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제로 편 - 지혜를 찾아 138억 년을 달리는 시간 여행서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개정판)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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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맑은 하늘에 태양이 떠있다. 태양은 존재하는 것일까. 알 수 없다. 태양 중심부에서 만들어진 광자가 지구에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8분. 우리는 8분 전 태양의 모습은 알 수 있어도 그것의 존재 여부는 알 수 없다. 본질을 두고 날아 오는 것은 '빛' 뿐이다. 태양에서 출발한 빛은 우주를 날아와 우리 안구 조직인 망막에 닿는다. 망막은 1억개가 넘는 광수용체 세포를 갖고 있다. 광수용체는 빛을 검출한다. 검출된 정보는 1백만 개가 넘는 시신경 세포로 전달 된다. 모든 신경 세포는 시냅스에 의해 다른 신경 세포와 연결된다. 신경세포는 정보에 의해 자극을 받으면 전기적 신호로 재빨리 바꾼다. 초당 120m의 속도로 축색돌기를 거쳐 시냅스에 보내진다. 시냅스에서는 이를 신경전달물질을 통해 화학적 신호로 바꾼다. 다시 이것을 옆 신경세포에 전달하면 다시 이는 전기 신호로 바꾸어 다른 세포에 전달한다. 빛이 보낸 신호를 화학과 전기적 신호를 주고 받으며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가 '시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고로 '보인다'는 것은 '존재'의 여부를 증명하는 수단이 아니다. 심지어 이 전기적, 화학적 신호들은 자는 동안에도 활성화되어 '꿈'이라는 '환영'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꿈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생생하게 체험하지만 그것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꿈'에서 확신하기 어렵다.

만약 눈앞에 빨간 사과가 있다고 해보자. 그것은 존재하는 것일까. 알 수 없다. 빨간 사과가 있다는 사실도 같은 원리로 확인한다. 일단 사과를 보기 위해서 '광원'이 있어야 한다. 광원이 없는 상태에서는 사과는 보이지 않기에 존재하는지 알길이 있다. 사과를 본다고 해보자. 태양광이나 형광등 불빛에서 나오는 광원은 입자이자 파동이다. 광원에서 쏟아져 나온 광자들은 사과 표면에 부딪친다. 이 과정에서 일부는 사과에 흡수가 되고 일부는 튕겨져 나온다. 이 팅겨진 일부가 나의 망막에 들어온다. 이후 과정은 앞과 같다. 감각 기관을 통해 그것을 확인하는 여부는 그것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지 않는다. 모든 정보는 '빛의 속도'라는 딜레이를 갖는다. 빛은 1초에 30만km를 날아가지만 그것이 '동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고로 '광자'가 전달해주는 '정보'만 있을 뿐 세계가 존재하는지 알길은 없다.

만약 그것을 만져서 확인하면 어떨까. 그러나 그것도 확인할 수 없다. 만진다는 것은 실제로 만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원자'로 이뤄져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원자는 양성자와 전자로 이뤄져 있다. 양성자는 입자다. 그러나 전자는 입자가 아니다. 파동이다. 아니다. 파동이 아니다. 입자다. 이것이 무슨 말 인고 하면, 전자는 입자일 수도 있고 파동일 수도 있다. 전자는 마이너스 전하를 가자고 있다. 만약 사과를 만진다고 해보자. 그러나 우리는 사과를 만진 적 없다. 이유는 이렇다. 사과를 구성하는 원자 속 전자와 손가락에 있는 원자의 전자는 서로 마이너스 전하를 갖는다. 고로 이 둘은 반발력을 가져 결코 닿지 않는다. 사과의 전자와 손의 전자는 전자기력을 갖는다. 결국 이 둘은 반발하여 서로 접근할 수 없고 일정 근접거리에서 멈춘다. 이때 우리의 피부에는 압력과 온도 등 진동을 인식하는 수용기가 있다. 이 수용기를 통해 물리량이 측정된다. 이들은 다시 전기적 신호로 바뀌어 옆 신경세포를 전달하며 '뇌'까지 가서 닿는다. 결국 모든 것은 우리 내부의 전기적 신호가 만들어낸 이미지일 뿐이다. 이것은 외부의 존재와 관련 없다. 오감을 통해 존재라고 확신하는 것들은 거의 대부분 '전자신호'다. 그렇다면 컴퓨터 속에 존재하는 빨간 사과 또한 같은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 둘다 '전자신호'의 해석으로 이뤄진 것이다.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실재인가. 알 수 없다. 양자 역학의 아버지 '닐스 보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론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만난 적 있다. 양자 역학은 '관찰자'의 중요성을 말한다. 고로 관찰자가 보지 않으면 '달'은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은지 알 수 없다. 실제로 앞서 말한 것처럼 전자는 입자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하다. 신기하게도 관찰자가 관찰하면 그것이 입자로 존재하다가, 관찰자가 관찰하지 않으면 그것은 파동이 된다. 이 말을 아인슈타인은 이해하지 못했다. 전자는 또한 양성자를 돌고 있지 않으며 파동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가 관찰자가 관찰하면 그때서야 입자가 된다. 고로 전자가 어느 곳에서 관찰될 지는 확정 지을 수 없으며 어느 곳에서 발견될지 확률로만 존재한다. 고로 사과는 여기에 있을 수도 있고 혹은 없을 수도 있으며 중국이나 미국에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오로지 확률로만 존재한다.

