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은 청춘에게 주기 아깝다
조수빈 지음 / 파람북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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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극작가 겸 소설가인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젊음을 젊은이에게 주기 아깝다.'라는 말을 했다. 젊은이들이 젊음을 제대로 즐기고 활용하지 못함을 지적한 말이었을 것이다. 노인처럼 시간 죽여 육체와 정신을 소진 시키기에 젊음을 젊은이에게 주는 것은 정말 아까울지도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있다. 그 아까운 젊음을 늙은이에게 준다고 알차게 사용할 거라는 확신이 들지도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후회를 하는 동물이다. 후회는 가장 마지막에 남는다. 학창시절로 돌아가면 공부 좀 해둘걸 하는 어른들의 하소연은 실제도 돌려주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습'이 결정하는 인생에서 아마 같은 실수를 반복할 확률이 높다. 젊은 시절을 돌이켜 후회하는 늙은이에게도 그 젊음은 적당한 값어치를 하지 못할 것이다. 가수 유승준의 '비전'이라는 노래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다.

"타시 태어난다해도 자신이고 싶은, 그런 모습의 삶을 위하여."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자신이고 싶은가. 이 질문에 당당히 '그렇다'라고 대답하기에는 여러가지 망설여지는 부분도 있다. 세상에는 나보다 훨씬 잘난 사람도 있다. 내게 느껴지는 부족한 부분이 너무 잘 보인다. 다만 오랜기간 이 질문에 고민하다 답을 내렸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자신으로 태어나되 조금더 먼저, 조금더 일찍, 조금더 빨리 경험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결론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중학교 때는 흘러가는대로 살았던 것 같고 고등학교 때는 생각없이 살았던 것 같다. 스무살에는 닥치는대로 살았던 것 같은데, 서른이 가까워져가며 겨우 '꿈'이라고 부를만 한 것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조금 먼저 알았으면 좋았을 법 했던 것. 물론 지금이라도 알게 되서 참 다행인 것들. 후회없는 지난 날들을 고대로 답습하더라도 조금 빨리 하고 싶다는 생각말이다.

'주체적인 삶'. 꿈을 이야기 하라면 당당하게 이렇게 말한다. 이 '하위'에는 '긍정', '감사', '균형'이 있다. 다만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은 결국 '주체적인 삶'이다. 누군가에 의해 휘둘리거나 어떤 상황에 의해 휘둘리는 삶이 아닌 스스로 주체성을 쥐고 있는 삶 말이다. 직업이야 뭐가되던 상관없다. 직업은 그저 '돈벌이' 아니던가. 고등학교 진로시간에는 학생들에게 '꿈'에 대한 이야기를 써오라고 시키는 모양이다. 장담컨데 그 과제를 제출시키는 선생 쪽도 꿈을 이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른들은 참 이상하게도 자신도 못한 일을 아이들에게 바라곤 한다. 자신들은 학창시절 꿈꿔왔던 삶을 살고 있지도 않으면서 아이들에게는 '꿈'을 꾸라고 말한다. 단 한번도 학교 밖에서 어떤 식으로 사회가 굴러가는지 경험해보지 않았던 아이들은 막연하게 주워들은 직업을 '꿈'이라고 착각한다. 이들이 꾸는 꿈이란 대부분 자신의 능력 범주에서 최대한 지원 가능한 직업군인 경우가 많다. 그 꿈이 이뤄지느냐, 이뤄지지 않느냐는 대게 열 아홉, 11월에 결정된다. 인간의 꿈이 이뤄지든 말든, 그 기한이 고작 19년에 결정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백범 김구는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를 꿈꿨다. 만약 백범 김구 선생의 꿈이 '대통령'였다면 역사는 얼마나 허무하게 그를 바라보겠는가. 꿈은 그런 성격이 아니다. 평생을 가로지르는 가치관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루고 이루지 못하고를 떠나 갖고 있는 것만으로 방향을 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꿈이나 장래희망에는 '돈벌이'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 그따위 직업으로 인간의 꿈을 한정 시켜버릴 수 없다. 우리는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나 '주체적인 삶' 등의 인생 가치관을 학창시절 동안 잃게 된다. 꿈은 철학을 담고 있어야지, 연봉을 담고 있어서는 안된다.

