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경험과 전통적인 학술적 관심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는 것이 바로 벤야민의 주안점이었다. -16쪽
벤야민은 사물의 의미에는 사물의 역사가 너무나도 분명하게 각인되어 있다고 믿었다. 사물은 "말이 없다." 그러나 사물의 ‘이름’을 부르는 충실한 철학자는 사물의 표현적 잠재력을 읽을 수 있으며, 이러한 잠재력을 말이라는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여 사물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만든다.-28쪽
부르주아-자본주의의 터전인 소비의 거대도시가, 혹세무민하는 매혹적 세계이기를 그만두고 형이상학적․정치적 조명의 세계로 변형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과제였다. -41쪽
서쪽의 파리는 정치적-혁명적 의미에서 부르주아 사회의 기원이며, 동쪽의 모스크바는 동일한 의미에서 부르주아 사회의 종말이다. 남쪽의 나폴리는 지중해의 기원으로서, 신화로 둘러싸인 서구 문명의 어린 시절이며, 북쪽의 베를린은 신화로 둘러싸인 작가 자신의 어린 시절이다.-45쪽
선택은 자유 없는 권력이거나 권력 없는 자유였다. (모스크바) -52쪽
벤야민은 프롤레타리아의 편에 서는 것이 부르주아 지식인의 객관적 이익에 이르는 길이라는 신념을 줄기차게 설파했다. 그러는 사이에 프롤레타리아 자체가 편을 바꾸고 있었다.-59쪽
19세기의 지붕 덮인 아케이드 상가는 벤야민의 중심적 이미지였다. 꿈꾸는 집단의 내면의식, 아니 무의식의 정확한 물질적 복제물이었기 때문이다. 아케이드에서는 부르주아의식의 모든 오류(상품 물신주의, 사물화, "내면성"으로서의 세계)와 부르주아식의 모든 유토피아적 소망(유행, 매춘, 도박)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아케이드는 근대 건축 최초의 국제적 양식이었으며, 따라서 범세계적인 대도시 세대의 산 체험의 일부였다.-6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