이에 아인슈타인은 말한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네." 이에 닐스보어는 말한다. "신에게 이래라 저라래 하지 마시오." 모든 것은 확률적 가능성으로만 있다가 그것을 관찰하면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그렇다고 존재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알 수 없다. 가장 작은 입자라는 '원자'는 앞서 말한 것처럼 양성자와 전자로 이뤄졌다. 전자는 입자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하다. 백번 양보하여 전자를 입자라고 보더라도 원자는 '물질'이라고 보기 힘들다. 원자를 구성하는 원자핵과 전자는 그 둘을 제외하고 나머지 99.999%가 텅빈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슨 말인고하면 원자핵 하나의 크기를 축구공이라고 해보자. 그 경우 전자는 고작 먼지 크기 밖에 되지 않으며 그 거리는 서울 시청에서 수원쯤 된다. 고로 원자는 서울 시청에 있는 축구공 주변을 부유하는 먼지이 공간 비율을 갖는다. 결국 '사과'는 공간이다. 사과를 구성하는 99.999%는 빈공간이며 그것은 나의 손, 나의 발, 달, 지구를 포함하여 모든 것이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세상은 이처럼 모두 비워져 있다. 또한 물질이라는 것도 굉장히 불안정적이다. 빈 공간이라는 것은 물질과 반물질의 쌍입자가 순간적으로 생성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현상이다. 즉 멀리서 지켜 보기에 그저 0일 뿐이지만 그 0을 확대하면 무수한 1과 -1이 순간적으로 생겼다가 사라졌다를 반복하며 다시 0이 됐다가 다시 1이 됐다가 -1이 되길 반복한다. 스티븐 호킹 박사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양의 에너지와 음의 에너지 총합은 0이다'라고 했다. 엄청나게 출렁거리는 양의 에너지와 음의 에너지 사이에서 우리는 아주 가까스로 양의 에너지를 움켜 쥐고 그것을 존재한다고 믿고 사는 것이다. 그것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끓는 물의 거품이 오르고 내리는 것을 보며 그 거품은 존재하는 실체인지를 따져 묻는다면 알 수 없다고 답할 것이다. 그것은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환영일뿐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신호로만 존재한다. 그것은 관찰자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그것이 과연 가상 현실과 다를 바는 무엇인가. 이에 일론 머스크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가상현실이 아닐 확률이 10억분의 1이라고 했다. 많은 과학자들 또한 시뮬레이션 우주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모든 정보로만 존재하는 혹은 존재한다고 할 수 없는 존재들이 채워진 세상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모든 것이 '무'하다는 노자, 모든 것이 '공'하다는 붓다, 모든 것이 확률이라는 양자역학, 모든 것은 0이라는 스티븐 호킹. 왜 모든 현자는 모든 것이 공간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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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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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전쟁, 프랑스 종교전쟁, 30년 전쟁 등 역사적으로 전쟁과 분쟁은 종교를 표면상의 이유로 갖는다. 세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흐름을 바꿔 놓은 사건들도 보면 대체로 종교적인 이유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개종 선언을 하면서 인류 역사는 아주 빠른 속도로 변화했다. 세계사에서 종교는 이처럼 엄청난 영향력을 가졌지만 중국, 일본, 한국에서는 '종교전쟁' 혹은 '분쟁'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지리를 보면 동양은 아래로 태평양과 인도양을 갖고 있다. 서양은 아래로 아프리카 대륙을 갖고 있다. 태양광이 지구를 가장 가깝게 내리쬐는 부근은 적도다. 적도 부근은 복사열을 가장 많이 받는다. 동양 대기는 고로 습하고 수증기를 많이 함유한다. 서양의 대기는 아프리카로 건조 기후에 영향을 받는다. 아프리카 북부는 강수량 보다 증발량이 많으며 일교차가 심하다.

