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씽 The One Thing (리커버 특별판)
게리 켈러 & 제이 파파산 지음, 구세희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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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뉴질랜드 출신 탐험가 '에드먼드 힐러리' 경은 어떻게 에베레스트 산을 올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한발씩 걸어서 올라갔지요."

단번에 이뤄지는 것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발'이고 그 다음 중요한 것은 '다음 한발'이다. 한번에 하나씩 이뤄가는 수 밖에 없다.

'에베레스트'를 등반하겠다는 야욕은 열 발을 한 번에 밟고 싶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얼마나 대단한 여정을 떠나던 얼마나 먼 여행을 떠나던 그것은 중요치 않다. 얼마나 대단한 결정을 하던 얼마나 가치있는 일을 하던 그것도 중요치 않다.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첫 번째 행동은 한 걸음을 내딛는 일이고, 그 다음을은 두 번째 걸음을 내딛는 행동일 뿐이다. 머릿속에 높은 목적과 험난한 여정에 겁을 먹을 필요없다. 생각보다 단순하다. 그저 지금 닥친 일을 하는 것이다. 대체로 그것은 발걸음을 떼는 일부터 시작한다. 성취는 작은 일의 연속에서 발생할 뿐이다. 커다란 무언가는 도착한 뒤의 해석일 뿐이다. 시작하고 연속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무엇일까. 이렇다. 산적해 있는 과중한 일들 중에서 쉽고 작은 일을 그 첫 번째 업무로 정하는 것이다. 노자가 했다는 '천리 길도 한 걸음 부터'라는 말은 시작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시작의 중요성은 지금 닥친 단 하나의 행위에 집중하라는 말과 같다. '단 하나'라는 것이 핵심이다. '단 하나'는 시작을 하게 한다. 다시 그것은 지속하게 한다. 연속으로 이어지는 작은 성취를 쌓음으로써 결국 완성 단계로 나아간다.

리처드 도킨스는 완성된 구조물에는 '하향식 설계'와 '상향식 설계'가 있다고 했다. 스페인 바로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과 흰개미집은 얼핏 그 구조가 비슷하다. 결과가 비슷하지만 그렇다고 과정도 닮은 것은 아니다. 흰개미집은 '상향식 설계'다. 즉 각기 다른 개미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부분적으로 규칙이 만들어지며 완성되는 완성체다. 반면 사그라드 파밀라아 성당은 다르다. 파밀리아 성당은 설계자가 설계도면을 바탕으로 구조물을 만들어내는 '하향식 설계'다. 날아가는 철새를 보면 안다. 철새는 하늘을 무리지어 날아간다. 이때 특정한 모양을 한다. 이들은 철저하게 계산된 공중쇼를 하는 것 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다. 이들은 한 마리, 한 마리가 서로 일정한 각도라는 규칙을 따르며 비행할 뿐이다. 여기에는 설계자가 없다. 숲과 나무 중 다수는 '숲'이라는 거대한 덩어리에 경이로움을 느낀다. 누군가 설계자의 '설계'에 의해 숲이 이뤄졌다면 설계자는 상당히 복잡한 설계 과정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시작도 전에 지치게 만든다. 완벽한 설계 도면이 나오기까지 시작조차 하지 못한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천재가 아니라면 섣불리 시작하기 어렵다. 이런 수준의 천재가 되기 전에도 우리는 파밀리아 성당과 비슷한 모양의 구조물을 세우고 싶다. 철새처럼 그럴싸한 공중쇼도 해보고 싶다. 그런 경우 가장 완전하고 안전한 방법은 '상향식 설계'로 움직이는 것이다. 흰개미가 단순히 앞 개미의 행동에 맞게 다음 행동을 하고, 철새가 단순히 옆 새의 행동에 맞게 다음 행동을 하는 것처럼 무지한 첫 번째 발자국을 움직이며 그에 상응하는 다음 발자국을 움직이는 것이다. 매상황이 주어지는 순서에 대응하다보면 완벽하진 못해도 범인의 완성체를 가질 수 있다. 동시 다발적으로 움직여지는 '설계'는 꽤 그럴 싸 해보인다. 이런 '하향식 설계'는 다수가 공동의 목적으로 움직일 때나 가능하다.