많지 않은 나이이지만 조금 살아보니 그 시절에 속한 이는 깨닫지 못하는 것들이있다. 조수빈 아나운서의 말 처럼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얼마나 빛나는지 말이다. 다시 돌이켜보면 대략 서른, 마흔 정도면 그래도 적당히 어른의 태가 잡혀야 있어야 했다. 다만 지금의 나를 돌이켜 보건데 아직도 나는 이 시절에 속해 있으면서 지금이 얼마나 빛나고 있는지 덜 깨닫고 있는 것 같다. 아마 예순이나 일흔정도가 되면 느끼려나. 아니다 여든이 되면 느끼려나, 아니다 그 때도 10년 만 더 젊었으면 날아다녔다는 말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 아까운 것이 아니라,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이에게 주기 아까운 것일 지도 모른다. 누구의 말마따나 '실패를 하지 않는 방법은 실패를 해보는 것이다.' 실수를 줄이는 방법은 실수 하는 방법 밖에 없다. 그 시절 그것도 모르던 '나'를 비웃을 것이 아니라, 그 실수와 실패를 했던 젊은 시절 덕분에 내가 겨우 그것을 깨닫고 있다고 감사하는 것이다. 조수빈 아나운서는 어린시절부터 꿈이 아나운서라고 했다. 그렇게 명문대를 졸업하고 KBS 9시 앵커로 얼굴을 알렸던 성공적인 아나운서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퇴사를 결정했다. 우리는 마주하기 전까지 그 내면을 알 수 없다. 의사, 변호사, 판사, 검사, 아나운서, 방사선사, 환경미화원, 컴퓨터 공학자 등 직업들은 그 직업을 실제 가져보고 겪어보기 전까지 고충이나 장점, 단점을 알기 어렵다. 막연히 미디어가 만들어낸 환상과 대중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가지고 '꿈'을 결정한다는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나의 직업은 '학원 원장'이면서 '강사'이고 '강연가'이며 '작가'이면서 '농부'이기도 하고 '사업가'이기도 하고 또 여러가지다. 내가 좋아하는 유현준 교수 님은 건축가이면서 강연가이고 작가이면서 방송인이시고 교수이기도 하다. 가수 아이유 님은 가수 이면서 작사가, 작곡가이고 연기자 이기도 하다. 직업은 칼처럼 구분지어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성향의 것이 아니다. 니체는 '철학자'로 알려져 있으나 '교수'였고 공자는 '사상가'로 알려졌으나 일종의 '강사' 혹은 '정치인'이 였다. 우리를 우리로 만드는 것은 어설프게 쌓여 있는 젊음의 흔적들일 것이다. 청춘은 청춘에게 주기 아깝지만 그래도 그나마 청춘에게 줘야지 별 수 없이 낫다. 어차피 할 후회라면 실패건, 실수건 많이 쌓아둬라. 팔순에 남는 건 통장의 잔고가 아니라 언제나 눈 감으면 떠올릴 수 있는 경험과 기억들일 것이다. 청춘, 이게 우리에게 와 있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실패하고 실수하고 경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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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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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야기 속에 의미를 숨겨 놓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찾아보는 재미는 독자 몫이다. 내가 좋아하는 김영하 작가 님의 소설이다. 숨긴 의미를 찾으려 작정하진 않았으나 '봉준호 감독' 살인의 추억, 마지막 대사처럼 '해석하는 재미'는 무궁무진하다. 왜 책은 '작별인사'가 아니라 '자ㄱ벼ㄹ이ㄴ사'인가. 그냥 읽기 어설픈 이 단어는 '자악벼열이인사'로 읽힌다. 감정없는 '로보트 음성'에 어울리지 않는 감성적인 단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배경지식 없이 들여다보고 대략 열 페이지 정도 넘겨야 알 수 있다. 그냥 씁쓸한 사랑 이야기나 이별 이야기 정도일 거라고 생각하고 서점에서 집어들지 않은 책이었다. 책은 첫 문장부터 두 번째 문장까지 흡입력 있으며, 두 번 째 문장부터 세 번째 문장까지 호기심을 자극하고 세 번째 문장부터 다섯 번째 문장까지 생각거리를 준다. 그리고 그것들이 '쭉~'이어지며 마지막 문장까지 이르게 만든다. 왜 여러 분야의 책을 많이 읽은 작가의 글을 읽어야 하는가.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나 그것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작가의 배경 지식과 인성, 가치관이 투영된다. 속빈 강정처럼 밍밍한 글은 아무리 장황해도 읽기 지루하다. '작별인사'는 얼핏 누구나 생각해왔던 소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다만 그 이야기가 전혀 지루하지 않고 흡입력있는 이유는, 가짜 이야기를 읽어내면서 인문학과 자기계발을 함께 읽게 되는 이유는 '작가'의 것들이 투영되어서다. 지금 이 문장 뒤로 이어지는 말들은 소설의 '스포일러'가 된다. 여기까지 읽고 흥미가 생긴다면 어서 서점으로 가서 책을 구매하고 읽던지 아니면 이 글을 읽은 것을 후회하며 서점으로 가서 책을 읽을 것이다. 만약 이 책을 읽고 싶다면 '내 서평'을 여기까지만 읽고 빠르게 서점에 달려가서 소설을 완독 후에 두 번째 문단을 읽기를 권유한다.

