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담은 배 - 제129회 나오키상 수상작
무라야마 유카 지음, 김난주 옮김 / 예문사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우리는 모두 섬이다.

연안에 자그마하게 엎드려 있거나, 망망대해에 우뚝 솟아 있는 개별적 존재들.

끝없이 밀려드는 파도에 제 살이 깎여나가는 고통을 느끼거나, 폭풍전야 검게 부풀어 오르는 바다를 공포스럽게 지켜 볼 때도 우리는 각각 혼자다.

 

 봄날, 달빛이 바다에 온 몸을 밀착시키는 밤, 섬은 외로움에 몸을 떨며 다른 섬을 찾아 먼 수평선을 더듬는다.

 여름의 해풍 속, 강렬한 생명력을 불태우며 피어난 절벽 위 들꽃을 자랑하고 싶어, 섬은 뒤척이며 다른 섬을 찾아 먼 수평선을 더듬는다.

 가을날, 깊어가는 하늘빛 따라 물빛도 짙어지면 뱃고동마저 슬픈 울음같아, 섬은 따라 울며 다른 섬을 찾아 먼 수평선을 더듬는다.

 겨울이 흰날개을 펼쳐 지구를 뒤덮는 날,너무 멀리 떠밀려 온 것 같은 두려움에 섬은 지나 온 발자취를 확인하기 위해, 다른 섬을 찾아 먼 수평선을 더듬는다.

 

 인생의 물결에 흔들리고 밀리며 안간힘을 다해 닻을 내리고 살아보려고 애쓰는 우리는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섬인 것이다. 이처럼 고독한 우리를 하늘의 별로 승화시키고 그 별을 배에 담아 이 섬에서 저 섬으로 건네준다. 그래서 마침내 외로운 섬들은 밤하늘에 무리져 빛나는 은하수가 된다.

 

 인류의 역사가 존재하는 동안 이 임무를 묵묵히 수행해 온 배의 이름은 '가족'이다. 누구에게는 한없이 따스하고 든든한 의지처이지만 , 누구에게는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뜨거운 감자 같은 존재. 그러나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아무리 상처투성이어도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가족의 사랑이고 가족의 힘이다. 이 절대불변의 진리를 별을 담은 배 한 척이 한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노래로 들려준다.

 

 1964년 생, 동갑내기 여류작가 무라야마 유카. 비록 국적은 다르지만 동시대를 살아왔다는 동질감과 우리 세대만이 느낄 수 있는 마음결을 만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읽어 본 책. 나오키상 수상작 <별을 담은 배>. 서로 어긋나고 뒤틀리며 상처를 안고 사는 한가족 삼 대의 역사를 통해 진정한 가족의 의미와 사랑을 아프게 묻고 있다.

 

 목수일을 하는 아버지 시게유키, 그의 두 아내 하루요와 시즈코, 큰 아들 미쓰구, 작은 아들 아키라, 두 번째 아내 시즈코가 데려온 딸 사에, 막내 딸 미키, 조카 사토미. 이 가족들의 숨겨지고 곪은 가족사가 가족 각각의 입장에서 바라봐지고 느껴지고 쓰여졌다. 작가는 어느 한 사람의 편을 들지도 비난하지도 않는다. 여섯 가지 이야기 모두 때론 담담하게 거리를 두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며, 때론 잔인하리만치 진실을 파고 들며 아픔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마치 퍼즐이 맞춰지며 큰 그림이 완성 되듯 각기 다른 단편들이 모여 한가족의 대서사시를 그려냈다.

 

 처음엔 배다른 오누인 줄 알았는데 친오누이였던 아키라와 사에의 뜨거운 사랑. 금단의 사랑이었기에 불나방처럼 자신을 더 내던졌던 사랑. 그 사랑이 더럽거나 역겹게 느껴지지 않고 그 애틋함, 절절 끓는 고통이 그대로 공감 되는 것은 작가의 유려하고 섬세한 문체, 금기마저 보듬는 따뜻한 포용력때문일 것이다.

 

 그런 언니와 오빠의 영향으로 사랑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진실 된 사랑을 하지 못하는 미키, 언제나 이별이 예정 된 사랑을 한다.

 

 가족과 늘 거리를 두고 덤덤한 인생을 살고 있는 중년의 큰 아들 미쓰구는 목을 죄어오는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고자, 밀애에도 빠져보고 농삿일에 매달려보기도 하면서 자아를 조금씩 찾아간다.

 

 미쓰구의 딸 사토미, 소꿉친구를 사랑하지만 이미 그는 사토미의 절친과 연인사이가 됐고, 우정과 질투 사이에서 힘겨운 줄타기를 하며, 친구에게 지울 수 없는 죄를 짓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출발점에 아버지 시게유키가 있다. 전쟁의 아픈 기억을 평생 십자가처럼 지고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온 그.

 '우리는 전쟁을 살았다. 오늘 하루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사람에게 내일도 모레도 계속되는 것이 전쟁이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없었던 시대, 나라를 위하고 천황을 위한다는 기치 아래, 빨간 종이 쪼가리 한 장에 가족과 연인과 생이별을 해야 하는 것이 전쟁이었다. 그 공포. 그 아픔.그 절망.'

(p372)

 '1전 5리, 소집 영장에 뒤이어 도착하는 집합 날짜 통지 엽서의 가격이 졸병의 목숨값이었다.'

 (p377)

 '처음 사람을 죽인 날은 무섭고 두려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며칠이나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시게유키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동료들이 다 그랬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란 길들고 익숙해지는 법, 살인이 점차 아무렇지도 않아졌다.' (p382)

 '죽이고 싶으면 죽여. 내 이름은 야에코가 아니야, 강미주! 강미주! 개만도 못한 짐승은 우리가 아니야, 너희들이야! 이 쪽바리! 왜놈!' (p431)

 시게유키의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 마침내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은 제자리를 찾는다. 그것은 한일 양국 역사의 가장 아프고 뜨겁고 잔인한 접점인 위안부 문제와 닿아있다.

 

 개인의 삶과 역사는 결코 서로 유리되거나 자유로울 수가 없다. 개인의 삶이 응집되어 역사가 되고, 그 역사의 영향력 아래 개인의 삶은 통제되고 결정 지워진다. 한가족이 지닌 흉터를 더듬어 올라가니 그 뿌리엔 역사의 화인이 남긴 시뻘건 상처가 있었다. 번역자의 말처럼 그 화인이 가족 삼대에 카르마로 작용하여 뒤틀린 가족사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일본 소설은 대체로 따스하고 재미있고 그리고 가볍다. 부담없이 읽혀 좋기도 하지만 그래서 또 조금은 싫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기존의 일본 소설이 가진 장점에 인간존재의 아픔과 외로움, 진정한 가족의 의미와 역사의식을 얹어 무게감을 더해 준 가슴 찡한 좋은 책이다.

 

 이 세상에 크기나 모양은 제각각 다르지만 상처가 없는 가족은 없다. 상처가 아무리 쓰라리고 참혹해도 치유력 또한 상처속에 있음을 가슴에 새긴다. 

 

 혼자 울고 있는 섬으로 머물지 말고 '가족'이란 배를 타고 별이 되자. 그 배를 타고 과거의 시간속을 항해하다 보면 내 상처가 보이고 너의 상처도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뿌리가 보인다.

 

 그곳이 바로 '우리'가 되는, 치유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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