중학교 과학시간에 전류를 연결하는 방법으로 '직렬연결'과 '병렬연결'을 배운다. 직렬연결은 전류가 흐르는 길을 하나로 연결한 것이고, 병렬연결은 전류가 흐르는 길을 나눠 연결하는 것이다. 단순히 전지를 나란히 배열하느냐, 나눠 배열하느냐의 차이지만 같은 전지 두 개로 다른 효과가 난다. 직렬 연결한 전구는 전구의 빛을 더 밝게 빛나게 하지만 병렬 연결한 전구는 전지를 더 오래 쓸 수 있게 한다.

어떤 방식으로 전지를 연결하느냐는 무엇이 좋고 나쁘냐의 성질이 아니다. 전구의 빛을 더 밝게 할지, 전지를 더 오래 사용할지에 따라 결정할 뿐이다. 사람 여럿이 다른 공간에서 동시에 작업을 할 때는 병렬 작업이다. 반면 개인의 시간은 직렬로 연결되어 있다. 개인이 완성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방법으로 상황에 대응해야 한다.

직렬연결은 단순하다. 한번에 하나씩이다. 동시에 여럿을 진행하는 것은 공간을 쪼개 쓰는 경우나 가능하다. 인간의 뇌는 애초에 그런 방식으로 진화했다. 중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가장 힘든 길을 가려면 한 번에 한 발씩만 내댇으면 된다. 단, 계속해서 발을 움직여야 한다.'

한 번에 하나씩, 단순한 논리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는다. 공부하며 음악을 듣거나, 산적한 업무를 동시에 처리하는 '멀티태스킹'을 시도한다. 그것은 능력처럼 보이지만 틀렸다. 멀티태스킹은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완성하는 일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망치는 일이다. 많이 갖는 것, 많이 하는 것을 대부분 '욕심'이라고 치부한다. 그러지 않다. 불가에 따르길, 욕심이란 많이 갖는 것이 아니라 상응할 수 없는 두 가지를 동시에 갖는 것을 말한다. 움직이지 않고 달성하거나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을 동시에 취하는 것을 말한다. 뜨거운 얼음, 차가운 불처럼 당최 상응할 수 없는 두가지를 동시에 취하는 것이 욕심이다. 손이 두 개라면, 둘을 취하고 셋을 갖고 싶다면 하나를 놓아야 한다. 자신의 그릇이 종지잔이라면 종지잔 만큼만 취하고 자신의 그릇이 호수와 같으면 그 모든 것을 취해도 욕심이 아니다. 결국 핵심은 이렇다. '무언가는 포기해야 한다.'

모든 일은 다 중요하다. 개중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을 나눠야 한다. 모두 중요하다는 착각은 모든 중요한 일을 모두 덜 중요한 일로 만든다. 고로 더 중요한 일을 먼저 선택하고 그것에 집중해야 한다. 이후 남은 것들 중 가장 중요한 일을 선택하여 그것에 집중한다. 결국 순서의 차이지, 언제나 행동은 남은 것 중 가장 중요한 것만 취하여 집중하게 한다. 파레토의 법칙은 중력 법칙 만큼이나 현실적이다. 상위 20%가 전체 80%를 해낸다는 의미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대부분의 80%보다 상위 20%가 전체 결과의 80%를 좌우한다. 결국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20%만 효과적으로 해낼 수 있다면 나머지 80%의 영향력은 덜 완성하더라도 20% 내외의 영향력을 끼칠 뿐이다. 미국의 작가 프래신 제이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목표는 더 많은 일을 해내는 것이 아니라 할 일을 적게 만드는 것이다.'

효율은 더 많이 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효율이란 덜 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효율적으로 산다는 것은 '가장 게으른 방법'이다. 현명하게 게을러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시에 모든 것을 처리한다는 환상을 버리고 하나에 한 번씩 만 하자. 그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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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크크오리지널 1
윤재광 지음 / 부크크오리지널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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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윤재광의 책. 글 참 예술적으로 잘쓴다. 기대감 없이 시작했다가 끝나는 줄 모랐다. 인간의 생에 대한 욕망을 다룬 작품. 소설은 현대와 과거를 교차 반복하며 진행하다가 중간 어느지점에서 만난다.