'인공지능'을 보며 인간은 '인간화'되는 인공지능에 두려움을 느낀다. 인공지능이 소설을 쓴다거나, 인공지능이 노래를 부른다거나 하는 기술적인 부분이 점차 인간 공포를 느낀다. 다만 무서운 것은 '인공지능'이 '인간'을 넘어서거나 '휴머노이드'가 '인간'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들을 닮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에서 꽤 오랫동안 함께 해왔던 존재들이 있다. 그들은 처음에는 야생이었으나 우리는 그들을 길들였다. 바로 '고양이와 개'다. 우리는 그들을 가축화하면서 그들의 성격과 습성은 바뀌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야생의 다른 것들과 다르게 눈 흰자위가 생기기도 하고 몸집이 작아지는 등 변화를 겪었다. 다만 이 변화에 인간도 함께 했다. '고양이와 개'만 인간을 닮은 것이 아니라 '인간' 또한 그들에 맞게 진화했다. 모든 진화는 상호적이다. 뉴턴의 말을 빌리자면 태양이 지구를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태양도 지구를 끌어당기고 지구도 태양을 끌어당긴다고 했다. '만유인력'이라고 부르는 이 '인력'은 물리계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우리 인간과 가축 사이에서도 서로 끌어당김이 있었다. 이 상호인력의 법칙에 중요한 점은 '질량'이 큰 쪽으로 끌려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다보면 엄청나게 성숙한 성인들이 '아기화'되는 것을 경험한다. "맘마 먹어야 아야하지 않아!"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면 전혀 어색하지 않다. 다만 이 이야기를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30대 여성이 친구에게 했다고 가정해보자. 얼마나 어색한가. 우리는 상대에 맞춰 간다. '안녕하세요. 빅스비에요', "오.늘.날.씨.알.려.줘.". 조금 어눌한 인공지능의 말에 그보다 더 어눌한 인간이 물음이 이어진다. 우리는 아기에게 맞추는 '엄마'와 같이 '인공지능'에 맞추고 있다고 여기지만 진화의 속도는 매순간 제곱으로 키워나가며 언젠가 진화한 인공지능과 퇴화한 인간만 남을 것이다.

인간은 언제부턴가 '초인류'가 됐다.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그렇다. 눈을 감고 마음 속 이야기를 떠올리면 지구 반대편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떠올리는 '텔레파시(Telepathy)'는 '초능력'이었다. '존재할 수 없을 이 초능력'이 이제는 누구나 가능하다. 우리의 '전달능력(Pathy)'는 5G의 속도로 지구 반대편을 날아가 '이야기'는 물론 '사진'과 '영상'을 전송해버린다. 꿈의 색깔 같은 몽롱하고 흐릿한 모양이 아닌 '깊은 색상', '넓은 시야감', '무한대의 명암비', '잔상없는 화면'의 OLED로 말이다. 그 뿐만 아니라 앉아서 수 백 킬로의 사람과 소통하고 선물을 보내며 돈과 물건을 주고 받는다. '스마트폰과 함께'라는 말만 빼면 이것은 '초능력' 수준이다. 실시간으로 지구 반대편의 이야기를 전달받고 주기도 한다. 잘 때도, 먹을 때도, 씻거나 심지어 대소변을 보는 순간까지 스마트폰은 인간의 몸에 붙어서 인간의 오감에 연결된다. 진동이라는 촉감, 알림이라는 청각, 화면이라는 시각이 모두 스마트폰에 물리적, 비물리적으로 '도킹(결합)'되면 된다. 사실상 스마트폰의 배터리는 인간의 배터리나 다름없다. 스마트폰 배터리에 빨간 불이 붙으면 인간은 스마트폰과 함께 전기선에 연결되어 한참을 이동하지 못한다. 기계가 인간화 되어간다는 세상에 가장 큰 위협중 하나는 떠올려보자면 인간의 기계화다. 우리는 반 정도 기계화되어 있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면서 '신'을 버리고 '기계'로 갈아탔다. '산업혁명', '르네상스' 인간을 단합시키는 힘이 '종교'에서 '기계'와 '돈'이 되면서 기계는 곧 신이 됐다. 신을 소유(?)하던 이들이 독식하던 권력이 기계를 '소유'하는 이들이 권력을 독식하는 시대가 되면서 기계가 우리를 지배할까봐 걱정하는 것은 우습다. 우리는 이미 기계이거나 기계에 지배 당하고 있다.

