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이럴 걸 왜 외면해왔나” [2010.01.08 한겨레21 제793호]
 
[특집] 유가족·세입자의 ‘어버이 같은 동지’ 문정현 신부
“정권의 무지막지함, 사회의 냉담함·무관심 절실히 느낀 한 해”
 
 
 
임인택


 
 

2010년 1월1일 남일당 앞에 문정현 신부가 서 있다. 2009년 1월20일 아침 7시20분께 불타버린 서울 한강로 용산 4구역 초입의 그 건물. 아무도 찾지 않는, 여섯 명의 ‘무덤’이다. 문 신부는 건물 계단을 지팡이로 당겨가며 힘겹게 올랐다. “너무 무섭고 끔찍해 지금껏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고 그는 말했다.

민주화 복판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거리의 신부’가 무서워하는 게 있다. 해 바뀌며 나이 일흔을 꽉 채웠고 신부가 된 지 45년이 된 그가 끔찍해하는 게 있다. 게다가 용산 참사는 이제 모두 타결이 되었다 하질 않는가. 그런데도 문 신부는 애면글면 공포에 관한 것으로부터 말머리를 열었다. 모두 ‘희(希)·활(活)·생(生)’을 얘기한다는 새해 첫날 인터뷰였다.


 
 


» 문정현 신부.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 합의 결과가 알려지고서 처음 든 소회가 궁금합니다.

= 결국, 결국에 이렇게 할 것을 정부가 1년 동안 그건(용산 참사 협상) 사인 간의 문제라면서 얼마나 외면했냐 말이죠. 1년을 넘기는 게, 기일이 다가오는 게 부담이 됐나? 올해 선거가 부담이 된 건가? 한 해를 넘기지 않으려고 밤샘 협상까지 하면서, 결국 이렇게 할 것을, 그동안 얼마나 무지막지했느냐 말이죠. 정말 잔인하고 무서운 정권이에요, 잔인해.

- 아쉬움이 많으신가요.

= 모두 타결이 되었다고 생각지 않아요. 모든 마을이 해방되면서부터 형성된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일시에 이것을 무너뜨리고 대다수를 쫓아내고 죽이고 호화주택을 짓는다? 이게 무슨 의미를 갖는 거죠? 근본적으로 지금의 재개발 정책에 대한 반성과 수정이 필요해요.

- 그렇다면 아직 개인적으로 숙제를 남기신 겁니까.



= 제 원칙은, 내 바람이나 목표가 이분들(유가족·세입자)의 수준을 넘어선 안 된다는 거예요. 여러 문제가 남아 있으나 이분들께 그것까지 해결하자 할 순 없죠. 하루빨리 새 삶을 꾸려 살아가야 하는 분들 아닙니까.

- 대중은 타결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 분명한 건, 결국 이곳 세입자들은 통째 사라지고 재개발은 본래대로 유유히 진행될 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크고 작은 제2의 용산이 계속 나올 수밖에 없겠죠. 여기서 교훈 하나 얻지 못할까 착잡하고, 지금이 여기 아니면 어디서 다시 재개발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겠느냐는 목소리를 들으면 아득하지요.


문 신부는 2009년 3월28일 용산 참사 현장으로 들어왔다. 본거지인 전북 군산에서 직접 차를 한 대 몰고 왔다. 옷가지 등을 모두 챙겨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잤다. 하루, 한 달을 넘어 새해를 용산에서 맞게 될진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유가족·세입자에게 문 신부는 ‘동지’이자 세배까지 드리는 ‘어버이’가 됐다. 가장 단단한 걸목이었다.


- 처음 이곳으로 와야겠다고 결정하게 된 배경이 뭔지요.

= 사고가 터진 날,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과 같이 있었어요. 딱 대형 참사다 했지. 난 재개발이나 철거 문제, 솔직히 잘 알지 못했어요. 그런데도 단박에 든 생각은, 이렇게 추운 겨울에 사람을 내쫓겠다며 죽였다는 것, 그건 도대체 말이 안 된다는 거였죠. 그러다 집에 왔는데, 여기저기 채널을 돌려도 계속 뉴스가 나와요. 눈을 뗄 수가 없었어. 올라가야겠다 했지요.

- 그래도 홀몸으로 쉽지 않았을 텐데요.

= 여러 지인들이 용산에 어른이 없다고 했어요. 간절한 마음으로 와닿았지요. 게다가 그즈음 김수환 추기경께서 선종(2009년 2월16일)하고 추모 미사가 열렸어요. 미사 때마다 용산에 대해선 전혀 얘기되는 게 없더라고요. 서글펐어. 추기경님이 용산 참사도 그냥 지고 올라가셨나 했지요.