진시황도 소망했던 영생의 욕망. 그것을 소설은 흥미롭게 풀었다. 진시황도 영생을 꿈꿨다. 진시황이 얼마나 영생을 꿈꿨는지는 '제주'에서도 찾을 수 있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아 헤맬 때, 그의 사자였던 '서복'은 한반도 남쪽 제주까지 찾아왔다. 서복은 당시 정방폭보에 정박하고 한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했다. 그탓에 '서귀포'는 '서귀'라는 이름을 가졌다.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의 꿈 중 하나다. 하늘을 날거나, 영원히 사는 욕망은 고로 여러 방식으로 만날 수 있다. 그닥 특별한 소재는 아니다. 흔한 소재지만 소설가 '윤재광'은 수려한 문체로 이야기를 전개 한다. 독서를 마치고 난 뒤, 그의 다른 작품을 찾아보려 했더니, 2021년에 출간된 두 권의 책이 전부다.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조선 어느 시대 쯤, 서삼이라는 인물이 있다. 인물은 물건을 움치는데 도가 튼 인물이다. 언젠가 값비싼 비녀를 훔쳐 어머니를 드린다. 이 문제로 그의 어머니는 곤장을 맞고 얼마 뒤에는 죽는다. 도둑질로 삶을 연명하던 그는 우연히 한 노승을 만난다. 노승이 전한 말에 서삼은 번뜩인다. 노승의 말은 이렇다.

사람은 날 때, 혼을 갖고 태어난다. 하나는 머리, 다른 하나는 마음이 그렇다. 다만 가끔 혼이 셋인 사람이 날 때가 있는데 서삼의 혼이 셋이라는 것이다. 서삼의 다른 하나의 혼은 '자혼'이라는 놈으로 '쥐'처럼 남의 물건을 탐하고 훔쳐 남을 곪게 만든다. 서삼은 자신도 모르게 어미의 뱃속에서 형제의 혼을 훔쳤다. 그렇게 그의 삶은 날 때부터 일반적이지 않았다.

소설의 두 번째 주인공이 등장한다. 소설의 두 번 째 주인공은 그 시대적 배경이 현대다. 지호는 여섯 살 된 아이다. 그는 의사인 아버지 '진우'와 교육학을 전공한 어머니 '희령' 사이에 영특한 아들이다. 영특함은 차고 넘쳐 '천재'의 면모를 갖춘다. 이런 지호에 관한 설명은 '서삼'의 이야기와 교차 서술된다. 도대체 이야기를 어떻게 풀려고 이처럼 두 시대적 배경을 동시에 끌고 가나 싶다.

여기서부터는 약간의 스포가 하나만 하겠다.

두 시대적 배경은 따로 진행되지면 막바지에 들어가며 결국 하나로 모아진다. 남의 혼을 훔쳐 영생하는 '서삼'이 현대에 이르러 '지호'를 만난다.

더 읽을 다른 독자를 위해 더 이상의 스포는 하지 않겠다.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는 것에는 여러 관점이 있다.

일단 기본적으로 불교에서는 영원히 사는 것은 없다. 불교에서는 영원히 살 것이라는 것을 하나의 '상'으로 규정하여 그것이 존재하지 못한다고 못 박았다. 반대로 기독교는 다르다. 기독교에서는 영원한 삶이 존재한다. 기독교에서의 영생은 말 그대로 영원한 생명을 의미한다. 여기서 생명은 해석하기에 따라 다르지만, 육체를 벗어난 뒤에 이어지는 세계까지 포함한다. 두 뿌리를 끝까지 이어보면 사실 둘다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긴 하다. 영생에 대해 생각하기에 이 두 관점은 모두 '육체를 벗어난 영생'을 말한다.

