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의 눈 문학과지성 시인선 193
마종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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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에는 여의도에 홍수가 졌다.
시범아파트도 없고 국회도 없었을 때
나는 지하 3호실에서 문초를 받았다.
군 인사법 94조가 아직도 있는지 모르지만
조서를 쓰던 분은 말이 거세고 손이 컸다.

그해 여름 내내 나는 섬을 생각했다.
수갑을 차고 굴비처럼 한 줄로 묶인 채
아스팔트 녹아나는 영등포 길로 끌려가면서
세상에서 가장 심심한 작은 섬 하나 생각했었다.
그 언덕바지 양지에게 들풀이 되어 살고 싶었다.

곰팡이 냄새 심하던 철창의 감방은 좁고 무더웠다.
보리밥 한 덩어리 시끄러운 취침 점호를 받으면서도
깊은 밤이 되면 감방을 탈출하는 꿈을 꾸었다.
시끄러운 물새도 없고 꽃도 피지 않는 섬.

바다는 물살이 잔잔한 초록색과 은색이었다.
군의관 계급장도 빼앗기고 수염은 꺼칠하게 자라고
자살 방지라고 혁대도 구두끈도 다 빼앗긴 채
곤욕으로 무거운 20대의 몸과 발을 끌면서
나는 그 바다에 누워 눈감고 세월을 보내고 싶었다.

면회 온 친구들이 내 몰골에 놀라서 울고 나갈 때,
동지여, 지지 말고 영웅이 되라고 충고해줄 때,
탈출과 망명의 비밀을 입 안 깊숙이 감추고
나는 기어코 그 섬에 가리라고 결심했었다.
이기고 지는 것이 없는 섬, 영웅이 없는 그 섬.

드디어 석방이 되고 앞뒤 없이 나는 우선 떠났다.
그러나 도착한 곳이 내 섬이 아닌 것을 알았을 때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나는 부양 가족이 있었다.
오래 전, 그 여름 내내 매일 보았던 신기한 섬.
나는 아직도 자주 꿈꾼다. 그 조용한 섬의 미소,
어디쯤에서 떠다니고 있을 그 푸근한 섬의 눈물을. 

---

 방문객

무거운 문을 여니까
겨울이 와 있었다.
사방에서는 반가운 눈이 내리고
눈송이 사이의 바람들은
빈 나무를 목숨처럼 감싸안았다.
우리들의 인연도 그렇게 왔다.

눈 덮인 흰 나무들이 서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복잡하고 질긴 길은 지워지고
모든 바다는 해안으로 돌아가고
가볍게 떠올랐던 하늘이
천천히 내려와 땅이 되었다.
 
방문객은 그러나, 언제나 떠난다.
그대가 전하는 평화를
빈 두 손으로 내가 받는다

마종기, <이슬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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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5
프란츠 파농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04년 8월
구판절판


프란츠파농(Franz Fanon, 1925~1961) 프란츠 파농은 1925년 서인도제도의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섬에서 흑인으로 태어났다. 제2차 대전 중 전쟁에 지원하여 각지에서 파시즘 세력과의 전투에 참여했던 파농은 전후 프랑스 리용대학에서 정신병리학을 전공하여 학위를 취득했다. 1952년 파농은 그의 유명한 저작 '검은피부 하얀가면'을 출간하고 1953년 11월에는 알제리의 블리다 주앙빌 정신병원으로 부임하여 근무했다. 그러나 다음해 알제리 독립전쟁이 발발하면서 파농의 인생은 결정적인 전기를 맞이했다. 파농은 전쟁 초기에는 주로 비밀리에 민족해방전선(FLN)의 활동을 지원했지만 1957년 이후에는 병원을 그만두고 전면적으로 FLN에 몸을 던졌다. 파농은 그 후 FLN의 기관지 '엘 무자히드'에 정력적으로 기고하는 등 알제리 혁명의 대변인 역할을 수행했고, 1960년에는 임시혁명정부에 의해서 가나 대사에 임명되어 활동했다. 1961년에 백혈병과 싸우면서도 이 책을 10주 만에 집필했던 그는 이 책이 간행되고 난 며칠 뒤인 1961년 12월 6일, 36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앞날개쪽

'검은 피부, 하연 가면'에서 파농은 이미 인종차별을,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문화의 지배에 결부시키고 있었다. 인종차별은 우연한 현상이나 심리적 변덕이 아니라 식민지에 만연된 억압체제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지배문화에 의한 억압, 즉 공동체와 정치와 문화만이 아니라 심리상태에도 타격을 주는 억압의 결과를 명백히 밝히지 않는다면 인종차별과의 투쟁은 헛된 싸움이었다. -13쪽