- 유가족·세입자 모두 문 신부가 아니었다면 이만큼 버티기도 어렵고 이 정도의 결과도 얻기 어려웠을 거라고 말합니다.

= 내가 하고, 할 수 있는 게 뭐 미사밖에 더 있나. 처음 짐을 실은 차를 끌고 왔는데, 현장에 못 세우게 할 줄 알았어요. 실제 경찰들이 안 된다고 차를 빼라는 거예요. 내가 그럼 전경차도 빼라, 그랬죠. 안 빼더라고. 그래서 내 차도 안 뺐지. 허허.

- 그렇게 신부님들이 보호막이 되었습니다.

= 어, 미사를 건드리진 않더라고. 대신 경찰에 완전히 둘러싸인 채 했지요. 하루 걸러 몸싸움이 있었으니까. 플래카드 하나만 붙이려거나 천막 하나만 치려고 해도, 부수고 빼앗고 잡아갔어요. 유가족이나 세입자 가운데 성한 사람이 없었어요. 깁스를 하거나 보호대를 차고 그랬지. 그래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합류하고, 서울대교구 이강서 신부(빈민사목위원 위원장)도 와줘서 큰 힘이 되었지요. 사실 나 혼자 미사를 한 건 두 차례 정도밖에 되지 않아요. 이강서 신부는 처음 일주일만 머물겠다고 해서 4구역 빈집에서 지내셨는데, 막상 도저히 못 돌아가겠다고 했어요. 내가 그랬지요. 그동안은 내가 남일당 성당의 주교였는데, 이 신부가 주교 하시고 난 은퇴한 사람이니 보좌신부라고. 허.

- 용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을 써준 분들이 많다고 곳곳에서 목소리가 나옵니다.

= 여기 와서 세상을 봅니다. 정부나 서울시, 이런 데는 둘째 치고라도 ‘종교의 가면’이 너무 많아요. 강도를 당한 곳인데, 오기만 하면 그 사실이 다 보이는데 오질 않아요. 용산 주변만 해도 성당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로 옆인데, 어찌됐건 사람이 죽었잖아요. 모든 종교가 마찬가지죠. 서울시에서 타결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보니 종교인분들도 자리하셨던데, 많은 고생을 하셨지요. 하지만 그렇게 참석하실 거라면, 그전에 여기부터 깊숙이 계셨어야죠. 용산엔 한 번도 와보지 않은 분도 있으니까. 두 전직 대통령 서거 때나 김수환 추기경 서거 때 참석한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 갔는지도 난 궁금합니다.

- 정권의 외면은 민중의 무관심에 근거한 것일 수도 있겠군요. 초기에 관심을 받다 금세 잊혀지고선 용산은 섬이 되었습니다. 그 안에서 많은 이들이 무력했다고 얘기합니다.

= 공권력 앞에 더없이 왜소해졌어요. 도대체 메아리가 없었으니까, 이 사회에 희망이란 게 있긴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지요.

- 새해입니다. 바람이 있으신지요.

= 우리 몸 어디 발가락에 상처라도 나면, 머리끝까지 거기에만 신경을 쓰잖아. 그런데 여긴 사람이 죽었는데도 남 일 보듯 할 수 있느냐 말이죠. 건전한 사회가 될 수 있겠어요? 당장 1월25일(남일당에서 최종 해산키로 한 날)이 지나면 다들 어떻게 현실로 돌아갈지 상상을 못하겠어요. 4대강을 보는 것 같아요. 밀고 나가는 거지. 건물들이 쭉쭉 올라가겠지. 여기 사람들은 잊혀지고 사라진 채.


그는 용산 참사 타결 소식이 전해지자, 신부를 포함한 가까운 지인들에게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용산 타결… 유족과 엉켜 울다. 속은 부글부글. 재개발은 유유히.” 사실 그의 속내는 이 ‘24글자’에 모두 담겼다. 한 달에 두 글자씩 새겨온 셈이다. 그리고 부족한 게 있다면 ‘눈물’이 말하리라.

“아직 덕담을 나눌 때가 아니에요. 딱 봉합한 수준의 타결이란 게 맞아요. 여러 권력자들 혹 하나 떼냈다고 하겠지요. 이 모든 고통이 정말 승화되길 바랍니다. 이 사회의 냉담함, 무관심을 무섭게 확인했어요. 그건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문제 아닙니까?” 인터뷰 말미, 흘리고 흘렸던 눈물을 문 신부는 결국 또 쏟아냈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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