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카 김재희 케이스릴러
김달리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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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대세 분구필합 합구필분(天下大勢, 分久必合, 合久必分)

무릇 천하대세는 합쳐지면 반드시 흩어지고, 흩어지면 반드시 다시 합쳐진다. 이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의 도입부다. 영원한 것은 없다. 천하대세 또한 마찬가지다. 기존 질서가 영원히 지속되는 일은 없다. 기존 질서가 '통합'이라도 언젠가는 '분열'이 되고, 기존 질서가 '분열'이라도 언젠가는 '통합'이 된다.

'21세기'는 '파편화'의 시대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인류의 역사는 '분열'과 '통합'을 반복했다. 시기에 따라 '분열'되고 합쳐진다. 어떤 시기에는 '채집'과 '수렵'이 옳다가, 어떤 시기에는 '농사'가 옳다. 어떤 시기에는 '농경민'이 세계를 제패하다가, 어떤 시기에는 '유목민'이 세계를 제패한다. 한 동안은 '대륙세력'이 세상을 지배하다가 갑자기 '해양세력'이 세상을 지배한다. 이런 반복은 꾸준히 있어왔다.

봉건국가인 '네덜란드'가 중앙집권 국가인 '영국'에 세계의 패권을 넘겨준 사건은 시대가 바뀌면서다.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거나,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일들은 반복되며 증명한다. 한때는 '통합'이 세계적 추세였다. '세계화'라는 말은 보편적 가치였다. 모든 세계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질서에 반하는 경우, 시대착오라고 여겼다.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파편화'가 대세다. 세계 뿐만 아니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돈과 권력, 정보는 중앙에서 개인으로 넘어간다. 실체가 어떠하든 '탈중앙화'를 외치는 비트코인이 1억을 넘는 시대이며, 공중파 방송국이 '인플루언서'에게 정보 제공자로의 역할을 넘기는 시대이다. 알고리즘은 점차 '개인 맞춤 정보'를 제공한다. 좌는 좌끼리, 우는 우끼리, 여성은 여성끼리, 남성은 남성끼리, 청년은 청년,노년은 노년, 소년은 소년. 각자 자신들의 세상에 묶여 파편화 된다. 고로 세대 갈등과 남녀 갈등, 인종 갈등, 국가 간의 갈등, 저출산, 고립, 양극화는 그런 의미에서 필연적이며 세계적인 추세다.

이런 파편화 된 세계에서 이슈에 대해 빠르게 정리하여 영상을 만드는 인플루언서들이 있다. '사이버 렉카'다. 사이버 렉카는 매스컴에서 '나쁜 쪽'으로 비춰진다. 개인적으로 꼭 나쁘다고 보지는 않는다. 개인의 시대에서 필연적인 과정이며, 누군가는 개인 인플루언서의 음악을 듣고, 누군가는 개인 인플루언서의 '글'을 읽고, 누군가는 개인 인플루언서의 예능을 본다. 권력이 중앙 집권되어 있던 시기에서 점차 파편적으로 나눠지는 그 과도기적 시점에서 그에 따른 부작용과 정화작용은 피할 수 없는 절차다.

