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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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네틱 플로우'의 '몽환의 숲'은 '이루마' 반주에 독특한 가사가 매력적이다. 한때, 이 노래를 무한 반복으로 들었던 기억이 있다. 누군가의 말에 따르면, 슬플 때는 멜로디가 들리고, 즐거울 때는 가사가 들린단다. 가사는 제목처럼 몽환적이다. 몽환의 숲은 오감을 초월한 곳으로 묘사도니다. 화날일도 아픔도 없다. 이 노래에서 주인공은 소설과 같이 한 남자다. 새벽을 비추는 초생달 밑 술취한 도심을 걷는 남성의 이야기다. 이야기는 도심의 남성이 갑자기 '몽환의 숲'으로 들어가며 시작된다. 몽환의 숲에서는 모든 것이 초월적이다. 거기서 '그'는 '그녀'를 만난다. 오감을 비롯한 모든 것을 초월한 그곳에서의 초월적 교감을 나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현실로 복귀한다.

4분짜리 짧은 이 음악은 2006년에 발표한 '키네틱 플로우'의 데뷔 앨범 수록곡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는 내내, 이 음악이 떠올랐다. 물론 음악이 주는 분위기와 소설의 주는 분위기는 완전 다르다. 소설은 가까이 보기에 방향없이 감정의 흐름만을 전개한다. 그렇게 세계관을 확장한다. 다만 소설을 멀리서 보면, '몽환의 숲'이 떠오른다. 음악을 먼저 알아서 그럴까. 마치 이 노래를 소설화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루키'가 말하고자 했던 '불확실한 벽'으로 둘러 싸인 도시는 분명, '몽환의 숲'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술 파는 곳 없어도 마음만 먹으면 취할 수 있고, 나뭇잎는 하늘색, 하늘은 연두색, 눈빛은 보라색, 모든 것이 정반대이고 오감을 초월해 버린 그곳. 하루키는 도시를 그렇게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읽기에 그렇게 그려진다. 그곳에서 나오면 회색빛 현실이 나오고 다시 몽환의 숲으로 들어가면 알록달록한 세계가 펼쳐진다. 소설이 그렇게 읽힌 이유는 음악 때문일 것이다.

하루키 소설의 줄거리를 딱히 읊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하루키는 '줄거리'가 아니라 '감정묘사'와 '심리묘사'를 섬세하게 하는 작가다. 고로 소설의 줄거리가 어떤지는 하등 중요치 않다.

줄거리가 의미를 상실하면 소설은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매우 몽환적인 이야기를 담아도 어색하지 않다. 현실에서 마주하는 비현실의 묘사는 매우 현실같았고, 비현실에서 마주하는 현실은 매우 비현실 같았다. 이야기가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며 심리와 감정을 묘사하는 동안 나는 여지 없이 주인공에 이입했다. 하루키의 묘사가 이입되어 반쯤 내게 이식됐다. 감정을 읽으며 주인공과 동화되는 것은 꽤 매력적인 경험이다. 그의 글을 다 읽고나면 이 기억은 나의 기억이 된다.