1그램당 밀의 열량은 3.5~4.0칼로리, 쌀의 열량은 3.5~3.7칼로리다. 일반적으로 열량의 차이가 크지 않다. 다만 1헥타르 당 수확량을 비교하면 다르다. 1헥타르당 밀은 820kg가 생산되는 반면 쌀은 1헥타르 당 1440kg가 생산된다. 농업 방식의 차이도 있다. 쌀과 밀의 가장 큰 차이는 '이어짓기'다. 쌀의 경우 이어짓기가 가능하다. 반면 밀의 경우 새로운 경작을 위해 농지를 갈아 앞어야 한다. 종자대비 수확량도 다르다. 종자 1kg을 뿌리면 밀은 10배를 수확할 수 있다. 같은 무게의 종자를 뿌렸을 때 쌀은 120배를 수확할 수 있다. 결국 같은 면적에서 쌀은 압도적으로 생산성이 높다. 다만 문제가 있다. 강수량이다. 연간 강수량이 1000mm가 넘으면 벼농사가 가능하다. 다만 그 이하일 경우 벼농사가 어렵다. 고로 이하의 지역에서는 밀농사가 유리하다.

여기서 차이가 발생한다. 벼농사는 물이 어느 정도 고여 있는 논에서 자란다. 고로 관개 물대기는 벼농사의 필수요소다. 적절한 물이 꾸준하게 공급되기 위해서는 땅에 물길을 만드는 작업을 해야한다. 여기에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물길 주변에는 사람이 살아간다. 벼농사는 앞서 말한 것 처럼 이어짓기가 가능하다. 한해 이모작, 삼모작이 가능하여 경우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수확량을 반복적으로 얻는다. 이 지역에서는 당연히 운반을 위해 '인간'과 '소'가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집단을 형성하면 적잖은 수확량을 보장 받는다. 최초의 쌀농사는 '중국'이 아니라 '한반도'다. 한반도에서 쌀농사가 이루어진 것은 대략 2만년 전 정도 된다. 집단에서 이탈된 이들은 대체로 굶어 죽거나 영양상태가 좋지 못했기에 자연선택적으로 걸러진다. 집단생활에 최적화 된 이들이 자연선택적으로 후손에 유전자를 전이 했음으로 결국 동양은 '관계형성'이 대체로 고대부터 형성됐다. 친족관계의 여성을 부르는 말이 서양에서는 'aunt' 하나인 반면 한국에서는 고모, 이모, 숙모 등으로 분류된다. 이들을 이어주는 가장 큰 매개는 '피'다. 고로 낳고 길러준 이가 아니더라도 '어머님', '아버님', '할아버지'라는 호칭이 보편화되고 같은 핏줄이 아닌 이들에게 '누나', '오빠' 등의 호칭이 일반화된다.

서양은 다르다. 밀농사의 경우 자연 강우에만 의존하면 된다. 혼자서도 관리가 가능하다. 수확량이 폭발적이지 않기 때문에 타인의 노동력이 필요치 않다. 누군가에게 '인간'에 비해 '소'는 크게 중요치 않다. 소를 신성하게 여기는 '쌀농사' 지역에 비해 '밀농사'지역에서 '소'는 노동력이 아니다. 다만 쌀에 비해 영양가가 낮은 이유로 이들은 소를 통해 우유와 고기를 얻었다. 건조한 기후탓에 밀은 대체로 가루화 하여 장기간 보관할 수 있었다. 밀가루는 우유와 적당히 섞어 불에 구우면 먼 거리로 이동이 가능하여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었다. 먼거리를 이동하여 전쟁을 치루기 위해서 '동양'의 경우, 농지로부터 '보급'이 필수적이다. 서양의 경우 언제든지 먼 거리를 이동하여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전쟁 수행이 용이했다. 당태종이 고구려 침공을 위해 동원했다는 200만의 군사중 100만은 보급병으로 추산된다. 다만 유럽인은 보급없이 바다에서 수 개월을 항해하면서도 생명유지가 가능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단체 생활을 하던 동양은 고대부터 빠르게 중앙집권 국가체제를 형성했다. 서양은 다르다. 서양은 동양과 유사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수립해 본적이 없다. 타인을 결집하기 위해서 연결성 없는 다수를 하나로 연결할 매개체가 있어야 한다. 대체로 동양은 이것이 필요없었다. '먹고 사는 문제'가 결집을 이미 해결했기 때문이다. 서양은 다르다. 서양인들을 결집하기 위해, 공통적인 믿음이 필요했다. 공통적인 믿음은 '하나'라는 결집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이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이다.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어떤 의미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애초에 로마는 외래신을 받아들이기도하고 독자적인 신을 만들기도 하는 다신교 국가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거대한 제국의 결집 부족을 봤다. 그는 시간이 흐르며 '동부'가 경제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로마가 워낙 거대한 제국이다보니 점차 제국의 동부과 서부지역의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차이가 벌어진다. 결집이 잘된 동부지역은 도시화가 쉽게 이루어졌으며 무역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반면 서부지역은 찾은 분쟁과 갈등, 전쟁이 있었다.

