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것들의 이름짓기
김시래.김태성.최희용 지음 / 파람북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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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가의 기적, 34번가의 기적, 7번방의 선물.

모두 비슷한 이름이다. 이처럼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을 '극의 제목'에 사용하는 경우는 적잖다.

'택시운전사', '택시운전수', '택시운전기사'

이런 제목은 익숙한 제목의 인지도를 이용해 빠르게 전파되고 제목을 몇번을 더 되뇌는 효과가 있다.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라는 제목은 '스마트폰을 떨어뜨렸더니', '핸드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핸드폰을 떨어뜨렸더니'와 너무 비슷하다. 이처럼 비슷한 제목은 틀린 제목을 몇번 되뇌는 과정에서 저절로 각인되는 효과가 있다.

자고로 '외우게 만드는 것'은 어렵지만 '떠오르게 하는 것'은 비교적 쉽다. 이 둘의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답하기도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은 쉽게 각인되는 것이 가장 좋다.

예전 한 정치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욕을 먹더라도 많이 알려지는 것이 좋다.' 그 말의 저의는 이렇다. 100명에게 알려지고 100% 지지받는 정치인보다 100만명에게 알려지고 0.1%에게만 지지 받는 정치인이 결과적으로 더 낫다는 의미다. 그렇다. 100명에게 알려지고 100% 지지를 받아봐야 결국 100명이다. 다만 100만명에게 알려지고 0.1%에게만 지지를 받으면 결국 1000명이다. 결국 만인에게 욕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인지도'가 높은 쪽이 무조건 이득이다.

사람에게 '기억이 나도록 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도쿄대 의대 명예교수 요로 다케시의 말에 따르면, '사람은 웃으면서 생각을 바꾸지만 설득되어 생각을 바꾸는 일은 거의 없다.'

예전 동화 중 '바람'과 '햇님'의 나그네 외투 벗기기 시합과 닮았다. 결과적으로 느리다고 생각되는 방법이 가장 빠른 법이다. 얼핏 내가 살던 동네에는 재밌는 이름의 음식점들이 있다. '오리전문점'인 '탐관오리'나 '고기전문점'인 '육값하네'가 그렇다. 이런 이름들은 '헛'하고 헛 웃음이 나오지면 결국 각인되는 효과가 있다.

이처럼 반복적인 변주를 통해 기억에 각인시키는 방법은 광고와 정치, 미디어에서 자주 활용된다. 특히 반복된 노출과 유사한 변형은 처음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는데 어느 순간 인식 속에 스며들어 결국 자연스레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사람의 기억 속에 남기 위해서는 단순 반복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소위 '감정의 고리'를 활용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단순 정보보다 자신의 감정에 연결고리가 있는 요소에 집중하고 집착한다. 고로 아무리 비슷한 제목이라도 그 속에 특정한 감정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면 그만큼 강하게 각인된다.

앞에서 언급한 '요로 다케시' 교수의 말에 따르면 '웃음'이나 '유머'는 꽤 적잖은 감정의 반응이다. 우리 인간은 이런 상호작용을 통해 상대를 기억한다. 이처럼 우리의 감정을 사용하고 반복적이고 기억나게 하는 작명법을 '퓨즈'라고 한다. 퓨즈(FUSE)는 Fun(재미있고), Unique(독특하고), Story(스토리가 담긴) 그려먼서도 Easy(쉬운) 이름을 뜻한다. 이러한 것들이 퓨즈처럼 결합되어 빛을 만드는 법이다.

나의 블로그 이름도 그렇다. 블로그에는 천문학에 관한 이야기, 양자역학에 관한 이야기, 시사에 대한 이야기, 역사에 관한 이야기, 자기계발에 대한 이야기, 경제나 주식에 관한 이야기 등 여러 이야기가 있다. 대체로 책을 읽고 그것을 나만의 방식으로 소화하여 뱉는다. 보통 먹고 소화하면 먹은 모양이 그대로 나오는 경우는 없다. 어떤 경우에는 무엇을 먹었는지 가늠도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나의 글이 그렇다. 나는 책이 주는 영양분을 삼키고 소화시켜 블로그에 배출한다.

