상’ 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깨달음 같은 것 말이다.

서론이 길었는데 하여튼 앞부분의 ‘쿠데타’ 언급을 읽고 나서,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나이지리아의 역사를 공부했고 주인공 캄빌리의 가족이 어떤 사회적 위치 속에 있는지를 파악했다. 캄빌리의 아버지는 부유한 계급 출신이 아니었지만 영국 가톨릭 선교사의 눈에 들어 미션 스쿨을 다녔고, 역시 가톨릭의 지원으로 영국 유학을 다녀온 인물이다. 1966년의 쿠데타와 이보족 독립 운동, 이후의 잔인한 대학살이 있던 시기 그는 영국 유학 중이었고 자신의 속한 민족과 계급의 피흘림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전형적인 식민지 지식인이며 우리 나라식으로 말하면 ‘제국대 출신의 친일 조선 유학생’이었던 자다. (이들에 대해 다룬 좋은 책이 최근 출간되었다. 정종현 저 ‘제국대학의 조센징’을 참조하라)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신문사와 식료품 회사를 차리고 거부로 발돋움한다. 정치적으로는 매우 진보적이며 앰네스티가 선정한 시대의 양심으로 알려진 자이지만, 종교적으로는 신실함을 넘어 근본주의적이며 (철저한 가톨릭인 그는 심지어 오순절교회 식의 방언과 부흥회 행사조차 몹시 싫어한다), 가정에서는 폭압적이고 잔인한 아버지다. 요컨대 그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하느님과 같은 존재다. 정치적으로는 이교도들에게 핍박받는 신이며, ‘전능한 하느님’으로서 지역 사회에 군림하고, ‘두려운 하느님’으로서의 지위를 가정 내에서 누리고 있는, 영국에서 돌아온 나이지리아의 하느님이다.

‘사랑’을 빙자한 아버지의 폭력 하에 억압받으며 자라고 있던 오빠 자자, 주인공 캄빌리는 어느 해 크리스마스 찾아 온 고모 이페오마 - 국립대학의 교수이자 과부이며 자유주의자인 그녀 덕분에 대학과 고모 집이 있는 은수카에 며칠 머물게 된다. 성모의 발현을 직관하기 위함이라는 핑계로 떠나온 달콤한 휴가다. 아버지에게 매를 맞아 늘 다치고 자주 아기를 유산하는 엄마를 남겨두고 오긴 했지만 고모 집에서 누리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생활은 자자와 캄빌리를 매혹시키고, 일단 자유의 맛을 보고 난 인간이 누구나 그러하듯 아이들은 에누구의 아버지 집에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한다.

이 소설은 흔히 ‘나이지리아 상류층 소녀의 성장기’라고 이야기된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고 싶은 건, 이 소설에는 ‘성장’ 이 없다는 거다.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주인공 캄빌리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데 사실 이 시점을 주인공 시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캄빌리의 적극적 행동이나 사고의 변화가 소설 속에 드러나지 않는다. 캄빌리는 1인칭 주인공이라기 보다는 1인칭 관찰자에 가깝고 사실 사고의 변화를 겪고 행동하는 인물, 그리하여 소설의 시작과 끝에서 변화와 성장을 성취한 인물은 오빠 자자이지 캄빌리가 아니다. 아버지의 반복되는 학대를 못 이긴 엄마는 홍차에 독을 타서 아버지를 살해하고, 소설 시작부터 엄마를 지켜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아들 자자는 자신이 아버지를 살해했다고 자백하여 감옥으로 끌려간다. 감옥에서 힘든 몇년간을 견디고 정치적 이유로 출감되는 자자는, 많은 신화와 전설과 소설 들에 흔히 등장하는, 아버지-신에 맞서 저항한 아들이며, 아버지를 살해하고 (혹은 살해했다고 천명하고) 아버지의 독점적 지위를 계승(혹은 찬탈)하는 후계자가 된다. 나아가 자자는 고통받는 가족들을 구하고 성모와 같은 어머니의 죄를 대속하여 수감 생활의 고난을 겪고 온몸에 성흔을 지닌 채 부활하는, 예수의 모습으로 소설 끝에서 묘사된다. 즉 구약성서 속의 하느님은 죽고, 성모의 몸에서 태어나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 다시 돌아온 예수의 모습을 성취하는 것으로, 자자의 성장은 완결된다. 이 소설은 자자의 성장기이지 캄빌리의 성장기라고 볼 수는 없다. 캄빌리는 행동하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다. 아버지를 살해하지 않으며, 심지어 아버지를 살해할 의도조차 품지 않는다. 소설 속에 지속적으로 묘사되는 캄빌리는 아버지의 규약을 오빠보다 훨씬 더 충실하게 받아들이고 이행하며 사랑하는 존재다. 제단 앞에 무릎 꿇고 십자가에 입 맞출 때 눈물흘리고, 아버지를 살해한 자자를 때리고 분노하며, 아버지의 사후에도 그를 지속적으로 그리워한다. 캄빌리의 종교는 아버지의 그것처럼 뿌리 깊게 그녀의 영혼을 쥐고 있다. 그녀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아버지는 곧 하느님이다. 꿈 속의 아버지는 하느님의 모습과 중첩되며, 캄빌리가 사랑하게 되는 아마디 신부 역시 하느님의 다른 버전 - 엄격하고 무서운 신으로서의 아버지 반대편에 서 있는 다정하고 자상한 신 버전이다. 캄빌리는 신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고 그것이 그 자체로 옳다는 것, 신은 그 자체로 말미암은 자라는 사실을 의심없이 받아들인다. 캄빌리의 변화는 그녀의 내적 변화와 성장이 아니라 그저 그녀를 둘러싼 ‘상황’의 변화일 뿐이고 따라서 나는 이 소설을 캄빌리의 성장기로 해석하는 것에 반대한다.