이 분할된 세계, 둘로 양단된 이 세계에는 서로 다른 두 인종이 산다. 식민지 상황의 특징은 경제적 현실, 불평등, 생활방식의 커다란 차이가 결코 인간의 현실을 은폐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식민지의 거주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세계를 구분하는 단초가 특정한 인종에 속하느냐 속하지 않느냐는 사실에 달려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게 된다. 또한 식민지의 경제구조는 상부구조다. 그 원인은 곧 결과다. 즉 백인이기 때문에 부자이고, 부자이기 때문에 백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으로 식민지 문제를 다룰 때는 약간의 확대 해석이 필요하다. -60쪽

폭력은 식민지 세계의 질서를 지배한다. 폭력은 토착 사회구조를 해체하고 경제의 준거틀을 완전히 파괴할 뿐 아니라 복식과 사회생활의 관습까지 변화시킨다. 그런데 원주민들이 직접 역사를 실현하기로 결심하고 금지된 구역으로 밀고들어갈 때 이들은 바로 그 폭력을 내세우고 구사하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식민지 질서를 쳐부수는 것은 매우 명료하고 매우 당연한 식민지 민중 개개인이 취해야 할 행동 양식이 된다. 식민지 세계를 무너뜨린다는 것은, 그 경계선이 철거된 뒤 두 지역을 연결하는 통로를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다. 식민지 세계의 파괴는 바로 한 지역을 철거한다는 의미다. 그 지역을 땅 속 깊이 파묻거나 이 나라에서 추방해버리는 것이다. -61쪽

백인의 가치관이 우월하다는 것을 폭력적으로 확증하려 하고, 원주민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을 억누르면서 그 가치관을 공격적으로 전파하려 할 때, 원주민은 조롱과 비웃음으로 응수한다. 식민지 상황에서 이주민은 백인의 가치관이 우월하다는 것을 원주민이 전폭적으로 인정하고 이해할 때까지 원주민을 길들인다. 그러나 탈식민화의 시기에 식민지 대중은 서구의 가치관을 비웃고 경멸하며 그것에 구토감을 느낀다.
이러한 현상은 보통 은폐된다. 그 이유는 탈식민화 시기에는 일부 식민지 지식인들이 식민주의 부르주아지와 대화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 토착민은 모호한 대중으로서만 인식된다. -64쪽

원주민은 자신의 삶과 호흡, 심장 박동이 이주민과 똑같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이주민의 피부가 원주민의 피부보다 더 귀중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은 근본적으로 세계를 뒤흔들 수밖에 없다. 원주민의 새롭고 혁명적인 확신은 모두 거기서 비롯된다. 나의 생명이 이주민의 생명과 똑같다. 이주민의 시선과 마주쳐도, 그의 목소리를 들어도 나는 더 이상 온몸이 얼어붙지 않는다. 그가 있는 곳에서도 나는 더 이상 안절부절 못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그를 저주할 필요가 없다. 그가 있다고 해서 내가 괴로움을 겪지 않을 뿐 아니라 나는 이미 그를 완전히 포위했으므로 그가 벗어나려면 오직 하늘로 날아가는 수밖에 없다. -66쪽

강단의 학자들이 설명하는 자기도취적 대화에 빠진 식민지 부르주아지는 인간이 아무리 큰 실수를 저지른다 해도 본질은 영원히 불변한다는 생각을 식민지 지식인들의 뇌리에 깊이 심어주었다. 물론 그 본질이란 서구의 본질을 가리킨다. 원주민 지식인은 그 이념의 설득력을 인정하고, 그리스-로마 문명을 지키려는 경계 태세를 굳게 다졌다. 하지만 히방투쟁 중에 원주민 지식인들이 다시 민중과 접촉하는 순간 그러한 인위적인 경계 태세는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지중해 세계의 그 모든 가치들-인간 개인, 명료성, 아름다움에 대한 숭상-은 무의미해지고 사소해진다. 그 모든 연설은 죽은 말들의 집합이 되고, 영혼을 떠받치던 가치들은 그 민족과 관련된 구체적인 분쟁과 무관하기 때문에 일거에 쓸모가 없어진다. -67쪽

막노동꾼, 실업자, 굶주리는 원주민은 진실을 애써 주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진실을 대변한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바로 진실이기 때문이다. -70쪽