모든 것에 양과 음이 있듯, 당연히 이들에게도 좋은 면이 있다. 사이버 렉카가 비난을 받는 이유는 조회수를 이유로 자극적인 컨텐츠를 제작하거나, 때로는 팩트 확인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잊혀질 뻔 한 이슈를 공론화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물론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짜집기 편집하여 송출하다보니 내용 상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모든 과도기에는 이러한 문제가 항상 나오며 그 문제는 때로는 기존 질서와 부딪치며 큰 소음을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미 시대가 달라지는 일을 과거도 돌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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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 증명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7
최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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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스코틀랜드의 어딘가 였다. 그 곳에는 '소니 빈'이라는 남자가 살았다. 그는 사회와 법률에 대한 반기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여인과 함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사회를 등지고 살기로 했다. 이들이 택한 곳은 스코틀랜드 해안을 따라 있는 외딴 동굴이었다. 둘은 이 동굴에 터전을 잡기로 한다. 새로 잡은 터전은 그들의 새로운 집이자 세계였다. 이곳에서 그들은 가족을 이루었고 자신들만의 '생활 방식'을 만든다. 생존을 위해 그들이 택한 삶의 방식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꽤 충격적인 방식이다. 그들은 밤이 되면 가족 구성원들과 동굴 주변을 순찰한다. 그러다 마주치게 되는 여행자들을 타겟으로 했다. 어두운 밤, 여행자들을 습격하고 그들의 물품을 훔쳤다.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시신을 식량으로 삼았다. 시간은 점차 흘렀다. 대략 25년의 시간이 지났다. 소니 빈의 자식들은 다시 자식을 낳는다. 그렇게 그들만의 사회가 구성된다. 이들은 자신의 생활 방식을 문화로 받아 들인다. 누군가는 사냥을 하고 누군가는 식량을 손질한다. 누군가는 내장을 비롯한 불순물을 바닷가에 버리는 일을 한다. 이렇게 분담된 일을 하면서 이 가족 구성원은 마흔 여덟 명까지 늘어난다. 살인과 식인에 대한 죄책감은 그저 '사냥'과 '조리'라는 단순 '문화'로 자리 잡는다. 그들 일가족의 이야기는 결국 사회에 알려진다. 소니 빈 가족은 체포되어 법의 심판을 받는다. 그들의 입장에서 '약육강식'은 '죄의식'과 큰 영향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이 어떤 죄를 짓고 있는지 몰랐으며 자신이 사냥했던 많은 '식량'들 처럼, 자신들도 곧 '강자'에게 잡힌 먹이감의 운명이 됐음을 직시했다. 이 이야기는 수세기 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된다. 소니빈의 이야기는 실제 역사와 설화의 중간 경계에 서 있다. 실제 그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분명 생각해 볼 거리가 있다.

가만히 지켜 보건데, 이는 근대에서의 어떤 일과 유사하다. '악의 평범성'. 20세기 정치 이론가인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나치 전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예루살렘 재판을 보도하면서 사용됐다. 아이히만은 대량 학살과 같은 끔찍한 범죄에 관여한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악'과 거리가 멀었다. 아렌트가 관찰한 그는 '평범하고 성실한 공무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덕적으로도 평범했던 그가 그처럼 악한 인물이 된 이유는 일상적인 환경에서 단순 명령과 복종 혹은 체계의 일부로써 자신도 모르게 '악'이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단순한 업무처리일 뿐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악'은 특별한 '악한 동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단순히 사회 시스템에서 커다란 맥락을 바라보지 못했을 때 조차 발생한다. 그렇다면 '소니 빈'의 가족 또한 다르지 않다. 애초에 태어났을 때 부터 '살인과 식인'에 길러진 '소니 빈'의 자녀와, 그 자녀의 자녀들은 자신의 행위가 '악'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돼지'와 '소'를 도축하고 불에 그을려 포식한다. 그들을 살육하고 포식하는 과정에서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 다만 대상이 '인간'이라면 거기에는 '죄'와 '악'이라는 이름이 여지 없이 들어간다. 가만 보면 그것은 '인간'만의 독특한 습성은 아니다. 자연계에서 '동족포식'은 흔한 일은 아니다. 그 이유를 따지고 들면 몇 가지가 있다. 개중 진화론적으로 보자면 이렇다. 동족을 잡아 먹는다는 것은 다른 종을 잡아 먹는 일에 비해 꽤 비효율적인 일이다. 자신보다 나약한 종을 잡아 먹는 일에 비해 더 많은 에너지와 노력이 필요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꽤 큰 위험 부담도 지어야 한다. 자연계에서는 '유전적인 차이'로 인해 '강자'와 '약자'가 나눠진다. '사자'는 같은 '사자'를 잡아먹지 않는다. 유전적 차이가 비슷한 경우에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해가 한다. 이들은 '토끼'나 '사슴'과 같은 상대적 약자를 잡아 먹는다. 그것은 훨씬 더 효율적인 포식 방법이다. 이처럼 유전적 차이가 명확한 경우, 힘의 논리가 명확하게 사용된다.

