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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이 멀지 않다
나희덕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시를 읽고 그에 대해 말하기는 늘 어렵다.
그 싯구가 아닌 그 어떤 표현으로도 그 시를 말할 수 없어
때로는 누구와 그 시에 대해 말하는것도 이게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고통에게 1
어느 굽이 몇 번은 만난 듯도 하다
네가 마음에 지핀 듯
울부짖으며 구르는 밤도 있지만
밝은 날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러나 너는 정작 오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날 너는 무심한 표정으로 와서
쐐기풀을 한 짐 내려놓고 사라진다
사는 건 쐐기풀로 열두 벌의 수의를 짜는 일이라고,
그때까지는 침묵해야 한다고,
마술에 걸린 듯 수의를 위해 삶을 짜 깁는다
손 끝에 맺힌 핏방울이 말라 가는 것을 보면서
네 속의 폭풍을 읽기도 하고,
때로는 봄볕이 아른거리는 뜰에 쪼그려 앉아
너를 생각하기도 한다
대체 나는 너를 기다리는 것인가
오늘은 비명 없이도 너와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나 너를 기다리고 있다 말해도 좋은 것인가
제 죽음에 기대어 피어날 꽃처럼, 봄뜰에서.
고통에게 2
절망의 꽃잎 돋을 때마다
옆구리에서
겨드랑이에서
무릎에서
어디서 눈이 하나씩 열리는가
돋아나는 잎들
숨가쁘게 완성되는 꽃
그러나 완성되는 절망이란 없다
그만 지고 싶다는 생각
늙고 싶다는 생각
삶이 내 손을 그만 놓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 그러나 꽃보다도 적게 산 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