'선', '달마', '철', '민'는 도가적, 불가적 사상을 의미하는 선과 달마, 기계를 뜻하는 철을 의미한다. 인간다움과 기계다움이 조화롭게 섞여 이름을 짓는다. 인간은 기계처럼 되어가고 기계는 인간처럼 되어간다. 기계스러움이 인간스러움이 되고 인간스러움은 기계스러움이 된다. 인간과 기계는 하나이면서 분리되고 분리되어있으며 하나다. 삶과 죽음은 왜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가, 만남은 왜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가. 이는 동양의 음양이론과 비슷하다. 섞이면서 분리되고 분리되면서 섞이는 이 철학이 담겨져 있다. 작가는 작품 속에 의미를 숨겨놓지 않는다고 했으나 등장인물 작명을 위해 인위적으로 작품에 생겨날 인격을 이름을 통해 투영한다. 숨겨놓지 않아도 숨겨진 것을 찾을 수 있고 그것이 재미다. 개인적으로 너무 재밌는 소설이라 주변에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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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 - 물이 평등하다는 착각
맷 데이먼.개리 화이트 지음, 김광수 옮김 / 애플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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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이아와 홍역, 에이즈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아동들이 '설사'로 죽는다. 수도 꼭지만 틀면 콸콸 나오는 물은 현대 사회에서도 역시나 불평등하다. 우리에게는 하찮게 흘러가 버리는 물이지만 아프리카 어느 곳에서는 물을 길러 가기 위해 적게는 1~2시간에서 많게는 6~8시간을 걸어가야 한다. 물을 길러가는 쪽은 대게 여성들이다. 그렇게 물을 구한다고 해도 물을 깨끗하지 않다. 오염된 물은 병의 원인이 된다. 역시 '설사'를 포함한 다양한 병의 원인이다. 소녀들은 하루 상당한 시간을 물 길러가는데 사용한다. 때문에 학교에 가기 힘들다. 물 부족으로 인해 욕실과 위생용품 사용에도 제약이 있다. '물'은 단순히 '식수'로 역할을 다하는 것만은 아니다. 생리기간 중 여러 날을 외출을 하지 않고 집에 머문다. 수인성 질병으로 한해 4억 4,300만 건이나 학교를 결석한다. '물'은 '물'로 시작했으나 '교육의 문제', '위생의 문제', '남녀 차별의 문제'를 더불어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국제 기구에서 우물을 만들어 준다고 해도 문제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우물은 2~5년 사이에 약 30~50%가 고장이 난다. 그 많은 우물들은 사용할 수 없는 상태로 방치 된다. 유지관리비는 꿈도 꾸지 못한다. 미국산 부품으로 만들었거나 유럽의 부품으로 만들었다면 이것을 수리하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가난하기에 더 가난해 질수 밖에 없다. 가난하면 돈이 많이 든다. 부유한 사람이 아니라 되려 가난한 사람들이 더 비싼 돈을 들인다. 한 빈민촌에서는 병원을 방문하는데 15불이 든다. 지역 사람들의 하루 생활비가 2불이라고 하니 터무니 없는 금액이다. 물부족 해결을 위한 프로젝트는 당연히 지원국의 제품이나 부품을 이용해야 한다. 은행 계좌도 없는 이들이 과연 어떻게 고장난 부품을 수리하고 전문가를 부를지 생각해보지 않는 모양이다. 고민해보지 않은 탁상공론의 결과 아니면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주의의 결과다.

