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사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양극단은 있다. 다만 두 극단은 무수하게 많은 점으로 이어진다. 고로 하나의 덩어리다. 수학에서 '위상동형'이라는 말이 있다. 위상동형은 본질적으로 같은 형태다. 위상동형이란 늘리거나 줄이는 정도의 차이만 존재하는 모형을 말한다. 다시 말해 덧붙이거나 잘라내는 것 없이,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정도의 차이만 있는 모형이다. 여름철 수영장 튜뷰를 예로들면 적절하다. 튜뷰는 겨울이되면 바람을 빼어 종이처럼 얇게 만들 수 있다. 그것은 튜브의 본질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여름이 되면 그것에 바람을 다시 넣어 도너츠 모양으로 만들 수 있다. 일부를 부풀리고 늘리고 줄이는 등의 변화로 그 도너츠 모양은 '컵'모양으로도 변한다. 고로 위상동형은 본질적으로 같다. 손에 착용하는 반지를 살펴보자. 반지에는 손가락을 집어 넣을 수 있는 구멍 하나가 있다. 이 반지를 길게 늘여 빨대처럼 만든다고 해보자. 빨대는 입구와 출구라는 두 개의 구멍이 생긴다. 그러나 새로운 구멍을 뚫은 것은 아니다.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다. 빨대도 반지와 같이 구멍은 하나다. 이것이 위상동형이다. 결국 구멍이 두 개가 된 적이 없다는 말이다. 길게 늘리기만 해도 인간은 하나의 구멍을 두 개의 구멍으로 착각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다. 본질은 하나다. 다만 그것의 여러 위상동형의 형태를 를 보면 그 모양이 각각 다른 것처럼 보인다. 삶과 죽음은 각각 입구와 출구의 다른 이름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없음'이라는 모양의 위상동형이다. 비어 있는 값에 마이너스 1과 플러스 1을 넣는 것이다.

수학의 아버지로 불려지는 피타고라스는 '만물은 수'라고 정의했다. 그가 말하는 '수'라는 것은 자연수를 말한다. 인간의 눈으로 하나, 둘, 셋하고 셀 수 있는 단위의 수라고 여긴다. 그는 바닥에 깔려 있는 타일을 보며 직각 삼각형에 어떤 규칙이 있음을 발견한다. 세 개의 정사각형 타일로 가운데 직각삼각형을 만든다고 해보자. 이때 가장 큰 정사각형 한 변의 제곱은은 다른 두 정사각형 한 변의 제곱의 합과 같다는 등식이다. 이것을 '피타고라스의 정의'라고 한다. 이 발견은 역시 위대했으나 그의 제자중 '히파수스'는 의문을 제기한다. 만약 직각 삼각형에서 짧은 두 변의 제곱의 합이 긴 변의 제곱이라고 하면 한 변이 1인 정사각형의 대각선의 길이를 구하기 위해선 제곱해서 2가 되는 값이 필요하다. 무언가를 제곱해서 2가 되는 수는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최초의 무리수가 발견되지만 '히파수스'는 이 수를 발견한 죄로 처형당하고 만다. 결국 제곱해서 2가 되는 수를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루트'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처럼 수학은 등호의 양변에 같은 값을 더하고 뺀다는 규칙으로 수의 개념을 확장해 나간다. 결국 무엇을 더하거나 무엇을 빼도 등호가 성립된다면, 양변에는 무슨 짓을 해도 좋다.