민중과 처음 교류할 때 원주민 지식인은 세세한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식민주의의 타도가 투쟁의 실제 목적임을 잊어버린다. 투쟁의 다양한 측면에 다소 당황한 탓에 지식인은 지역적 과제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으며, 열정은 있으나 지나치게 진지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운동의 전반적인 흐름을 내내 파악하지 못한다. 그는 마치 격렬하게 돌아가는 쇄석기와 혼합기 같은 민중 혁명에서 특수한 분야, 특수한 기능, 한 분과에 관한 아이디어밖에 제출하지 못한다. 그는 특별한 전선에서 행동에 참여하므로 운동의 통일성을 꿰뚫어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지역에서 패배할 경우 그는 회의를 품게 되고, 심하면 좌절하게 된다. 그 반면에 민중은 처음부터 식량과 투지라는 넓고 포괄적인 입장에서 출발한다. 즉 어떻게 해야 우리는 토지와 식량을 얻을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대중의 그와 같은 완고한 관점은 편협한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가장 귀중하고 가장 효율적인 진행 방식임이 드러난다. -70-71쪽

원주민은 포위되어 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식민지 세계가 분할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원주민이 맨 먼저 배우는 것은 정해진 경계를 넘어가지 말고 제 자리를 지키는 일이다.(...)나는 뛰고, 헤엄치고, 달리고, 기어오르는 꿈을 꾼다. 호방한 웃음을 터뜨리고, 단걸음에 강물을 뛰어넘고, 자동차들이 뒤에서 쫓아오지만 아무도 나를 제치고 앞서나가지 못하는 꿈을 꾼다. 식민화의 시기에 원주민은 오로지 저녁 아홉 시부터 아침 여섯 시까지만 마음껏 자유를 누린다.
식민화된 인간은 자신의 골수에 깊이 감춰진 이 공격성을 자신의 동포에게 터뜨린다. -73쪽

치열한 투쟁의 현장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가 구사할 수 있는 수단과 전술을 결정하는 일이, 다시 말해 운동을 어떻게 전개하고 조직할 것이냐라는 문제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살펴볼 것이다. 이런 일관성이 없으면 자유를 향한 맹목적인 의지만이 존재할 뿐이며, 몹시 반동화될 위험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80쪽

식민지 나라에서 유일하게 혁명적인 세력은 농민이다. 그들은 잃을 게 없고 얻을 건 전부이기 때문이다. 굶주리는 농민은 계급 체계의 외부에 있으며, 폭력만이 대가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피착취자들 가운데 처음으로 깨달은 계층이다. -82쪽

결정적인 순간에, 그때까지 활동하지 않고 있던 식민주의 부르주아지가 일선에 나선다. 그들은 적절한 용어로 식민지 상황을 설명하는 새로운 방법, 즉 비폭력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그 비폭력의 가장 단순한 형태는 이러한 식민주의 부르주아지와 같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식민화된 나라의 지적,경제적 엘리트들이 공익을 위해서는 그들과의 협상이 긴급하고 필수불가결하다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비폭력이란 후회할 만한 행위나 돌이킬 수 없는 행위가 저질러지기 전에, 즉 피를 부르는 사태가 빚어지기 전에 식민지 문제를 녹색 테이블 위에서 해결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만약 대중이 테이블 위에서 사슬이 재조정되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고 분노를 터뜨리며 건물에 불을 지르기 시작하면 엘리트와 민족 부르주아 정당들은 식민주의자들 편으로 달려가며 이렇게 한탄할 것이다. "상황이 아주 심각하군! 어떻게 끝날지 모르겠어. 해결책을, 뭔가 타협안을 찾아야 할 텐데 말이야." -82-83쪽

모국의 공장주와 금융 거물들이 정부에게 기대하는 것은 식민지 주민들을 학살하는 게 아니라 경제 협약으로 자신들의 '정당한 이익'을 보호해주는 것이다. -87쪽

민족 지도자들은 국제 여론이 서구 언론에 의해 주도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서방의 기자가 우리에게 질문을 할 때 우리를 돕기 위해서인 경우는 거의 없다. 예를 들어 알제리 전쟁에서는 가장 자유를 존중하는 프랑스 기자들조차 내내 모호한 용어로 우리의 투쟁을 보도했다. 이에관해 우리가 비난하자 그들은 자신들이 객관적이었노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원주민에게 객관성이란 언제나 불리한 것을 의미한다. -100쪽