그 시기 콘스탄티누스는 동방의 작은 유대인들의 종교를 유심하게 지켜봤다. 기독교다. 그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로마가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유대인들만의 작은 종교는 동과 중앙, 서로 빠르게 확산됐다. 애초 유대인들의 토착종교였던 '유대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분화된다. 시기를 서기 1년으로 본다. 유대교가 시작된 중동에서 서기 600년 쯤 '무함마드'가 나타나다. 이것이 이슬람교의 시작이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같은 성경을 기본으로 같은 신을 믿는다. 연필을 두고 일본에서는 '엔삐쯔'라고 부르고 미국에서는 '펜슬'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명명의 차이이지, 하나님과 알라는 같다.

이슬람과 기독교는 같은 뿌리를 갖고 있지만 굉장히 다른 차이가 있다. 이슬람에서 '신'은 하나다. 유일신이다. 이슬람을 창시했다는 '무함마드' 자체도 인간이다. 그는 예언자일 뿐이지, 인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르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신성'과 '인성'을 둘 다 가졌다고 본다. 이는 이슬람교에서 극도로 경계하는 '다신교 논리'다. 성당과 교회를 가면 그 앞에는 '성모마리아 상' 혹은 '예수 상'이 있다. 이슬람 사원에는 '무하메드 상'이 없다. 이슬람에서 보기에 오롯이 유일신만 숭상하겠다는 믿음을 유럽인들은 저버린 것이다. 이 갈등은 대체로 뿌리가 깊다. 대체적으로 우리의 시선은 '서양'에 맞춰져 있다. 이슬람인들에 대한 '이슬라모포비아'가 우리에게도 만연하다. 테러와 차별, 전쟁 등 좋지 못한 공포심이 있다. 이는 상대 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생긴다.

프랑스는 대표적인 카톨릭 국가다. 대체적으로 동쪽으로 갈수록 결집에 유리한 유전인자가 남아 있다. 우리가 대체로 공감하지 못하는 것 중 하나는 '반유대주의'도 있다. 우리의 경우 '유대인'에 대한 이미지가 나쁘지 않지만 서양으로 가면 반유대주의는 적잖게 들리는 차별용어다. 이들은 대체로 잘 결집하는 성향이 있다. 현대 민주주의는 분산된 표보다 결집된 표에 유리하다. 민주주의는 고로 프랑스를 이슬람화한다는 설정의 소설이다. 프랑스에서는 꽤 사람들이 공감하는 주제다. 다만 종교가 일상생활과 크게 연결되지 않은 우리에게 '종교 갈등'라는 이야기가 조금 이색적으로 보여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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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혁명 - 완전학습 자동화로 진짜 배움의 시대가 온다
이효정 지음 / 라온북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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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2차원이다. '선'이다. 말도 2차원이다. '선'이다. 좌에서 우로 정보가 나열된다. 줄줄이 늘어나는 정보들을 보면 인간은 대체로 피곤함을 느낀다. 인간 대부분에게 '문해력'이 없는 이유다. 문해력이란 2차원으로 된 정보를 3차원으로 변환하는 작업이다.

대략 400만년 전 '오스트랄로 피테쿠스'가 두발 보행을 했단다. 최초의 화석인류다. 이후 3,994,000년 동안 인류는 '문자'없이 살았다. 이후 나온 문자라고 해도 고작 '쐐기문자'로 거의 회계를 기록하는데 사용한 것이 전부다.

인간 뇌의 진화과정을 보며 글을 읽는 인간이 '똑똑하다'라고 할 수 없다고 확신이 든다. 그러나 책을 읽는 인간에 대한 현대인들의 인생은 몹시 좋다. 책의 기본이라고 하는 '글'은 아주 불친절한 정보 저장 매체다. 이유는 단순하다. 인간은 6000년을 반올림한 400만년 동안 공간 기억하도록 진화했다. 인간의 기억은 3차원을 저장하도록 진화했지 2차원을 저장하도록 진화하지 않았다. 그런데 글과 말은 2차원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공부법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공부법은 간단하다. 2차원 '선'으로 된 정보를 '3차원'으로 바꿔 이해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암기해야 할 내용이 있으면 커다란 전지에 외워야 할 정보를 '마인드맵'으로 그렸다. 그것은 아주 효과적이다.

