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기억의 도시 - 건축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공간과 장소 그리고 삶
이용민 지음 / 샘터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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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1800년, 뉴욕의 인구는 6만명이었다. 이 정도면 현재 충남 아산시 배방읍 인구보다 2만명이나 작다. 이런 뉴욕은 50년만에 인구가 60만명으로 성장하고 다시 50년 뒤에는 400만에 가까워진다. 다시 50년이 지난 1950년에는 1200만명의 거대 도시가 된다. 이렇게 도시가 급격하게 성장하자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

상하수도의 문제 뿐만 아니라 '공간'에 대한 갈증이 일어난다. 뉴욕시는 이런 수요가 불러 일으키는 갈증을 해소해야 했다.

마침 19세기 초, 영국의 벽돌공, 조셉 애습딘은 구운 석회석과 점토, 가소(Calcine)을 섞어 시멘트 가루를 발명하다. 그것이 '포틀랜드 시멘트'다. 포틀랜드 시멘트는 빠르게 굳고 높은 강도를 가진 재료로 이후 건설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시멘트는 단단하지만 열에 의한 팽창으로 깨지기 쉽다. 간혹 뜨거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이되면 깨져 버리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그러다 프랑스 공학자인 프랑소와 코그넷은 19세기 중반, 인류 최초의 철근 콘트리트 건물을 만든다. 무슨 말인가 하면, 철근 프레임에 콘크리트를 붙여 조금 더 단단한 구조물을 만드는 것이다. 이후19세기 후반에는 프랑스 정원사였던 조셉 모니에르가 콘크리트에 철망을 삽입하는 방식을 개발하는데 그것이 철근 콘크리트 시스템의 토대다. 철근과 콘크리트를 함께 쓰는 공법은 생각보다 아주 기가 막힌 우연으로 가능한데, 철근과 콘크리트의 열팽창계수는 거의 똑같다. 거기에 배합 비율에 따라 그 차이는 더 줄어들 수 있다. 콘크리트는 철근을 감싸고 있기에 산소에 의한 부식이 적어지고 되려 콘크리트의 주 성분인 탄산칼슘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여 그나마의 철근 부식도 막아준다. 이런 기가 막힌 우연의 궁합으로 인류는 인장력이 높고 내구성이 좋은 건축물을을 짓게 된다.

뉴욕의 인구 증가는 이처럼 '건축공학'의 발달이 한몫했다. 건축공학이 때마침 발달하면서 뉴욕은 수평구조로 넓어지는 기존 도심들의 구조적 문제에서 벗어난다. 2차원 평면의 도시가 수직으로 공간활용을 하면서 더 넓은 공간을 활용하는 도심으로 탈바꿈된다. 이 과정에 문제가 발생한다. '수평 구조'의 공간 활용에서는 '자동차'가 이용됐지만 '수직 구조'의 공간 활용에서는 이동 수단이 마땅치 않은 것이다. 이에 획기적인 운송수단이 생겼다. 일상상활에서 우리는 가끔 'OTIS'라는 단어를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에 호기심을 갖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눈썰미가 있는 이라면 한번쯤 본 적 있을 것이다. 엘리베이터 앞에서다. 1853년 미국의 엔지니어인 엘리샤 오티스는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를 제조한다. 이런 제조 공법은 수직 공간 활용에 박차를 가했다. 이런 공학적인 발전을 적극 받아들여 뉴욕은 아주 빠른 속도로 인구를 수용하고 거대 도시로 탈바꿈 된다. 이 과정에서 뉴욕하면 떠오른 높은 빌딩, 마천루가 탄생한다. 1931년에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완공되어 뉴욕의 랜드마크로 자리잡았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높이 381미터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다. 이어 1970년에는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완공되었고 2013년에는 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지어진다. 이처럼 뉴욕이 엄청난 수용력을 자랑하는 도시가 됐을 때, 그것을 상징하는 다양한 상징물들도 함께 따라왔다. 다만 19세기 중반 뉴욕이 빠른 속도로 산업화 되고 도시화 되면서 도시의 시민의 생활 환경이 약화됐다. 1850년 뉴욕의 성장이 본격화 됐을 때, 시민을 위한 자연과 레이크레이션 공간이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1857년 대규모 경쟁 설계 공모전을 개최한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건축가이자 조경 디자이너인 프레더릭 로우 올름스테드와 칼베르트 바우스의 디자인이 선택되면서 뉴욕의 가장자리에 커다란 공원이 자리 잡는다. 이 공원은 소풍, 공연, 자전거 타기, 그림 그리기 등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어 시민들의 삶의 만족도 높였다.