고로 나의 블로그는 화장실이고 글은 똥이다. 다만 사찰에서 화장실을 이르는 '해우소'라는 이름을 지어서 번뇌가 사라지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다시 내가 먹고 소화하고 배출한 양분은 다시 누군가의 양분이 된다. 그것은 다시 돌고 돌아 나에게 온다. 예전에 언급한 적 있지만, 열역학 제 1법칙과 제2법칙에 위배되어 불가능하다는 무한동력이 먹고 싸지르는 이 블로그 내에서 가능하다고 여긴다. 내가 먹고 배설한 무엇이 온라인 이곳 저곳에 거름이되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배출을 공개적으로 싸질러도 충분하고 배변을 참을 필요도 없다. 실컷 먹고 마음껏 배설한다.

예전 '먼 곳에서' 라는 소설에서 이런 대목이 나온다. '스웨덴 농장 감자에 떨어진 빗방울도 언젠가는 호랑이 방광 속에 있었다'는 대목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자' 사상과 불가 사상을 닮았다.

이야기는 꽤 돌고 돌았지만 결국 이름을 짓는다는 행위는 전체를 함축하는 대표 '문장'과 '단어'를 선출하는 일이다. 우리가 우리를 대표하는 이를 신중하게 선거하든 '이름'을 선출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책을 읽다보면 제목에 이끌려 읽되, 결국 이름과 달라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또한 일단 '선택'됐다는 점에서 '선택받지 못한 다른 도서들보다 더 낫다.' 결국 이름은 본질을 담은 또다른 본질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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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한자 읽기의 힘 - 교과서가 쉬워지는
김연수 지음 / 빅피시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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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은 위대하다.'라는 명제는 참이다. 다만 그것이 '한글'만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한글은 위대하지만 한글만 위대하지는 않다. 한글은 수학 기호와 아라비아 숫자를 대체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F와 V의 발음을 정확하게 표현하지도 못한다. '한글'이 위대하다는 것은 분명 '참'이지만 '한글만 위대하다'는 것은 '참'이 아니다.

우리는 '청동기'를 훨씬 지나왔지만 '기계산업', '전기산업', '예술' 등 여러 분야에서 '청동'을 사용하고 있다. '주된 사용'이 무어냐를 묻기에 '돌은 아니다.'라고 답할 수 있으나, 더 좋은 것을 발견했다고 그것이 모든 것을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한자는 지금으로부터 3300년 전인, 기원전 14세기에 처음 시작했다. 그 뒤로 2700년이 흐르고 한글이 만들어졌다. 한글의 발견은 혁명적이었으나 한글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는 없다.

'한자'가 가진 장점이 분명하게 있다. 한자는 '명사화'하기 쉽다.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다.'라는 말을 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또한 소통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범위에 따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세계도 제한된다. 즉 언어는 우리가 경험하고 사유하는 세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도구다. 언어가 발달할수록 우리의 사고나 세계관은 더 넓어진다. 즉 언어를 구성하는 '도구'를 많이 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

그렇다면 언어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나. '단어'다. 단어를 많이 하는 것을 우리는 '어휘력'이라고 부른다. 어휘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명사'다. 명사는 몹시 중요하다. 명사의 종류가 많을수록 언어 표현의 폭은 넓어진다. 명사는 사람, 사물, 개념 등을 나타내는데, 이런 명사가 세분화 될수록 정확한 표현이 가능하다. 가령 '동물'이라는 일반 명사는 '사자', '호랑이', '고양이' 등의 더 세분화된 명사로 나눠진다. 다시 '고양이'는 '페르시안', '샴', '스핑크스' 등으로 나눠진다. 즉 더 다양한 명사를 알수록 더 명확하고 풍부한 표현이 가능하다.