하루키의 글은 '내면'의 중심으로 읽힌다. 고로 밖으로 어떤 행동이 일어나는지가 가려진다. 주인공은 생각해보면 꽤 비현실적인 행동을 한다. 다만 감정묘사가 탁월하다보니, 비현실적인 행동이 현실적으로 보인다. 누군가에게 유령의 이야기를 한다거나, 벽으로 둘러 쌓인 알 수 없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거나, 모르는 여자에게 말을 걸어 단숨에 연인관계로 발전한다는 설정은 서술 방식에 따라 비현실적이고 허무맹랑할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이 비현실적이라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설득하는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어쨌건 책을 읽으며 느꼈다. 분명하건데 하루키의 소설 속 주인공의 MBTI는 INFJ일 것이다. 하루키의 MBTI도 INFJ일 것 같다. 최근 MBTI에 심취해 있어, 어쩐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읽게 된다. MBTI 검사를 하면 INFJ와 INTJ가 반반씩 오고 가는 1인으로써, 이번 글을 읽으면 나의 MBTI도 한동안 INFJ가 될 듯하다. 근래 읽는 책의 여운에 따라 내 성향이 바뀌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연초부터 심한 독감에 시달렸다. 기운은 지금도 남아 있다. 마른 기침이 한 달도 넘게 멈추지 않는다. 아이 입학 준비에 이것저것 신경 쓸 것도 많다. 그밖에 다양한 일들이 쉴새없이 몰아쳐 정신없다. 와중, 700쪽이 넘는 벽돌 소설책을 읽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 그러나 모든 일을 다 마치고 새벽 1시, 침실에서 이 책을 읽는 일은 새로운 감각으로 샤워를 하는 느낌이 든다. 2024년, 꽤 다난하게 시작한 한해지만, 이 책으로 꽤 위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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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의 사랑 - 낭만의 혁명과 연애의 탄생
고은임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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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과 여성이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남성과 여성이 친구가 될 수 있냐는 질문은 '우정'이 존재하는지 알아야 대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정은 무엇일까?' 우정은 상호간에 이해와 지지를 바탕으로 한 관계다. 그렇다면 남녀 사이에도 충분히 우정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은 '사랑'을 정의할 때, 또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사랑 또한 강한 애착과 감정적 의존성을 만든다. 우정과 마찬가지로 상호간에 이해와 지지를 바탕으로 한 관계이고 때로 더 깊은 연결성과 감정적 연결을 필요로 한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사랑과 우정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목적성'이다. 사랑과 우정에는 '목적의 유무'에 따른 차이가 분명 존재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이성 간의 사랑'을 말하기에,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나, 전우애, 동지애와 같은 사랑을 말하는 바는 아니다. 이성 간의 사랑을 볼 때, 대체적으로 이 감정은 '육체적, 정서적, 문화적 요소'에서 '완성'의 단계로 나아가는 목적성을 띈다. 쉽게 말해 이성은 '결혼'이라는 문화적 목적성을 '완성'으로 두고, 육체적 관계를 목적으로 두며, 정서적으로 상대의 감정적 독점 권리를 행사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 반면 '우정'은 '목적성'을 띄지 않는다. 우정에는 '완성'의 단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지속적이고 일관적인 상호관계다. 그런 의미에서 남녀 간의 우정을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만남에 '목적성'을 둘 수 있느냐가 중요한 듯 보인다.

역사의 이야기를 해보자. 과거 서양에서 '우정'은 남성만의 전유물이었다. 아둔하게도 과거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독립성을 갖추지 못한다고 여겼다. 고로 여성에게 '우정'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다 여성의 정신적 능력이 재평가되기 시작한다. 18세기 후반부터다. 시대의 흐름을 주도하던 남성들은 여성과의 순수한 우정을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대표적으로 '볼데마르'가 그렇다. 볼데마르는 '헨리에테'라는 분별력 있고 이해심 많은 여성을 만난다. 이후 그녀를 친구로 삼겠다는 결심한다. 결심 이후 그는 '헨리에테'와 결혼을 격렬하게 거부한다. 자신의 우정이 사랑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결심한 탓이다. 그는 그녀와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와 결혼한다. 무릇 우정이란 순수하게 '정신적 관계'여야 하기에 '볼데마르'는 우정을 사랑이나 결혼보다 더 높게 평가했다. 우정에 대한 과거인들의 생각은 역시, '순수한 정신적 관계' 였는지 모른다. 다만, 그것이 위태로움에 대해 인지했다는 듯, 그는 그 순수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와의 결혼을 선택한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남녀 간에 순수한 '우정'이 이런 장치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심지어 독일에서는 '삼자결혼'이라는 관계도 있었다. 삼자결혼이라는 관계는 이례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이것은 일부다처나 일처다부와 다르다. 한 사람이 여러 이성에 대한 '정신적 신체적' 독점을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정신적'으로 이어지는 관계였다. '에밀리에 폰 베를랩슈'는 소설가 '장 파울'에게 다른 여성과의 결혼을 권유하면서 자신을 그 옆 친구로 살고 싶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정신'과 '육체'에 대한 사랑을 구별하는 '이원론적인 사랑'이 그렇게 과거 유럽에서 종종 있어 왔다. 그러나 때로 일부는 일체적인 사랑을 더 본질에 가깝다고 봤다. 사랑에는 우정, 사교, 욕망, 열정 등이 모두 담겨져 있고 성적인 사랑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은 '열정으로의 사랑'에서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진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이 질문에는 다양한 답변이 가능하다. 가령, 종교, 도덕, 철학 등의 담론이 난무할 수 있다. 이 와중 그는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린다.