우리 인간은 어떤가. 가만 보면 인간의 DNA는 서로 비슷하다. 다만 우리가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은 'DNA'뿐만 아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은 '돈'과 '사회적 지위', '환경'도 포함된다. 이렇게 '사회적 DNA'를 물려받는 과정에서 '약자'와 강자'가 생겨난다. 과거에는 동족을 사냥하는 일이 '에너지적으로 비효율'에 해당됐지만, 사회가 점차 양극화 되면서 서로 물려받는 '사회적 DNA'에는 '사자'와 '토끼'만큼의 차이가 발생한다. 인간이 실제 인간을 포식하는 일은 흔한 일은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이런 일은 쉽게 벌어진다. 우리 사회는 아무런 죄의식 없이 강자가 약자에게 포악한 일을 저지르는 경우를 목격하게 된다. 그들이 실제 '악'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더라도 말이다. '악의 평범성'이 떠오른다. 자신은 실제 어떤 죄의식도 갖지 않으며 당연한 절차를 진행해 온 성실한 아무개라는 의식 말이다. 인간과 인간의 격차가 점차 서로를 동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격차로 벌어졌을 때, 어쩌면 강자나 약자 모두가 사냥하고 사냥당하는 관계를 너무 당연하게 여길지 모른다. 우리가 사자가 '악', 토끼가 '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처럼 말이다.

'최진영 작가'의 '구의 증명'은 구와 담이라는 '남과 여'의 이야기다. 구를 먹음으로써 사랑하는 이와 하나가 되는 꽤 도발적인 주제다. 다만 그 이야기는 섬뜻하거나 더럽다기보다 안쓰럽고 씁쓸하다. 어쩌면 포식자로부터 동족을 지키기 위한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다. 소설을 다 읽고 마지막에 작가의 말에는 '창세기'의 '9와 숫자들'이라는 음악을 들으며 이 소설을 집필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소설의 끝부분에 이 음악을 들으며 '잔잔하게 퍼지는 여운'까지 이 소설은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만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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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짧고도 사소한 인생 잠언 - 마흔, 후회 없는 삶을 위한 처방
정신과 의사 토미 지음, 이선미 옮김 / 리텍콘텐츠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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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쾌한 말을 들으면 때로는 심각한 상처를 받는다. 현실이나 온라인에서도 마찬가지다. 불쾌한 말은 잔잔한 마음에 풍파를 일으키고 그 하루 자체를 망치기도 한다. 일본에서 38명의 팔로워를 보유한 인플루언서이자 정신과 의사인 '토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못된 사람에게는 칭찬보다 비난을 듣는 편이 낫습니다."

모두에게 인정 받을 필요는 없다. 그럴 받을 수도 없다. 살다보면 누군가의 잣대로 평가되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은 '메세지'에 큰 상처를 입니다. 그런데 공곰히 생각해보면 이렇다.

상대에게 '칭찬'을 받는 편이 더 치욕스러울 수 있다. 칭찬은 때로 상대의 기대나 가치관에 부응하고 있다는 의미다. 내가 상대의 기대와 가치관에 부응하고 있다는 것은 상대에 따라 내가 원치 않는 모습일 수 있다.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에 주목해보자.

추악한 범죄를 저질러도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고, 아무리 선한 행동을 하여도 누군가에게 비난을 받을 수 있다. 범죄에 함께 연류된 공범에게는 완벽한 범죄에 대한 치밀한 계획이 '칭찬'의 대상이 된다. 반대로 선한 행동에 대해 질투만은 혹자는 '비난'을 하기도 한다.