다음으로 발견한 수학의 법칙은 이렇다. 0을 제곱하면 0이다. 또한 0이 아닌 수를 제곱하면 0보다 크다. 그렇다면 마이너스 1은 무엇을 제곱한 값일까. 논리대로라면 이 값은 루트 마이너스 1이 된다. 양변이 같다는 등호는 절대적 규칙이다. 그것을 해치지 않는다면 앞서 말한 음수의 제곱도 존재할 수 있다. 이처럼 음수의 제곱을 궁리하다가 우리는 '허수'라는 개념을 찾았다. 허수는 가상으로만 존재하는 값이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 'i'라는 기호를 쓰고 실수로 표기한다. 이것은 복소수다. 복소수는 존재하지 않는 '허수' 때문에 다루기 힘들다. 고로 계산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 우리는 '켤레복소수'라는 것을 활용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더하고 빼는 관계다. 이를 활용하면 허수는 사라지고 실수만 남는다. 이렇게 우리는 관측 불가능한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어쨌건 우주는 하나가 더해지면 하나가 빼지는 관계다. 여기서 절대규칙이 있다. 등호는 바꾸지 않는다. 우주의 절대값은 바뀌지 않는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처럼, 반드시 에너지의 총량은 유지된다. 우주가 최초로 폭발하는 빅뱅으로 돌아가면 우주는 '양'과 '음'의 두 극단으로 폭발해 나간다. 고로 우주에는 물질과 반물질의 쌍입자들이 순간적으로 생성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다시말해서 우주의 텅 빈 시공간이 0이라고 하면 그것을 멀리서 보기에는 그저 0이지만 그것을 양자 단위로 확대해서 보면 쌍입자는 플러스 1과 마이너스 1을 무한으로 생겼다 사라지는 양자 요동 상태다. 그것이 도가에서 말하는 '무', 불가에서 말하는 '공'을 닮았다고 해도 좋다. 스티브 호킹 박사가 했던 말 처럼 우주의 모든 양의 에너지와 음의 에너지 값을 모두 합하면 0이 된다. 우주는 결국 '무'와 '공'의 위상동형이다. 고로 '삶'과 '죽음'은 '없음'이라는 상태를 100년의 시간과 공간으로 늘린 위상동형이다. 단지 길이만 길어졌을 뿐이지 '없음'의 위상동형이다. '남자'와 '여자' 또한 무한대로 요동치는 양극단의 공간일 뿐이다. 거기에는 무수한 점들이 있으며 있고 없고의 사이에 중간 값도 존재한다. 다시말하면 이렇다.

남성이 여성을 좋아하는 상태, 여성이 남성을 좋아하는 상태.

남성이 남성을 좋아하는 상태, 여성이 여성을 좋아하는 상태.

신체적으로는 남성, 정신적으로는 여성인 상태

신체적으로는 여성, 정신적으로는 남성인 상태

신체적으로 남성이고 정신적으로 여성인 자가 여성을 좋아하는 상태.

신체적으로는 남성이고 정신적으로는 여성인자가 남성을 좋아하는 상태 등.

이처럼 정확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는 무수한 점도 역시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이렇다. 음양적으로 여성이 남성을 좋아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 어디까지가 남성이고 어디까지가 여성이라는 것인가. 그것은 윤리의 문제를 포괄하여 복잡해진다. 뇌사와 식물인간은 살아 있는 상태인가 죽어 있는 상태인가. 정신이 남성이고 신체가 여성이면 남성인가 여성인가. 신체가 정신보다 중요한 것인가. 또한 정신적으로 여성이라면 어느 경계부터 여성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른 양자 요동의 상태 중 멈춰지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들이다. 우리가 정의한 것은 정의한 이후에도 끝없이 변하지 않는 진실 남는 것인가. 흐르는 물에 손가락을 가리키고 거기에 이름을 정한다면 그 물의 이름은 그것이 되는가. 그 강물은 멀리서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가리킨 순간의 물은 이미 흘러가고 없지 않은가.

결국 촛불하나 켰을 때 어디서 부터가 빛이 끝나는 지점인지를 지정하는 것처럼 그것은 아주 미세한 그라디에션이며 무엇이 무엇이라고 칼처럼 단정할 수 없는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창을 두드리는 그림 - 수도원에서 띄우는 빛과 영성의 그림 이야기
장요세파 지음 / 파람북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렘브란드의 'The Holy Family'라는 그림은 책을 든 엄마가 아이를 내려다 보고 있다. 이 모습은 너무 평범한 가정의 모습이다. 다만 그 앳된 엄마가 '마리아'라고 알고 보면 다르다. 흔히 성숙한 모습으로 기억하는 '마리아'가 앳된 소녀 엄마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오른손는 '구약'으로 보여 지는 책이 들려 있다. 아이를 비추는 빛은 그 위치가 다르다. '벽난로'가 있는 측면이 아니다. '상향'이다. 앳된 마리아와 어린 예수의 모습이라고는 보여지지 않을 이 그림은 '빛의 화가, 렘브란트'의 의도가 있다. 빛 통해 평범하지만 비범하게 보여지는 효과다.