'사랑하니까 사랑한다.'

'사랑'이라는 본질을 해석하기 위해 다양한 곁다리를 붙일 수 없다는 의미다. 본질은 단순하여 그 자체가 물음이자 정답인 경우가 많다. 고로 사랑은 설명 불가하다.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우리 모두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있다. 같은 것을 보더라도 각기 다르게 이해하고 바라본다. 누군가는 꽃에서 좋은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꽃이 아름답다고 여긴다. 이처럼 우리 각자는 자신만의 생각과 감정, 경험을 가지고 그것을 이해하고 반응한다. 이를 '자기준거성'이라고 한다. 사랑은 '자기준거성'을 통해 각자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되고 이해된다. 즉, 사랑에 대한 우리 각자의 생각과 느낌은 개인적인 경험과 가치관, 감정에 의해 형성된다. 누군가는 사랑을 보호받는 감정으로 여기고, 누군가는 돌보는 감정으로 여길 수 있다. 누군가는 얼굴이 빨개지는 감정으로 여기고, 누군가는 함게 웃고 즐기는 것으로 여긴다. 이처럼 자기준거성은 사랑을 바라보는 우리 각자의 독특한 안경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안경을 통해 우리는 사랑을 보고, 느끼고, 경험한다. 그렇다면 사랑 뿐만 아니라, 우정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모든 것은 다수의 정의에 의해 결정되는 사전적 의미만 가지고 있지 않다. 고로 남녀 사이의 사랑과 우정은 각자 개인들의 기준과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사안이지, 그것을 일반화할 수는 없다.

사랑에 대해 사유하고 경험하고 성찰했던 과거 18세기 프랑스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역시 '사랑'은 그 무엇으로도 정의 내릴 수 없는 모호하지만 아이러니하게 개인으로써 확고하게 가지고 있는 감정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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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근대사 왜곡은 언제 시작되는가 - 한일 근대사 속살 이야기
박경민 지음 / 밥북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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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한반도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 셋이 동시에 벌어진다.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청일전쟁이 그렇다. 이는 임계점까지 차오르던 역사의 카르마가 터져 나온 시점으로, 잠재된 역사의 흐름이 가시적으로 보인 시작한 사건들이다.

개인적으로 '역사'는 '한 사람'의 악행이나, '한 사건'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역사의 변곡점에는 '사람'과 '사건'이 존재하지만, '흐름'이 그것을 주도한다고 생각한다. 물이 흘러가는 것은 흐름을 주도하는 강력한 '물방울'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흐르게 하는 몇가지 법칙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는 어떤 시점에는 흐름을 바꾸고, 어떤 흐름에는 다시 흐름을 바꾼다. 여기에는 '지정학적 위치', '인구 구조', '태양의 흑점활동에 따른 지구 기온의 변화' 혹은 '자연재해' 등도 포함된다.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혹은 큰 흐름을 설명하기 위해, 때로 우리는 '한 사람'과 '사건'에 집중하지만, 그 또한 흐름상 파생된 현상이지, 그것이 역사의 흐름을 주도한다고 여기진 않는다. 그 역사의 인과관계를 따지고 들며, 여러 사건을 만들어내는 거대한 줄기를 찾아가는 것은 매우 흥미롭고 재밌다. 또한 정치, 외교, 경제에서 피할 수 없는 '역사왜곡'이라는 해석은 어떻게 발생하며 그것에게 꼬리를 내어준 사건은 어떤 인과관계가 다양하게 섞여 있는지 알아야 한다.

