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공부 - 개나 소나 자유 평등 공정인 시대의 진짜 판별법
얀-베르너 뮐러 지음, 권채령 옮김 / 윌북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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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 없이 어떻게 합의에 이를수 있는가? 갈등은 열린 사회의 핵심이다. 민주주의를 악보로 표현하자면, 주요 테마의 화성은 불협화음일 것이다. 모든 변화는 움직임을, 움직임은 갈등을, 갈등은 열기를 의미한다' -솔 앨린스키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 민권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던 솔 앨린스키는 '민주주의'를 '갈등'과 '불협화음'의 체제라고 언급했다. 누군가는 그를 대중을 선동하는 좌파 선동가라고 불렀지만, 이런 모든 모습을 수용하는 것조차 어쩌면 민주주의일 것이다. 국민의힘 상임고문이자 전 새누리당 대표최고의원인 김무성 전 대표는 당내 계파갈등에 대해 "민주주의는 원래 시끄러운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주의란 원래 불안정하고 비효율적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런 민주주의의 불완전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민주주의에 완성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끊임없이 진보합니다." 이 두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민주주의는 원래 시끄러운 것이고 불완전하고 비효율적인 것이다. 대단한 정당이 집권하거나 훌륭한 지도자가 탄생한다고 해도 민주주의의 완성은 존재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항상 다리 길이가 달라 삐끄덕 거리는 의자 위를 조심스럽게 앉아 있는 것과 같다. 마치 어느 쪽 방향으로든 쓰러질 것 같은 곡예사의 막대기 위에 접시가 겨우 균형을 잡으며 돌고 있는 것이다. '국민대통합'이란 말은 사실상 민주주의에 어울리지 않다. 민주주의는 생각이 다른 여러 '자유의사'들 이곳으로 힘이 왔다갔다 번갈으며 반복한다. 그러나 이런 불완전한 체제임에도 민주주의는 현 세대의 대세가 됐다. 이에 유시민 작가는 민주주의가 대세가 된 이유는 '경쟁력'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16세기 조선에서 대단히 위험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천하는 공공의 물건이고, 특정 주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조선 최초의 공화주의자 정여립이다. 그는 '천하가 임금의 것'이어야 하는 대세를 거스렀다. '황해도 관찰사'가 선조에게 올리며 이 '사상 다른 이'를 고발하면서 사건은 시작됐다. 사건의 시작되자, 정여립은 체포 직전에 자살한다. 그러나 선조는 정여립과 연관된 이들을 모두 제거하기 시작했다. 2년 간 약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생각 다른 불순물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체제안정'을 하는 것은 전체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즉, '국민대통합'이라는 말은 자칫 위험하게 해석될 여지도 있다. 민주주의는 효율적이거나 안정적인 제도는 아니다. 5년에 한 번 씩 전임 통치자가 했던 정책을 싹다 갈아 엎어 새로 시작한다. 사회적 비용이나 시간, 노력을 생각하자면 이처럼 비효율적인 정치방식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대부분의 국가는 민주주의를 택하고 있다. 생각 다른 이들과 공존하며 너 한 번, 나 한 번, 권력을 이양하고 양도 받는다. 이는 스포츠 경기와 비슷하다. 상대방의 골대로 골을 넣는 방법은 상대 선수를 모두 총으로 쏴버리고 터벅 터벅 걸어가 넣는 일이다. 그러나 스포츠 경기의 공은 일정한 규칙을 지키며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바쁘게 왔다갔다 하며 승리를 한다. 심지어 같은 목표를 도달하기 위해, 같은 팀의 다른 포지션 누군가에게 서스름없이 공을 넘겨 준다. 우리 팀끼리도 서로 공을 주고 받길 바쁘게 하다가 결국 한 골 넣고, 한 골을 먹히길 반복하며 경기는 진행된다. 이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규칙, 심판, 관중, 선수들이다.