이탈리아 초기 화가, 카라바조 역시 빛과 그림자를 이용하여 그림을 표현한다. 그의 그림만큼 자신도 빛과 그림자가 분명한 이름이다. 그는 살인을 저지르고 뒷골목을 전전한 사람이다. 또한 신학적으로 해석했을 때 깊은 의미가 있는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므로써 스스로도 빛과 그림자의 극명함을 보여주는 삶을 살았다. 카라바조의 그림 중 'The taking of Christ'라는 작품은 어둠 속에서 예수의 얼굴에 빛이 드리워져 있다. 다만 그의 표정은 역시 어둡다. 예수 그리도가 잡혀가는 상황을 묘사한 이 그림은 매우 역동적으로 보이지만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고작해봐야 여섯이 전부다.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으면서 인물 한명 한명이 강한 서사를 드러낸다. 예수를 잡으러 온 병사들은 과도한 복장을 착용하고 있다. 번쩍 거리는 갑옷을 착용하여 사납게 덤빈다.

대체로 예수를 표현하는 그림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빛'이다. 이 빛을 더 돋보이게 하는 것은 어둠이다. 고로 예수와 마리아의 그림에는 빛과 어둠이 함께 있다.

일본에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타다오는 오사카, 아바라키 가스가오카 교회를 직접 설계했다. 이 교회는 평범한 주택가 안에 있는 교회지만 그 애칭은 '빛의 교회'다. 그는 교회를 콘크리트로 지었는데, 예배당 제단 뒷편에 쉽자겨 형상으로 창을 만들어 밖에서 빛이 세어 들어오도록 설계했다. 이 교회는 주변이 어두워 그 빛이 선명하게 보여질 뿐 만아니라 아름답기까지하다. 반면 교회의 외부로 가게되면 정확히 그 빛은 반전된다. 밝은 주변에 비해 검은 십자가가 나있다. 고로 밝음은 어둠을 낳고, 어둠은 밝음을 낳는다. 성경 구약에 따르면 창세기 1장 3절는 다음과 같다.

"빛이 있으라 하여 빛이 있었다."

얼핏 창조주는 빛을 가장 먼저 창조했을 것 같지만, 빛이 생기기 위해 먼저 존재해야 하는 것은 '어둠'이다. 고로 어둠은 '빛'에 선행한다. 또한 빛은 어둠이 있기에 존재 할 수 있다. 세상을 모두 이분법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창세기에 따르면 빛과 어둠은 극명하게 반대되는 개념이지만 또한 둘이 맞닿아 있고 서로가 서로를 낳는다.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와 모네가 빛의 화가라고 불려지는 이유는 이 빛을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밝음과 어둠은 단순히 빛과 그림자로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들은 빛의 방향과 표정 상황, 분위기, 색체 등을 이용하여 다양하게 빛과 어둠을 표현한다.

사람에 따라 그림을 보는 행위는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예술 작품일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 사료일 수도 있다. 다시 누군가에게는 기법과 기술일 수도 있다. 다만 '장요세파' 수녀에게 그림은 기도와 닮았다. 기도라는 것은 특별히 어떤 동작에만 이름을 붙이는 성격의것이 아니다. 삶의 모든 것과 세상의 모든 것에서 신의 숨결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는 종교에 다르지 않다. 단순히 미술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을 통해 구도자의 길에 대해 묵상하고 생각해보는 것은 단순히 눈을 감고 손을 모으는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림은 분명 불투명 하지만 분명 관통하여 무언가를 또렷하게 보게하는 '창'과 닮았다. 단순히 여러 색깔의 집합체가 아니라 거기에는 인문학적 정보와 신학적 정보가 함께 담겨져 있다. 이런 인류학적인 압축파일은 풀어내는 이가 어떻게 푸느냐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해석된다. 중세 유럽에서 종교의 의미는 특별하다. 그 시기에 그려진 그림을 해석하는 이가 종교인이라는 것은 그 시대적 배경과 생각해 봤을 때 굉장한 매력이 있다. 우리는 글이라는 것에 굉장히 큰 의미를 둔다. 그러나 원래 인간이 최초에 남긴 정보는 글이 아니라 그림이었다. 인간이 당시 남겼던 정보가 글이 아니라 그림이었다는 것은 지금의 우리에게 어쩌면 다행일지 모른다. 우리는 그림을 통해 직선적인 정보가 아닌 공간적인 정보를 받아들이고 추상적인 관념에 대해 폭넓게 추측하게 됐다. 이것이 아마 우리의 인지 발달에 직선 정보보다 더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장소들 - The Places
류성훈 지음 / 시인의 일요일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군지 모르지만 최초의 언어를 사용한 인간은 '명사'부터 썼을 것이다. 무언가에 이름을 짓는 행위로 그것을 정의하고 싶었을 것이다. 정의를 좋아하는 인간의 특성이 자신에게도 '이름'을 짓고, 상대에게도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이름 지어진 자신과 상대는 아이러니하게 그 이름에 갇혀 본질을 잃을 것이다. 언어는 본질을 멋대로 가둬 놓는 행위다. 피어 오르는 아지렁이를 아지렁이라고 부른다면 그 옅어지는 가장자리를 무어라 부를 것이며 그 가장자리의 가장자리를 무어라 불러야 하나. 인간이 존재를 형용하려는 순간 대부분의 것들은 가차 없이 난도질되며 멋대로 쓸모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구분된다. 칼로 잘려 나가진 본질의 외곽 부분은 부스러기가 되어 이름 조차 없이 무존재로 존재할 것이다. 고로 언어를 만진다는 꽤 날카로운 면도날을 다루는 일과 같다. 무언가 잘못 그어버리면 한뿌리 한뿌리가 동강나 버린다. 글을 쓰는 사람의 글의 칼날과 같으니, 시인의 글은 수술대에 올라선 외과의사의 상대를 닮았다. 미세한 감각으로 덜어낼 것과 그러지 않은 것들을 건들어내는 것이다. 물리학은 시공간이 관찰자에 의해 존재하거나 변용된다고 한다.