식민지 민중으로서는 폭력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폭력에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성격을 부여하게 된다. 폭력의 행사는 그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주며, 각 개인은 폭력이라는 커다란 사슬의 고리들이 된다. 이 거대한 폭력의 유기체는 이주민이 처음에 행사한 폭력이 클수록 덩치가 커진다. 집단들은 서로 인정하고, 미래의 통합된 민족이 싹을 드러낸다. 무장투쟁은 민중을 동원시키며, 한쪽 방향을 취하도록 몰아간다. -117쪽

저개발 지역의 정치 지도자는 민중에게 늘 싸울것을 요구한다.(...)민족에게 "허리띠를 졸라매고 일하자"고 요구한다.(...)이들은 유럽 나라들이 지금처럼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가 그만큼 노력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우리도 그와 똑같이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세계 만방에 보여주자"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저개발국이 이런 발전 계획을 수립하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 옳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다. -119쪽

오늘날 저개발 지역에서 민족 독립과 민족 감정이 성장하는 과정은 전혀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여기서는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면, 대개의 나라들이 경제적 기반이 없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국민 대다수가 가난에 시달리고, 똑같은 몸짓으로 버둥거리며,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는 이른바 기아의 지리학을 보여준다. 행정관도 없는 세계다. 이런 세계를 상대로 하여 유럽 국가들이 호사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유럽의 풍요는 노예제에 기반하고 있기에 말 그대로 모욕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노예들의 피로 자라났고, 저개발 세계의 흙과 땅에서 직접적으로 나왔다. 유럽의 복지와 진보는 흑인, 아랍인, 인도인, 황인종의 땀과 죽음을 토대로 건설된 것이다. 우리는 이를 더 이상 좌시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120쪽

사실 독일은 배상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승전국들은 독일을 반공산주의 진영에 편입시키려 했기 때문에 독일에게 배상금을 완전히 물릴 수 없었다. 식민지 나라가 예전의 식민지 모국으로부터 배상을 받고자 할 때, 혹은 서구 진영에 편입되지는 않는다 해도 군사기지나 영토의 일부를 제공할 때도 그와 마찬가지의 상황이 벌어진다. 오히려 식민지 나라는 NATO의 전략에 기여하고 자유 세계를 보호하기 위해 원래의 요구를 기꺼이 철회하기로 결정한다. 그 결과 지금 독일은 막대한 달러와 기계를 가지게 된 것이다. 서구 진영에게는 독일이 다시 강국으로 일어서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다. 독일이 재건되고 번영을 이루어 궁극적으로 공산주의 세력을 막는 첫번째 보루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이른바 유럽 자유 진영의 이익에 부합했다. 독일은 유럽의 위기를 잘 활용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과거에 자신들에게 정복당했던 독일이 지금은 경제 분야에서 치열한 경쟁자로 부상했다는 사실에 당연히 회한을 느낀다. -125쪽

제국주의 나라의 재산은 우리의 재산이기도 하다.(...)유럽은 라틴아메리카, 중국, 아프리카 등 식민지 나라들의 금과 원료로 잔뜩 배를 불렸기 때문이다. 이 모든 대륙의 나라들을 통해 유럽은 현재 부의 탑을 쌓아 올리고 있으며, 수백 년 동안 그 나라들의 다이아몬드와 석유, 비단과 면화, 목재와 이국적인 산물들이 유럽으로 흘러들어갔다. 유럽은 말 그대로 제3세계의 창조물이다. 유럽에 가득 쌓인 부는 저개발 민족들에게서 강탈한 재산이다. 네덜란드의 항구들, 보르도와 리버풀의 선창은 흑인 노예무역을 전문으로 한 덕분에 유명해졌다. 그러므로 어느 유럽 국가의 수반이 손을 가슴에 얹고 저개발국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겠다고 엄숙히 선언할 때 우리는 감사의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정반대로 우리는 "그건 단지 우리에게 지불해야 할 배상금일 뿐이야"라고 말해야 한다. 또한 저개발국에 대한 지원을 "박애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지원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즉 식민지 민족의 입장에서는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이며, 자본주의 열강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지불해야 할 대가라는 점을 명심해야 하는 -126쪽

"유럽에서 사회주의를 수립하는 문제와, 제3세계와 우리의 관계(마치 표면적인 관계에만 국한된 것처럼)를 설정하는 문제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식민지의 유산을 저개발국의 해방 위에 퍼뜨리는 속도에 있다. 즉 그것은 제국주의가 강탈한 결실에 기반하여 사치스러운 사회주의를 수립하고 싶다는 의미다. 이는 마치 강도들 사이에서도 약탈물이 어느 정도 공정하게 배분되며, 심지어 그 일부는 박애의 형태로 빈민에게 돌아가기도 하는 것과 같다. 그 약탈물을 빼앗긴 사람은 바로 그 빈민임에도 불구하고." 마르셀 페쥐, '드골을 위해 죽을 것인가?', "현대"-127쪽