대한민국 정치인들의 뉴스에 아름답거나 멋진 이야기는 실리지 않는다. 그들은 보통의 대중보다 더 선한 일을 하더라도 반드시 욕을 먹는다. 대한민국의 정치가 후진적이거나 나쁘다라고 누군가는 말할지 모르지만, 그 또한 '민주주의'의 한 조각이다. 지난 2021년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지지하는 시위대가 워싱턴 DC의회의사당에 난입하는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었다. 이에 주 방위군의 투입됐다. 민주주의는 약속과 합의를 통해 비폭력적으로 권력을 이양하는 그나마 인류가 발견한 가장 선진적인 방식이다. 물론 우리의 과거 민주주의도 '폭력'과 '강요'로 얼룩져 있지만, 최소한 지금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우리가 동경해오던 여타 선진국만큼이나 성숙해지고 있다고 믿는다. 지난 민주당 경선에 졌던 이낙연 후보는 상대 경선 후보였던 이재명 후보에 지고 난 뒤 이렇게 말했다.

"불만이 있어도 약속은 약속이고 합의는 합의입니다.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입니다."

어떤 스포츠 경기더라도 '목적'에 '맹'자가 붙는다면 어김없이 '폭력'으로 이길 수 있다. '축구경기'에 몽둥이를 지참하지 않는 이유는 상대도 나와 같이 규칙을 지킬 것이라는 믿음을 통해 경기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반드시 경기를 지켜보는 관중에 의해 감시를 받아야하고 이를 중재하는 심판이 있어야 하며, 경기의 룰을 최대한 따르겠다는 플레이어의 최소한의 양심이 있어야 한다. 언제든 대통령을 욕할 자유가 있고 실행하는 권력에 반대할 권한을 누구나 가질 수 있으며 표현과 사상의 자유 등 다양한 다양성을 인정하되 '법치'에 따른 규칙을 지키는 '문명'적인 권력이양 체제다.

도서는 대한민국의 정치보다는 미국 혹은 유럽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책이 말하고자하는 '민주주의'는 특히나 우리에게도 이미 적용되는 이야기들이었다. 포퓰리즘이나 독재와 같이 민주주의는 언제나 경계해야 할 내용들이 분명하게 있다. 지난 브렉시트 때, 나는 투자하던 회사의 주가 하락으로 꽤 큰 손해를 봤다.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될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지금에서야 그럴 수 있을 법한 일들이지만, 당시에는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하거나, 트럼프가 힐러리를 이기는 일이 당연한 일은 아니였다. '설마, 그래도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 않겠어?'라는 생각이 언제나 틀릴 수 있음은 '민주주의의 역설'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국가를 운영하는 '행정가'들은 가끔 '엘리트주의'를 말하곤 한다. 플라톤 역시 포퓰리즘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순수한 엘리트 주의를 이야기 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교육'에 의해 가장 잘 정제되어 합리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이에 그 원리와 역사 등을 알아보고 살펴보는 것은 우리 대중이 앞으로 어떤 국가와 국민이 되는지 가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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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 코드 - 고통의 근원을 없애는 하루 10분의 비밀
알렉산더 로이드 지음, 신동숙 옮김 / 시공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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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는 '인생은 고통이고 슬픔으로 가득 찬 감옥'이라고 했다. 고통의 본질을 고민하던 사상가는 그 밖에도 많다. 석가모니와 쇼펜하우어 역시 고통의 본질을 고민하였다. 인생은 아름답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름다움보다 '고통'을 더 깊게 느낀다. 염세주의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라는 것은 아니다. 본질을 직시하는 것은 그저 다가 온 고통을 모르쇠로 일관하여 외면하는 것과 다르다. 우리가 그러지 않다고 곱씹고 되뇌여도 우리의 대부분은 인생에서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모두 겪을 것이며, 그 중, 희(喜: 기쁨)와 락(樂: 즐거움)보다는 노(怒: 성냄)와 애(哀: 슬픔)를 더 크게 인식을 할 것이다. 원래 인간은 그렇다. 우리를 생존하게 하는 기본 원리는 생존지향성(survival orientation)이다. 인간은 종족과 개체보존의 법칙을 철저하게 지켜내기 위해, 위협에 기민하게 진화해왔다. 우리가 겪어오는 수 많은 기억은 모두 장기 기억으로 넘어가지 않고 일부는 단기기억이나 외현기억, 암묵기억으로 넘어간다. 그중 생존에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기억은 반드시 장기기억으로 전송시킨다. 그것이 우리를 생존케 하는 '본능'이다. 결국 우리의 머리속 해마 옆에 있는 편도체는 공포와 두려움 등의 고통의 감정에 반응한다. 이것이 장기기억으로 넘어가줘야, 우리는 맹수에게 물리지 않기 위해 두려움을 이용하여 '조심'히 행동하고 움추려 적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은폐한다.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칭찬받은 기억보다 혼난 기억이 더 먼저 떠오르는 이유도 사람은 대게 나쁜 일을 오래 기억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기억의 내용이 상실되더라도 감정과 불안, 공포라는 아주 효율적인 압축파일로 저장됐다가 불현듯 떠오르게 한다. SNS를 들여다보면, 모두가 행복해 보이는 곳에서 혼자만 고통의 인생을 살고 있다고 좌절하거나 우울해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바로 그 이유다. 우리의 사피엔스 종은 참 어리석게도 가장 행복한 순간을 '인터넷 클라우드 서버'에 남기고, 가장 불행한 기억을 '자신의 편도체'에 남긴다.