우치다 영사의 조선 상황보고를 보면 조선 내부 정치의 무능이 여실히 보여진다.

"이 나라 내정을 관찰해보니, 중앙 정부를 비롯해 모든 행정기관이 실로 부패의 극점에 다해 민력의 곤폐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침상에 빠져 있습니다. 정치의 실권은 항상 국왕 또는 왕비의 근친인 몇개의 문벌 가문에 귀속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습니다. 각 가문이 서로 권력을 경쟁하고 그 경쟁에서 각각 자기 집안의 이익을 도모하기에 급급할 뿐 국가의 안위와 왕실의 영욕은 안중에 없습니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서 일본 영사가 바라 본 조선은 부정하고 부패하며 무능했다. 조선의 쇄락하는 시점을 어디서부터로 정의해야 하고, 일본의 야욕을 어디서부터 정의해야 할까. 알 수 없다. 꽤 오랜시간 다양한 사건, 다양한 카르마가 쌓여 있다가 터져 나온 순간은 아마 1894년 그즈음이지 않을까 싶다.

조선 후기 특정 가문은 집권하여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다. 나라를 매국한 행위자 몇몇도 역사를 바꿨다 할 수 있다. 다만 이것은 역사를 너무 단순화한 일일 뿐이다. 조선 멸망이라는 한 사건이 벌어지기 위해 다양한 내외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조선 뿐만아니다. 1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국민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당을 지지했다. 나치의 프로파간다와 대중 조작이 독일국민을 세뇌시켰다고 볼 수도 있지만, 지도부의 명령으로 역사가 흘러갔다기에는 구성원 개개인의 도덕적 윤리적 책임도 분명 존재한다. 역사의 흐름은 작은 흐름이 쌓여 커다란 사건으로 발현된다.

역사는 때로 정치적 소수의 의지로 주도되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결국, 구성원의 집단적 의지가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프랑스 대혁명은 귀족과 왕정에 국민의 불만이 폭발한 사건이다. 이 혁명은 전체 정치에 국민들의 거부감이 오랜 기간 쌓여 온 결과물이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는 열망은 일부가 아닌 흐름이 만든 결과물이다. 다수는 언제나 강력한 힘을 갖는다. 발휘하고 발현한다.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들은 결국 쌓여 있다가 결정적 사건을 만들어낸다. 구성원의 책임과 참여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다.

일본의 근대사 왜곡은 일본 근현대 정치의 일방적인 행위로 보여 질 수 있다. 다만, 이를 견제하는 쪽의 세력이 더 강하다면 일방적으로 이또한 행해질 수는 없다. 모든 것은 힘의 균형 아래 이루어진다. 즉, '역사'는 여타 '사회과학'과는 달리 해석의 여지가 훨씬 큰 학문이다. 과거의 위치와 관계, 상황 뿐만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현재의 위치, 관계, 상황을 대변한다. 그 사건들이 발생한 맥락과 후대에 끼친 영향을 고려하여, 해석자가 능동적으로 해석하는 일이며, 단순히 과거의 연대기를 나열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는 해석의 폭이 넓은 학문이며 그런 의미에서 왜곡은 어느나라에나 존재한다. 다만 그것이 현재 진행형일 때, 우리가 그것을 견재하기 위해 어떤 자세와 인지를 해야하는지 무척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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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동행만리 - 한국콜마 창업주 윤동한 회장의 인문경영
윤동한 지음 / 가디언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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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우리가 '창조'라고 믿는 대부분의 것은 '모방'과 '연결'에서 시작했다.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과거로 부터의 무엇과 현재의 무엇 사이를 끊임없이 연결하고 복제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인간만 이런 모방과 연결에서 '창조'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현재 새로운 의미로 인간을 뛰어 넘는 존재로 위협하는 '인공지능'도 그 창조 방법이 같다. 인공지능은 과거의 기록과 현재의 무엇과 끊임없이 연결하는 과정에서 벌어진다. 고로 '창조력'은 '모방'할 데이터가 많아야 하고, 연결할 '대상'이 화수분처럼 흘러 넘쳐야 한다. 우리가 인지한 어떤 것들은 우리 뇌속에 '약몰입'상태로 존재하다가, 시냅스 사이의 끊임없는 화학작용 중 '번뜩'하고 연결성을 찾아낸다. 아르키메데스가 욕조에서 뛰어나오며 '유레카'라고 외친 것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아이디어가 그의 머릿속에 내리 꽂힌 것이 아니라, 그가 읽었던 책, 생각 그리고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던 약몰입 상태가 묘하게 이어지다가, 의식이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에 터져 나오는 것이다.