식민지의 프롤레타리아는 식민지 체제로부터 커다란 수혜를 입은 계급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성장 초기 단계의 도시 프롤레타리아는 비교적 특권적 지위에 속한다. 자본주의 나라에서는 노동계급이 더 이상 잃을 게 없으나, 결국에는 모든 것을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식민지 나라의 노동계급은 모든 것을 잃는다. 실제로 그들은 식민지 기구가 매끄럽게 돌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계급이다. 전차 기관사, 택시 운전기사, 광부, 부두노동자, 통역자, 간호사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민족 정당을 가장 충실하게 추종하는 계급이며, 식민지 체제에서 점하고 있는 특권적 지위 때문에 식민지 민족의 '부르주아'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134쪽

역사는 우리에게 식민주의와의 투쟁이 민족주의의 노선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하게 가르쳐준다.(...)
민족의식은 모든 사람의 내적인 희망을 아우르는 결정체가 아니며, 대중 동원의 즉각적이고 명백한 결과도 아니다. 그것은 속이 빈 껍데기일 뿐이고 원작의 치졸한 모작에 불과하다. 여기서 우리가 흔히 발견하는 문제점은 신생 독립국을 말할 때 흔히 국민을 종족으로, 국가를 부족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는 건물의 갈라진 틈과 같이 퇴행적인 과정을 보여주는, 민족적 노력과 민족 통합을 해치는 편견에 가득찬 생각이다. 그러한 퇴행적 단계에 내포된 취약함과 위험성은 심각한 역사적 결과를 빚는다. 그 때문에 민족 부르주아지는 대중 행동을 합리화하지 못하고 대중 행동의 근거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175쪽

부르주아지는 편협한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민족을 대표하여 권력을 얻는다.(...)서구 부르주아지는 근본적으로 인종주의적이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다양한 수사를 통해 그 인종주의를 은폐한다.
흑인과 아랍인에 대한 그들의 인종적 편견은 멸시의 인종주의이며, 증오 대상을 최소화하는 인종주의다. 하지만 인간의 기본적인 평등을 내세우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하층 인간을 인간의 지위로 끌어올림으로써 자체로 논리적인 것처럼 가장하면서 실은 서구 부르주아지로 구현된 서구적 인간주의를 표준으로 삼고 있다.
그와 달리 신생국 민족 부르주아지의 인종적 편견은 공포에 기반을 둔 방어적인 인종주의다. -191쪽

민중은 더 잘 이해하게 될수록 그만큼 더 조심스러워지며, 모든 것이 자신들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더 쉽게 깨닫는다. 즉 자신들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우선 단결해야 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올바르게 인식해야 하고, 적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민중은 재산이란 노동의 결실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자행되는 강도짓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 부자들은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 아니라 민중의 피를 먹고 사는 재칼이나 독수리처럼 잔인한 포식동물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정치위원들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위해 일하는 것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토지는 토지를 경작하는 자의 몫이다. 이것은 설명을 거쳐 알제리 혁명의 근본적인 법칙이 된다. -217쪽

우리는 비범한 사람을 육성하거나 영웅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곧 지도자의 다른 형태일 따름이다. 그보다 우리는 민중을 향상시키고 그들의 두뇌를 계발하여 생각을 불어넣고, 그들을 진정한 인간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시 아프리카의 모든 정치인들이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것은 바로 대중에게 지식을 전달해서 전통적인 지적 암흑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일이다. 저개발국에서 책임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대중 교육에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대중의 사고 수준을 높이는 것, 흔히 말하는 '정치 교육'이다. -223쪽

정치 교육은 대중의 마음을 열고, 일깨우고, 지성이 생겨나도록 하는 것, 세제르의 표현을 빌리면 '영혼을 창조하는 것'이다. 대중을 정치적으로 교욱하는 일은 정치 연설을 한다는 뜻이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그것은 모든 일이 대중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분명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가르치는 일이다. 만약 우리가 침체에 빠진다면 그것은 대중의 책임이고, 앞으로 전진한다면 그것 역시 대중의 책임이다. 조물주 같은 존재는 없고, 어떤 영웅이 나타나 모든 일의 책임을 대신 져주지도 않는다. 조물주는 바로 대중 자신이며, 마법의 손은 바로 대중의 손이다. 이 모든 일을 실천하기 위해, 진정으로 민중을 구현하기 위해, 우리는 극단적인 분권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또 아래로부터 위로의 움직임은 고정된 원칙이 되어야 한다. 형식에 얽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원칙을 존중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힘은 밑에서부터 솟아나와 꼭대기에 그 역동성을 공급하며, 변증법적인 도약을 가능케한다. -223쪽