책은 과학과 오컬트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모든 내용에 공감하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책은 어떤 의미에서 나에게 새로운 인사이트를 분명 던졌다. 어떤 책이던 읽다보면 작가와 생각이 다를 때가 있다. 그렇다고 그 책이 잘못됐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흥미롭게 읽어 내려갔다. 한때, 나 또한 어떤 작가의 책을 평가했던 적이 있다. '상당히 실망스러운 책입니다.'라는 평을 달았던 적이 있다. 그것에 굉장히 큰 후회를 한다. 나 또한 내 집필서적에 대한 리뷰를 꼼꼼하게 챙겨본다. 그럴때면 당연하게 좋은 이야기만 적혀 있지는 않다. 어떤 누군가는 부끄럽게도 '인생 책 중 하나'로 꼽기도 하고, 너무 좋았다며 여러 권을 더 구매하여 주변에 선물하기도 했다고 했다. 반면 다른 누군가는 되려 '인쇄된 종이가 아깝다'고 하거나 '작가에게 속았다'라며 평가하기도 한다. 같은 글을 보고도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책'이 '상대적인 도구'이기 때문이다. 같은 거울을 들여다 보고도 '남자'가 서 있기도 하고, '여자'가 서 있기도 하며, 멋있는 사람이 서 있기도하고, 그렇지 않은 이가 서 있기도 하다. 이유는 '거울'이 잘못 만들어진 이유도 간혹 있겠지만, 보통 '거울'이 '상대적인 도구'이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어디를 비췄느냐', '누구를 비췄느냐'에 따라 거울은 완전히 다른 결과물을 보여준다. 1548년 생인 조르다노 브루노라는 이탈리아의 철학자가 있었다. 그는 '무한 우주와 세계에 관하여'에서 교황청에 반하는 주장을 했다. 그 주장으로 인해 그는 교황청에서 이단으로 분류됐다. 그는 당시 '성경'의 해석에 불만이 많았다. 삼위일체를 부인하거나 그리스도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바라봤다. 그런 그에게 교황청은 불순한 해석을 철회하지 않을 경우 사형시키겠다고 엄포를 놨다. 그러나 그는 철회하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그는 화형당했다. 그가 사망하고도 수 백 년 간, 그의 명예는 회복되지 않았다. 20세기나 되서야 이 종교 재판의 잘못됐음이 인정되고 1979년에서야 사형판결이 취소 됐다. 내가 믿는 진리는 결코 영혼불멸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학이나 종교에서도 분명하다. 내가 중력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중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내가 모르는 영역에 대해 활짝 열어 두고 상대의 이야기에 일말이라도 재고할 필요는 있다. 즉, 나쁜 책은 없다.