굳이 고대 성인들의 말씀을 빌리지 않더라도 죽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육체는 언젠가 모두 썪어 다른 어떤 것으로 변해간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을 '영' 혹은 '혼', '얼'이라 한다. 소설을 쓴 '윤재광' 작가는 대체로 이런 세계에 관심이 많은 듯 보였다. 책은 매우 쉽게 읽히며 또한 실제로 빨리 읽혀지기도 했다. 바쁜 일상을 살면서 흘러 버리는 아무 의미 없는 생에서 '영생'을 바라는 못난 욕심을 생각해 보게 하는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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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로 다시 읽는 세계사 - 역사를 뒤흔든 지리의 힘, 기후를 뒤바꾼 인류의 미래
이동민 지음 / 갈매나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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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도 30도에서 60도의 북반구 지역은 인구가 많다. 세계에서 GDP가 가장 몰려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 지역은 최근 '기후변화'를 겪는다. 홍수가 빈번하고 지진과 화산활동이 잦아졌다. 에너지 가격과 곡물가격이 올라가고 농업수확량은 줄었다. '위도 30도에서 60도 사이' 이 지역에 흔히 말하는 선진 국가들이 몰려 있다. 대체로 같은 위도에 걸려 있다. 이 지역을 '축복 받은 벨트'로 보기도 한다. 마주하는 '기후위기'는 이 지역 메스컴을 통해 심각하게 다뤄진다.

BBC뉴스에서는 기후위기로 바다 얼음이 줄어들며 북극곰 개체 수가 감소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대로 가다가는 2100년에 북극곰을 지구상에서 볼 수 없다고 밝혔다. 매년 멸종하는 숫자를 극단적으로 보도하며 인류가 만든 위기를 극대화한다. 그러나 2022년 영국 국립역사박물관 연구자들은 2022년 351종의 새로운 동물이 태어났다고 발표했다. 대체로 어떤 종이 멸종하면 새로운 종이 태어난다. 지구에는 총 5번의 대멸종기가 있었다. 생명은 대체로 흥망성쇠를 반복한다. 오르도비스기 대멸종에는 86%, 데본기에는 75%, 페름기 말에는 96%, 트라이아스기 말에는 80%, 백악기 말에는 76%의 생명체가 멸종했다. 그 모든 멸종은 누구의 탓일까. 그 멸종에도 애도의 뜻을 표할 수 있을까. 어째서 선진국들은 '기후변화'에 '기후위기'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일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기후위기'라는 이름과 함께 등장하는 '그래프'를 보자. 그래프는 대체로 완만하다가 1960년을 계기로 급증한다. 구글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자료다. 여기에 인구수, 에너지 사용량, 질소비료 소비량, 탄소 배출량, 해양산성화 정도도 함께 보여진다. 지후변화는 지구 종말 위기를 말한다.

과연 지구 역사, 45억 년 중 인류 산업기 50년이 종말의 신호탄일까. 인류는 엄청난 비용을 치루고 지구를 지키고 있는 것일까. 신석기 시대를 1만년 전으로 보자면 현재의 빙하의 두께는 역대 가장 두꺼운 시기 중 하나다. 4000년을 기준으로 보더라도 현재는 가장 서늘한 시기다. 10~13세기에는 지금보다 더 기온이 높았다. 따뜻했던 중세 온난기와 소빙하기에도 생물종은 대멸종하지 않았다. 기후학자들이 말하는 지구온난화의 위기는 '가파름'이다. 이 '가파름'에 '인류 산업기'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차치하고 지구온난화는 모두에게 위기인 것은 아니다. 지구 온난화로 빙하고 녹으며 북극에는 새로운 항로가 생겼다. 대체로 '축복받은 벨트'에 거주하는 '선진국'들이 물류 이동을 위해 이동하던 '수에즈 운하'보다 훨씬 경제적 가치가 있는 '북극권 항로'가 열렸다. 이 항로는 러시아에 커다란 기회다. '북극권 항로'는 러시아의 단독 영해다. 러시아는 그간 기존 선진국들의 물류이동에 합류하지 못했고 유럽과 미국에 의해 고립되기 쉬운 지리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이 지역이 수에즈 보다 훨씬더 경제적으로 유리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이 지역은 인구가 희박하기 때문에 해적활동이 힘들고 낮은 기온으로 물류 이동 중 에너지 활용을 줄일 수 있는 큰 장점이 있다. 북미와 유럽, 아시아를 관통하는 엄청난 기회를 '러시아'가 갖게 되는 셈이다.