1944년작, 영화 '가스라이트'는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 자체의 유래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남편이 자신의 아내를 미치게 만들려고 조직적으로 거짓말하고 환경을 조작하는 내용을 다룬다. 아내는 점점 자신의 기억과 정신 상태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때로 칭찬과 비난은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 고로 '말'은 언제나 '객관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며 타인의 평가에 너무 의존할 필요도 없다.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비폭력 저항의 아이콘인 마하트마 간디는 '누군가가 당신의 마음을 그들의 더러운 발로 걷도록 허락하지 마라'라고 말했다. 그는 개인의 정신적 자유와 순수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모든 것은 적정 수준이라는 것이 있다. 난데없이 다른 이의 마음에 들어와 헤집고 다니는 인성이라면 그들의 평가에 의기소침해질 필요는 전혀 없다. 그들의 기대와 가치관에 부흥하는 일이 되려 모욕일 뿐이다.

나를 평가한 상대의 인품은 어떤가.

그의 능력은 어떤가.

그의 칭찬과 비난이 곧 나의 정체성을 결정하는가.

삶을 언제나 평탄하게 살 수는 없다. 우리는 누군가의 비난을 받기도 하고 칭찬을 받기도 한다. 때로는 비판을 받아들이고 칭찬에 감사해야 하기도 한다. 다만 어떤 비난과 칭찬이 '자아'를 흔들 정도라면 전혀 게의치 말아야 한다.

붓다에 관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 한 번은 붓다가 비난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자,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붓다는 웃으며 말했다.

"만약 누군가가 당신에게 똥을 주려 하지만 당신이 그것을 받지 않는다면 그 똥은 누구 손에 들려 있습니까."

우리가 비난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한다면 마음의 문을 열고 그것을 '배움'으로 받아들이면 좋다. 다만 그 비난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비난은 결국 비난하는 사람에게 돌아간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비난'하는 사람은 종종 자신의 내면의 불안이나 부정적 감정을 다른 이에게 투사한다. 이로써 비난하는 사람은 자신의 문제로 부터 일시적으로 벗어난다. 다만 이는 단기적 불편함을 경검시킬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자기 인식 부족과 대인 관계의 문제를 만들어 결국 비난하는 사람보다 더 큰 심리적 문제나 부정적 영향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

인생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주체성'이다. 모든 문제를 상대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어떻게 관리하고 대처할 것인지의 문제다. 외부에서 벌어지는 일은 외부에 두고 선택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성장할 수 있는 부분을 취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은 일은 아닐까.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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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괜찮은 태도 - 15년 동안 길 위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에게 배운 삶의 의미
박지현 지음 / 메이븐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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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로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위로하는 좋은 말들 처럼, 평탄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마라. 그의 인생 역시 어려움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당신의 인생보다 뒤처져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좋은 말들을 찾아낼 수 조차 없었을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이다.

흔히 하는 착각 중 이런 것이 있다. 혼자만 세상의 모든 짐을 들러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리를 나가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일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의 어깨이는 그만한 짐이 하나씩을 얹어져 있다.

과거 외국 공익광고 영상 중에 '우울증'에 대한 위험성을 알리는 영상을 본 적 있다. 영상에는 두 남자가 등장한다. 두 사람 모두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는 중이다. 한 사람은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을 짓고 있다.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매우 열정적으로 팀을 응원한다. 때로는 환호를 지르고 큰 소리로 웃는다.