우리가 겪었던 기억들이 반드시 우리에게 되돌아오고 그중 장기기억으로 넘어간, '부정'의 감정들은 다시 현재의 나에게 간섭할 것이다. 오래된 기억을 잘 정리하고 다듬지 않는다면 이 기억들은 분명 '독'이 될 것이다. 같은 샘물을 마셔도 '독사'는 '독'을 만들고 젖소는 '우유'를 만든다. 우리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언제나 '독성'을 만들어낸다. 그 독성으로 상대를 죽이기도 하고, 가끔은 '자신'을 죽여 '나는 맛없는 고기입니다'라는 신호를 뿜어내기도 한다. 우리가 스트레스를 극하게 받아 독성을 스스로에게 투여하고 있다면 그것을 멈춰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기억은 그 고통의 원천이 된다. 그 기억을 잘 다듬고 직시하는 것은 몹시 중요하다. 아무리 되돌리고 떠올려봐도 도대체 고통의 근원이 자신이게 있지 않을 때가 있다. 그것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수 백 년 전, 내 조상의 기억이 유전적으로 되물림 될지도 모른다는 시선도 있다. 현대 사회에서 '조상의 업보'를 '후대'가 받는다라는 '비과학적'인 말이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우리 모두는 우리 조상이 나무 위에서 내려 온 업보 때문에 '직립보행'하는 진화를 겪었다는 것과 연결시켜 볼 수 있다. 조상과 내가 전혀 다른 개체라고 여기는 것도 사실상 굉장히 비과학적인 접근이다. 수백년 전 조상의 과보를 후대가 받는다는 '영적'인 믿음의 영역이 아니라, 분명 우리 모두는 조금씩의 진화를 거쳐 성장해왔고 인간의 역사 대부분은 철저하게 '가문'만의 직업과 역할을 가지고 살아왔다는 점이다. 수 만 년을 올라갈 것도 없이 동양의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불교' 또한 '고(苦: 괴로움)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했다. 그것을 피하지 말 것이며, 부정하지 말 것이며, 인정하되 사로잡히지 말고 받아들이되 빠지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를 객관적인 입장으로 바라보고 그 현상에 대해 냉철하게 바라보는 것을 '수행'하는 것이 오랜 동양 철학의 사상이다. 오래 전 부터, 동양은 밀농사를 짓는 서양과 다르게 '관계'를 중요시 했다. 집중호우기에 풍부한 강수량으로 벼농사를 짓던 동양인들은 보를 짓거 관개사업을 할 때, 항상 공동체적으로 움직여야 했음으로 관계설정은 굉장히 중요했다. 아들러의 말처럼 관계설정에서 부터 열등감이나 우월감 등 다양한 감정이 생겨남으로, 동양의 이런 철학의 뿌리는 역사적으로 신임이 가기도한다.

두고 두고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다. 인생의 고락이 어디서 부터 출발했는지, 그리고 지금의 나는 과연 과거와 그 윗대에서 부터 완전하게 분리 독립된 객체인지를 말이다. 우리 모두에게 잠들어 있는 기억들로부터 고통으로 해방되고 다시 오늘과 내일을 다르게 살 수 있게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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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미 이치로의 삶과 죽음 - 나이 듦, 질병, 죽음에 마주하는 여섯 번의 철학 강의
기시미 이치로 지음, 고정아 옮김 / 에쎄이 출판 (SA Publishing Co.)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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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태어난 그날이 바로 죽기 시작한다. 병들지 않으면 좋지만, 병에 드는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삶의 조각이다. 이별하지 않으면 좋으나, 만남은 동시에 이별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간다. 삶과 죽음에 대해 철학적인 질문을 하면 할수록 인생을 옭아 매는 사슬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사랑은 좋은 것이나, 돌아설 때는 '원수'의 모습을 하고, 존경과 감사는 긍정적인 것이나 돌아서면 증오나 실망으로 한순간에 바뀐다. 어린 아이를 달래는 방법은 간단하다. '초콜렛'이나 '사탕'을 들고 서면 된다. 혹은 '큰 소리'로 호통을 치거나, 기쁨 마음으로 칭찬을 하면 고래도 춤추게 한단다.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통해 회유하거나, 그 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통해 공포심을 주면 된다. 그것은 가장 원초적이고 확실한 방법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 다 자란 성인에게는 그깟 '초콜렛'과 '사탕'이 회유의 미끼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 자란 성인에게는 그깟 '큰 소리' 호통 정도는 공포감을 주지 못한다. 사람을 나이가 들면서 '초콜렛'과 '사탕'보다 달콤한 것을 알아가고, '큰 호통'보다 무서운 것들을 알아간다.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피하고 싶은지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데, 가장 어려운 상대는 무엇도 원하지 않고, 무엇도 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나이 마흔이 '불혹'이라고 했다.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이가 마흔이란다. 나이 마흔이 되면 사람들은 웬만한 '미끼'를 물지 않는다. 달달한 사탕이면 언제든 꿸 수 있는 어린 시기를 지나고 '돈' 몇 푼에 '청춘'도 내다파는 젊은 시기를 지나, 웬만한 일을 다 겪고나면 나이 마흔 쯤에는 꿸만한 미끼도, 위협할 공포도 많이 사라지는 모양이다. 사람이 생로병사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태어나면 늙고 병들고 죽는다. 인간이라면 반드시 겪게 되는 네가지 고통인 생로병사, 그나마 다 자란 어른을 움직이는 유일한 공포다.