우리 모두는 '관찰자'로서 공간과 시간을 존재케 하고 변용케 한다. 그 위대한 업적을 매순간 매장소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라는 존재고 그 모호한 것을 대상을 수술대에 올려 놓고 섬세한 칼날로 본질을 들어내게 하는 것이 시인이다.

장소(場所)는 흙 위로 태양이 빛추는 글자, 장과(場), 도끼로 나무 찍는 소리를 의미하는 글자 소(所)가 합쳐진 글자다. 그것이 빛과 떨림을 모두 의미하니 조금더 깊게 보자면 양자역학처럼 존재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어떤 장소를 단순히 면과 면이 만나는 3차원으로 기억할 수 없다. 우리는 거기에 시간이라는 1차원을 덧되어 4차원을 산다. 거기에 시간을 제거하면 단순히 그곳은 장소가 아니라 '공간'이 되어 버린다. 비어있는 사이. 아무런 의미를 상실한 비어있는 곳. 그것은 아무 의미를 담아내지 못한다.

어떤 장소를 보면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이 함께 머릿속에 그려질 때가 있다. 고로 장소에서 시간을 뺀다는 것은 모든 것을 비워 버리는 것과 같다. 등호를 사이에 두고 양변을 저울질해 보건데 그 값이 0이 된다면 장소는 곧 시간이 된다. 나에게도 그런 장소가 있다. 단순히 공간으로 보이지 않고 시간으로 보이는 장소 말이다. 남들보다 꽤 다양한 곳을 스쳐 지나갔다. 그것이 오죽이나 넓은지 지구를 몇 번을 돌았을지 모른다. 비행기의 속도로 12시간은 움직여야 도달하는 곳에도 나의 기억은 묻어 있다. 내가 공간을 이동하며 했던 생각은 그곳을 비어 있는 곳에서 가득찬 곳으로 바꾸었다. 비로소 장소가 됐다. 고대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명사를 동사화하여 사용했다. Place라는 장소는 동사 위치에 두어, '두다. 놓다. 배열하다'의 의미로 사용했다. 나는 공간에 시간과 기억을 두고 왔다. 내가 그곳에서 했던 모든 행동들은 빛의 형태로 우주 전체로 산란되어 수백억 광년 우주 끝에 죽지 않고 정보로 도달할지 모른다. 그것은 우주 끝에 있는 누군가가 정보를 확인하지 않는 이상 그저 내 머릿속에서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가 사라질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간이 있고 누구에게나 그런 장소가 있다.

'장소들'을 집필한 '류성훈' 시인의 글은 이미 출발지에서 광속으로 우주 끝을 향해 달려가는 정보를 언어화하여 종이 위에 담아 두었다. 그 아련한 기억은 그의 추억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추억으로도 남아졌다. 작가는 아주 복잡한 자신만의 세계관으로 함수를 짜놓은 상자와 같다. 어떤 값이 입력되면 작가의 시간과 공간, 기억은 아주 세밀하게 작동하여 완전히 새로운 것을 토해 놓는다. 안타깝지만 작가가 가지고 있는 함수는 그의 고뇌와 슬픔, 기쁨, 우울함, 즐거움의 다양한 감정에 기인한다.