이처럼 명사의 종류가 많을수록 생각을 더 세밀하게 구분하고 전달할 수 있다.

'포유류가 서 있다' 보다는 '고양이가 서 있다'가 훨씬 더 명확한 전달이 가능하고 그보다는 '스핑크스 고양이가 서 있다'가 훨씬 더 정확한 의미 전달을 가능하도록 한다.

한자는 '명사화'하기 굉장히 유리한 문자다. 우리는 '겉과 속이 다르다'라는 표현을 '표리부동'이라는 명사로 바꾸어 쓸 수 있다.

일단 한 개념을 명사화 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언어에서 모든 명사는 동사화 될 수 있다.

'컴퓨터'는 '컴퓨터하다.'

'구글'은 '구글하다.'

'축구'는 '축구하다.'

등으로 사용된다.

다시 모든 동사는 형용사화 가능하다.

'구글하는', '축구하는', '컴퓨터하는' 처럼 말이다. 다시 이렇게 형용사화 된 표현은 부사화 할 수 있다. '구글하도록', '축구하기 위해서', '컴퓨터스럽게'처럼 밀이다.

즉 '표리부동'은 '표리부동하다'가 되고, '표리부동한', '표리부동하게' 등으로 무한히 넓어진다.

인간의 지식은 '분류'로 넓어진다. 물리학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과학은 '분류학'에 가깝고 대상은 분류하여 세밀하게 정리하는 과정에서 '과학'이 발생했다. 고로 언어에서 '명명'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는 지난 3000년 간 '한자'로 명명하여 언어화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 '한자'를 모르는 것은 우리 언어를 좁히는 것이고 이는 세계를 좁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혹자는 한자를 보고 '중국문자'라고 말하며 사용하기를 기피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아라비아 숫자'나 '알파벳', '수학기호' 등에는 조용하다. 유독 일본어와 한자에만 극성인 것은 역사적 열등감일지 모른다.

일단 한자는 '중국의 문자'가 아니다. 일단 '중국'은 '영토중심 역사관'을 갖고 있다. 다시말해서 현 중국의 영토 내에서 발생한 모든 역사는 '중국 역사'인 셈이다. 우리의 경우는 '민족중심 역사관'이다. 영토와 상관없이 민족이 중심이 되어 어떤 역사를 겪었는지를 말한다. 이 역사관의 차이는 사소해 보이지만 큰 갈등을 빚기도 하는데, 중국 역사관을 중심으로 보면 고구려는 중국의 영토에서 일어난 역사이니 중국 역사이고, 우리 역사관을 중심으로 보면 고구려는 우리 민족이 겪은 역사이니 한민족 역이다. 이는 역사를 기준하는 방법에 대한 차이일 뿐이다.

고로 중국의 역사관을 기준으로 볼 때, 한자는 중국 내에서 발생했기에 중국의 문자이지만 우리의 역사관으로 볼 때, 한자는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사용했기에 우리의 문자이기도 하다. 이는 '고구려의 역사'를 보는 중국과 한국의 차이처럼 볼 수도 있다.

'문자'는 사실상 '국적'이 없다. 얼마 전, '누나'와 '오빠'라는 단어가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등록됐다. 이제 '누나'와 '오빠'는 '한국어'이기도 하지만 '영어'이기도 하다.

때때로 우리는 '문화'에 '국적'을 달곤 한다. '초밥'은 어느 나라 음식인가. '햄버거는 어느나라 음식인가', '김치는 어느 나라 음식인가'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는 굉장히 구분하기 어려운 특성을 갖고 있다. 쌀밥 위에 날생산을 올려 먹은 최초의 사람을 찾는 것, 빵과 빵 사이에 햄을 넣어 먹은 최초의 사람을 찾는 것, 발효된 채소에 매운 양념을 무쳐 먹은 최초의 사람을 찾는 것이 음식의 기원이 되지 않는 것 처럼 말이다.

