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 동백 - 이제하 그림 산문집
이제하 지음 / 이야기가있는집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다보면 불현듯 심장이 '툭'하고 떨어져 내리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일부러 찾아 듣는 노래 가수 조영남의 '모란, 동백'.

 

 세월의 더께가 더해질수록 삶의 언저리로 밀려나는 듯한 위기의식때문일까. 아니면 우리네 삶의 본질이야말로 외롭게 변방을 떠돌다 떠돌다 홀로 잠드는 것임을 깨달아 가기때문일까. 그 노래가 ​그낭 좋았다. 들으며 눈물 흘리고 나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심장이 제자리를 찾아들어 간 느낌.

 그동안 신산한 우리 삶을 따스하게 보듬어주고 쓰다듬어 주는 좋은 산문집들을 출판해 온 '이야기가있는집'이 펴낸 이제하의 '모란, 동백'.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조영남의 노래를 떠올렸지만 그 모란 동백과 이 모란 동백이 같은 모란 동백임을 알지 못했다. 그동안 소설가, 시인으로만 알아왔던 이제하가 작사 작곡에 직접 부른 노래가 '모란, 동백'이라니....

 이 책이 작가가 2011년부터 2014년 사이 '페이스 북'에 포스팅한 글과 그림들을 수록한 것임을 알고 또 한 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첫째는 작가 이제하의 실체가 팔방미남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 이삼십 대 시절 소설가, 시인으로 한때 조우했던 작가로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페이지마다 수록된 직접 그린 그림들과 여기저기 엿보이는 음악에 대한 깊이와 재능들은 과히 그가 전방위적 예술가임을 가감없이 드러내 주었다. 어릴 때부터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훌룽한 사람들은 예술가라고 생각했던 예술지상주의자로서 부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둘째는 老작가로서 '페이스 북'을 이용한 대중과의 소통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물론 SNS를 이용하여 대중과의 소통을 시도한 예술가들이 한둘이 아니나, 유명세를 타다가 손가락질을 받은 작가도 있는 터에 이처럼 삶과 예술에 대한 깊이있는 글을 통해 타인과 소통하고 다가가려 했다는 시도와 노고가 대단하고 고맙게 느껴졌다.

 예전에 내게 있어 예술은 저 높은 구름위에 있는 고아하고 숭고한 존재였다. 시궁창 냄새 나고 추레한 우리 삶과는 다른 격조있는 그 무엇! 그러나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가슴으로 온몸으로 삶이 곧 예술임을 깨닫는다. 이 책을 통해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서 기뻤다. 책장을 넘길수록 삶과 예술이 결코 다름이 아님을, 치열하고 진실된 삶의 결과물이 곧 예술임을 작가는 자신의 삶을 통해 이야기한다.

 사라져 간 것들에 대한 애정과 회한, 음악과 그림과 문학에 대한 열정, 정치계와 문학계에 대한 따끔한 일침.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과 삶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느껴지는 글과 그림들.

 ' 예술이고 나발이고 좀 있으면 호박잎이 온통 흐드러질 것 아닌가. 견디자. 제발 견디자. 마음아' (P96)

이 부분이 표지에서는 '호박잎'이 '꽃'으로 바뀌어 있었다. '모란, 동백'이라는 책 제목과 꽃 삽화에 어울리게 바꾸었는지는 모르지만 '호박잎'이 가지는 건강한 삶의 허기가 사라진 것 같아 조금은 아쉬웠다.

 '암자주색의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그 빛깔은, 향과 액을 다 소진시키고 스산한 바람에나 바스라질 듯 휘불리며 그제야 정작 떠들고 싶었던 침묵의 내용을 마냥 서걱대는 늦가을의 포도넝쿨과 그 잎새들을 제풀에 또 상기시킨다. 더 갈 데가 없는 곳에 다다른 빛깔과 품위......' (P78)

거꾸로 매달아 말린 장미에 대해 묘사한 글이다. '더 갈 데가 없는 곳에 다다른 빛깔과 품위'라는 마지막 구절이 가슴을 베고 지나갔다. 나도 더 갈 데가 없는 곳에 다다른 그 순간까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품위를 잃고 싶지 않다. 여기에서의 품위는 허영도 가식도 아니다. 이제하가 노래했듯 비록 세상은 바람불고 고달팠으나 삶을 진정으로 사랑한 인간으로서 의연한 모습으로 나무그늘 아래 고요히 잠들고 싶은 꿈. 그리고 나를 기억해 주는 모란 같고 동백 같은 사람이 있다면 아름답고 좋은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연말이다 신년이다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문득 공허해지고 황망해지는 기분이 들 때, 차분히 마음결을 어루만지고 새로운 힘을 얻고 싶은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이제하의 늘푸른 예술에의 열정과 자유로운 영혼이 우리의 가슴을 녹여주고 밝혀 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다시 듣는 '모란, 동백​'

예전엔 귀로 가슴으로 듣고 느꼈다면 이젠 내가 그 속에 있다.

 덧 없고 바람부는 세상이지만

 활짝 핀 모란 동백 꽃송이 같은 얼굴로

 삶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나의 기꺼운 모습이 그 속에 있다. ​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