기후변화는 인류 역사에서 항상 있어 왔다. 이런 기후변화에 '기후위기'라는 이름을 붙이는 이유는 경제 패권이 이동할지 모른다는 위기감 덕분이다.

12만년에서 9만년 사이에는 기후 변화로 인해 사하라 사막이 습윤한 초지로 바뀌었다. 이 시기 현생인류는 아프리카 남부를 벗어나 세계 각지로 이동했다. 기원전 200년에는 한나라와 로마가 본격적으로 온난기에 접어 들기 시작하면서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다. 2세기 중반에 기온이 내려가면서 중국에서는 농산물 수확량이 줄고 역병이 창궐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로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거나 한나라가 멸망하는 등 다양ㅇ한 사건이 일어난다. 11세기에는 소빙하기가 오면서 유럽에서는 농산물수확이 줄고 전염병이 창궐한다. 몽골 스텝에는 유사이래 가장 많은 비가 내리면서 유목의 생산성이 극적으로 증가하고 초원지대가 확산되면서 말을 통해 몽골제국이 번영할 수 있는 배경을 만들었다. 14세기 초반에는 유럽 평균기온이 하강한다. 소빙하기의 시작이다. 이 시기에 유럽 전역에서 흑사병이 유행하고 엄청나게 많은 사망자가 생겨나자 인류는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난다. 그리고 아메리카를 발견한다. 16세기, 동아시아에도 소빙하기가 시작된다. 초원지역에 거주하던 여진족이 명을 무너뜨리고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는 시기도 이 시기다. 역사의 흥망성쇠는 반복한다. 빙하기는 유럽에게 재앙이었지만 몽골에게는 기회였다. '기후위기'라는 말이 대체적으로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지구온난화를 이야기할 때, 이상화탄소 농도를 자주 이야기하곤 한다. 이산화탄소는 '지구의 적'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지질학적 역사로 보면 현재 이산화탄소는 낮은 편에 속한다. 생태계 광합성을 증가를 위해 되려 이산화탄소가 높아져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산소'가 충만한 지구가 좋은 지구라는 편견은 지극히 인간종의 편협한 생각일지 모른다. 이산화탄소는 광합성의 원료이므로 대기중 이산화탄소 노도가 높을수록 식물종의 광합성은 유리하다. '지구온난화' 혹은 '기후위기'에 지나치게 꽂혀 있으면서 남들보다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을 하는 것이 옳을까. 다가오는 여름이 되면 '지구를 위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에어컨 켠 건물에서 '냉장고'의 시원한 음료를 꺼내 먹으며 이 주장들을 비판할지도 모른다. 대체로 기득권을 위한 '기후 위기'는 다양한 방면으로 생각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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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완벽주의자를 위한 책 - 자기증명과 인정욕구로부터 벗어나는 10가지 심리학 기술
마이클 투히그.클라리사 옹 지음, 이진 옮김 / 수오서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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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 미술 선생님은 내 그림을 반 전체에 보여주셨다.

"아주 감각있는 그림이야. 소질이 다분해. 이쪽으로 나가도 성공하겠어."

