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 동백 - 이제하 그림 산문집
이제하 지음 / 이야기가있는집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다보면 불현듯 심장이 '툭'하고 떨어져 내리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일부러 찾아 듣는 노래 가수 조영남의 '모란, 동백'.

 

 세월의 더께가 더해질수록 삶의 언저리로 밀려나는 듯한 위기의식때문일까. 아니면 우리네 삶의 본질이야말로 외롭게 변방을 떠돌다 떠돌다 홀로 잠드는 것임을 깨달아 가기때문일까. 그 노래가 ​그낭 좋았다. 들으며 눈물 흘리고 나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심장이 제자리를 찾아들어 간 느낌.

 그동안 신산한 우리 삶을 따스하게 보듬어주고 쓰다듬어 주는 좋은 산문집들을 출판해 온 '이야기가있는집'이 펴낸 이제하의 '모란, 동백'.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조영남의 노래를 떠올렸지만 그 모란 동백과 이 모란 동백이 같은 모란 동백임을 알지 못했다. 그동안 소설가, 시인으로만 알아왔던 이제하가 작사 작곡에 직접 부른 노래가 '모란, 동백'이라니....

 이 책이 작가가 2011년부터 2014년 사이 '페이스 북'에 포스팅한 글과 그림들을 수록한 것임을 알고 또 한 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첫째는 작가 이제하의 실체가 팔방미남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 이삼십 대 시절 소설가, 시인으로 한때 조우했던 작가로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페이지마다 수록된 직접 그린 그림들과 여기저기 엿보이는 음악에 대한 깊이와 재능들은 과히 그가 전방위적 예술가임을 가감없이 드러내 주었다. 어릴 때부터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훌룽한 사람들은 예술가라고 생각했던 예술지상주의자로서 부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둘째는 老작가로서 '페이스 북'을 이용한 대중과의 소통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물론 SNS를 이용하여 대중과의 소통을 시도한 예술가들이 한둘이 아니나, 유명세를 타다가 손가락질을 받은 작가도 있는 터에 이처럼 삶과 예술에 대한 깊이있는 글을 통해 타인과 소통하고 다가가려 했다는 시도와 노고가 대단하고 고맙게 느껴졌다.

 예전에 내게 있어 예술은 저 높은 구름위에 있는 고아하고 숭고한 존재였다. 시궁창 냄새 나고 추레한 우리 삶과는 다른 격조있는 그 무엇! 그러나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가슴으로 온몸으로 삶이 곧 예술임을 깨닫는다. 이 책을 통해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서 기뻤다. 책장을 넘길수록 삶과 예술이 결코 다름이 아님을, 치열하고 진실된 삶의 결과물이 곧 예술임을 작가는 자신의 삶을 통해 이야기한다.

 사라져 간 것들에 대한 애정과 회한, 음악과 그림과 문학에 대한 열정, 정치계와 문학계에 대한 따끔한 일침.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과 삶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느껴지는 글과 그림들.

 ' 예술이고 나발이고 좀 있으면 호박잎이 온통 흐드러질 것 아닌가. 견디자. 제발 견디자. 마음아' (P96)

이 부분이 표지에서는 '호박잎'이 '꽃'으로 바뀌어 있었다. '모란, 동백'이라는 책 제목과 꽃 삽화에 어울리게 바꾸었는지는 모르지만 '호박잎'이 가지는 건강한 삶의 허기가 사라진 것 같아 조금은 아쉬웠다.

 '암자주색의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그 빛깔은, 향과 액을 다 소진시키고 스산한 바람에나 바스라질 듯 휘불리며 그제야 정작 떠들고 싶었던 침묵의 내용을 마냥 서걱대는 늦가을의 포도넝쿨과 그 잎새들을 제풀에 또 상기시킨다. 더 갈 데가 없는 곳에 다다른 빛깔과 품위......' (P78)