자본주의는 그래왔고 지금도 그렇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돈 없고 신용등급 낮은 이에게 '고리'를 받고, 돈 많고 신용등급 높은 이에게게 '저리'를 제공한다. 은행의 입장에서 '상환' 받지 못할 '리스크'에 대한 대안이겠지만 냉정하게 '돈' 없는 사람이 더 가난해 질 수 밖에 없는 구조를 갖고 있다. 반대로 돈 많은 이들은 투자 기타 자금 운용을 통해 더 큰 수익을 얻는다. 이런 경제적 논리는 '물부족'에 시달리는 '가난한 이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일부는 자기 수입의 10분의 1을 물값으로 지불하기도 했다. 이는 얼핏 적잖은데 월 200 받는 직장인이 물 값으로만 20만원 씩 쓰는 것과 다름 없다. 매년 물부족에 시달리는 이들의 상당수는 '화장실'이나 '상수도' 설치에 '고리대금'을 빌려 쓰고 이를 갑지 못해 자살하는 사건하기도 한다. 인도나 아프리카 등에서 최소한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적 삶의 여건에 대해 '세상'은 야박하다. 세상이 이런 것에 대해 비판하거나 고치려고 할 수는 없다. 이것은 세계인 다수가 합의한 일종의 약속이다. 그나마 인류가 찾아낸 가장 합리적인 사회 유지 방식이다. 그렇다고 해서 알면서 방치하는 일도 쉽지 않다. 조그만 어떤 노력이라도 이쪽에서 취할 것은 없을까. 영화 127시간에서 주인공은 편안한 가정집에서 쉽게 물을 사용하고 여행을 나선다. 그리고 그랜드캐년에서 엄청나게 많은 물이 꾸준하게 화면에 노출된다. 주인공이 사고로 암벽에 팔이 끼이는 사고가 일어나고 그 순간부터 영화는 '물'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 영화를 보고 나또한 물 한모금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영상을 제작하고 연기하는 것은 이처럼 어떤 영향력을 누군가에게 행사하고 세상을 바꾸는 아주 작지만 큰 일이다.

2003년 독일에서 특이한 사건이 있었다. '로텐부르크'에 사는 '아르민 마이베스(42)'는 인터넷에 사람고기를 먹고 싶으니 지원자가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 광고를 냈다. 자발적 희생자를 찾는 광고에 놀랍게도 많은 지원자들이 자신이 잡아먹히고 싶다며 신청서를 냈다. '아르민 마이베스'는 그중 하나를 골라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그리고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와 함께 '오션스 일레븐'이라는 영화를 봤고 결국 신청자는 마음이 바뀌었다. 그는 잡아먹지 말아달라고 아르민 마이베스에게 말했다. 그렇게 그 둘은 헤어졌다. '오션스 일레븐' 출연한 '맷데이먼'은 이 뒤로 자신이 하나의 생명을 살렸다고 농담처럼 말하고 다녔다. 우스께스러운 일이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누군가의 생명이 살아나고 죽어가는데 미세한 영향은 있다. 매달 카드값처럼 저도 모르게 빠져나가는 기부금이 있다. 푼돈일지라도 그 기부금을 납부함으로 투박한 '반지' 하나를 받았다. 반지를 착용하면 '나 이런데 기부하는 사람입니다'라는 의미없는 허영심을 부릴 수 있다. 그 허영심의 값으로 어쨌건 누군가는 생명을 구했다. '나비효과'라는 말을 좋아한다. 뉴욕 센트럴파크에 있는 작디 작은 나비의 날개짓으로 태평양 한 가운데에 커다란 태풍이 만들어진다는 이론으로 사소하고 의미 없어 보이는 일이 산꼭대기에서 떨어져 내려오는 눈덩이처럼 커진다는 의미다. 물부족은 이처럼 엄청난 나비 효과를 만들어 부정적인 사건을 크게 만들기도 하고 지구 반대편에서 내가 했던 아주 작고 사소한 행동도 다시 반대편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한다.

어린시절부터 내 꿈은 '아프리카'였다. '유럽'이나 '미국'이 아닌 '아프리카'를 가는 것이 오랜 꿈이다. 이유는 특별하게 없다. 다만 돈만 있으면 누구나 다 갔다오는 여행지가 아니라 '철학'이나 '사연'이 있어야만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환상이 있었던 것 같다. '돈'만 있다고 '아프리카'를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아프리카를 가기 위해서는 유럽에 가는 것 이상의 경비가 든다. 시간과 철학, 그 밖에 삶을 바라보는 여유와 어느정도의 호기심과 인류애 등 좀처럼 거창한 것들을 함께 들고 있는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그 땅에서 벌어지는 일에 호기심이 있다. 맷데이먼은 오래전 부터 내가 좋아하던 배우다. 그는 하버드 대학교 영문학과를 다닌 수재이며 젊은 시절부터 화려한 외모를 가진 배우다. 심지어 엄청난 연기력과 철학이 있는 배우다. 그런 배우가 '아프리카'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에 '그럴만도 하다'라는 생각과 함께 일종에 동질감이 들기도 한다. 글은 얼마 전 읽은 '뉴호라이즌'이라는 책이 생각나게 한다. 한 프로젝트를 성장시키는데 일어나는 헤프닝이 담겨져 있다. 다만 미지의 세계와 과학 문명의 발전, 우주의 탐구라는 신비롭고 화려한 주제가 아니라 안타깝게도 이는 인류가 겪는 어떤 위협과 불행에 대해 공유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한 쪽에서는 그저 의미없이 뿌려던지기도 하는 '물'이 어느 한쪽에서는 삶과 행복에 치명적인 위협을 줄 만큼 부족하다는 데에서 얼마나 우리 인간이 무섭고도 어리석고 위험한지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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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공부가 하고 싶어졌다 - ‘유리멘탈’을 위한 공부 상담소