뿐만아니라 급격한 인구의 증가는 상하수도관, 도시 행정, 전력 및 수도 공급 등 당양 문제를 야기했고, 이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간 뉴욕의 도시 행정은 다른 국가들의 모델이 된다. 도시의 성장을 보면 그것이 개인의 성장과도 닮았다.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으면 역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문제가 일어나고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성장을 발생한다. 다시 말해서 문제가 일어나지 않으면 성장은 일어나지 않으며, 반대로 문제가 일어난다는 것은 성장을 하고 있는 과정이기도 하다. 현재 뉴욕주의 인구는 1984만명이다. 6만명의 도시가 2세기만에 330배 성장하여 2000만 명에 가까운 도시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문제를 맞이하고 그것을 성장했는지를 보면 과연 뉴욕의 문제 해결 역사가 성장의 역사와 다르지 않다고 볼 수도 있겠다. 현대 많은 이들의 동경의 대상이 된 이유는 그 뒤에 있는 수많은 문제와 해결의 반복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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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섬에 꽃비 내리거든
김인중.원경 지음 / 파람북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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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바람이 불고 눈, 비가 내려도 햇빛이 똑같이 비춰도 다르게 보일 때가 있다. 어느 창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렇다. 창안의 온도가 어떤지에 따라 그렇다. 창을 바라보는 마음이 어떤지에 따라 그렇다. 훈훈한 창 안쪽에서 가족들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다 바라보게 되는 창 밖 풍경은 눈보라 마져도 따뜻하게 보인다.

어릴 때는 단풍을 보며, '빨갛구나' 하다가, 젊을 때는 '예쁘구나.'하다가, 나이가 조금 들어서는 '덧 없구나'하고 느끼는 걸 보면, 같은 걸 보고도 다르게 느끼는 것이, 무엇을 보느냐의 문제만은 아닌듯 하다.

천둥치고, 벼락이 떨어지는 무시무시한 날에는 방음된 샤시문을 닫고 평온함을 느낀다. 무서운 비바람과 천둥 번개에도 보호 받는 안정감이 때로는 날 맑을 어느날 보다 더 차분해진다. 가만히 서서 창을 바라보면 거기에는 사람들이 지나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때로는 시간이 흘러 지나가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그 모든 것의 관찰자가 되어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사람의 눈은 마음의 창이라 하여, 언제고 밖을 비추고 있다. 눈안은 때로 창과 닮아, 그것을 지켜보는 나를 숨겨주는 곳이다. 나는 눈이 비추는 세상의 안쪽에서 적막하고 고요한 상태로 밖을 바라본다. 그것이 무엇을 비춰도 '그렇구나' 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되면, 밖으로 천둥과 번개가 치고, 때로는 비가 와서 외꺼풀 피부와 옷을 적셔도 눈 안쪽, 내면의 나는 고요하게 그것들에 보호 받는다.

단풍이 빨갛다고 생각하든, 단풍이 예쁘다고 생각하든, 때로 단풍을 보며 덧 없다고 생각하든. 단풍에게는 사랑도 시기도, 탓도 하지 않으며 지금 내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살핀다. 밖을 스쳐가는 모든 자연의 원리가 변화무쌍이라 변화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것을 바라보는 안쪽의 원리도 변화무쌍이라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창밖의 모습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에 분노하지 않고, 창안의 내가 창밖을 보며 불안해 할 필요도 없다. 무엇을 바라 보고도 다르게 느낄 수 있고, 또한 그 내부가 차분하면 그 무엇을 바라보더라도 안정감을 갖는다.

원경 스님의 시, '창'에는 창을 내신 '그대'가 등장한다. 안전하게 나를 보호하는 외꺼풀에서 유일하게 밖을 볼 수 있게 내어 놓은 '창'도 누군가의 산물이기에 '창'을 내어주신 누군가를 축복하고 창의 안쪽에서 따뜻하고 안전한 내면을 만든 다른 누군가에게도 감사함을 느낀다. 누군가라면 어쩌면 '부모, 형제, 신, 연인' 누구라도 될 수 있고 그 여럿이 함께 일수도 있으나 그 고운 창을 내신 이의 손결을 축복한다.