거꾸로 매달아 말린 장미에 대해 묘사한 글이다. '더 갈 데가 없는 곳에 다다른 빛깔과 품위'라는 마지막 구절이 가슴을 베고 지나갔다. 나도 더 갈 데가 없는 곳에 다다른 그 순간까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품위를 잃고 싶지 않다. 여기에서의 품위는 허영도 가식도 아니다. 이제하가 노래했듯 비록 세상은 바람불고 고달팠으나 삶을 진정으로 사랑한 인간으로서 의연한 모습으로 나무그늘 아래 고요히 잠들고 싶은 꿈. 그리고 나를 기억해 주는 모란 같고 동백 같은 사람이 있다면 아름답고 좋은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연말이다 신년이다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문득 공허해지고 황망해지는 기분이 들 때, 차분히 마음결을 어루만지고 새로운 힘을 얻고 싶은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이제하의 늘푸른 예술에의 열정과 자유로운 영혼이 우리의 가슴을 녹여주고 밝혀 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다시 듣는 '모란, 동백​'

예전엔 귀로 가슴으로 듣고 느꼈다면 이젠 내가 그 속에 있다.

 덧 없고 바람부는 세상이지만

 활짝 핀 모란 동백 꽃송이 같은 얼굴로

 삶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나의 기꺼운 모습이 그 속에 있다. ​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직필 - 들어 세운 붓
주진 지음 / 고즈넉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직언과 직필

둘은 다른 듯 서로 같다.

입으로 옳고 그름을 기탄없이 말하는 곧은 말, 직언.

입에서 나와 흔적없이 흩어지려는 말을 붓으로 붙들어 사실 그대로를 적어야 하는 직필.

 

 이 둘의 상대는 거의 강자인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긴장감과 무모하리 만치의 큰 용기와 진실을 추구하고 지키려는 양심과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담대함이 필요하다. 특히 공중으로 분해되어 사라져버리는 말과는 달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제 모습을 간직한 채 수많은 사람의 눈과 머리와 가슴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직필이란 행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 자신의 조국 조선이 '법 위에 순과 덕이 지켜지는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바라며 붓을 똑바로 들어세워 진실만을 기록하고 그것을 지키려한 한 사내가 있다.

 

 사내라는 말은 진정 멋지다. 모든 남자가 다 사내인 것은 아니다. 사전적 의미와는 별도로 자신의 신념을 위해 험난한 길을 꿋꿋이 걸어가는 진정한 남자를 사내라고 부르고 싶다. 그래서 사관 민수영은 내게 사내로 다가 왔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진정한 사내였던 것은 아니다. 민수영은 가난한 생원의 자식으로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어렵게 관직을 얻고 사초를 기록하는 사관의 자리에 오른다. 관직 생활에서 그가 곧 깨달은 바는 능력이나 정의감이 아닌 인맥과 줄서기가 출세의 필수조건이라는 것이었다. 뇌물과 접대로 훈구파 대신들의 눈에 든 그는 드디어 조선권력의 정점 한명회의 수족이 된다.

 

 조선의 역사를 더듬어 한명회만한 권력의 화신이 또 있을까. 그의 머릿속과 손끝에서 왕이 만들어지고 사라지고 다시 세워졌다.

 

 만인지상의 자리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킹 메이커 한명회 그리고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의 죽음,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예종의 죽음, 이 죽음의 진실을 기록한 사초를 앞날의 대비책으로 훔쳐 빼돌려 숨긴 민수영.

 

 실록을 수정한 죄값으로 겨우 처형을 면하고 유배를 떠나게 되는 순간부터 민수영의 삶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사라진 사초를 손에 쥐려는 양쪽 진영의 팽팽한 줄다리기, 두 왕의 죽음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한명회와 훈구파 대신들, 죽음의 비밀을 벗기고 신권을 제압하려는 의경세자의 차남 성종과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

 

 그 속에서 민수영은 거듭된 죽음의 위기 속에서 기억을 잃었고 또 그 기억을 찾아가며 마침내 진정한 사관으로 새로 태어나며 올바른 길을 걸어간다. 비록 처음에는 순수하지 못한 의도로 사초를 숨겼지만 '신하로...사관으로...마지막 의무...긍지'를 위해 마지막 호흡을, 진실을 지키기 위한 희생의 제물로 기꺼이 바치며 진짜 사내가 된다.

 

 저자는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파괴적이며 인간을 짐승으로 만들어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시킬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말단사관 민수영부터 꼭짓점인 한명회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구도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심지어 성종과 그의 형 월산대군의 우애마저 뒤흔들어 놓았던 욕망이란 보이지 않는 검은 그림자.