화면은 시간이 흐른 뒤를 두 남자를 비췄다. 두 남자는 어떻게 됐을까. 다음 화면에는 두 사람이 아닌 한 사람만 영상에 등장한다. 앞서 말한 우울한 표정을 짓던 남자다. 그렇다면 열정적으로 응원하고 환호를 지르며 큰 소리로 웃던 남자는 어떻게 됐을까. 남자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우울증'에 대한 편견을 철저하게 부숴 버리는 영상이었다. 우리는 그런 삶을 산다. 우리를 위로하던 누군가가 먼저 세상을 떠나 버린다거나, 세상에 웃음과 희망을 주던 유명인이 생을 달리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대한민국 자살 통계에 따르면 여성보다 남성의 자살률이 두 배는 더 높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의 우울증이 남성에 비해 두 배는 더 높다. 이에 관해 어떤 이들은 '남성'에게 부여된 사회적 기대가 '강인함'이기 때문에 남성이 여성에 비해 '정신과 진료'를 기피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때로는 자신이 '우울하다'고 외치는 쪽이 '침묵하는 쪽'보다 더 건강한 편일 수도 있다는 의미다.

삶은 '태도'다. 거창한 '꿈'과 '미래', '비전'은 어쩌면 지나간 '왕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뒤나 앞이나 어느 것에도 매달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 때로 사회는 '소년, 청년'들에게 '꿈'과 '비전'을 가지라 말한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를 어떻게 대하는지 이다. '과거'와 '왕년'에 얽매이는 '노년'처럼 '꿈'과 '희망'에 매달리는 청년도 과하면 독이다. 어느 시기 할 것 없이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와 '지금', '여기' 뿐이다.

사람은 이기적이다. 이기적인 것은 나쁜 것은 아니다. 산을 등지고 서 있으니 '뒷산'이라고 부르고, 산을 앞서고 있을 때는 '앞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가 자신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관점의 차이다. 물론 그 정도의 차이는 가질 수 있다. 저쪽 편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바라 볼까 하는 그런 호기심은 간혹 '이타심'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산을 앞서는 사람이 그 산을 '뒷산'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온전히' 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객관화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이라는 것이 어디서 보아도 왜곡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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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의 신 - 충주시 홍보맨의 시켜서 한 마케팅
김선태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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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 주무관은 충주시 6급 공무원으로 나와 나이가 같은 87생이다. 아무런 연관성은 없지만 단지 나이가 같다는 이유로 괜히 관심이 가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아주대를 중퇴하고 6년간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이후에는 지방직 공무원에 합격하여 면사무소에 출근했다. 그런 그가 지금은 65만 구독자를 운영하는 '유튜버'가 됐다. 면밀히 말하면 그의 채널은 아니다. 채널은 '충주시' 채널이지만 모든 운영은 그가 한다.

유튜브 채널에서 그를 처음 보게 된 것은 '하수종말처리장'에서 카레밥을 먹는 영상이다.

'이게 왜?'

그랬다. 워낙 자극적인 컨텐츠가 많은 탓에 그 정도면 유튜브 세계에서 꽤 준수한 편이 아니던가. 그러다가 다시 썸네일을 들여다 봤다.

'뭐지? 충주시?'

충주시 공식 채널이었다. 그러다 다시 놀랐다.

'뭐지? 공무원이야?'

아슬아슬 선을 넘을락 말락, 대한민국 사회가 임의로 설정한 선을 지키며 운영됐다.

그를 잊고 지내다가 쇼츠에서 'Sam smith'의 'holy'패러디 영상을 다시 보게 됐다.당시 'Sam Smith'의 'I'm not the only one'이라는 노래에 심취해 반복 재상으로 듣던 시기였다.

'어디서 많이 보던 사림'이었다.

'누구였지?'

채널을 눌러보니 '충주시 공식 채널'이다.

'뭐지? 그 공무원이야?'

그 이후부터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왜?'

'도대체 어떻게? 이런 영상과 채널이 올라 갈 수 있는가.'

'또한 그는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최선을 다하는가'

이후, 잊혀질 때 쯤 해서 '긴급체포' 시리즈를 봤고, 다시 잊혀질 때 쯤해서 '세금 먹방'을 보게 됐다. 몇 번의 선택을 받던 그 채널은 '충주시 공식 채널'이라는 구독할 이유가 전혀 없고 해서도 안 될 것 같은 채널을 구독하게 했다.