기쁨은 '마약'과 같다. 약물을 더 많이 쓸수록 내성이 생겨 쾌감이 줄고 더 많은 사용량이 필요하다. 어린시절 어머니는 분홍 소시지 전을 종종 해주셨다. 아무때나 먹을 수 있는 건 아니였고 대부분의 우리집은 김치찌개가 식사 매뉴였다. 김치찌개에서 고기나 두부를 건져 먹는 일 말고는 내가 좋아하는 반찬은 그닥 없었다. 내 기억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던 어린 시절 반찬은 '분홍 소시지'다. 이 반찬은 나를 움직이는 아주 좋은 자극제였다. 이 반찬이 나오는 날은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다. 안좋은 일들도 금새 잊게 됐다. 나이가 들면서 적게는 몇 만원에서 수 십 만원을 하는 한끼를 먹는 날이 생기기도 했다. 세상 맛있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짜장면 한 그릇값이라는 5,000원짜리 아메리카노를 먹어도 그닥 큰 기쁨이 몰아오곤 하지 않았다. 1,500원이면 거의 일주일을 먹던 분홍소시지라는 적은 투여량으로는 나를 만족 시키지 못했다. 담배농사는 옛부터 벼농사보다 수지가 맞는 사업이었다. 사람들은 배부름보다는 쾌락을 선택하곤 했다. 사람들이 쌀보다 담배를 더 많이 찾기 시작하자, 농사꾼들은 당연히 벼농사를 지어야 할 농지에 담배농장을 지었다. 그러자 국가에는 조세 문제가 발생했다. 중세부터 동양에서는 점차 이 것에 위험을 감지했다. 17세기 일본에서는 담배 금지를 수차례 내렸고, 명나라나 청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담배는 꽤 질이 좋았는지 조선인들은 대부분 담배를 사랑했다. 중독의 파멸은 '청나라 말기'에서 노골적으로 들어났다. 청나라가 담배를 금지하자, 담배대신 사람들은 더 자극적인 아편을 찾아 피웠다. 처음 작게 시작한 사건의 발달은 청나라 경제를 무너뜨리고 급기야 청의 몰락까지 이어졌다.

대부분의 쾌락은 항상 이처럼 극도의 중독성과 함께, 그 투여양이 늘어난다. 부자가 되길 원하는 마음은 1억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10억과 100억으로도 만족하지 못한다. 이 것이 결국 파멸로 가는 것을 경계 많은 성인들은 '쾌락' 사용의 위험을 이야기 하곤 했다. 얼마 전, 아이와 한라산 근처에 있는 '관음사'를 방문했다. 거기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병들어 죽는 일'에 대해 '불행'이라고 여기지 마라. 얼핏 표면적으로 다가오지 않던 그 말의 진위가 보였다. 병들어 죽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며,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나이들어감, 병듦,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면 사람은 자신을 위협하던 공포에서 자유롭게 된다. 채찍질하는 마구에게 말이 노예처럼 쓰여지는 이유는 등을 후려치는 '매질'이 두려워 움직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후둘겨 패도 꼼짝도 하지 않는 말은 마구에게 쓸모가 없어 버려진다. 그로써 말 듣지 않는 말은 '자유'를 얻는다.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인 알프레드 아들러는 '개인심리학'을 수립했다. 그는 인간의 행동과 발달을 결정하는 것이 열등감과 무능력이라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열등감과 무능력을 갖고 있으며, 이것에 대한 보상 욕구는 그 사람을 움직인다. 또한 권력에 대한 의지 또한 사람을 움직인다. 원인론 적인 측면에서 사람의 심리를 다루는 아들러는 인간의 번뇌의 시작이 '관계'에서 발생한다고 봤다. 즉,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상대성'에 비교 기준을 두면서 '절대성'이 생긴 것이다. 지나가며 마주한 10층짜리 빌딩은 굉장히 높다고 보여지나, 50층 짜리 빌딩 옆에서는 작은 건물일 뿐이다. '관계설정'과 같은 '비교'가 사라지면, 인간은 자유를 얻는다.