'모두 스스로의 불안에서 비롯된 마음이었다. 우애는 늘 그 자리에 있었고 충의는 먼 발치에서도 변치 않았다.'(P398)

 

 그러나 끝은 달랐다. 욕망의 덫을 헤치고 진정한 사관의 임무를 죽음으로 완성시켰던 민수영. 형제 간의 신뢰를 회복하고, 개인적 복수심보다는 군주가 법으로써 백성을 위하고 다스리는 법치국가를 위해 <경국대전>을 완성시킨 성종. 이들과는 달리 끝끝내 손아귀에 틀어쥔 욕망을 내려놓지 못하고 그것을 지키고자 비굴하게 몸을 낮추는 한명회.

 

 시시각각 어떤 사실도 누구도 믿을 수 없다. 마치 양파를 까듯 한 꺼풀 진실이 벗겨지면 그 속엔 또 숨겨진 비밀이 있다. 주인공들을 둘러 싼 주변 인물들 또한 각각의 비밀을 간직한 무게감으로 작품의 재미를 더하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가슴을 죄어오는 긴장감과 속도감, 서스펜스를 선사한다. 역사를 소재로한 뛰어난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이다.

 

 엄청난 인기몰이를 한 일본의 추리소설보다, 훨씬 심도있는 주제의식과 탄탄한 필력으로 또 다른 작품이 읽고 싶어지는, 작가의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된다

 

 인간이기에 한때 헛된 욕망에 눈 멀 수는 있으나 자신의 과오를 죽을 힘을 다해 바로 잡으려 했던 사내 민수영.

 

 그런 사내들의 땀방울이 있었기에 역사의 수레바퀴는 잠시 헛돌거나 비켜났다가도, 제자리를 찾아 멈추지 않고 면면히 굴러올 수 있었을 것이다.

 

 재미와 감동과 교훈을 모두 얻을 수 있어 참으로 기꺼운 작품

 

 진실을 지키고자 애쓰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소리없이 사라져 갔을

 수많은 민수영을 떠올려 보는 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별을 담은 배 - 제129회 나오키상 수상작
무라야마 유카 지음, 김난주 옮김 / 예문사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우리는 모두 섬이다.

연안에 자그마하게 엎드려 있거나, 망망대해에 우뚝 솟아 있는 개별적 존재들.

끝없이 밀려드는 파도에 제 살이 깎여나가는 고통을 느끼거나, 폭풍전야 검게 부풀어 오르는 바다를 공포스럽게 지켜 볼 때도 우리는 각각 혼자다.

 

 봄날, 달빛이 바다에 온 몸을 밀착시키는 밤, 섬은 외로움에 몸을 떨며 다른 섬을 찾아 먼 수평선을 더듬는다.

 여름의 해풍 속, 강렬한 생명력을 불태우며 피어난 절벽 위 들꽃을 자랑하고 싶어, 섬은 뒤척이며 다른 섬을 찾아 먼 수평선을 더듬는다.

 가을날, 깊어가는 하늘빛 따라 물빛도 짙어지면 뱃고동마저 슬픈 울음같아, 섬은 따라 울며 다른 섬을 찾아 먼 수평선을 더듬는다.

 겨울이 흰날개을 펼쳐 지구를 뒤덮는 날,너무 멀리 떠밀려 온 것 같은 두려움에 섬은 지나 온 발자취를 확인하기 위해, 다른 섬을 찾아 먼 수평선을 더듬는다.

 

 인생의 물결에 흔들리고 밀리며 안간힘을 다해 닻을 내리고 살아보려고 애쓰는 우리는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섬인 것이다. 이처럼 고독한 우리를 하늘의 별로 승화시키고 그 별을 배에 담아 이 섬에서 저 섬으로 건네준다. 그래서 마침내 외로운 섬들은 밤하늘에 무리져 빛나는 은하수가 된다.

 

 인류의 역사가 존재하는 동안 이 임무를 묵묵히 수행해 온 배의 이름은 '가족'이다. 누구에게는 한없이 따스하고 든든한 의지처이지만 , 누구에게는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뜨거운 감자 같은 존재. 그러나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아무리 상처투성이어도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가족의 사랑이고 가족의 힘이다. 이 절대불변의 진리를 별을 담은 배 한 척이 한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노래로 들려준다.