모든 전모가 환하게 보여지는 것. 우리는 그것을 '통찰력'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위대한 이가 독서를 좋아한 이유는 독서가 이런 통찰력을 길러주는 매우 핵심적인 여가 행위이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자이지만 음악을 좋아했다. 다윈은 지리학자지만 생물학에서 굉장한 업적을 발견했다. 모든 것은 불완전한 연결과 무관하고 임의적인 데이터 간의 상호작용으로 벌어진다. 고로,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아주 명확하다. 그것이 전모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을 가져다 주며, 인간이 '환경'을 모방하고자 하는 본능에 철저하게 이용되게 하기 때문이다. 수백, 수천년 전에 죽은 철학자와 대화를 나눈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지나, 양자역학을 공부하는 학자와 음악하는 세계적인 음악가들 사이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으면 우리는 어떻게 달라지나, 이 위인들간의 연결의 접합점으로 우리는 어떤 인물이 되는가. 또한 그 위대한 인물들을 알고 있는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 형성이 수월해지며 우리가 소통하는 방식과 생각하는 방식은 어떻게 범인과 달라지는가.

근묵자흑(近墨者黑),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는 말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주변 영향을 많이 받는다. 사람만 그런 것은 아니다. 자연이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은 워낙 당연하기에 북극곰의 털은 '흰색'이 되고, 나탁의 털은 '황색'이 된다. 자연 환경에 적합한 것이 같은 방향으로 진화해 가듯, 인간에게 환경도 그런 영향을 끼친다. '맹모'가 세 번씩이나 이사를 가면서 아들을 가르친 교훈은 아들을 키우는 것이 '어미'가 아니라 '환경'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로 보내는 이유도 그만한 환경이 그만한 양육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길러내는 환경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나.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알기 위해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스스로 학습한다는 인지 없이 꾸준히 학습하게 하는 '환경'의 무서움은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스스로 부를 이룬 이들이 '책을 읽으라 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째서 한국인들은 '학력'을 얻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갖게 되는 것일까. 누구에게 둘러 쌓이느냐에 따라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정신분석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정체성이 관계속에서 형성된다고 봤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개인의 정체성은 사회적 상호작용과 관계를 통해 발달하며, 이런 관계들은 개인의 성격 형성과 자신이 누구인지 인식하는 정체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고로 개인은 속한 사회적 맥락과 경험하는 대인 관계에 따라 자신을 설정한다. 사업하는 이들이 '학력'이 우수한 이들을 먼저 뽑는 것은 단순히 그들의 학습능력이 '돈'을 만들어내기 때문이 아니다.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 '학구적인 인물'을 우선적으로 채용하는 이유는 이들이 '목표'를 위해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선택했는지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명확히 눈에 보이는 '숙제'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이들에게, 대부분의 사업가는 업무를 맡길 수 없고, 꾸준하게 자신만의 패턴으로 '반복'해왔던 습관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다. 그리하여 사회는 '학력 높은 이들'을 우선적으로 곁에 두고 그들로 하여금 '성취'를 얻어 내도록 한다. 다만 사람마다 성장의 시기와 깨달음의 시기가 달라, 누구나 좋은 학력을 가질 수는 없고, 누구나 좋은 인맥을 형성할 수는 없다. 애당초 안정된 분위기에 어린 시절이 노출된 이들과 불안전한 분위기에 노출된 이들이 갖게 되는 심리적 안정감의 차이도 분명하게 있다. 고로 10대 시절 학력만 가지고 사람을 평가할 수는 없다. 고로 그 인간이 어떤 환경에 둘러싸여 있는지를 알기 위해, 우리는 '그 사람의 학력', '출신'을 살피고 가정환경을 알아보고자 한다. 다만 이런 것들 보다 더욱 사람의 정체성을 바꾸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독서다.