'미움받을용기'를 집필한 '기시미 이치로'의 조금더 철학적인 이 책은 아이러니하게도 굉장이 얇다. 진리와 철학은 굉장히 고차원적인 것 같지만 사실상 단순하다. 세상 만물을 모두 더하면 '1'인 것과도 같다. 책은 생각할 거리를 충분하게 주면서도 어렵지 않고 대화 형식을 적당히 섞어가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역시나 '미움 받을 용기'에서 처럼 그의 철학의 대부분은 '아들러 심리학'에서 출발한다. 일본어를 하는 그의 철학 이야기를 이처럼 서재 자리에 앉아 읽어 낼 수 있다는 행운은 일종의 독서가 주는 '축복'에 가깝다. 책의 마지막에 그는 '한국 영화'에 대한 도서 집필을 했다고 한다. 다만 마침내 한일관계가 악화되어 출간되지 않은 모양이다. 어떤 형식으로 출간될지 모르지만, 그의 철학과 적절하게 섞어 한국 영화에 대한 평이 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그의 새로운 책 또한 한국어로 번역되길 고대하고 기대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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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위의 집
TJ 클룬 지음, 송섬별 옮김 / 든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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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른이를 위한 동화. 장난감 집이 커다랗게 표지에 자리 잡아있다. '벼랑 위의 집'이라는 책의 제목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올렸던 제목은 '벼랑 위의 포뇨'다. 아이와 함께 보면 좋을 것 같은 동화의 제목과 표지에 대한 기대감으로 첫 페이지를 열었다. 얼마를 읽었을 때는 어렵지 않은 문체에 시원 시원하게 넘어가는 글자는 580페이지나 되는 책을 단숨에 읽어 내려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법이라는 소재로 시작하는 이 책이 '어린이'가 아니라'어른이'를 위한다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을 때, 가장 먼저 생각했던 '벼랑 위의 포뇨'는 온데간데 없어졌다. 나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자리 잡은 것은 프랑스 작가 생택쥐페리의 동화 '어린왕자'였다. 생택쥐페리의 동화, 어린완자는 '분명' 어른들이 '어린이'들에게 읽기를 권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단순히 동화같고 단조롭다. 또한 짧다. 다만, 그 이야기를 잊고 지낼 언젠가 '어린왕자'의 대목 하나 하나가 어른이 된 나에게 불쑥하고 찾아온다. 그리고 다시 읽게된 '어린왕자'는 사실, 어린이로 읽었던 동화와 분명히 다른 책이었다. 그 책은 어른이 되어 읽으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유치한 소재와 터무늬 없는 설정에도 어른들은 그 '어른이 동화'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다. '벼랑 위의 집'이 담고 있는 이야기는 과연 '마법'을 소재로 한 판타지 동화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TJ 클룬이 누구인지 먼저 알았다면, 아마 이 책을 읽기 전 부터 마음에 준비를 하고 읽었을지도 모른다. 저자인 TJ클룬은 람다 문학상 수상 작가다. 그는 보험회사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평범한 남자로 보이지만, 스스로 괴짜라고 인정하고 사는 사람이다. 그는 보통 '동성애'에 관한 장르를 쓰곤 한다.

코로나19로 무언가 재밌는 것을 검색해 보기를 반복한다. 넷플릭스에서는 더이상 재밌는 영화를 기대하기 힘들고 그렇다고 새로 개봉하는 영화를 찾아보기도 힘들다. 갇혀 사는 세계에 점차 익숙해지며 심심하고 우울하기를 반복한다. 그런 와중 이 책이 나에게 왔다. 꽤 두툼한 글자는 처음 펴들기 막막하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 한 번 읽기 시작한 책은 속도감 있게 책장이 넘어갔다. 소설은 전체적으로 단순하게 흘러간다. 마법아동고아원을 감찰하는 조사요원인 라이너스 베이커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고아원의 아이들을 조사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을 하는 와중 한 고아원을 조사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들어선다. 소설은 생동감이 넘치고 정교하게 짜여져 있다. 기발함과 장난기가 가득 묻어난다. TJ클룬의 성격답게 긍정적임과 괴짜스러움이 잔뜩 묻어진 책이다. 마법 아이들을 위한 고아원, 세상과 떨어져 사는 온화하고 자상한 두 남자 사이의 로맨스,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살피지만 일반 대중의 눈에서 멀어지며 보여지는 관료주의와 편견, 두려움 그리고 그것에 맞서는 가족의 힘. 분명 단순히 신비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을 담은 판타지 소설이 아니다. 제일 처음 '모던패밀리'라는 미국 드라마를 보던 때가 기억이 난다. 당시 나는 드라마가 한참이나 진행되는 동안 왜 그 제목이 그런 제목이 됐는지 알지 못했다. 어느덧 이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취지를 알 수 있게 됐다. 이 드라마는 '현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이 시트콤의 주인공들은 '게이커플'과 나이 많은 남편과 젊은 여성, 이민자 가족 등 우리가 '일반적인 가정'의 모습이 아닌 이들이다. 그러나 현대 미국을 비롯해 대한민국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의 가족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이 소설과 시트콤이 같은 부분을 담고 있다고 보여진다.