고흐는 스스로 엄청난 고뇌를 지니고 살아가다가 정신병원에서 권총자살을 했지만 그의 고뇌는 현대인들에게 작잖은 인사이트를 남겼다. 모짜르트도 스스로 엄청난 작품을 남긴 작가지만 엄청난 빚을 지고 가난에 허덕였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30대에 도박으로 부모의 유산을 모두 날렸다.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보내 많은 빚을 졌고 성욕과 도박의 유혹에 쉽게 현혹됐다. 그의 젊은 시절은 쾌락과 그 뒤에 찾아오는 환멸감의 윤회였다. 그는 질투심이 많고 타인의 존경과 세상의 찬사를 갈망했다. 이런 세속적인 인생을 살던 이력이 그의 글을 '그의 글'답게 한다. 그는 결혼 이후 굉장히 불행한 삶을 살았다. 그의 아내와 맞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다. 다만 그 또한 스스로에게는 여러 고통을 주었겠지만 결국 자신을 더 자신스럽게 만들었음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우스께 소리로 하는 소크라테스의 이야기가 있다.

"좋은 아내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나쁜 아내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것이다."

결국 작가는 좋음과 나쁨의 어떤 선택에서도 글의 성향이 결정될 뿐이다. 류성훈 작가가 자신의 눈과 경험으로 소화하고 글로써 만들어낸 모든 경험들은 아주 미묘한 그만의 역사가 숨겨져 있다. 그것은 찬찬히 읽다가 문뜩 누구의 글이었는지 기억이 가물한 나의 옛추억과 만나 완전히 새로운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시인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 시인의 글은 시인의 삶으로 완성된다. 고로 그의 글은 이미 쓰여 있지만 현재 진행 중이고 앞으로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나아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뱃살을 빼야 살 수 있습니다 - 내장지방 명의의 내 몸을 살리는 지방간 다이어트 살 수 있습니다 1
구리하라 다케시 지음, 윤지나 옮김 / 서사원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대 초반 몸무게가 한 달 만에 80kg에서 65kg까지 빠졌던 기억이 있다. 방식은 간단했다. 토마토와 녹차, 양치질이다. 토마토는 단순히 저칼로리 식품이기 때문에 말할 나위가 없다. 다만 녹차와 양치질은 의외로 다이어트에 굉장히 도움을 준다. 그중 양치질부터 이야기하면 이렇다. 양치질을 하고나면 이후 얼마 간, 간식을 먹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상쾌한 입안을 유지하고 있으면 마치 샤워 뒤에 외출을 하기 싫은 것처럼 음식을 입에 넣고 싶어 하지 않게 된다. 뿐만 아니라 치약이 주는 상쾌함은 괜스레 식욕을 억제하기도 한다.

입안이 청결하지 못하면 살이 빠지지 않는다. 입안에는 수 백 종의 세균이 수 천 억 마리가 살고 있다. 내부로 연결되는 첫 번째 입구인 입 안은 그래서 중요하다. 외부에 노출된 공기는 세균 번식을 유발하고 그것이 음식과 함께 내부로 들어갔을 때 장내부에도 영향을 끼친다. 장내 세균의 균형이 깨지게 되면 변비에 걸리기 쉽고 대사 기능이 저하된다. 대사가 나빠지면 지방 연소가 수월치 않게 된다. 이는 살이 잘 빠지지 않는 체질이 된다.

잇몸에서 피가 나거나 붓고 통증이 생기는 풍치는 치주병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로 인해 염증이 생기면 '염증성 사카토카인'이라는 물질이 생긴다. 이 물질은 인슐린 작용을 방해한다. 이로써 당이 혈액으로 방출되면 혈당이 올라간다. 혈당이 오르면 지방간이 악화되고 당뇨에 노출된다. 이로인해 다시 잇속 모세혈관이 약해지면 다시 풍치가 발생하고 악순환은 그렇게 돌고 된다.