이는 단순히 어느 곳에서 대중성을 가졌느냐의 문제이지, 최초의 문제를 따지고 드는 것은 굉장히 비생산적인 일이다. 어쨌건 우리는 일반적으로 초밥은 일본, 김치는 한국, 햄버거는 미국을 떠올린다. 그 음식이 그 나라에서 대중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자'는 어떤가. 한자는 물론 '중국'에서 가장 대중적이지만 이는 동아시아에서 공유하는 문화다. 실제로 한국과 중국, 일본이 사용하는 한자는 각기 다르며 각자 다른 방식으로 개발하여 사용됐다. 즉 한자와 중국은 상관관계는 있지만 그것이 한자의 정체성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자의 정체성은 우리쪽에 충분하게 들어있다.

다시말해서 한자를 공부하고 사용하는 것은 매우 우리를 잘 알 수 있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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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주의 희망배달부입니다 - 우리 이웃들의 따뜻한 위로와 나눔 이야기
김완필 지음 / 미다스북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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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다 문뜩 밖을 보았다.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건물 밖에 세워둔 자전거가 떠올랐다. 아마 다 젖었을지 모른다. 비는 멈췄지만 빗물이 스며든 안장은 축축히 내 엉덩이를 적실 예정이었다.

비가 몰아치다가 잦아든 밖을 내다 보았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손 쓸 방법은 없었다. 축축한 엉덩이가 벌써 느껴지는 듯 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자전거'를 타고 나오지 말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해가 지고 건물을 나섰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자전거가 있는 곳으로 갔다. 거기에는 '우산'이 꽂혀 있었다. 우산은 자전거의 안장을 덮고 있었다.

'누가 우산을 씌워 놨을까'

알 길이 없었다. 누군가의 알 수 없는 선행으로 그날은 기분 좋게 집으로 퇴근할 수 있었다.

모든 선행에는 '댓가'가 필요한 법이다. 그렇게 믿었다. 다만 어떤 선행에는 댓가가 필요없다. 겉으로만 그럴싸한 '표면적인 열정'이 댓가를 충족하는 경우가 있다. 가령 무거운 짐을 여럿이 들어야 할 때, 조금 더 생동감 넘치는 거짓 표정과 거짓 기합 정도면 함께 들고 있는 여럿을 속일 수 있다. 굳이 조금더 남들보다 큰 노력을 들였다고 남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고로 적당한 힘과 적당한 연기만으로 적정선의 댓가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가짜 노력은 어디에나 있다. 우리 직업도 마찬가지다. 그럴싸한 표면적 열정만으로도 '급여'를 제공 받을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삶의 자세는 자칫 지금 약간 편안함을 느낄지 모르지만 삶 전체로 볼 때, 커다란 에너지 손실을 얻을 수 있다.

내가 거짓 노력을 하고 삶을 대하면, 나의 삶에서 '진실된 노력'은 판타지가 된다. 고로 다른 사람의 노력에 대해 '신뢰'를 가질 수 없다. 내 직업에 '진실성'이 없으니 타인의 '직업'에 진실성을 기대하지 못한다. 의사를 만나도 의사가 진심을 다해 치료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없고, 변호사를 만나도 변호사가 진심을 다해, 변호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없다. 이삿짐을 맡겨도 그들이 책임을 다해 물건을 정리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지 못하고,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해도 그들이 최선을 다해 요리를 만들 것이라는 믿음이 부족해진다. 고로 삶 전반적으로 에너지 소비량을 보면 '손해'에 가깝다.

고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삶'에 대한 '진실성'이다. 댓가에 맞는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댓가를 충족하고 흘러 넘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런 말이 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을 채우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잔을 충족시킬 수 없다. 내 잔이 흘러 넘칠 때, 우리는 다른 이들의 잔을 충족시킬 수 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진실성을 갖는다면 우리는 타인의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회 전반적으로 굉장히 생산적이고 삶 전체적으로 에너지를 줄일 수 있는 매우 탁월한 가치관이다.