독서는 방구석에서 '뉴욕대 교수'와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수 백년 전, 이미 사망한 철학자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한다. 다시 엄청난 고학자들에 둘러 쌓여 많은 삶의 간접 경험과 영향력을 얻기도 한다. 책 좋아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이유는 거기에 단순히 '돈 버는 방법'이 적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그들을 둘러싸는 환경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능동력을 갖기 때문이다. 일론 머스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작은 마을에서 자랐으나 그는 세계의 위대한 사상가들과 발명가들, 과학자를 책으로 만났으며, 책을 통해 같은 인맥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과 원활한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토대를 갖추기도 했다.

빌게이츠는 우리안에 3080만 달러를 주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첩을 구매했으며 폴 앨런, 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창립자는 카렐 차페크라는 체코의 유명 작가의 작품을 120만 달러에 구입했다. 존 제임스 오듀본의 '북아메라키의 새들'이라는 책은 2010년 런던 미술 딜러인 마이클 톨레마크에 의해 1500만달러에 구매됐고 2023년 워렌 버핏과의 점심식사 경매가는 무려 1900만 달러였다. 주식투자자와의 점심식사도 이처럼 비싼 값을 하는데, 우리는 이만원 안팍으로 동서고금의 엄청난 현자를 만날 수 있다.

자, 동네 서점에 가서 '뉴턴'의 프린키피아나 다윈의 '종의 기원'은 2만원 내외의 돈으로 구매할 수 있다. 이로인해 우리는 오래 전 위대한 이들과 커넥션을 갖는다. 이것을 얼마나 위대한 '인맥형성'인가. 그것은 환경이 되고 환경은 사람을 기른다. '큰 사람 밑에서는 덕을 배울 수 있고, 큰 나무 밑에서면 크게 자랄 수 없다.' 누군가와 함께 하고 있는지, 최근 어떤 책을 읽었는지, 그 다양한 환경이 우리를 만들며 우리가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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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인간 김동식 소설집 1
김동식 지음 / 요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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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월이면 초등학교를 입학하는 아이를 보면 한편으로 뿌듯하면서 해방감을 느낀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보내지 않고 집에서 아이를 보았다. 집에서 아이와 함께 책에 관한 좋은 인식을 심어주기에 6, 7세라는 나이는 매우 소중하다.

항상 무언가를 할 때마다 책을 손에 쥐고 있는 편이라, 아이와 시간을 함께 보내며 그 모습을 각인 시켜 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아이와 시간을 보내며 좋은 점이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