양치질뿐만 아니라 '녹차'도 마찬가지다. 녹차는 단순히 마셨을 때만 효과를 내는 것은 아니다. 녹차는 입냄새와 충치 예방을 도와준다. 녹차의 카테킨 성분은 체내에 불필요한 노폐물과 중성지방을 소변으로 내보내 준다. 녹차는 이뇨작용을 일으킨다. 소변을 자주보게 된다. 이뇨작용은 어떤 면에서 좋지 못할 수도 있지만 몸속에 노폐물이 빠져나가는데 큰 도움을 준다. 그 밖에 녹차는 간 해독작용을 도와주기 때문에 앞서 말한 '간 기능 향상'에도 도움을 준다. 이로인해 피부가 밝아지고 다이어트에도 꽤 큰 도움이 된다. 같은 양을 먹고도 누군가는 체질적으로 더 많은 살이 찌고, 누군가는 살이 찌지 않기도 한다. 그것이 단순히 '양'의 차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얼마나 많은 칼로리를 섭취했느냐의 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몸속에서 어떻게 분해되고 사용되며 저장되느냐다. 자동차의 예를 들면 알 수 있다. 같은 자동차도 같은 양의 기름으로 갈 수 있는 연비는 다르다. 어떤 자동차는 기름을 많이 먹기도하고 어떤 자동차는 기름을 적게 먹기도 한다. 어떤 자동차는 이동하지 않아도 그저 현상을 유지하기만 해도 기름을 많이 먹기도 하고 어떤 자동차는 기름을 적게 먹기도 한다. 그것은 기름을 얼마나 넣느냐가 아니라 에어컨 작동이나 차체무게, 엔진 효율 등 다양한 부분의 메커니즘적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헬스장에 운동을 하러 가면 그 목적에 따라 다르겠지만 퍼스널트레이너(PT)는 체중조절을 목적으로 온 사람들에게 '스쿼트'라는 운동을 시킨다. 뿐만아니라 하체 위주의 운동을 자주 시키는데 이유가 있다. 하체는 우리 신체의 70%에 해당하는 근육이 몰려 있는 곳이다. 여성의 경우 다리가 두꺼워질까봐 하체운동을 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같은 무게대비 지방과 근육은 3배 정도 차이가 난다. 즉 같은 부피의 근육은 지방보다 3배 무겁다. 그 말은 몸무게가 많이 나가지만 훨씬 날씬해 보이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무게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보기 좋은 몸을 만들기 위해서 펄스널트레이너들은 하체 운동을 많이 시킴으로써 근육량을 늘리고 건강하고 보기 좋은 몸매로 만든다. 지방은 그것을 유지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지만 근육은 그것을 유지하는데 꽤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는 편이다. 고로 근육이 많은 사람은 그 근육을 유지하는 것 만으로도 꽤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기 때문에 살이 덜 찌는 체질로 변화한다. 대체로 살을 빼러 간 이들은 런닝머신이나 실내 자전거를 오래타는 경향이 있는데 유산소 운동은 즉각적으로 몸에 산소를 공급함으로써 지방을 연소하는 효과가 있지만 그것은 운동하는 동안에만 벌어지는 효과다. 고로 산소를 사용하지 않고도 꾸준하게 살이 빠지기 위해서는 그것이 운동하지 않는 동안에도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정량의 근육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므로 운동은 유산소 운동과 무산소 운동을 병행하는게 좋다.

많은 나이는 확실히 아니지만 서른이 넘어가면서 분명 체질의 변화가 생긴 것은 분명하다. 뱃살이 많이 나오고 쉽게 피곤해진다. 잠이 잘 오지 않아 뒤척이는 경우가 많고 일과가 끝난 뒤에는 피부 발진이나 비염 등으로 고생하기도 한다. 이것은 대체로 면역력 부족인 경우가 많다. 소화되지 않은 많은 에너지를 잠자리까지 갖고 가게 될 경우 깊은 수면에 방해가 된다. 수면에 방해가 되면 수면의 질이 좋지 못하여 면역력이 약화된다. 고로 자기 전에는 꽤 들어온 에너지를 소화시켜 두고 자는 것이 좋다. 물론 바쁜 일상에서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꾸준함이다.

'구리하라 다케시'라는 일본 의과 대학교수는 체질 개선을 위해 녹차, 다크초콜릿, 적절한 운동, 양치질 등을 꼽았다. 그것은 작고 사소하지만 분명 중요하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도 있고 알지 못했던 내용도 분명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며 그리고 꾸준히 유지하는 것이 아닐까.