계절이 흐르는 창에는

이웃의 일상이 흐르고

생각이 많을 땐

사유가 흐르고

휴식이 필요할 땐

차향이 피어나고

나의 기도가 깊어질 땐

빛빛마저 모여든다

이 고운 창을 내신 그대

그 손결 빛나셔라

원경 스님의 시를 읽고 생각이 깊어진다. 원경스님의 글과 김인중 신부 님의 그림은 무지한 내면으로 들어와 빛이 된 듯하다. 어둠은 빛을 이긴 적이 없다. 창은 어두운 내부로 빛을 허락하는 유일한 창구이고 그 빛은 어떤 형태를 띄더라도 빛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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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달에 가기로 했다 -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NASA의 8가지 마인드셋
리처드 와이즈먼 지음, 박선령 옮김 / 리더스북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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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를 탈 때 생기는 불안감은 착각이다. 실제 비행기를 타고 있을 때보다 자동차를 타고 있을 때 사망할 확률이 100배는 더 높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할 때가, 하지 않을 때 보다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말 그대로 착각이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죽는 장소는 대개 집이다. 대부분의 살인 사건은 남이 아니라 지인에 의해 일어난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동차보다 비행기에 더 공포심을 갖고 집보다 밖에서 더 공포심을 가지며 지인보다 낯선 이에게 더 공포심을 갖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보통의 사람들은 사업이나 투자를 꺼려한다. '손실회피'다. 어떤 행위를 함으로써 얻게 되는 손실에 사람들은 민감하다. 반대로 어떤 행위도 하지 않을 때 얻게되는 손실에 대해서는 둔감하다. 거기에 대부분의 사람은 이익보다 손실에 더 크게 반응하는 경향도 있다. 2022년 기준 최저임금이나 공무원 임금 인상률은 물가상승률에도 미치지 못했다. 쉽게 말해서 사람들은 행위에 의한 손실을 크게 기억하지만 무행위에 의한 손실에는 무감각하다. 부동산, 주식, 코인을 비록한 자산 가치, 소비자물가를 모두 따져 봤을 때, 돈의 가치는 심각하게 떨어지며 이렇게 떨어진느 돈의 가치는 임금인상률을 크게 웃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무행위에 의한 손실에 무감각하다. 아무 일도 하

지 않다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날아가는 공을 안전하게 잡기 위해서는 공의 속도에 버금가는 정도로 달려 주어야 한다.

1961년 5월, 케네디는 의회에서 1960년대가 끝나기 전에 달에 사람을 보내겠다고 발표한다. 이런 야심차고 대담한 비전은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였다. 이런 목표설정을 하는 것은 자칫 스스로 리스크를 만들어내는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리스크가 사실 가장 안전한 길인 경우도 상당하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말했다.

"준비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실패를 준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가올 미래에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사실상 현상을 유지하고자 아무런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은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 일이며,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 것은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처럼 실패를 준비하는 일이다.

마크 트레인은 이에 대해 '개구리 식단'을 예를 들었다. 만약 개구리를 꼭 먹어야 한다면 언제 먹어야겠는가. 이에 대해 마크 트레인은 말했다.

"만약 개구리를 꼭 먹어야 한다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먹는 게 좋다. 또 개구리를 두 마리 먹어야 한다면 큰 놈부터 먹어라."

같은 맥락으로 나는 학창시절, 가지무침을 가장 먼저 먹었다. 이유는 가지무침은 내가 가장 싫어하던 반찬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시작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산적해 있는 일 중에 가장 쉬운 일을 첫 번째 과제에 두는 일이고 시작한 이후, 일의 부담을 줄이는 가장 훌륭한 일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가장 먼저 해치워 버리는 일이다. 고로 아침에 셋, 저녁에 넷이라는 것은 아침에 넷, 저녁에 셋과 전혀 같지 않다.

개인적으로 모호한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꿈이란 너무 모호하고 포활적인 개념이다. 누군가의 꿈은 '세계 평화'이고 누군가의 꿈은 지구인 1등 부자다. 이런 모든 꿈을 응원해 줄 수는 없다. 꿈이란 이루기 위한 대상이 아니다. 그저 꾸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서 꿈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다만 꿈을 이루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사람을 달로 보내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가졌다. 이후 그가 나사를 방문하여 한 청소부를 만난다. 이때 케네디는 청소부에게 이렇게 묻는다

"여기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그러자 청소부가 답했다.