일반적이지 않은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다보니, 매력적인 캐릭터를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소설의 재미는 곱절이상으로 커저간다. 물론 이 소설이 담고 있는 모든 이야기가 긍정적으로 보여지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바라보는 작가의 성격이 시선으로 반영됐다. 분명 미국에서 조차 이 책에 대해 여러가지로 다른 관점들이 나오는 모양이다. 이 소설은 "The Sixties Scoop"이라는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작성된 책이다. 실제 1950년에서 80년대까지 캐나다의 원주민들이 백인 가정에 강제로 입양됐는데, 이 일로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느끼고 문화상실에 대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곤 했다. 당시 고아원을 다니며 복지를 감독하는 이가 있었다.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가정에서부터 빠져나와 학교나 정부 보호 시설에 수용됐다. 그들은 캐나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 등지로 입양됐는데 그 숫자가 2만명이 넘어가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2017년이 넘어서야, 캐나다 정부차원에서의 보상이 이루어졌다. 사실 중산층 백인 집으로 입양된 원주민들의 이야기는 자칫 아름답게 포장될 수도 있겠으나. 사실상 그들은 고문이나 폭력에 시달리고 강제적인 문화적 변화에 트라우마를 겪곤 했다. 지금까지도 각자의 나라에서 2등 시민으로 살고 있는 이들에 대해 사회는 8억 달러의 보상을 통해 문제가 해결 됐다고 믿는다. 우리가 알다시피, 미국은 비교적 최근까지 노예제도를 유지하던 선진국이다. 독일이나 근대 유럽에서나 있을 법한 '홀로코스트'나 '노예제도'가 북미에 사실상 더 큰 범위로 존재 했다는 사실은 미국인으로써 기분 나쁜 일일지도 모른다. 이런 가슴 아픈 이야기를 유머러스하고 판타지스러운 소재와 함께 섞어 출판된다는 것이 그닥 그들로써 기쁜 일이 아닐 지도 모른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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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혁철 지음 / 샘솟는기쁨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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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사대'

나는 살면서, '가라사대'라는 말을 일상에서 단연코 써 본 적이 없다. '가라사대'는 '가로되'를 높인 말로 '말씀하시다'라는 뜻이다. 이는 실제 더이상 모국에서 조차 사용하는 사람이 없는 '사어(死語)'다. 굳이 찾아본다면, 제주 사투리 중에 '말하다'를 '고르다'라고 하는데, 이것이 '아'와 '오'의 중간 정도 소리가 나는 '아래 아'를 쓰고 사용하기도 한다. 이것을 제외하고 '가로다'라는 말은 사용하는 사람도 없고 들어도 어색하다. 대통령 할아버지가 온다 해도 '말하다'를 어떻게 하면 높여야 할지 고민하지 않는다. 다음은 '요한 복음 19장 28절~30절'의 내용이다.

"이 후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에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요한 복음 19장 28절~30절

모자람이 많은 나는 읽는 내내 불편함이 느껴졌다.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돌아가시니라'. 무지한 나에게는 이 글들은 어렵다. 이 것은 과연 번역의 문제일까.

"Later, knowing that everything had now been finished, and so that Scripture would be fullfilled, Jesus said, "I am thirsty." A jar of wine vinegar was there, so they soaked a sponge in it, put the sponge on a stalk of the hyssop plant, and lifted it to Jesus' lips. When he had received the drink, Jesus said, "It is finished." With that, he bowed his head and give up his spirit."