학학이 멘토단 지음 / 메리포핀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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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에 따르면 사람의 단계는 3단계가 된다. 하나는 낙타 다른 하나는 사자, 마지막 단계는 어린이다. 쉽게 '낙타'는 엄청나게 무거운 짐을 실어 주고 걷기를 시키면 시키는대로 묵묵하게 따른다. 자신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 부다을 아무리 지어주더라도 묵묵하게 그 일을 수행한다. '사자'는 그에 반항한다.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 일에 대해 저항하고 반항한다.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반항과 저항을 한다. 마지막은 '어린이'다. 어린이는 '놀이'로써 창조하고 자신만의 가치를 새롭게 만든다. 즐기고 긍정하고 독립적이며 반항도 가능하다. '즐거움'을 추구하고 '놀이'로 승화하는 과정에서 '긍정'적인 부차적 성과가 나오기 나따름이다. 위버멘쉬(übermensch)란 넘어서다(über)와 사람(mensch)의 합성어다. '초월한 사람', '초인'과 같은 말을 의미한다.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말은 얼핏 도덕적인 지탄을 받기 쉽지만 그것은 인정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기적이며 자신의 이익에 최선을 다한다. '아름다운 이야기'로 포장되는 '이타적인 사람'은 동화 속에서 존재한다. 다만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렵다. 즉각적인 성과와 보상이 스스로에게 있지 않다면 대부분의 것들은 지속가능하지 못하다. 가령 월 200만원을 버는 사람이 월 190만원을 기부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이타적인 사람은 길게 수 개월 생활을 지속할지 모르지만 언젠가 이 일을 멈추게 될 것이다. 다만 200만원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취미 활동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취미활동을 하는 사람과 기부를 하는 사람은 분명 지속성에서 차이가 생긴다.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고 재밌어하는 일에 지속성을 갖는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편안함'을 추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가령 서 있는 사람과 누워 있는 사람 중 누가 오랫동안 그 자세를 유지할 수 있을까. 서 있는 사람은 앉고 싶어지고 앉아 있는 사람은 눕고 싶어한다. 밥을 먹고 배가 부르면 식곤증이 몰려와 잠을 자고 싶어진다. 높은 곳에 매달려 있는 사람은 내려와 땅에 있고 싶어하고 걷고 있는 사람은 쉬고 싶어하며 무거운 짐을 들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놓고 싶어한다. 우리 모두가 '편안하고 쉬운 것'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처럼 모두가 쉬운 방향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 반대를 거스르는 사람은 '희귀종'이 된다. 모두가 눕고 싶어할 때 운동을 하거나, 모두가 먹고 싶어 할 때 굶거나 모두가 자고 싶어 할 때, 일어나거나 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기본적으로 DNA에 새겨진 편한 방향으로의 설계를 거슬러야 한다. 이런 비자연적인 일을 하기 위해선 '반드시' 개인에게 이익이 있어야 한다. 공공이 이익을 나누는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사유재산을 인정했던 '자본주의'가 세상의 주류가 된 것도 지극한 인간의 '이기심' 때문이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앞서 말한 '비자연적인 현상'이다. 능동적으로 글에 쓰여진 의미를 파악하고 이해하려고 달려드는 일 보다 생각없이 '멍'하게 스마트폰을 바라보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자연스러운 일'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왜 그 일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이기적인 명분'이 있어야 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 사회는 '학력'에 대한 비정상적일 만큼의 '신임'을 가졌다. 학력 좋은 사람에 대해 바라보는 시선과 평가가 분명하게 있었다. 사회는 그들에게 그만한 댓가를 주기도 했다. 다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인구가 줄어들면서 '대학'에 들어가기가 한결 수월해졌고 '대학 졸업장'이 없어도 성공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널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해야하는 이유는 '성취하는 방법'에 대한 '단련'이다.