'공무'를 보는 사람을 우리는 '공무원'이라고 부른다. 공무라는 것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티가 나지 않는 법이다. 때로 사람들은 공무원을 바라보며 '철밥통'이라고 비아냥 거리기도 한다. 다만 그들의 직업 윤리를 탓하는 사람들의 직업윤리도 돌아봐야 할 것이다. 삶은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서 밖에 생각하지 못한다.

한국어 밖에 하지 못하는 사람은 '스와힐리어'로 꿈을 꾸는 것이 불가능하다. 자신이 가치관과 세계관 밖의 세상에 대해서 상상하기는 어렵다. 고로 어떤 시각으로 삶을 바라보느냐는 자신이 어떤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가와 일치한다.

김완필 작가의 '나는 제주의 희망배달부 입니다.'는 제주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던 작가가 그간 자신의 보고 들었던 다양한 '공무'에 대한 일화와 철학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떠한지는 그가 직업을 바라보는 태도로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삶을 기반으로 '사회'에 다양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자신의 개인사와 가정사를 통해 제주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시간에 연민의 시각을 느끼고 자신의 하는 '공무'에 대한 단단한 철학을 갖는다. 그러한 바른 시각이라면 단연컨데 그가 바라보는 세상이 바를 것이다. 그는 남을 의식하고 의심하는 불필요한 걱정과 에너지를 줄이고 점차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을 것이다. 줄어든 에너지는 자신에게 꽤 긍정적인 힘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는 흔히 말하는 '카르마'로 반드시 어떤 부분으로 그에게 돌아갈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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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장 한자 4권 초등 2-2 - 한자 급수 시험 대비 6급 2 초등 하루 한장 한자
미래엔 교육콘텐츠연구회 지음 / 미래엔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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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뉴턴에게 물었다.

"어떻게 만유인력과 같은 대단한 생각을 하셨나요?"

뉴턴이 답했다.

"내내 그 생각 밖에 안하니까."

열매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떨어지는 구나'하고 넘어갔을 일을 뉴턴은 놓치지 않았다. 과연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누구나 같은 것을 보고 다른 것을 떠올린다. 고로 기회가 나무에서 송두리째 떨어지며 힌트를 주어도 뉴턴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맞추지 못했다.

열매가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되면 누구나 '만유인력'을 발견할 수 있을까. 아니다. '허생전'에서 '허생'은 열매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곧 풍년이 될 것을 알았다. 열매의 가격이 폭락할 것을 예측한 허생은 열매가 헐값이 되기 전에 대량 구매하고 저장한다. 열매는 풍년이 됐으나 허생의 독점으로 공급이 부족해지자 가격이 치솟는다. 허생은 그때 자신이 사둔 열매를 높은 가격에 팔아 큰 이익을 얻는다.

열매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누군가는 '인류사의 위대한 물리학적 업적'을 남겼고 누군가는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누군가에게 주어진 '행운'과 '기회'를 '시기'할 필요가 없는 이유다.

기회는 나에게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가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기회를 발견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뉴턴의 대답이 해답이다. 뉴턴은 '늘 그 생각만 했으니까'라는 명쾌한 대답을 했다.

다른 대안이 없이 늘 그 생각만 한 사람들의 뇌속에는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 '망상활성계'는 정보의 중요도를 구분하고 처리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정보에 기민하게 반응하도록 한다. 가령 자라보고 놀라게 되면 솥뚜껑을 보고도 놀라게 된다.

중요 정보에 대한 기민성이 작동되면 모든 사고가 일방향으로 전환된다. 미국의 경제는 꽤 단단한 편이었으나 1차 세계 대전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이에 미국의 국방력은 과소평가되곤 했다. 다만 미국은 전쟁에 참여하면서 모든 사회 기반시설과 경제 체제를 전시체제로 바꾸면서 전례없는 생산성을 갖게 됐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 중공업 산업은 미국 경제를 활성화 시켰고, 특히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미국이 세계 최대 군수물자 공급국으로 자리 잡게 됐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적이다. 이러한 것은 분산되어 여러 방면에 흩어져 있다가 긴장상태에 돌입하면 모든 에너지가 한곳에 집중되며 오로지 한 부분을 비대하게 만든다.