 

 1964년 생, 동갑내기 여류작가 무라야마 유카. 비록 국적은 다르지만 동시대를 살아왔다는 동질감과 우리 세대만이 느낄 수 있는 마음결을 만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읽어 본 책. 나오키상 수상작 <별을 담은 배>. 서로 어긋나고 뒤틀리며 상처를 안고 사는 한가족 삼 대의 역사를 통해 진정한 가족의 의미와 사랑을 아프게 묻고 있다.

 

 목수일을 하는 아버지 시게유키, 그의 두 아내 하루요와 시즈코, 큰 아들 미쓰구, 작은 아들 아키라, 두 번째 아내 시즈코가 데려온 딸 사에, 막내 딸 미키, 조카 사토미. 이 가족들의 숨겨지고 곪은 가족사가 가족 각각의 입장에서 바라봐지고 느껴지고 쓰여졌다. 작가는 어느 한 사람의 편을 들지도 비난하지도 않는다. 여섯 가지 이야기 모두 때론 담담하게 거리를 두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며, 때론 잔인하리만치 진실을 파고 들며 아픔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마치 퍼즐이 맞춰지며 큰 그림이 완성 되듯 각기 다른 단편들이 모여 한가족의 대서사시를 그려냈다.

 

 처음엔 배다른 오누인 줄 알았는데 친오누이였던 아키라와 사에의 뜨거운 사랑. 금단의 사랑이었기에 불나방처럼 자신을 더 내던졌던 사랑. 그 사랑이 더럽거나 역겹게 느껴지지 않고 그 애틋함, 절절 끓는 고통이 그대로 공감 되는 것은 작가의 유려하고 섬세한 문체, 금기마저 보듬는 따뜻한 포용력때문일 것이다.

 

 그런 언니와 오빠의 영향으로 사랑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진실 된 사랑을 하지 못하는 미키, 언제나 이별이 예정 된 사랑을 한다.

 

 가족과 늘 거리를 두고 덤덤한 인생을 살고 있는 중년의 큰 아들 미쓰구는 목을 죄어오는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고자, 밀애에도 빠져보고 농삿일에 매달려보기도 하면서 자아를 조금씩 찾아간다.

 

 미쓰구의 딸 사토미, 소꿉친구를 사랑하지만 이미 그는 사토미의 절친과 연인사이가 됐고, 우정과 질투 사이에서 힘겨운 줄타기를 하며, 친구에게 지울 수 없는 죄를 짓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출발점에 아버지 시게유키가 있다. 전쟁의 아픈 기억을 평생 십자가처럼 지고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온 그.

 '우리는 전쟁을 살았다. 오늘 하루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사람에게 내일도 모레도 계속되는 것이 전쟁이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없었던 시대, 나라를 위하고 천황을 위한다는 기치 아래, 빨간 종이 쪼가리 한 장에 가족과 연인과 생이별을 해야 하는 것이 전쟁이었다. 그 공포. 그 아픔.그 절망.'

(p372)

 '1전 5리, 소집 영장에 뒤이어 도착하는 집합 날짜 통지 엽서의 가격이 졸병의 목숨값이었다.'

 (p377)

 '처음 사람을 죽인 날은 무섭고 두려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며칠이나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시게유키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동료들이 다 그랬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란 길들고 익숙해지는 법, 살인이 점차 아무렇지도 않아졌다.' (p382)

 '죽이고 싶으면 죽여. 내 이름은 야에코가 아니야, 강미주! 강미주! 개만도 못한 짐승은 우리가 아니야, 너희들이야! 이 쪽바리! 왜놈!' (p431)

 시게유키의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 마침내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은 제자리를 찾는다. 그것은 한일 양국 역사의 가장 아프고 뜨겁고 잔인한 접점인 위안부 문제와 닿아있다.