"인간을 달에 보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꿈이란 그런 것이다. 만약 청소부가 사람을 달로 보내는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청소부는 자신의 일을 하면서 괴로움에 빠질 것이다. 다만 청소부가 꿈을 이루는 대상이 아니라 꾸는 과정으로 두었기에 그는 그 일에 자부심을 가졌을 것이다. 행동은 목적을, 가슴은 꿈을 행해라. 그렇게 한다면 당신이 청소부라 하더라도 인간을 달로 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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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레터 - 좋은 이별을 위해 보내는 편지
이와이 슌지 지음, 권남희 옮김 / 하빌리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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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일본소설은 좋아하지만 영화나 드라마는 좋아하지 않는다. 일본 특유의 '감성' 때문인데 뭐라 정확하게 표현하긴 힘들다. 이것은 취향의 영역인데, 언어 특성상 목소리톤이 대체로 높고 연기가 비교적 과하다고 느껴진다. 실제 일본인들을 만나면 그렇지 않은데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유독 그렇게 느껴지는 걸 보면 각 국민들이 극을 보는 취향의 차이 때문에 연기 방식에도 차이가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한국 드라마도 가끔 어색한 부분이 있어 집중하기 힘든 경우가 있긴 하다. 현실과 꽤 다른 말투와 제스처들은 현실적으로 너무 괴리감이 느껴질 때가 있다. 연기 방식이 어쨌건 분명한 것은 일본어 자체가 한국어 감성과 꽤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영상을 보다 보면 간혹 남녀를 불문하고 고개를 90도로 숙이는 장면이 나온다. 꽤 비슷한 감성을 가진 이웃국가지만 그 장면만 나오면 완전한 문화적 이질감이 생긴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 취향이고 주관적인 생각이다. 일본 소설로 어떤 작품을 먼저 접하면 전혀 문화적 이질감이 없다가도 영상으로 접하면 꽤 느껴진다. 고로 원작이 소설인 일본 영화는 언제나 실망하곤 했다.

1999년 영화 '러브레터'의 원작소설을 구매했다. 영화는 당시 꽤 유명했다. 설원에서 '오겡끼데스까'하며 외치는 영화 속 모습은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꽤 유행했던 걸로 안다. 매번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범인을 추리하는 추리소설만 보다보니, 꽤 잔잔한 이야기를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읽게 된 소설, '러브레터'는 읽으면서 영화로 어떻게 구현했을까, 호기심이 일어났다. 1999년이면 벌써 24년이나 넘은 영화다. 개인적으로 이 시절 감성을 좋아한다. 스마트폰도 없고 인터넷도 없던 시절. 우체통이 온전하게 자신의 역할에 바쁘던 그시절에 대한 향수도 일어났다.

마음만 먹으면 이름과 나이 정도만 알면, 그 사람의 사생활은 물론 생각까지 모조리 훔쳐 볼 수 있는 시대에 '잘못 전달된 편지' 한통으로 시작되는 묘한 인연은 매력적이다. 그것은 소설이 매력적인지, 그 시절에 대한 향수가 그것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분명 그 시절 우리는 헤어지고 나면, 다음에 보기까지 실제로 헤어지는 것이었으며, 떨어져 있는 시간에는 실제 '그리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감성을 가지고 살았다. 지금은 함께 있으면서 헤어지면서, 헤어지고 나서도 1분 단위로 상대의 행동을 알 수 있기에, '그리움'이라는 단어가 예전에 비해 많이 퇴색됐다. 심지어 죽은 이에 대한 과거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세상에서, 빈 공간, 빈 시간에 홀로 앉아 상대의 빈 시간과 빈 공간을 상상해 보는 일은 이젠 판타지 영역이 됐다.