성장은 무한대로 커나가는 것이 아니다. 수축과 팽창이 주기적으로 반복하면서 내부적으로 단단하게 다지며 강도를 높여 커 나가는 것이다. 블록을 높게 쌓기 위해서는 블록을 윗쪽으로 쌓기만 해서는 안된다. 의미가 없어 보일지 모르는 하단부를 탄탄하게 할 수록 결국 더 높게 쌓을 수 있다. 그저 하늘 쪽으로 벽돌을 쌓아 올렸다면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이처럼 오래 유지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결국 성장과 별로 관련없어 보이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성공'만이 쌓여 있어서는 안된다. '목표'와 관련 없어 보이는 '실패'라고 할지라도 피라미드의 하단부처럼 단단하게 하부를 지탱하는 것이다. 하단부가 넓어지면 피라미드의 높이는 더 높고 단단해진다. 문제를 풀고 틀린다는 것은, 문제를 단방에 맞추는 것보다 중요하다. 틀린 문제는 자신의 취약점을 발견하게 해주고 자신의 취약점을 보완할 여지를 만들어준다. '시험공부'는 '본질(개념)'을 단단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시험(문제)'해보며 '실패(틀린 문제)'를 고민하여 '보완(오답노트)'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공부법'이 아니라 '목표에 도달하는 법'이다. 공부, 요리, 운동을 비롯해 거의 대부분의 것들은 앞서 말한, 본질파악, 시험, 실패, 보완의 과정을 겪어 성장한다. 학창시절 성적표는 '대학교 이름' 따위를 바꾸는 목적이 아니라 스스로를 자기계발할 수 있는 좋은 훈련과정이다. 그까짓 대학교 이름이나 성적따위는 요즘 세상에 '그까지것' 쯤이다. 명문대학교를 입학한 학생들이 재학 도중 자퇴를 하고 창업하여 성공하는 경우는 적잖다. 미국이나 우리 대한민국에서도 대학졸업장과 상관없이 명문대 출신 '부자순위' 상위에 이런 이들이 상당하게 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여 좋은 명분이나 이름을 얻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본인의 성장을 위한 이런 이기적인 욕심은 반드시 성장을 지속시킨다.

세상 공짜 좋은 정보가 판치는 요즘 세상에 공부법이나 좋은 강연은 인터넷에 키워드 몇 자 적어 얼마든지 검색 가능하다. 그런 '기술(스킬)'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대하는 철학이 필요하다. 공부는 왜 해야하는지도 납득이 되지 않는 이들에게 공부하지 않냐고 잔소리하는 것은 난데없이 지금 당장 '지금 도로로 나가서 만세 3창 하고 오세요'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만약 난데없이 도로로 나가서 만세 3창을 하라고 한다면 되물을 것이다. "왜요?" '왜'가 해결되지 않은 행동은 그 누구도 하지 않는다. '왜'가 해결되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려 본질이 없는 것이다. 공부를 하지 않는 이유는 '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고로 당연한 일이다. 부모나 친구, 주변 선생님이 시킨다고 '공부'를 한다는 것은 위보멘쉬에서 '낙타'와 다름없다. 시키면 시키는대로 자신의 철학이나 의지없이 무거운 짐을 얼마든지 날라주는 것과 다름없다.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을 깨닫는다면 드디어 공부가 하고 싶어질 것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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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논어를 읽다 - 삶의 변곡점에서 시작하는 마지막 논어 공부
조형권 지음 / 비즈니스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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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시대, 다리에 장애가 있던 70세의 노인 '공흘'은 15살의 '안징재'라는 한 소녀를 만난다. 70세 노인의 청혼을 받아드린 15세 소녀는 그렇게 아들 하나를 낳는다. 지금에서는 패륜적인 이야기지만 어쨌던 그랬다. 아들을 낳기 전에 그녀는 높은 언덕을 힘들게 올라가는 태몽을 꿨는데, 그 의미에서 아들의 이름을 '언덕'으로 칭하기로 했다. 이런 이유로 '구(丘)'라고 지었고 그가 우리가 알고 있는 '공자'다. 공자의 어머니는 남편과는 55세의 나이 차이가 있고 아들과는 16살의 나이 차이가 있다. 쉽게 공자의 철학을 이야기 하자면 '정리', '질서' 정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아들은 아들답게. 그것이 공자가 말했던 정치 철학이다. 2천 년이 넘어 그의 이야기 중에는 고리타분한 내용도 물론 간혹 있다. 다만, 2천 년 넘게 우리에게 공감이 되는 철학이 대부분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춘추전국시대라 국가가 혼란한 시기 공자는 세상의 '도'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보면 '칼세이건'은 '질서정연한 우주'로 정의했다. 무량대수급의 우연이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내는 아이러니한 질서는 우주가 존재하도록 하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은하계를 태양이 돌고 지구가 태양을 돌고 달이 지구를 도는 것처럼 마구자비로 떠다니는 별들도 상호작용을 하며 아름답게 질서있게 움직인다. 다만 공자가 바라 본 '인간'의 세계는 그와 거리가 있었다. 하극상은 일반적이고 봉건제는 파괴되었으며 질서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인간이 우주를 닮았다면 분명 우리가 사는 세상도 '질서정연한 코스모스'여야 한다. 공자는 인간 세계도 적당한 질서와 규칙이 있어야 아름답게 돌아간다고 봤다.