책이나 교과서 목차를 살피면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제목, 대주제, 소주제, 키워드. 그리고 목적

대체로 이렇다. 제목은 전체를 아우른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제목은 크게 이야기한다. 이후로 커다란 대주제가 나눠진다. 대주제 하위로 소주제들이 이어진다. 소주제 이후로 키워드가 나온다. 대체로 사람들은 책을 피면 그것을 좌에서 우로 이해한다. 그것은 잘못됐다.

커다란 전지 가운데 제목을 적어보자. 제목은 4~5개의 대주제 가지를 친다. 4개의 가지에 4~5개의 소주제 가지를 친다. 각 소주제 가지에 하나의 키워드들을 적는다. 그렇게 그림으로 그리고 나서 가장 상위에 '목적'을 쓴다. 왜 그것을 알아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그것을 그리고 나면 어두운 공간이 환하게 밝아진다. 공부 시작 전에 맵 전체가 밝아진다.

'black sheep wall'

이것은 스타크래프트의 치트키 중 하나로 맵의 시야 전체를 밝힌다. 맵 전체를 밝혔다고 반드시 게임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지만 어두웠던 화면이 훤하게 비춰지면 아주 수월하게 게임에 임할 수 있다.

어두운 화면에서 한치 앞 정도를 살피며 임하는 것보다 전략적으로 우수하다. 이로써 1차원적인 게임의 화면을 3차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 보이지 않던 것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진다.

스타크래프트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 쯤 나왔던 것 같다. 이후 스타크래프트는 국민 스포츠처럼 됐다. 잘 하는 사람과 못 하는 사람이 구분됐다. 게임에 시간을 많이 투자한 이들은 게임을 잘했고 적게 투자한 이들은 실력이 형편 없었다. 그 뒤로 수년이 지났고 언젠가부터 '빌드오더'라는 것이 등장했다.

'일꾼'이 8마리가 되면 '배럭'이라는 것을 짓고, 9마리가 되면 서플라이 디팟을 짓고...

이런 식이다. 이런 빌드오더는 아주 촘촘하게 짜져 있었다. 결국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과 격차가 급격하게 줄었다. 단순한 빌드오더를 배우기만 하면 누구든 중급자 이상의 실력을 가질 수 있었다. 다만 모두가 빌드오더를 적용하고 있어도 역시 실력 차이가 등장했다. 빌드오더를 적용하면 중급자까지는 쉽게 올라 갈 수 있어도 그 이상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적잖은 연습이 필요하다. 이것이 학습과 닮았다. 가르치는 것은 빌드오다다. 그것을 얻었다고 실력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빌드오더 정도를 주는 것이 '가르치는 자'의 역할이다. 모두가 중급자가 되면 다시 분야는 상향 평준화가 된다. 그때는 '빌드오더'는 기본일 뿐이다.

'티칭'의 teach는 고대 게르만어 어족의 영향을 받았다. 이 단어의 최초 어원은 '보여주다', '설득하다', '선언하다'와 같다. 즉, 이는 주는 쪽의 일방적인 행위다. 배우는 쪽에서는 역시 수동적으로 받아 드릴 수 밖에 없다.

'코칭'의 coach는 사륜마차를 가리키는 코치에서 비롯됐다. 목적지까지 사람을 운반하는 일이다. 이것은 주는 쪽과 받는 쪽이 함께 같은 방향으로 움지기며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도록 인도한다는 의미로 바뀌었다.

'쪽집게 선생님'은 이제 존재하지 못한다.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분석한 인공지능의 정보가 더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층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얼마 전까지는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은 꽤 능력자였다. 특히 택시를 운전하는 이들 중 지리에 빠삭한 이들은 더 빠르고 효과적인 경로를 찾아낼 수 있었다. 경로를 빠르게 찾고 지리를 잘 아는 것은 '본질적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네비게이션'의 탄생으로 사라졌다. 기계가 생기면 직업군의 능력은 평준화 된다. 이번에는 '교육쪽'이다.