이 소설은 굉장히 재미있다. 가독성이 높고 뒷 내용을 궁금하게 만드는 힘이 탁월하다. 십대 소녀가 자기 이야기를 한다는 설정부터 대중성을 획득하기에 좋은 조건이고, 더군다나 감정 이입하기 쉬운 1인칭 시점이라 독자가 몰입하기에 좋다. 인물들은 모두 스테레오 타입이라 이해하기 아주 편하다. 밖에선 존경받지만 집에서는 폭력적인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 순종하며 꼼짝 못하고 당하는 어머니, 아버지에게 저항하는 아들, 움츠린 채 모든 것을 지켜보는 딸. 이 가족과 상반된 집단이 있어야 하므로 존재하는 고모네 가족. 억압적인 아버지와는 다른 다정한 인물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아마디 신부. 이 인물 설정들은 전형적이다 못해 상투적이고 이런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또한 새롭거나 전복적일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이 책은 초보 독자에게도 전혀 어렵지 않다. 이 점 때문에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잘 씌어진 청소년 소설은 될 수 있겠지만 인간과 세계의 복잡성에 대한 심오한 성찰을 전달하는데-즉 훌륭한 성인용 소설이 되는데는 못 미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오직 두 종류의 인간 - 선한 인간과 악한 인간만이 존재하며 내레이터 소녀 캄빌리는 그들을 조용히 관찰하고 그저 가만히 상황에 순종한다. 변화는 남성의 몫이다. 이페오마 고모네의 중심이 둘째이자 외아들인 오비오라였듯 캄빌리네의 중심 또한 아버지였고, 그 다음에는 아들 자자로 넘어간다. 이 소설에서 여성은 주도권이 없고 심지어 남편을 살해할 권리조차도 갖지 못한다 - 아비 살해의 영광은 아들의 몫이다. 캄빌리는 삼종지도를 따라는 한국의 여인네처럼 처음엔 아버지-그 다음엔 자자-마지막은 아마디 신부의 길을 따른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이 책이 '잘 씌어진 청소년 소설'이기는 한 것인지의 의문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은 시작부터 끝까지 그냥 '착한 소녀의 이야기'일 뿐이다.

여러 모로 아쉽지만 작가의 첫 책이라는 점을 감안해 다음 소설까지는 읽어봐야 평가를 제대로 할 수 있지 싶다. 마지막으로 하나 덧붙이자면, 이페오마 고모는 정말 그녀의 오빠-캄빌리의 아버지와는 다른 인물인가? 어떤 방식으로 자식을 키우든, 자식을 바라보며 잘 훈련된 축구 선수들을 바라보는 감독 같은 마음을 갖는다면, 결국은 같은 것 아닌가? 엄격한 아버지 혹은 다정한 어머니, 결국 그들의 피조물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평가하는 신의 두 얼굴일 뿐.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