 

 개인의 삶과 역사는 결코 서로 유리되거나 자유로울 수가 없다. 개인의 삶이 응집되어 역사가 되고, 그 역사의 영향력 아래 개인의 삶은 통제되고 결정 지워진다. 한가족이 지닌 흉터를 더듬어 올라가니 그 뿌리엔 역사의 화인이 남긴 시뻘건 상처가 있었다. 번역자의 말처럼 그 화인이 가족 삼대에 카르마로 작용하여 뒤틀린 가족사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일본 소설은 대체로 따스하고 재미있고 그리고 가볍다. 부담없이 읽혀 좋기도 하지만 그래서 또 조금은 싫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기존의 일본 소설이 가진 장점에 인간존재의 아픔과 외로움, 진정한 가족의 의미와 역사의식을 얹어 무게감을 더해 준 가슴 찡한 좋은 책이다.

 

 이 세상에 크기나 모양은 제각각 다르지만 상처가 없는 가족은 없다. 상처가 아무리 쓰라리고 참혹해도 치유력 또한 상처속에 있음을 가슴에 새긴다. 

 

 혼자 울고 있는 섬으로 머물지 말고 '가족'이란 배를 타고 별이 되자. 그 배를 타고 과거의 시간속을 항해하다 보면 내 상처가 보이고 너의 상처도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뿌리가 보인다.

 

 그곳이 바로 '우리'가 되는, 치유의 출발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시, 봄 - 장영희의 열두 달 영미시 선물
장영희 지음, 김점선 그림 / 샘터사 / 2014년 4월
평점 :
품절


 

 故 장영희 교수 님과 김점선 화백 님께 (이하 책의 호칭을 따릅니다)

골목길을 환하게 밝히며 여름의 도래를 알리던 붉은 덩쿨장미도 지고, 장마전선이 오르내리는 여름의 초입길에서 두 분을 불러 봅니다. 마음 속에 다시 봄이 찾아온 듯 속눈썹 끝에는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느껴지고, 온 몸에 새 순이 돋으려는지 기분 좋은 간질거림이 찾아 듭니다.

 

 어린시절부터 예술을 지상에서 가장 숭고하고 멋진 것으로 생각하고 흠모하며 살아왔기에, 문학가 장영희, 화가 김점선은 저에게 가장 닮고 싶은, 비록 도달하지 못했으나 늘 꿈꾸어 보는 롤 모델이며 멋진 스타였으며 존경하는 인생 선배였습니다.

 

 친정어머니와 성함이 같아서 처음 듣는 순간 가슴에 콕 들어와 박혔던 그 이름, 장영희. 평생을 목발을 짚은 장애인의 삶을 살면서도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온 몸으로 삶을 껴안고 사랑했던 분. 그 해맑고 예쁜 미소 속에 느껴지는 당당함을 사모했습니다. 시를 사랑하고 한때 시를 써본 적이 있으면서도 번역시를 좋아하지 않던 제가 당신이 번역한 시들을 읽으며 영미(英美)시의 품격과 문학성과 깊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소탈한 웃음과 털털함이 매력적인 김점선. 처음 그림을 접했을 때 속으로 웃고 말았습니다. 선머슴애 같은 외모와는 달리 그림이 너무 따스하고 예쁘고 간질거려서요. 도저히 화가의 이미지와 그림의 느낌이 일치가 되지 않아 그냥 웃음이 났답니다. 그런데 찬찬히 들여다보니 아니었습니다. 그림 속엔 영락없는 당신의 모습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림 속에 등장한 말과 오리와 소녀와 꽃들이 모두 당신의 얼굴이었답니다. 장난기 가득하기도 하고 유쾌하고 그러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긍정의 메시지.

 

 삶의 부조리에 채이고 지칠 때, 허방을 밟아 한없이  추락하는 느낌이 들 때, 그 그림들을 보면 차갑던 혈관이 따뜻해지는 느낌, 구멍 숭숭 뚫린 가슴이 메워지는 느낌, 그리고 봄날 눈부신 들판처럼 마음이 환해져 한없이 좋았답니다.