민족주의는 정강이나 정책이 아니다. 진정으로 자기 조국이 퇴보하거나 정체되거나 불확실성에 머물기를 원치 않는다면, 민족의식에서 정치,사회의식으로 신속하게 전진해야 한다. 혁명 지도부가 수립하고 대중이 올바르게 이해하고 환영하는 정책에는 민족이 포함되지 않는다. 민족의 활동은 항상 저개발국의 전반적 배경 속에서 조정되어야 한다. -229쪽

'흑인 정신'이라는 개념은 백인이 인간성에 가하는 모욕에 대한 (논리적이라기보다) 감정적인 대응이었다. 이처럼 백인의 경멸에 맞서 흑인 정신을 내세우는 것은 어떤 분야에서는 금지와 증오를 고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유럽문화의 무조건적인 긍정에 이어 아프리카 문화의 무조건적인 긍정이 나타났다. -241쪽

민중이 전개하는 해방투쟁은 민중을 상황에 따라 두 가지의 길 중 하나로 이끌어간다. 즉 민중은 식민지 행정, 군사적 점령, 경제적 착취로 인해 민중의 의식 안에 확립된 이른바 진리라는 것을 거부할 수도 있고 폭발시킬 수도 있다. 우리 안에 생겨난 허위, 약동하는 정신을 열등감으로 몰아넣고 말 그대로 우리를 못쓰게 만들어버리는 허위를 진정으로 몰아내는 것은 오로지 무장투쟁밖에 없다.
-3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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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지성 시인선 2
마종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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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의 이야기는 언제나 절절한게 있다.  

낚시질 

낚시질하다
찌를 보기도 졸리운 낮
문득 저 물속에서 물고기는 
왜 매일 사는 걸까.

물고기는 왜 사는가.
지렁이는 왜 사는가.
물고기는 平生을 헤엄만 치면서 
왜 사는가.  

낚시질하다 
문득 온 몸이 끓어오르는 대낮,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만은 없다고
中年의 흙바닥에 엎드려
물고기같이 울었다.
  

 

나비의 꿈

1
날자.
이만큼 살았으면 됐지.
헤매고 부딪히면서 늙어야지.

(外國은 잠시 여행에 빛나고
이삼년 공부하기 알맞지
십년이 넘으면 外國은
참으로 우습고 황량하구나.)

자주 보는 꿈 속의 나비
우리가 허송한 시간의 날개로
바다를 건너는 나비,
나는 매일 쉬지 않고 날았다.
絶望하지 않고 사는 表情
絶望하지 않고 들리는 音樂.

2
그래서 절망하지 않은 몸으로
비가 오는 날 저녁
한국의 港口에서
당신을 만나고 싶다.
낯선 길에 서 있는 木蓮은
꽃피기 전에 비에 지고
비 맞은 나비가 되어서라도
그날을 만나고 싶다.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마종기,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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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이 멀지 않다
나희덕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시를 읽고 그에 대해 말하기는 늘 어렵다. 
그 싯구가 아닌 그 어떤 표현으로도 그 시를 말할 수 없어
때로는 누구와 그 시에 대해 말하는것도 이게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고통에게 1

어느 굽이 몇 번은 만난 듯도 하다
네가 마음에 지핀 듯
울부짖으며 구르는 밤도 있지만
밝은 날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러나 너는 정작 오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날 너는 무심한 표정으로 와서
쐐기풀을 한 짐 내려놓고 사라진다
사는 건 쐐기풀로 열두 벌의 수의를 짜는 일이라고,
그때까지는 침묵해야 한다고,
마술에 걸린 듯 수의를 위해 삶을 짜 깁는다

손 끝에 맺힌 핏방울이 말라 가는 것을 보면서
네 속의 폭풍을 읽기도 하고,
때로는 봄볕이 아른거리는 뜰에 쪼그려 앉아
너를 생각하기도 한다

대체 나는 너를 기다리는 것인가
오늘은 비명 없이도 너와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나 너를 기다리고 있다 말해도 좋은 것인가

제 죽음에 기대어 피어날 꽃처럼, 봄뜰에서. 
 