그림은 4B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옅게 물을 섞은 수채화였다. 붓으로 노란 물감과 물을 섞어 한번 정도 칠한 뒤였다. 대상은 참외, 바나나 따위다. 그림이 명확히 기억나는 이유는 미술 선생님께 받은 칭찬 때문이 아니다. 그 그림이 C+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몇 분 뒤, 엄청난 칭찬이 이어졌다. 미술 선생님은 내 그림이 왜 감각있는 그림인지 설명했다. 사적인 칭찬도 함께 이어졌다. 이후 그림은 도로 돌아왔다. 민망하기 그지없는 칭찬을 듣고 그림을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 생각없이 칠한 물감 따위에 그렇게 심오한 의미가 있었다는 사실을 당사자인 나도 몰랐다. 미술 선생님의 칭찬과 기대에 부응하고자 했다. 다만 더 진행을 했다가는 선생님이 감동을 무너뜨릴 것만 같았다. 나는 나머지 시간을 그리는 척만하고 그 미완성 된 작품을 제출했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던가.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칭찬은 되려 성장을 멈추는 구실이 되기도 한다. 보통 '완벽주의자'는 굉장히 부지런할 것 같다고 착각한다. 다만 게으른 쪽이 더 완벽주의자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완벽하지 않기에 시작을 두려워 하는 것이다. 완벽주의는 보통 '시작'을 지연하거나, '선택장애'를 낳는다.

도착까지 모든 신호가 '파란불'이 되면 출발하겠다는 마음. 혹은 선택을 하지 않으면 '오답을 고르지 않는다'는 마음. 그것이 완벽주의자에게 있다. 고로 실패할 행동이라면 아예 하지 않는 오류를 낳는다. 다시말해 틀리는 것이 두려워, 문제를 풀지 않는 것과 같다.

가장 좋아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일단 시작하고 나중에 완성하라' 대체적으로 불완전함을 견디지 못하면 시작을 하지 못한다. 실수투성이 초보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마음이 발전을 더디게 한다. 세상에 완벽이란 없다. 따지고 보면 그렇다. 자연상에는 100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순도 99%라는 말을 자주 접한다. 산업적으로 이용되는 가스의 순도에는 five-nine 혹은 nine-nine이라는 말이 있다. 99.999% 혹은 99.9999999% 처럼 극도로 정제된 순도 기술로도 100%을 달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도체에 사용되는 가수의 순도는 9가 무려 11개나 들어가는 eleven-nine이 사용된다. 세상에 없는 것을 달성하려고 하니 불필요한 에너지가 소모된다. 순도 1%에서 2%로 올리는 것은 쉽다. 다만 99%에서 100%로 올리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어쩌면 1에서 99까지 올리는 편이 더 낫다고 할수도 있다. 그것이 100이 됐다고 차원 다른 결과물이 되는 것도 아니다. 아주 극히 적은 경우가 아니라면 대개 99면 충분하다. 90도 충분하다. 때에 따라서 50도 충분한 경우가 있다. 우도할계(牛刀割鷄)라는 말이 있다. 닭을 잡는 데에 소 잡는 칼을 쓸 필요없다는 뜻이다. 완벽을 추구하는 것은 닭을 잡기 위해 소잡는 칼을 사용하는 일이다.

'제논의 역설'이라는 말이 있다. 수학에서 '극한값'을 설명하기 위해 종종 사용되는 예시다. 내용은 이렇다. 아킬레스와 거북이가 달리기 경기를 한다고 해보자. 거북이는 아킬레스보다 50m 앞에서 출발한다고 해보자. 이 경기는 과연 누가 이기게 될까. '제논의 역설'에서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영원히 추월할 수 없다.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추월하기 위해서는 일단 거북이와 간격을 절반으로 줄여야 한다. 절반을 따라 잡았다고 해도 25m는 아직 남아 있다. 다시 그 25m를 추월하기 위해서는 다시 25m의 절반을 따라잡아야 한다. 하지만 또 12.5m가 남는다. 이후 다시 그 절반인 6.25m를 추월하면 3.125m가 남는다. 이렇게 공간을 절반씩 나누는 행위를 영원히 반복하면 아킬레스는 영원히 거북이를 이길 수 없다. 이는 '무한'과 '극한'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다. 흔히 1에서 2까지 수와 1에서 100만까지의 수 중 어떤 곳에 수가 더 많은지 묻는다면 후자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알 수 없다. 숫자를 무한으로 쪼개면 어느쪽에 숫자가 많은지 알 수 없다. 결국 '완벽'이란 이처럼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는 아킬레스의 거북이 같은 존재다.