 

 하지만 장영희의 시보다도 김점선의 그림보다도 더 보기좋고 부러운 것이 있었으니, 바로 두 분의 꼭 가시버시 같아 보이는 우정이었습니다. 한없이 여성스러운 예쁜 미소를 짓는 한 사람과 사내대장부 같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한 사람. 장영희의 여성성과 김점선의 남성성이 조화를 이루어 그리도 어여쁜 인생길 좋은 동무가 될 수 있었나 봅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시와 그림의 콜라보레이션을 멋지게 보여 준 두 분. 예술가의 길을 가는 동지애로, 서로의 아픔을 보듬는 인간애로, 때론 당기고 때론 밀어주고 때론 나란히 함께 길을 걸어간 두 분의 뒷모습은 결코 쓸쓸하지 않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일 년 열두 달 내내 계절에 어울리는 시와 따스하고 밝은 그림을 접하며, 봄꽃같이 살라고 남겨주신 선물 같은 책. 그 속에서 인생은 유한하나 덧없지 않으며, 삶의 무게는 힘겹지만 슬플만치 아름답다는 것, 그래서 우리 모두는 아침의 빛나는 태양에서 힘을 얻고, 밤의 차분한 달에게서 안식을 얻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하늘나라에서도 함께 앉아 웃고 계실 두 분을 위해 시 한 편,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6월이 오면, 나는 온 종일

  사랑하는 이와 향긋한 건초 속에 앉아

  미풍 부는 하늘 높은 곳 흰구름이 지은

  햇빛 찬란한 궁전들을 바라보리라.

 

  그녀는 노래하고, 난 그녀 위해 노래 만들고,

  온 종일 아름다운 시 읽는다네.

  건초더미 우리집에 남몰래 누워있으면

  아, 인생은 아름다워라 6월이 오면.

 

           인생은 아름다워라! 6월이 오면

                  -로버트 S 브리지스-

 

 두 분 지금 저기 흰구름 궁전 속에 나란히 앉아 계신 거죠?

근심 걱정도 욕심도 다 내려놓고 건초더미 위에 누워 시만 읽어도 인생이 아름다운 6월!

 

 그 6월의 찬란한 햇빛 속에서 두 분 행복하시기를-

 

 <다시, 봄>을 읽으며 저 또한 많이 행복했음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로버트 프로스트가 <자작나무>에서 노래했듯이

'세상은 사랑하기 딱 좋은 곳'

 

 이 세상 떠나는 날까지 더 많이, 사랑하다, 가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핀란드 슬로우 라이프 - 천천히, 조금씩, 다 같이 행복을 찾는 사람들
나유리.미셸 램블린 지음 / 미래의창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이상향'을 가슴 깊숙히 품고 산다. 그곳이 실존하지 않고 마음으로 짓고 허무는 신기루이든 언젠가는 살고싶은 지도상의 한 점이든, 어깨 위 삶의 무게가 고달프고 무겁게 느껴질 때마다 우리는 이상향을 떠올리며 잠깐의 안도와 휴식을 맛본다.

 

 어린시절엔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사는 스위스가, 청춘 시절엔 예술가들의 도시 프랑스 파리가, 불혹의 나이엔 쏟아지는 별을 볼 수 있는 사하라 사막이 이상향이었다.

 

 그리고 작년부터 나의 이상향은 핀란드로 고정되어 버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고나서이다. 소설 속 주인공이 과거의 매듭을 풀기위해 옛친구를 찾아간 곳 핀란드. 끝없이 눈이 내리는 삼나무 숲에 둘러싸인 호수가 있고, 물결이 뱃전에 찰랑대는 소리를 들으며 벽난로가 있는 거실에 앉아 있노라면, 순간이 영원같고 영원히 순간일 것 같은 느낌. 그곳에 앉아 지나온 생을 다 내려놓고 담담하게 삶의 비의를 깨달을 수도 있으리라는 동경.

 

 이처럼 추상적인 감각으로만 다가왔던 핀란드가 지구 반대편에 엄연히 존재하는 나라, 그것도 인간 삶의 본질이자 최고의 목표인 행복지수가 늘 상위를 차지하는 복지국가 핀란드로 구체적인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

 

 한국인 아내와 스위스 태생이며 다국적자인 남편이 함께 들려주는 핀란드 사람의 행복공식. 각기 다른 문화환경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두 사람이기에 누구보다 열린 마음과 다채로운 프리즘을 통해, 객관적이고 다양하게 핀란드 사람들의 삶을 공유하고 공감하고 분석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들이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살았던 7여 년 간의 체험을 통해 얻어낸 핀란드의 행복공식은 바로 '슬로우 라이프'였다.