첫째로, 긴 글을 읽지 못하게 됐다. 가끔은 벽돌책을 잡고 한참을 몰입해 읽는 것이 삶의 낙이었다. 다만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가장 먼저 그 부분을 내려 놓아야 했다. 특별히 아이가 독서에 방해가 되는 행위를 하기 때문은 아니다. 명확하게 설명하기 힘든 이유로 '몰입'이라는 과정이 사라졌다. 아이는 종종 무언가를 물어봤고 어떤 사고를 쳤으며, 아빠가 혼자 무언가에 몰입하는 것에 시기하기도 했다. 시간이 남으면 특히 책을 들고 있으며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같은 부분을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으며, 읽고 난 뒤에는 '무엇을 읽었나' 남기지 못했다. 짧게 끊어진 주의력은 아이러니하게도 '스마트폰 짧은 영상'에 적합했다. 1분마다 쪼개지는 주의력을 싸매 쥐는 일에 피로를 느꼈다. 고로 남는 시간에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엄지손가락만 까딱거리고 싶었다. 아무 의미 없는 영상을 보고 또보고, 넘기고 또 넘겼다. 이후 다시 책을 들어도 1분 뒤에는 스마트폰으로 손이 갔다. 집에서 육아를 하는 '가정주부들이 건망증'이 빈번하다 하듯, 짧아진 주의력은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깡총깡총 이곳저곳에 맴돌았다. 당연히 주의 깊게 몰입하는 것이 없으니 건망증이 높아졌다. 신경은 예민해졌다. 아이에게 '책 읽는 추억'을 남겨 주겠다는 최초의 다짐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되려 아이에게 '버럭'하고 호통치거나 짜증을 내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후 타협해야 할 부분을 찾았다. 탈출구는 '짧은 글'이다. 아이의 질문과 질문사이에 짧게 몰입할 수 있는 소설이다. '김동식 작가'의 단편소설은 아주 짧다. 초단편소설이다. 이렇게 짧은 글을 엽편소설이라고 한단다. 글은 시작과 동시에 몰입 시키고 한호흡에 소설 하나를 마무리 시킨다. 소재는 매우 신선하여 글 읽는 맛이 있다. '김동식 작가'의 글쓰기 방식을 모방하여 짧은 소설은 연재 했었다. 그것이 멈춰진 이유는 '글쓰기 시간'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23년은 정말, 바쁜 한해였다. 개인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었고 여유가 생겨도 그저 허송세월처럼 흘려보낼 뿐이었다. 이런 핑계로 2023년에 목표했던 '소설출간'은 이루지 못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꽤 매력적인 일이다. 나의 머릿속을 남의 머릿속에 넣는 일이다. 글쓴이가 '태양'을 생각하면, 읽은 이는 '태양'을 떠올린다. 글쓴이가 '바다'를 쓰면, 읽는 이는 '바다'를 읽는다. 최첨단 과학기술이 하지 못할, '생각 이식'을 '독서'는 가능하게 만든다. 꼭 값비싼 기술력이 들어가야만 좋은 기술은 아니다. 앞으로도 '독서'가 가진 '생각 이식 기술'은 그 어떤 과학기술로도 구현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소설은 그렇다. 소설은 허구다. 읽는 이들은 글쓴이의 망상을 읽는다. 그것을 문자화 하지 않으면 망상은 망상일 뿐이지만, 그것을 문자화하면 그것은 '소설'이 된다. 자신의 망상을 얼마나 잘 문자로 구현할 수 있는지, 그 기술에 대해 사람들은 평가한다. 마치 음악을 만들거나 명화를 그리듯, 글쓰기는 전에 없는 무언가를 '창조'하는 '창조행위'다.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소설'은 '세계'를 창조한다. 저자본으로 지구를 종말로 몰아갈 수 도 있고 배우의 연기력 논란 없이, 다양한 감정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결국 그런 능력을 얻기 위한 시도는 할만하다. 그것은 별다른 준비물도 필요없고 대단한 배경도 필요없다. 그저 쓰기만 하면 그만이다. 2024년에는 소설 출간이라는 목표를 다시 가질 예정이다. 벌써 써두고 투고하지 못한 소설과 글이 많다. 2024년에는 하나씩 정리해 출간해 볼까 한다.

몇 일 전, 아이와 책 한무더기를 구매했다. 대체로 짧은 소설, 시, 에세이였다. 아마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는 3월 전까지, 천천히 읽을 예정이다. 창작물을 접하다보면, 그 소재에 이어 나만의 결과를 만들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럴때마다 이야기를 기록해 두었다면 아마 꽤 괜찮은 글들이 됐을 것이다. 김동식 작가의 글은 쉽고 가볍게 읽히지만 몰입력이 좋다. 아마 작가의 다른 책도 구매해 읽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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