사실 마케팅이란 그렇다. 마케팅은 이미 필요한 사람에게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이들에게 구매 가능성을 올리는 일이다. 즉 마케팅적인 측면에서 '충주시'는 완벽한 성공을 이뤘다.

나의 호기심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람이라면 반드시 욕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단순 '애향심'만 가지고는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나 또한 그렇다. 나또한 적잖은 기회를 가졌으나, '욕심' 때문에 일을 그르친 경우가 많았다. 마치 무르 익지 않은 과일을 수확하여 시장에 내다 팔아보겠다고 설친 경우다. 그러나 어떻게 그는 그 수많은 유혹을 견뎌 낼 수 있나. 그 부분에서 인간적인 존경심도 들었다.

그의 노하우는 매우 간결하게 책에 담겨 있다. 꽤 가볍고 쉽다. 때로 사람들은 '가볍고 쉽다'는 것에 불쾌감을 가질지 모른다. 다만 '가볍고 쉽다'는 것은 본질에 가깝다는 의미다. 그는 정보전달의 본질인 '쉽고 재밌다'를 너무 잘 알고 있다. 유튜브 채널처럼 도서는 쉽고 재밌게 내용을 설명한다.

누구를 타겟해야 하느지, 어떤 방식으로 내용을 전달해야 하는지, 그것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사실 조직이 규모화 되면 보수적으로 변한다. 그 어떤 조직도 마찬가지다. 커다란 조직에서는 '왜 그래야 하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악습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고, '효율'보다는 '명분'이 훨씬 중요해 지는 경우가 많다.

매너리즘에 빠진 조직원은 모든 것을 '관례화'한다. '최초의 의미'는 사라지고 그저 행위만 남는 것이다.

'군 조직'이 그렇다. 군조직에서는 '본질'은 사라지고 '행위'만 남는 경우가 많다. 그저 '행위를 위한 행위'만 남는 것이다. 이런 관례에 불만을 가지면 조직은 그저 '시키면 시키는대로'하라는 수동적인 자세를 강요한다. 대기업도 마찬가지다. 좋은 의미는 이미 사라지고 모두 관례만 남는다. 그러나 규모가 큰 조직 중 가장 큰 조직은 어디인가. 바로 국가 행정 조직이다.

이 행정 조직은 답답함 투성이다. 최근 아이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키고 느끼는 바가 있다. 초등학교 입학 후, 학교에서는 꽤 많은 서류를 보내온다. 거기에 서명하고 이름을 쓰고 다시 보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참 멍청하다' 싶을 정도로 바뀌지 않은 몇몇 관행이 보였다. 바로 불필요한 반복되는 서명이다. 세부내용에 대해 동의 하는지 묻고 서명을 요구한다. 그리고 문서 하단에는 '위 내용에 동의한다'는 서명이 다시 있다.

'동의 한 내용에 대해 동의한다는 서명'은 도대체 왜 필요한 것일까.

아마 그 최초의 문서 원문은 수십년 전 어떤 행정직 공무원이 작성한 글일 것이다. 그것을 수정하지 않고 아무도 불평하지 않으니, 사용하던 방식대로 그대로 사용하는 것일 것이다.

이런 관행은 점차 비효율을 낫는다. 변화에는 책임이 필요하다. 공무원은 비교적 책임을 피하고자 한다. 그런 의미해서 대체로 공무원 조직은 '비효율적'이고 '보수적'인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김선태 주무관'과 '그 조직'은 참 독특한 모양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하여도 그가 속한 집단의 모든 관행이 다른 부서와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비효율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오래된 관례를 이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신선한 도전이 하나 둘 생긴다는 것은 국민 한 사람으로서 고무적인 일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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