 

 지구상의 최북단에 위치한 도시 헬싱키. 매서운 추위와 높은 물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에서 가치와 행복을 추구하는 핀란드 사람들. 그들의 삶을 공예·디자인과 철학을 전공한 부부의 시선과 직접 경험한 에피소드를 통해 녹여낸 책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선정한 국가별 웰빙 비교 기준이 되는 '주거, 소득, 일자리, 공동생활, 교육환경, 행정, 건강, 삶에 대한 만족, 치안, 일과 삶의 균형'등의 요소를 키워드로 핀란드 사람들의 실제 삶의 모습을 생동감 넘치는 사진들과 함께 펼쳐보인 실용적인 책.

 

 뜬구름 잡기 식의 지루한 이론서도 아니며 핀란드의 국가정책을 연구한 보고서도 아니다. 평범한 헬싱키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을 통해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흥미롭고 실감나게 보여준다.

 

 일 년에 네 번 열리는 레스토랑 데이를 통해 '누구나 어디에서든지' 일일 요리사가 되어 음식으로 서로 소통하는 행복을 맛본다.

자연 속의 도시 헬싱키에는 농업을 통해 자연과 교감하고 생산자와 소비자의 역할을 겸함으로써 즐거움과 행복감을 얻는 것은 물론이고 좀 더 의식적인 행동을 할 수 있게 되는 도시농부들이 넘쳐난다.

핀란드 역시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나라로서 대두된 여러 가지 문제들을 로뿌끼리(마지막 질주)라는 노인 공동체를 통해 성공적으로 해결했다. 이곳에서 노인들은 다양한 활동을 통해 새로운 삶의 활력을 찾고 소중한 우정을 키워나간다.

교육강국 핀란드, 매년 국제학업성취도 평가에서 최고의 성적을 기록하기에 핀란드식 교육방법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경쟁에서 답을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한의 재량권을 가진 교사들이 학생의 눈높이에 맞추어 한 명 한 명을 개별적으로 존중하면서도 협동적인 사고를 키워주려고 애쓴다. '나만 잘하면, 내 자식만 잘하면'되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함께 가자, 그러면 더 행복하다'라고 말한다.

 

 이 외에도 핀란드 사람들의 주거, 소비형태, 문화창조, 동물복지, 식생활, 육아, 양성평등, 핀란드 디자인, 창업 드림, 이방인의 삶에 이르기까지, 타인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의 삶을 통제하며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핀란드 사람들의 아름다운 삶의 면모를 소개하고 있다.

 

 한 인간의 삶의 질은 그 사람의 의식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물질이 곧 행복'이라는 의식을 주로 갖고 있기에, 원하는 만큼의 물질을 가질 때까지 앞만 보고 빠르게 달려간다. 그 목표가 달성되면 더 많은 물질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을 움켜잡을 때까지 오늘의 행복은 훗날로 유보된다. 여기에 비해 핀란드 사람들은 심리적 만족감을 행복의 중요 조건으로 여긴다. 자신의 삶에 대해 여유를 가지고 소소한 일상에서 가치를 발견하며, 자신만의 삶의 템포로 만족감을 느끼는 나라. 상식이 통하며 정의롭고 양심이 살아 있으며 기본예의가 있는 나라. 그래서 저자는 한마디로 핀란드의 매력을 이렇게 정의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나라'

 

 사람이 사람을 존중하거나 포용할 줄 모르고 오로지 자신이나 가족만 잘 살면 되는 무한 이기주의, 천박한 황금만능주의에 눈 멀어 영혼이 가난한 사람들, 공중도덕이나 기본예의가 땅에 떨어진지는 오래이며 비양심적이고 부정부패한 정치인들이 판을 치는 나라. 이것들이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의 자화상은 아닌지 되짚어 보자.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앞만 바라보고 내달리며 흘려보내는 오늘이란 날은 두 번 다시 주어지지 않는다

 

 바로 현재의 소소한 삶 속에서 행복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 보자

 

 나도, 우리도, 자기만의 숨겨진 행복공식이 있다

 

 이 책이, 그 공식을 찾아가는 북극성이 되어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