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필 - 들어 세운 붓
주진 지음 / 고즈넉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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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언과 직필

둘은 다른 듯 서로 같다.

입으로 옳고 그름을 기탄없이 말하는 곧은 말, 직언.

입에서 나와 흔적없이 흩어지려는 말을 붓으로 붙들어 사실 그대로를 적어야 하는 직필.

 

 이 둘의 상대는 거의 강자인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긴장감과 무모하리 만치의 큰 용기와 진실을 추구하고 지키려는 양심과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담대함이 필요하다. 특히 공중으로 분해되어 사라져버리는 말과는 달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제 모습을 간직한 채 수많은 사람의 눈과 머리와 가슴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직필이란 행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 자신의 조국 조선이 '법 위에 순과 덕이 지켜지는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바라며 붓을 똑바로 들어세워 진실만을 기록하고 그것을 지키려한 한 사내가 있다.

 

 사내라는 말은 진정 멋지다. 모든 남자가 다 사내인 것은 아니다. 사전적 의미와는 별도로 자신의 신념을 위해 험난한 길을 꿋꿋이 걸어가는 진정한 남자를 사내라고 부르고 싶다. 그래서 사관 민수영은 내게 사내로 다가 왔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진정한 사내였던 것은 아니다. 민수영은 가난한 생원의 자식으로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어렵게 관직을 얻고 사초를 기록하는 사관의 자리에 오른다. 관직 생활에서 그가 곧 깨달은 바는 능력이나 정의감이 아닌 인맥과 줄서기가 출세의 필수조건이라는 것이었다. 뇌물과 접대로 훈구파 대신들의 눈에 든 그는 드디어 조선권력의 정점 한명회의 수족이 된다.

 

 조선의 역사를 더듬어 한명회만한 권력의 화신이 또 있을까. 그의 머릿속과 손끝에서 왕이 만들어지고 사라지고 다시 세워졌다.

 

 만인지상의 자리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킹 메이커 한명회 그리고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의 죽음,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예종의 죽음, 이 죽음의 진실을 기록한 사초를 앞날의 대비책으로 훔쳐 빼돌려 숨긴 민수영.

 

 실록을 수정한 죄값으로 겨우 처형을 면하고 유배를 떠나게 되는 순간부터 민수영의 삶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사라진 사초를 손에 쥐려는 양쪽 진영의 팽팽한 줄다리기, 두 왕의 죽음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한명회와 훈구파 대신들, 죽음의 비밀을 벗기고 신권을 제압하려는 의경세자의 차남 성종과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

 

 그 속에서 민수영은 거듭된 죽음의 위기 속에서 기억을 잃었고 또 그 기억을 찾아가며 마침내 진정한 사관으로 새로 태어나며 올바른 길을 걸어간다. 비록 처음에는 순수하지 못한 의도로 사초를 숨겼지만 '신하로...사관으로...마지막 의무...긍지'를 위해 마지막 호흡을, 진실을 지키기 위한 희생의 제물로 기꺼이 바치며 진짜 사내가 된다.

 

 저자는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파괴적이며 인간을 짐승으로 만들어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시킬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말단사관 민수영부터 꼭짓점인 한명회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구도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심지어 성종과 그의 형 월산대군의 우애마저 뒤흔들어 놓았던 욕망이란 보이지 않는 검은 그림자.

'모두 스스로의 불안에서 비롯된 마음이었다. 우애는 늘 그 자리에 있었고 충의는 먼 발치에서도 변치 않았다.'(P398)

 

 그러나 끝은 달랐다. 욕망의 덫을 헤치고 진정한 사관의 임무를 죽음으로 완성시켰던 민수영. 형제 간의 신뢰를 회복하고, 개인적 복수심보다는 군주가 법으로써 백성을 위하고 다스리는 법치국가를 위해 <경국대전>을 완성시킨 성종. 이들과는 달리 끝끝내 손아귀에 틀어쥔 욕망을 내려놓지 못하고 그것을 지키고자 비굴하게 몸을 낮추는 한명회.

 

 시시각각 어떤 사실도 누구도 믿을 수 없다. 마치 양파를 까듯 한 꺼풀 진실이 벗겨지면 그 속엔 또 숨겨진 비밀이 있다. 주인공들을 둘러 싼 주변 인물들 또한 각각의 비밀을 간직한 무게감으로 작품의 재미를 더하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가슴을 죄어오는 긴장감과 속도감, 서스펜스를 선사한다. 역사를 소재로한 뛰어난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이다.

 

 엄청난 인기몰이를 한 일본의 추리소설보다, 훨씬 심도있는 주제의식과 탄탄한 필력으로 또 다른 작품이 읽고 싶어지는, 작가의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된다

 

 인간이기에 한때 헛된 욕망에 눈 멀 수는 있으나 자신의 과오를 죽을 힘을 다해 바로 잡으려 했던 사내 민수영.

 

 그런 사내들의 땀방울이 있었기에 역사의 수레바퀴는 잠시 헛돌거나 비켜났다가도, 제자리를 찾아 멈추지 않고 면면히 굴러올 수 있었을 것이다.

 

 재미와 감동과 교훈을 모두 얻을 수 있어 참으로 기꺼운 작품

 

 진실을 지키고자 애쓰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소리없이 사라져 갔을

 수많은 민수영을 떠올려 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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