공자의 인생은 '위대'하지만 '행복'하다고 하기 힘들다. 그는 3000명의 제자를 거두었으나 그의 뜻에 따라 성공적인 깨달음을 얻은 제자는 10명 쯤이었고 가장 아끼는 제자가 먼저 죽자 정신을 잃고 통곡하기도 했다. 자신이 가르쳤던 제자가 기대치 않은 행동을 보이자, '너는 더이상 내 제자가 아니다!'며 호통을 치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하급 무사였고 집안은 몰락한 귀족이었다. 세살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아주 어린시절부터 가난하게 살았던 그는 젊은 시절에는 가축을 돌보는 일을 하기도 하고 정원관리사로 일하기도 한다. 젊은 시절부터 일과 공부를 병행하던 그는 18살에 과부가 된 어머니를 모시느라 꽤 어린 나이부터 고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나이 24살에 어머니는 마흔이 채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공자를 떠올리면 '성인'이라는 말이 먼저 떠올라 '출세욕'과 거리가 먼 것 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는 '출세욕'이 있던 사람으로 '노자'에게 따끔한 소리를 듣기도 하고 자신이 이루고저 했던 일을 본인 생에 이루지 못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말하는 '질서'는 세상이 혼란스럽다 느껴질 때마다 제 몫을 한다. 태양은 태양의 자리를 지키고 있고 지구는 태양의 주변을 돌고 있으며 그 주변에는 항상 달이 지키고 있는 '질서'는 앞서 말한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아들은 아들답게.와 같다. 의사의 본질이 '치료'에 있지 않고 '돈'에 있거나, '정치'의 본질이 '개인의 사적 출세'에 있거나 '가수'의 본질이 '인기'에 있는 것과 같이 느껴지는 본질 잃은 세상에 대한 '제자리'를 공자는 말하곤 했다. 10대에는 배움에 뜻을 두고, 서른에는 지립하며, 마흔에는 흔들리지 않고, 쉰에는 천명을 알며, 예순에는 귀가 순해지고 일흔에는 마음가는대로 법도를 넘지 않는다.

'세상' 뿐만아니라 개인에게도 그 나이에 맞는 질서와 순서, 시기가 있다고 봤다. 위정 편 4장 주주에는 '불가렵등이진(不可躐等而進)이라 하여 '등급을 뛰어 넘어 나아갈 수는 없다'고 하기도 한다. 기본에 충실하지 않고 다음 단계로 성급한 마음만 갖는 것은 항상 모든 것을 그르치게 한다. 간혹 사람을 만나다보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채, 이상만 높은 경우가 종종있다. 기본 체력도 없는 축구선수가 멋있는 개인기나 드리블만 연습하거나 노래 실력이 형편없는 가수가 '싸인 연습에 매진'하는 것도 같은 경우다. 요즘 시대에는 가혹한 말일 수 있으나, 공자에게는 각 시기와 때가 있고 위치와 자리가 있다. 일본에도 '쇼토쿠 태자'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일본에도 와(和) 사상이 있다. 일본 역시 어지러운 세상에 대한 질서를 위해 '와(和)사상'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와(和)는 각자의 자리를 찾는 것을 의미하는데, 사무라이, 귀족, 쇼군, 덴노 등 일왕을 중심으로 각자가 자리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질서정연한 사회를 만드는 것의 희망하는 사상이다. 지금도 이 와(和) 사상은 '장인정신' 등 일본을 나타내는 중요한 가치관이 되기도 했다. 이야기가 조금 샜지만 공자의 철학은 '질서'다. 요즘 시대에 고리타분할 수도 있지만, 규칙과 질서가 많이 허물어져 가는 시기에 다시 한번 우리를 일깨우기도 한다. 가끔 시대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할 때 '공자왈~ 맹자왈~'이라는 말로 공자가 고리타분한 이야기만 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있다. 다만 공자가 그런 이야기 만 한 것은 아니다. 공자의 말씀은 가끔은 냉철하고 가끔은 현실적이다.다만 이런 말도 있다. '가난하면서 원망하지 않기는 어렵지만, 부유하면서 교만하지 않기는 쉽다.' 가난을 몸소 겪었던 그는 '가난'이 '원망'으로 이어지는 것에 대해 관대했다. 그는 세상에 대한 철학 뿐만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자세'에 대해서도 여러 이야기를 남겼다. 2000년이 넘은 그의 글을 보고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우리가 결국 우주를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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