고통에게 2

절망의 꽃잎 돋을 때마다
옆구리에서
겨드랑이에서
무릎에서
어디서 눈이 하나씩 열리는가

돋아나는 잎들
숨가쁘게 완성되는 꽃
그러나 완성되는 절망이란 없다

그만 지고 싶다는 생각
늙고 싶다는 생각
삶이 내 손을 그만 놓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 그러나 꽃보다도 적게 산 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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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정체성 허문 '젠더 계보학' 소수자 철학으로 확장  

주디스 버틀러 Judith Butler

미국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수사학과와 비교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유대계 백인 레즈비언 철학자이다. 버틀러는 논쟁적 페미니스트이자 퀴어 이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19세기 독일 철학자 헤겔이 20세기 프랑스 철학사에 끼친 영향을 분석한 논문으로 예일대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0년 <젠더 트러블>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면서 미국 학계에서 영향력 있는 진보적 지식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국내에 번역서로는 <안티고네의 주장>,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젠더 트러블>, <불확실한 삶>, <누가 민족 국가를 노래하는가> 등이 있다.




 

» 주디스 버틀러
 

헤겔 철학에 대한 연구로 주저를 시작한 주디스 버틀러는 다양한 이론적 배경과 현란한 철학적 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난해한 글쓰기로도 정평이 나 있다. 버틀러는 프로이트와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주체형성 이론, 폴 드 망과 자크 데리다의 해체론의 영향을 받았고 미셸 푸코의 권력이론과 (역)담론이론을 주요한 방법론적 토대로 삼고 있다.

버틀러가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된 주요 저작은 무엇보다도 <젠더 트러블>(1990)이다. 이 책은 기존 페미니즘이나 철학에 대해 도발적인 논쟁과 문제를 제기하면서 학계에 트러블을 일으켰고 세계적으로 번역 출간되어 10만부 이상 팔리면서 인기를 누렸다. 또한 인터넷상에 ‘주디’라는 국제 팬진까지 탄생시키면서 버틀러를 영미 지성계의 떠오르는 아이콘, 학계의 주목받는 스타로 만들었다.


<젠더 트러블>은 버틀러의 ‘젠더 계보학’이 표면화되는 저작이다. 젠더는 불안정한 사회적 구성물이므로, 공통된 집단으로서의 여성이 페미니즘의 주체라는 주장은 특정한 정치권력이 작용한 결과임을 밝히려는 작업이다. 이 책은 페미니즘이라는 정치학에 여성이라는 주체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여성 주체가 있어야 여성 해방이라는 정치학이 있다는 전제에 있어서 그 ‘여성’은 확고한 본질이 아닌 일시적인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이라는 성의 정치학의 정치 주체가 여성이라면, 이때 성을 지칭하는 것은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가 될 것이다. 선천적으로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성이 섹스, 후천적으로 사회문화적으로 교육받은 성이 젠더라면, 섹슈얼리티는 인간의 근원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으로 말해진다. 쉽게 말해 우리는 태어날 때 남자와 여자라는 생물학적인 몸을 가지고 태어나, 남성성과 여성성을 학습하면서, 남녀 간의 이성애를 당연한 욕망으로 여기며 자란다. 그런데 섹스라는 생물학적이고 해부학적인 특성도, 섹슈얼리티라는 원초적인 욕망도 사실은 애초부터 그렇게 그 자리에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제도담론이 그렇게 명명하고 인식하도록 지식 체계를 동원한 결과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는 모두 사회 문화적 구성물이라는 의미에서 ‘젠더’로 수렴되며 규범이 만든 허구이기 때문에 분명한 정의가 불가능해진다.

계보학은 근본적 원인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사실상 어떤 것의 결과임을 역사적으로 밝히려는 방법론이다. 계보학은 원래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 논의를 계승한 푸코의 비평적 접근방식으로서 권력 효과나 담론의 구성물을 마치 근본 원인이자 전제인 것처럼 조작하기 위해 이루어진 보이지 않는 배타적 실천을 역사적으로 밝히려는 논의 양식이다. 공통 집단으로서의 여성을 페미니즘의 주체로 ‘재현’하는 언어와 정치의 사법적 구성은 그 자체가 하나의 담론적 구성물에 불과하며 당면한 ‘재현 정치학’의 결과일 뿐이다. 이는 사실상 이성애 중심주의라는 토대 위에서 안정된 여성성을 확보한 것으로 전제되는 생물학적 여성을 페미니즘의 법적 주체로 생산하려는 특정한 정치적 작용이기 때문에, 특정한 권력의 역학 관계 속에서 조작되고 구성된 결과물에 불과하다. 이 여성 주체에서 복장 전환자, 젠더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자, 성적 소수자 등은 배제되기 때문이다. 이런 젠더 계보학은 소수자 섹슈얼리티를 인정하고 그것과의 평등한 공존을 모색하려는 퀴어 이론의 현실적 정치성과 맞닿아 있다.