물론 이는 일부에서 '가짜영어성경'이라고 여기기도 하는 NIV(New international Version)이다. 그러나, '킹 제임스(King James Version)'에서도 '1599제네바 성경'에서도 모두 '가라사대'에 해당되는 부분은 'said'라고 표현되어 있다. 굳이 said를 '이르되', '가로되', '가라사대'로 바꾸는 이유는 무엇일인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원어인 '히브리어'의 경우는 다를까. 그렇지 않다. 글이 어렵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한다는 목적이라면, 사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용하는 '종교적 언어'는 사실상 '종교적 언어'가 아니라 '사어(死語)'가 많다. 이미 익숙해진 이들끼리 내부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사회적 방언'이라고 한다.

'복음전파'가 목적이라면 그 용어는 최대한 쉬워야 한다. 설교자는 누구인가. 설교자는 교단에 서서 대중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이다. '복음'이라는 말조차, 사실상 비종교인들에게 어색할 수 있다.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복음'이란 '복된 이야기'를 이야기한다. 들으면 '이로운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했다면, 최대한 쉽고 재밌게 전달해야 한다. 이것은 '종교적' 색채와 무관한다. 효과적인 전달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설교자'는 자신의 생각을 상대에게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다. 복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성경(가르침)'을 전달하는 전달자다. 성경복음은 마법이나 요술을 담고 있는 판타지 소설이 아니라, 복된 이야기를 통해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이들을 고통과 어려움에서 구해주는 '출처'다. 여기에 전달자의 역할은 중간자 역할이다. 간혹, '원출처'를 잘못해석하여 '신의 이름'을 빌려 그의 말의 힘을 자신의 권력으로 사용하거나, 잘못된 해석으로 다른 이들을 잘못된 생각으로 이끌기도 한다. 중간자는 원출처의 내용을 효과적으로 넘겨 주는 것이 본질이다. 이런 본질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충만한 성령'보다 '원출처'의 글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문해력'과 상대에게 좋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전달력'이 필요하다. 종교는 이 '복음(이로운 이야기)'가 전달 과정에서 변질되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 한다. 그러다보니 본의아니게 이야기가 왜곡되거나 지나치게 어렵게 보존되기도 한다. '락'을 하셨던 목사 님의 책이기에, 음악에 빗대에 예를 들어보면 이렇다. 복음전파는 소리를 저장할 방법이 없어 음악기호를 통해 악보를 만들어 음악을 전달하던 시기와 같다. 여기서 '설교자'는 연주자에 해당한다. 작곡가가 멋지게 지은 노래를 연주하여 대중에게 멋진 음악을 선물하는 것이다. 즉, 악보에 상관없이 내 멋대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작곡가'와 '청중'을 기만하는 것이다. 다만, 시대가 지나면서 아름다운 노래를 더 잘 보존하기 위해, 우리는 '음악'이라는 본질을 잃어버리고, 악보를 더욱 소중하게 보관하는 것에 목숨을 건다.

불교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觀世音菩薩)이 그렇다. 글이 없던 시기에 어떻게든 소리로 내용을 전달하던 당시에는 일단, 내용 전달보다 정보가 사라지지 않고 유지되는 것이 중요했다. 앞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한자로 적혀 있으나 원래는 '산스크리트어'다. '나무'는 '나마스'라는 뜻이다. 우리가 인도나 네팔에서 사용하는 '안녕하세요'의 번역인 '나마스 떼'의 '나마스'다. '떼'가 you(당신)을 의미다., 나마스는 '귀의하다'라는 뜻으로, '쫒아 따른다'라는 의미다. '아미타불' 또한 산스크리트어다. 이는 '아밋따 붓따(amita budda)'라는 뜻으로 아밋따는 '무한하다'라는 뜻이고 붓따는 '부처는 깨어있는 자'를 말한다. 즉, 나무아미타불은 '부처를 무한하게 따릅니다'라는 의미다. 마지막으로 '관세음보살'은 '아바로킷따 이슈와라'아는 산스크리트어로 '모든 것을 훤하게 내려다보는 자'를 의미한다. 즉, 산스크리트어로 된 '복음(이로운 이야기)'이 전달자가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한자어로 번역하면서 우리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는 말은 이해하지만 그것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훤하게 꿰뚫어보는 자를 무한히 따르겠습니다'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단순히 해리포터의 마법 주문인 '윙가르디움 레비오우사'처럼 일종의 주문이라고 여기는 상당수의 것들은 사실상 본질을 잃어버린 일종의 기록일 뿐이다. 설교자는 누구인가. 설교자는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가. 종교는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가. 그것은 진짜 이야기를 전달하는 설교자의 역할이 누구보다 더 중요하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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