완벽주의에는 두 가지가 있다. 적응적 완벽주의와 부적응적 완벽주의다. 적응적 완벽주의는 성취와 목표의 과정을 즐긴다. 부적응적 완벽주의는 결과와 기준에 엄격한 편이다. 고로 실패에 대해 두려워 하고 자기비판에 취약하다. 고로 적응적 완벽주의는 높은 생산성을 띄고 그것에 대한 보상고 충족감을 얻으며 성장한다. 이는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반면 부적응적 완벽주의는 결과에 치중한다. 자신만의 높은 기준에 의해 신경쇠약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사소한 일에 집착하고 강박적이고 회의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다. 완벽주의자들에게 자신은 언제나 미완전한 존재다. 자기 존중의 문제를 맞는다. 자신에 대한 불만은 자기 비하로 이어진다. 인간은 애초에 불완전한 존재다. 그것을 인지하지 않으면 실망과 스트레스는 끊임없이 따라다닌다. 스트레스는 보통 근육을 경직시키고 혈액순환에 장애를 가져온다. 식물과 동물은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독을 만들고 상대를 죽이거나, 자신이 맛없는 고기 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그 독소는 스스로에게 쌓여 결국 자신을 죽게 만든다. 현재 먹이사슬 최상위에 있는 인간은 포식자에게 노출되는 일은 없지만, 극도의 공포나 불안감은 포식자를 만났을 때와 같이, 우리 신체 내부에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스스로 독소를 만들어 낸다. 결국 결점과 한계를 이해하고 용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완벽주의는 겉으로 보기에 꽤 철저하고 완벽한 노력형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게을러지고 선택을 망설이는 방식으로 변화하기도 한다. 고로 어느정도 내려놓고 미완성의 자세를 인정하는 것이 삶을 대하는 편하고 쉬운 자세가 아닐까.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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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피어싱
가네하라 히토미 지음, 정유리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잠이 오지 않는 밤. 가볍게 읽을 책을 골랐다. 밤 11시. 결말을 보고 잘 수 있는 책. 기준은 두께. 서점에서 100 페이지 겨우 넘는 몇 권을 집었다. 내용은 상관 없다. 속도감. 몰입감이 있으면 좋겠다. 두 권은 '이언 매큐언'의 '바퀴벌레', '가네하라 히토미'의 '뱀에게 피어싱'이다. 바퀴벌레는 얇지만 묵직했다. 두 번 째 책.

'뱀에게 피어싱'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제목. 사전 정보 없이 책을 들었다. 그래서 그랬나. 꽤 충격적이다. 짧아 후루룩 읽히긴 한다. 소재는 문신과 피어싱. 기본적으로 수위는 아주 높다. 살인, 자해는 물론이고 성적인 내용도 아주 노골적이다. 자극적이다.

소설은 난데없이 '스필릿텅'으로 시작한다. 피어싱의 일종으로 혀 끝이 뱀처럼 갈라지는 모양이다. '스필릿텅'에 매력을 가진 '루이'라는 여성. 그녀를 '스필릿텅'의 매력으로 안내한 '아마'라는 남자. 문신전문가 '시바'의 이야기다. 묘사는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가 다수다. 준비없이 마주한 자극성에 흠짓 놀랐다. 대략 30 페이지 정도 넘어서고 이해했다. '이런 류의 책이구나'

예전 '365일'이라는 책을 읽었을 때도 그랬다. 책을 읽다가 펴놓을 수 없는 상황이 주가 되는 상황. 꽤 보수적인 성격이라 자신있게 내용을 알았다면 서점에서 자신있게 집어오진 못했을 것 같다. 어쨌건 어쨌건 영화를 보더라도 자극적인 영화를 못 보는 편은 아니다. 19금 딱지를 붙이고 나오는 것들이 주는 여과없는 매력이 분명있다. 불편하다는 시선도 많지만 그렇진 않았다.

자극적인 소재와 적나라한 표현이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줄수도 있겠지만 이 소설은 아쿠타가와 상 심사과정 중 심사위원 열 중 아홉이 추천하여 가장 높은 점수를 받기도 했다.