어떤 하나의 정보에 기민하게 되기 위해서는 항상 그 생각만 하면된다. 다이어트를 결심하면 전에 없던 '먹방'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자전거를 사고나면 길에 세워진 자전거 브랜드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비슷한 또래가 눈에 자주 보이게 된다.

이는 모두 망상활성계 탓이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판단한 정보가 세상에 임의로 뿌려진 다양하고 방대한 정보 중 선택 취합하는 것이다. 즉, 뉴턴은 실제로 늘 만유인력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다가 마침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우주의 법칙'을 깨달았을 것이다.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유레카를 외친 이유도 그에게만 특별한 기회가 주어져서가 아니다.

박찬호 선수는 길을 가다가 '계단'이 나오면 그것을 오르지 않고서는 '손해'를 보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실제 그런 심리는 그가 보이는 계단마다 오르게 했고, 남들이 그저 스치고 지나가는 계단 중 일부라도 오르고 내리게 했다.

즉, 어떤 것에 '약몰입' 상태로 집요하게 집념하면 그것은 우리 뇌에 의해 '중요 정보'로 분류된다. 이것이 어째서 무서운가. 이유는 이렇다. 이렇게 우리의 망상활성계가 작동되면, 우리의 뇌는 의식을 내려 놓은 모든 시간과 공간에 정보를 선택 취합하여 일방향 목적으로 인도한다. 즉 걸어가면서, 샤워하면서, 먹으면서, 심지어는 잠을 자는 동안에도 학습하고 발견하고 취합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잠'에는 '잠을 자는 동안' 꿈에서 공부하여 의대에 들어가는 내용이 나온다. 이런 비약은 역시 비현실적이겠지만 그렇다고 우리 현실에 완전히 없는 내용은 아니다.

무엇을 얻고 싶거나, 하고 싶거나, 가고 싶거나, 되고 싶다면,

고로 간절히 바라고 끊임없이 집요하게 의식해야 한다. 그저 표면적이고 명시적으로 '하고 싶다'고 앵무새처럼 되뇌일 것이 아니라, 우리의 뇌가 그것에 기민함을 가질 수 있도록.

*어릴 때, 특이 언어가 비약적으로 늘어나는 언어빅뱅 시기에 '한자'를 접하면 이후에 접하는 모든 어휘가 '한자' 보여진다. '복리'로 커지는 어휘력의 속성에서 최초에 2를 곱했는지 4를 곱했는지는 이후에 1000만을 더했는지, 말았는지 보다 중요하다. 아이가 하루 한장 한 글자의 한자를 아침에 보고 하루를 보내면 그 스치는 일상에서 얼마나 많은 중요 정보가 습득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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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나의 아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7
아서 밀러 지음, 최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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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밀러의 희곡 '모두가 나의 아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평범한 가정을 말한다. 테마는 '비극'이다. 주인공 조 켈러는 전쟁 중 불량 비행기 부품을 납품해 군인의 목숨을 앗아간다. 또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 책임을 동업자에게 전가한다. 이로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많은 가족은 고통을 받는다. 다만, '조'는 자신의 선택이 '정당했다'고 믿는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그의 아들인 '크리스'는 아버지의 진실을 알게 된다. 결국 가족은 이와 관련한 갈등을 겪는다.