한창 '가르치는 기술'이 중요하던 시기, '쪽집게 강사'라는 말이 유행했다. 가르치는 기술이 중요하던 시기에 잘 가르치는 선생님을 찾아 학생과 학부모는 따라다녔다. 이제 가르치는 기술은 중요치 않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가르치는 강사들의 강의는 '유튜브'에서 공짜로 찾을 수 있다. 결국 본질은 '가르치는 것'에서 벗어났다. 네비게이션이 나왔다고 택시 기사라는 직업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네비게이션이 나오자, 택시 기사라는 직업의 능력에 평준화가 이뤄졌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교육산업은 저출산으로 인해 큰 위기에 놓여 있다고 한다. 다만 생각해보면 이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저출산으로 인구가 줄어 큰 위기에 놓여지지 않은 산업군은 어디에 있을까. 인구절벽으로 위기에 놓였기 때문에 교육산업의 전망이 어두운 것은 아니다. 교육은 결국 정보 전달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간의 관리다. 가르쳐 주는 것 없어도 아이돌 공연장은 사람이 바글거린다. 결국 교육 또 다르지 않다. 능력의 유무가 아니라 '매력'의 유무가 결국 교육업을 결정할 것이라 생각한다. 학생은 친족이 아닌 어른을 만날 기회가 적지 않다. 꽤 매력있는 스토리텔링이 있는 스승을 스스로 찾아 다닐 것이다. 또한 스스로의 방향을 잘 이끌어줄 '코치'를 찾아 다닐지 모른다. 사실 학습은 스스로 하는 것이다. 누가 가르쳤다고 잘 잘하고 못하는 성격이 아니다. 대체로 배움은 일이고 연습이 99의 싸움이다. 결국 만남을 지속하고 싶은 '매력있는 강사'가 인기 강사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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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은 흐른다
로랑스 드빌레르 지음, 이주영 옮김 / FIKA(피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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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유대인들은 사구로 둘러 쌓인 사막 한 가운데서 위치를 확인하고자 했다. 동서남북 어디를 봐도 똑 같은 모양의 사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광경은 그들의 일부를 말라 죽도록 했다. 사막에서 길을 잃으면 대체적으로 말라 죽는다. 황량하고 넓은 사막은 방위를 알 수 없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만큼이나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없도록 한다.

시련은 '사막'에서 달련됐지만 '바다'에서 사용됐다. 유대인들이 사막을 횡단하기 위해 사용했던 태양과 별관측법을 익혔다. 하늘을 살피고 별의 위치를 살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했다. 목적지를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기원전 3세기, 중국에서 자석의 특성을 이용하여 방위를 알려주는 도구가 발견됐다. 그것을 유대인들은 '사막'에서 사용했다. 대체로 11세기 초 송나라 시기에 중국인들은 이것으로 방위를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13세기 그것은 '사막'의 아랍인들에게 필수품이었다. 사막에 사는 이들이 사용하던 그 물건이 15세기 유럽인들에게 넘어가면서 '대항해시대'가 열렸다. 바다와 사막은 같은 원리로 사람을 고립시켰지만 같은 원리로 모든 것을 연결시켰다.

기본적으로 연강수량이 250mm 미만인 지역은 사막이다. 반대로 바다는 물로 넘쳐 난다. 엄청나게 극과 극인 바다와 사막이다. 역시나 이 둘을 더욱 비교되게 하는 것은 '생명력'이다. 사막은 누가 뭐래도 '죽음'을 닮았고 바다는 누가 뭐래도 '생명'을 품었다. 이 둘은 이런 차이가 있어도 결국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막을 구분 짓는 기준은 '강수량'이다. 그런 이유로 일부 바다는 '사막'이기도 하다. 중국 남부에 위치한 '사해'나 퍼시아 만, 지중해, 호주 대부분의 해안은 건조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이 바다는 엄청나게 많은 물을 담고 출렁거리지만 결국은 '사막'이다. 대체적으로 이런 역설 덕분에 사람들은 바다를 선망의 대상으로 두거나 두려움의 대상으로 둔다.

제주에서 자라고 뉴질랜드에서 공부를 했다. 첫 해외여행지는 '일본'이었다. 살아온 배경이 '섬'이다. 어디든 쉽게 바다를 볼 수 있었다. 바다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단순히 감성적인 상태가 되기 때문은 아니다. 모든 바다는 출렁거린다. 그것은 '바람'의 영향이기도 하고 '달'의 영향이기도 하다. 살랑 살랑 거리는 바람은 몸에 묻은 무언가를 씻어 낸다. 촉각이 바람 샤워를 하면 '달'이 나선다. '달'은 지구를 빙글 빙글 돌며 공전한다. 달과 지구는 서로 끌어당기며 상호작용을 한다.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인력은 물을 출렁거린다. 물이 출렁거리는 모습. 거기에 '태양' 바다를 쏜다. 주로 백색을 띈 태양은 사실 다양한 색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다는 태양빛을 받아 산란시킨다. 이때 바다는 파란색 파장빛을 더 많이 산란한다. 태양이 바다를 '파란색'으로 만든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파란색을 보면 안정감을 갖는다. 파란색은 스트레스를 줄이고 집중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시력이 위안을 받고 나면 조력의 차이로 발생하는 파도소리가 귀로 들어온다. 들어오고 나간다. 다시 들어오고 나간다. 해변가의 파도소리는 인간의 호흡과 유사한 규칙과 리듬을 갖고 있다. 이 패턴 형성은 동조현상을 만든다. 파도가 연속적으로 소리를 자극한다.