'러브레터'는 죽은 애인에게 편지를 보내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시작한다. 죽은이에게 보낸 편지는 장난으로 시작했으나 죽은 이의 이름으로 답장이 오면서 반전을 맞이 한다. 죽은 이의 이름과 성이 같은 누군가와 갑작스럽게 시작된 펜팔. 죽은 이를 사이에 두고 추억을 끄집어내며 전개되는 이야기는 지금 우리에게 다시 오지 못하는 감성이 됐다. 모르는 이들과 너무 쉽게 소통하고 심지어 그들에 대해 뭐든지 알 수 있는 시대. 심지어 자신의 신상정보까지 모두 공개해두고 살아가는 시대에서 조심스럽게 묻고, 조금씩 떠올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 가까워져가는 이야기. 그때의 감성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일본 소설을 읽다가 너무 만족하면 앞서 말한 이유로 영화나 드라마를 찾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원작의 감성이 파괴될 것 같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다만 이 소설에 대한 영화의 평을 보니 꽤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고로 오늘 자기 전, 꼭 영화를 보고 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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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메의 문단속 신카이 마코토 소설 시리즈
신카이 마코토 지음, 민경욱 옮김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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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면서 감성이 변한 탓일까. 어릴 때에는 만화영화를 좋아했는데 좀처럼 보기 어렵다. 20대에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수 차례 돌려봤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그 속에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 다시 그것을 재해석 하는 재미는 같은 작품을 수십, 수백 번 보게 했다. 그러고 보니 20대 중후반에는 영화에 푹 빠져 살았다. 지금도 영화는 내 여가를 책임진다. 남들과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같은 영화를 여러번 돌려보며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그런 것들에 푹 빠져 지낸 시간이 길다. 그 긴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자면, 같은 것을 여러 각도로 생각해 보려는 습관일지 모른다. 만화는 영화와 다른 부분이 있다. 쉽게 말하면 장면의 모든 부분의 의도된 연출이라는 점이다. 영화의 경우, 모든 것은 연출이 아니다. 우연하게 발생한 바람, 배우의 머리카락 흘림, 지나가는 배역 등이 복합적으로 다양한 우연을 만든다. 다만 만화는 하나 하나가 모두 작가의 의도에 배제되지 않는다. 심지어 주인공의 머릿카락 하나까지, 작가가 의도해야만 움직인다. 작가의 의도는 '영화'보다 '만화'에 더 많이 담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렇게 정형화된 의도는 때로 갑갑함을 줄 때도 있다. 해석의 주체가 '작가'가 아니라 '독자'라는 점에서 '열린 해석'은 때로 그 작품을 더욱 재밌게 하는 순기능을 한다. 언젠가 이런 만화와 영화의 장점과 단점이 서로 단점과 장점이 되어 무엇을 멀어지게 만들고 무엇을 가까워지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만화에 빠져 산 것은 얼마 전인 것 같은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이제는 이 둘에서 더 발전하여 연극처럼 직접 해석자가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는 것에 매력이 느껴진다. 존 케이지의 4'33""는 아마 가장 유명한 쉼표로만 이루어진 음악일 것이다. 이 음악은 존 케이지가 1952년에 작곡한 작품으로 연주자는 악기를 연주하지 않고 4분 33초 동안 무기력하게 앉아 있기만 한다. 이 음악에 참여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청중이다. 청중의 숨소리, 발소리 등 환경 소리를 포착하는 것에 중점이 있다. 실시간으로 과거의 것을 재연한다는 설정은 현대와 과거를 동시에 존재하게 하는 시간여행을 간접경험하게 한다. 그렇다고 연극이나 뮤지컬을 자주 보러 다니는 것은 아니다. 기껏 해봐야 아이와 함께, 혹은 간혹 기회가 됐을 때 몇 번 정도 보는 것이 전부다. 어쨌건 OTT나 극장에서 개봉하는 애니메이션 작품에 선뜻 끌리지 않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사색을 즐기던 과거의 여유가 사라진 탓도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주변에서는 '그거 봤어?'로 알게 된 작품을 만났다. 바로 서점에서다. 이미 사람들은 전부 애니메이션으로 봤다는 작품이다. 당시에는 끌리지 않아 보지 못한 작품이지만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 자꾸 노출되니, 결국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자주 방문하는 서점에서 몇 차례 같은 책을 들었다 놨다. 아무래도 한참 바쁜 시기라 무언가 하나를 보면 오래 걸리는 '독서'의 특징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러다 윌라 오디오북에서 한 작품을 알게 됐다.

소설로 접한 '스즈메의 문단속'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평은 이렇다. 갑작스러운 전개, 너무 빠른 감정 변화. 그 진도를 따라가기에 나는 오롯하게 애니메이션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표현을 애니메이션은 어떻게 구현했을까.' 하는 궁금증이다. 그만큼 소설로 이미 완전했다. 다만 처음 만난 사람과 급격하게 사랑에 빠지는 일과 그 감상에 쉽게 젖어 들어가는 것을 볼 때, 8시간의 오디오북에서도 느껴지는 당황감이 2시간 러닝 타임의 애니메이션에서는 어떨지 궁금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이런 류의 애니메이션 중에 가장 인생에 깊은 것은 '시간을 달리는 소녀'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유학 시절에 처음 접했는데 그 분위기가 좋아서 꽤 여러번 본 기억이 있다. 개인적으로 '일본' 소설을 좋아한다. 간결한 문체와 직관적인 표현이 마음에 든다. 이 소설을 처음 접하고 난 뒤부터 '신제주 북앤북스'에 들려 일본 소설 몇 편을 더 빌렸다. 예전에 한참 좋아했던 일본소설이 었는데 이런 저런 여유가 없어서 소설을 많이 보고 있진 못하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워낙 다이나믹한 상황에서 본 책이라, 정확하게 집중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사실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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