우리가 하는 선택은 '선'과 '악'으로 명확히 구분지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맞이하는 선택은 항상 이런 식이다. 희곡과 같이 어떤 선택은 가족을 위하거나 지극히 개인을 위한 '선'일수 있고, 어떤 선택은 '사회적 책임'을 동반한 결정일 수도 있다. 다만 모든 선택에는 그 이면에 감춰진 '책임'이라는 것이 따른다.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 '허준'에는 비슷한 선택의 결과에 대한 장면이 나온다. 많은 이들에게 존경 받고 심지어는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이룬 '허준'은 드라마 후반부에 가서 '아들'의 '원망'을 듣는다.

임진년, 왜군이 쳐 들어왔을 때, 불에 탈 위기에 처한 '서책'을 짊어지기 위해, '국왕'의 호위길을 이탈했고 경황없는 전쟁의 위기에서 '가족'을 새까맣게 잊어 버린다.

이 드라마에는 굉장히 철학적인 서사가 있다. 바로 '허준 아버지', '허론'에 대한 이야기다. 드라마 상 허론은 굉장히 덕망있는 무반계 양반이다. 다만 '허론'은 '밀무역'이라는 중범죄를 지은 자식의 죄를 덮기 위해, 자신의 이름에 치명적인 선택을 한다. 반대로 '허준'의 경우에는 자신의 자식이 위독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순번을 지켜 아들을 치료하는 지독함을 보인다. 어떤 것이 옳다고 할 수 있는지의 문제가 아님은 분명하다. 어떤 가치관으로 상황을 보느냐에 따라, 분명 다른 평가가 나올 법하다. 허준의 융통성 없음은 분명 가족들에게 치명적인 불행이었겠지만, 역사적으로 더 많은 사람을 살린다. 그렇다면 그의 행동은 무전무결한 '선'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가. 알 수 없다.

'모두가 나의 아들'이라는 제목은 작품의 주제와 상징성을 갖는다. 제목은 단순히 한 가족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인류 공동체와 사회적 책임에 대한 메시지를 담는다. '조 켈러'는 자신의 비도적적 선택으로 전쟁 중 수많은 군인의 목숨을 앗아간다. 그의 선택은 직접적이지는 않다. 이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사건처럼 굉장히 철학적 사고를 요하는 선택이다. 그가 만든 불량 부품으로 인해 죽은 군인들은 전쟁터에서 자신의 자식이 사망한 모든 부모들의 아들이다. 고로 '모두가 나의 아들'이라는 제목은 조가 자신의 아들만 보호하려 했던 이기적인 태도와 전쟁에서 죽어간 많은 군인에 대한 책임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희곡이 쓰이진 배경적 지식의 영향으로 희곡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모호하지 않다. 다만 이를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여지는 분명하게 있다. 희곡에서 크리스는 아버지의 비밀을 알게되고 상황과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이 세운 도덕적 가치관이 무너지는 경험을 한다. 우리 대부분은 성장과정에서 부모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삼고 그것에 의지하여 자신의 세상을 구성한다. 다만 그러한 부모가 자신이 믿고 있던 도덕적 기준을 배신 할 때, 그 충격은 분노나 슬픔을 넘어, 나는 누구인가 하는 근본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를 보면, 얼마 전 읽었던 소설인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 떠오른다. 다자이 오사무 역시 꽤 부유한 배경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부의 출처가 '대부업'이라는 사실은 그를 괴롭게 한다. 그의 사상적 배경에는 '마르크스 사상'이 자리잡았기 때문에 그의 출신 배경과 생각해 볼 때, 자아에 대한 모순과 혼란이 필연적이었다. 실제 다자이 오사무는 이러한 배경적 지식과 자신의 철학에 대한 인지부조화로 삶을 괴로워하다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는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 이민진 작가의 소설은 '파친코'와 비슷하다.

결국 여기서 벌어지는 모든 비극은 '단순히 한 가정의 비극'아니다. 이는 우리 사회 속에서 서로에게 책임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우리가 내리는 선택들이 단순히 개인적 이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사회적 맥락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 아들러가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관계속에서 성장한다. 진정한 도덕적 선택이란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들과의 관계속에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결국 '모두가 나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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