들어오고 나가는 리듬과 반복은 들숨과 날숨을 닮아 마음을 안정화 한다. 이는 심장박동과도 같은 리듬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파도가 부서질 때 공기중의 물방울은 전기적으로 음이온을 갖는다. 대기중의 음이온은 공기를 떠다니가 다양한 입자와 반응하여 미세한 입자를 제거한다. 코로 크게 한숨 들이키면 이내 진정되는 이유는 바다에 서서 깊은 호흡을 할 때, 음이온이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을 분비하기 때문이다. 세로토닌이 분비되면 우울감이 감소하고 스트레스가 완화된다.

대체적으로 사람은 호흡이 틀어지며 긴장과 불안에 휩쌓인다. 촉각, 시각, 청각, 후각. 태양, 달, 바다, 바람 그런 것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작동하는데 치유가 되지 않을리 없다. 바다의 물결은 가슴을 채우고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호흡과 같다. 우피 골드버그는 '신이 얼마나 재능 있는지 잊게 될 때, 바다를 본다'라고 했다. 나에게도 바다는 그런 존재다. 아주 가문 어느 여름 정원에 물을 준 적이 있다. 그렇게 넓은 정원은 아니었지만 그 바닥을 조금 적시는데 한참의 물이 필요했다. 한참동안 땡볕에 서서 골고루 물을 뿌려도 그 땅의 표면을 적시기 무리였다. 가문 날이 며칠 지나고 소나기가 내렸다. 1분 정도, '쏴'하고 내린 소나기는 정원을 흠뻑 적셔버렸다.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그것을 느끼게 됐다. 정원을 적신 물이 얼마나 내렸는지 감이 잡히지도 않는데, 바다를 보면 그것이 넘쳐 흐른다. 그것을 보면 자연과 신, 삶에 대한 경이로움이 느껴진다.

커다란 욕조에 검은 물감 한방울 떨어 뜨리면 금새 사라져 버린다. 그 위대한 덩어리에 무릎 꿇을 정도로 감탄할 수 있다. 바다가 품고 있는 그 무한대에 가까운 그것. 그것이 꼭 뭐든 품어줄 것 같다. 어떤 더러운 것을 바다에 뿌려도 바다는 그것을 품어 낼 것만 같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 어머니와 바다에 놀러 다니곤 했다. 바다에 수영을 하다가 화장실이 가고 싶을 때, 거기에 소변을 누어도 전혀 오염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품어주는 바다는 성인이 되서 가만히 내 걱정과 스트레스, 불안도 품어준다. 아주 지저분한 머릿속 스트레스를 바람이 앗아가 바다에 희석해 버리면 바다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호흡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듣기만 하며 호흡과 박동 소리만 들려준다. 그것은 '사막'을 닮았다. 시련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막은 시련이 아니었다. 투정 부렸지만 지나고 나면 이유 있던 어머니의 말씀같다. 바다는 다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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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경찰의 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하빌리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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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단편 소설. '히가시노 게이고'의 '교통 경찰의 밤'이다. 자동차 사고와 관련된 여섯가지 이야기가 섞여 있다. 개중 '건너가세요'라는 소설이 기억에 남는다.

노상에 불법으로 주차한 차에 관한 이야기.

별거 아닌, 다른 이들도 모두가 지키지 않는 그런 법에 관한 이야기다. 1인당 자동차 보유대수 전국 1위. 내가 살고 있는 제주도다. 자동차 보유대수가 많은 것은 단순히 자산가가 많아서가 아니다. 불편한 대중교통 때문이다. 게다가 제주인들은 농사를 겸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트럭'이 필수적이다. 제주도 전체 가구 중 2대 이상의 차를 소유한 가구가 33.4%라니 말 다했다. 제주에서 차가 없으면 굉장히 불편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제주 시내, 서귀포 시내를 다닐 때 차를 가지고 나가면 굉장히 불편하다. 바로 주차난이다. 교통수단이 불편하여 차를 끌고 나갔는데, 세울 곳이 없어 같은 자리를 빙글 빙글 돈다. 차 세울 곳이 없어서 한참을 돌면 겨우 한 자리를 찾게 된다. 노상 주차다. 틀림없이 불법주차겠지만 그마저도 자리찾기 힘들다. 자리가 나면 바로 누군가가 그 자리를 채운다. 불법노상 주차도 대기 순서가 한참이나 밀려 있다. 언젠가 노상에 불법 주차한 자동차 때문에 소방차가 진입하지 못하여 큰 사고가 있던 적 있다. 한 번은 좁은 골목에 들어선 적 있다. 골목 오른쪽과 왼쪽은 이미 빽빽하게 노상주차게 되어 있었다. 그 골목의 중간에는 '클린하우스'라는 간이 분리수거장이 있다. 그곳에 트럭이 모호하게 주차를 했다. 클린하우스 바로 앞에 바짝 붙여서 주차를 한 것이다. 클린하우스에는 '주차 금지' 표식이 있었다. 지나갈 수 없게 길을 막고 있는 트럭에는 전화번호도 없었다. 그 자리에서 꽤 시간을 허비했다. 주이은 나타나지 않았다. 차 앞유리와 옆유리를 살펴보다가 결국 중요한 약속 시간에 늦고 말았다. 너무 화가나 다시 일을 마치고 그곳에 갔다. 트럭은 이미 온데간데 없었다.