버틀러는 9·11 사건 이후 국가가 가져온 폭력의 악순환과 현실의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여러 담론에 대해서도 새로운 규범을 제시해야 할 윤리적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관심은 이제 성적 소수자뿐 아니라 인종적, 종교적 소수자의 관점으로 확대됐다.
 
 
<젠더 트러블> 이후 버틀러는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1993), <권력의 심리 상태>(1997), <격분하기 쉬운 말>(1997) 등을 출간하면서 젠더 수행성 논의를 육체, 권력, 언어의 문제로 구체화한다.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2000)은 우연적 토대 위의 ‘보편성’이라는 주제를 면밀히 고찰했으며, <안티고네의 주장>(2000)은 희랍 비극의 고전적 여성 영웅 안티고네를 친족 교란과 젠더 역전의 급진적 퀴어 주체로 재해석했다.

주목할 점은 버틀러가 <불확실한 삶>(2003) 이후 <젠더 허물기>(2004), <스스로를 말하기>(2005),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2007) 등의 후기작에서 보여주고 있는 시각의 변화이다. 버틀러는 미국이 겪은 대참사였던 9·11 사건 이후 국가가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이라크를 공격한 것은 폭력을 제어하기 위해 또다른 폭력을 동원하는 악순환을 가져왔다고 본다. 그리고 대테러 전쟁을 주창하면서 현실의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여러 담론에 대해서도 새로운 규범을 제시해야 할 윤리적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버틀러의 관심은 이제 성적 소수자뿐 아니라 아랍인이나 유대인과 같은 인종적·종교적 소수자의 관점으로 확대되며, 특정한 삶만을 살 수 있는 삶으로 제한하고 정당화하는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를 극복하여 또다른 폭력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애도와 함께 있음으로써, 곧 가멸적 육체의 취약성과 이질성에 대해 사유하고 그 애도 상태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생산할 수 있는 정치적·윤리적 행위에 주목하는 것이다. 윤리적 가능성은 나의 내부에 내가 알지 못하는 불확실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레비나스의 ‘얼굴’처럼 재현의 한계를 드러내는 타자성이, 곧 자신의 실패를 드러내는 재현이 윤리적 재현이라고 해석되는 것이다.

가장 최근에 출간된 가야트리 스피박과의 대담집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에서 버틀러는 시민권을 얻기 위해 투쟁하는 불법 체류자나 난민의 관점에서는 국가 없음이 단순한 국적의 누락이 아니라 권력의 장 내부에서 법적인 권리를 박탈당하는 적극적인 방식이 된다고 주장한다. ‘국가 없음’은 한 국가의 권력이 닿지 않는 곳으로 그저 벗어난 상태가 아니라, 권력이 적극적으로 특정한 사람을 배제하는 현실이다. 실제로 국가에서 추방된 사람이나 추방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독일의 이주노동자, 팔레스타인 점령지구의 사람들, 관타나모 수용소의 포로들의 권리 박탈은 보편적 주체의 양상이 아니라 특정 권력이 복잡한 방식으로 개입된 역사적 상황이다. 조르조 아감벤이 말하는 ‘벌거벗은 삶’도 사실상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보편적인 조건이자 주권 권력 이면의 한 양상이기보다는, 특정한 법제적 권력에 의해 권리가 박탈된 사람들의 겪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상황이라는 주장이다.

이처럼 버틀러의 논의는 전기의 젠더 존재론에 대한 계보학적이고 이론적인 통찰에서, 후기의 실천적 정치윤리학에 이르기까지 이론과 실천 양면에서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이것이 단순히 여성이나 성적 소수자뿐 아니라 인종적·종교적 소수자의 문제까지 포괄하면서 이 사회 속에서 인식 가능한, 또한 생존 가능한 인간으로서 산다는 것에 대한 철학적 문제로 논의를 확대하고 있는 버틀러의 타자의 윤리학이 보여주는 새로운 가능성이다.

조현준/경희대 객원교수·영문학
(한겨레 200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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