중학교 때인가. 초등학교 때인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일본 영화를 본 적 있다. 예전에는 '토요일'이 휴일이 아니었다. 토요일은 일찍 끝나는 날일 뿐이었다. 이런 날, 선생님의 재량으로 '비디오' 빌려보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때 반 친구 중 재밌다고 빌려온 비디오가 하나 있었다. 그 비디오를 전 학년이 교실에서 봤다. 그 때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당시 봤던 비디오는 '배틀로얄'이라는 영화다.

우리나라는 '심의'가 높은 편이었다. 수위가 높다 싶으면 19금 딱지 붙일 기회도 없이 방영되지 못했다. 성인마저 때로는 보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다. 다만 '배틀로얄'은 나의 '상식선'을 가볍게 넘었다. '일본 감성'이라는 기준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는 주인공으로 '연약한 여성'이 설정된다. 건장한 남성과 까불거리는 인물이 통쾌하게 죽는다. 다들 죽임을 당하더라도 '주인공 여성'은 끝까지 살아 남는다. 그것은 일종의 '공식'이다.

정확치 않지만 배틀로얄은 그러지 않았다. 약육강식만 존재했다. 약하고 불필요하면 가차없이 죽인다. 배우의 이미지나 관객의 기대 같은 것은 철저하게 배제됐다. 목이 잘려 나가거나 망치로 두들겨 맞는 장면도 여지없다.

'무서운 영화추천'이라는 검색을 통해 '일본 영화'를 찾은 적 있다. 댓글은 보지 않았다. 댓글을 보면 기대감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당시 우연하게 본 댓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괜히 봤다. 일본애들은 도대체 왜 이런 걸 만드는 걸까.'

왠만한 공포 영화는 무섭지 않은 나의 기대감은 극도로 높아졌다. 방을 어둡게 했고 컴퓨터 스피커를 잔뜩 올렸다. 아이스크림을 앞에 끼고 재생버튼을 눌렀다.

영화가 시작했다. 10분 정도가 지났을까. 소리를 조금씩 줄였다. 얼마 뒤에는 다시 소리를 줄였다. 결국 이어폰을 착용했다. 형용할 수준이 아니다. 잔혹함이 지나치다시피했다. 영화는 영화와 성인물의 중간쯤 됐다. 입맛이 떨어졌다. 꺼냈던 아이스크림을 도로 냉동실로 집어 넣었다. 헛구역질 나서 더이상 볼 수 없었다. 비위가 나름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볼 수 가 없었다. '고어물'이라는 단어를 그때 처음 접했다. 공포와 상관없이 비위가 강해야 했다.

때로 그것이 솔직하다 여길 때도 있다. 대외적으로 쉬쉬하지만 다들 알면서 말하지 않는 것이 있다.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사회적 기대감, 인간관계, 구조적인 배경으로 '혼자'만 알고 있는 사적 폭력성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을 외부에서 확인했을 때 얻는 동질감도 있을 것이다. '루이'와 '아마'는 이름도 나이도 모르고 동거를 한다. 대기업에서 주관하는 파티에 참석하는 아르바이트를 할 때는 하고 있던 피어싱을 모두 빼고 '단아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을 '기업'에서 선호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입속에는 '스필릿텅'을 준비하는 '피어싱'이 숨겨져 있다. 입을 벌리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그것을 꾹 닫아 보이지 않는다. 남들의 눈에 평범해 보이는 것을 선택하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무엇을 숨겨둔다. 사회가 강제로 '마스크'를 쓰게 했을 때, 다수는 불평을 했지만 어느 순간 벗으라고 해도 벗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 마스크 뒤로 숨길 수 있는 표정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내면을 감추기 위해 얼굴 근육을 움직이는 일에 피로감을 느꼈던 이들은 조금더 편하기 위해 마스크를 벗지 않는다. 소설은 굉장히 얇지만 다양한 부분에서 생각해 볼 거리가 많았다. 본 소설은 '스네이크 앤 이어링'이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는데 소설과 내용이 같다고 알고 있다. 소설이 영화로도 나와 있다는 것은 그만큼 수요가 충분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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