이에 해당 담당 부서에 전화를 걸었던 적 있다. 그때 조금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주차 '금지 표식'은 있지만 강제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권장사항이란다. 말문이 막혔다.

"그럼 정말 급할 때는 '클린하우스'에 차 세워도 불법은 아닌 건가요?"

그러자 담당 공무원은 답했다.

"네. 세우셔도 불법은 아니세요. 그냥 권장 사항이고 시민 의식에 기댈 뿐이지, 법적 강제성이 있는 건 아니에요."

"급할 때는 세워도 된다구요?"

"불법은 아닙니다."

법이 그렇단다. 물론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른다. 그 뒤로 실행에 옮기진 못했지만 클린하우스를 볼 때마다 그 대화가 생각난다.

법이라는 것이 모두 지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알게 모르게 불법인 것들은 사실 굉장히 많다. 흔히 젊은 층에서 자주하는 '타투'는 대부분 불법이다. 현행법상 '타투'는 불법의료행위'에 해당된다. 취미로 향초나 디퓨저를 만들어 결혼식이나 기타 행사에 선물로 나눠주거나 친구에게 주는 경우도 있는데 이또한 불법이다.

"도를 아시나요?", "좋은 말씀 전하러 왔어요."

포교 행위를 거부한 자에게 재차 활동을 지속하는 경우도 불법이다. 고양이나 강아지를 무턱대고 분양 받는 것도 불법에 해당된다. 모든 법을 전부 지키고 살 수는 없다. 고로 '법대로 한다'는 것은 대체로 합리적인 인간처럼 보여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그 작은 불법이 큰 문제를 야기했을 때 상황은 달라진다.

소방차 진입을 막은 불법 주차 때문에 사망사고가 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난다. 모두가 짓는 가벼운 범법이지만 이로 인해 큰 사고로 이어지면 그때는 지은 법의 크기보다 더 큰 크기의 부담을 앉고 살아가야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읽으면 단순히 재밌고 흥미로운 이야기만 채워져 있지 않다. 작가 게이고가 생각하는 다양한 사건과 생각도 읽어 볼 수 있다. 작가가 글을 쓸 당시에 논란이 되는 '일본'의 어떤 사건들이 언급된다. 게이고의 소설을 보면 나이 많은 이들에게 없는 물건을 팔아 치우는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간혹 나온다. 아마 이것은 '도요타 골드'에 관한 이야기로 보인다. 도요타 상사에서는 실제로 '도요타 골드'라는 것을 판다. 실제 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순금 패밀리 증권'을 판다. 실제 금이 아닌 증서를 판매한다. 이런 영업은 규모를 키워 대략 3만명의 노인들에게 대략 7500억 상당의 금괴증서를 강매 했다. 60개 영업소에서 직원 7000명이 이 일을 함께 했다. 이들은 없는 것을 있다고 하여 팔았는데, '도요타 상사'는 '도요타 자동차'와는 별개의 기업으로 '도요타'라는 대기업의 이름을 이용하여 '신뢰'를 얻고 노인들로 하여금 큰 돈을 벌었다. 또한 장기이식에 대한 일본의 법 부재와 비효율, 다양한 이해관계와 생각할 거리도 던진다. 가벼운 마음으로 추리 소설을 읽으면서도 작가가 이야기의 영감을 받은 소재에 함께 몰입하며 여러가지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소설은 '윌라 오디오북'을 통해 들었다. 최근 눈이 뻑뻑하고 일과가 바쁘다보니 오디오북으로 소설을 듣는 시간이 많아졌다. 모쪼록 성우들의 연기력으로 볼 때, 게이고의 소설 중 단편은 '오디오북'이 재밌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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