나 또한 책을 통해 배운 내용을 토대로 다시 체질 개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데일 카네기 인간관계론 - 전2권 - 한글 번역본 출간 75주년 기념 1948년도 초판본 + 다이제스트판(해제본)
데일 카네기 지음, 크레센도 번역 그룹 옮김 / 라이스메이커 / 2023년 5월
평점 :
품절


사람은 모두 이기적이다. 그것을 부정하려고해도 어쩔 수 없다. 경제체제 경쟁에서 '자본주의'는 승리했다. 이 자본주의는 인간의 이기심을 근간에 두고 있다. 그것이 다른 체제보다 우월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가 이기심이 있다는 생물학적 근거를 뿌리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순자의 성악설처럼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최우선한다. 이 본능이 야만 수준에서 머물 때, 문명은 정체하지만, 그것을 잘 다루면 국가 전체에 부가 쌓이는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애덤 스미스에서 케인즈로 이어지는 수정 자본주의는 이를 법제화하고 규제화하여 체계를 정리했다. 적당한 개입과 적당한 자유를 통해 이기심이라는 본능을 발전의 원동력을 삼은 것이다. 자본주의의 승리는 국부를 높이는 것으로 사용될 수 있다. 바로 '관계'다.

매슬로우의 인간 욕구 5단계의 상위에는 자아실현의 욕구와 존경 욕구가 있다. 인간의 욕구 중 상위에 있는 두 욕구는 생리학적 욕구나 안전욕구처럼 모두가 희망한다. 다시 말하자면 모두가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고 싶어한다. 이것은 본능이다. 모든 사람들은 듣기보다 말하기를 좋아하고 상대에게 존중받고 싶어한다. 그것은 수면욕이나 식욕과 같이 본능이다. 욕구 피라미드 하위에 있는 하위욕구는 '결핍욕구'다. 다만 그것이 충족된 이들에게는 그 욕구보다 더 큰 보상을 주어야 한다. '성장욕구'다. 그것은 상위 욕구다. 결핍욕구로 상대를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은 어린이나 동물정도다. 다만 모두가 이 결핍 욕구를 당연히 해결한 문명 사회의 성인의 경우, '성장욕구'가 원동력이 된다. 본능을 잠시 살펴봤다면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활용되는지 알아볼 수 있다.

몇가지 원칙은 이렇다. 내 본능과 욕구가 원하는 것을 상대가 하게끔 해라.

그렇다. 내 본능과 욕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상대에게 잠시 물려주는 것이다. 이것은 간단하다. 누구나 타인에게 말을 하고 싶다. 그렇다면 말하고 싶은 욕구를 참고 잠시 귀를 기울인다.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비난하거나 불평하면 안된다. 이유는 이렇다. 그것은 성장욕구 중 존경욕구에 크게 상처를 입히는 행위다. 모든 사람은 인정받고 존경 받기를 원한다. 모두가 하고 싶어하는 것을 반대로 내어 줄 때, 희소성은 수요 공급에 의해 발생한다. 애덤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은 국부론에서 딱 한번만 등장하지만 자본주의 전체를 꿰뚫었다. 가치는 공급대비 수요가 많을 때 높아진다. 모두가 원하는 것을 손에 쥐고 있으면 그 가치는 점차 올라간다. 놀랍게도 그것은 본능이다. 본능을 자제하는 것은 문명의 핵심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상대보다 낮추고 상대에게 더 많은 것을 줄수록 더 많은 것을 갖게 된다. 인간관계론의 핵심은 고로 '이기심'과 '이타심'이다. 그러나 그 이타심 또한 결론적으로 이기심이다. 같은 이기심이지만 더 큰 숲을 바라본 이기심이 결국은 더 많은 것을 얻어간다.

상대에게 더 좋은 것을 준다는 것은 어쩌면 굉장히 어려운 일처럼 느껴진다. 내가 가진 것을 상대에게 주는 것에 대해 손해를 보고 있다고 느낄 지도 모른다.

20대 초반, 뉴질랜드 휘테커스 초콜렛을 좋아했다. 흔히 벽돌 초콜렛이라고 부르는 그 초콜렛은 정말 달고 맛있었다. 나의 가방에는 언제나 초콜렛이 있었다. 오죽하면 나를 처음 만난 이가 나에게 초콜렛 냄새가 난다고 할 정도였다. 그 초콜렛을 값도 꽤 나갔다. 당시 뉴질랜드 달러로 7불정도 했다. 어느날,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그 초콜렛을 먹으라고 주었다. 그러나 그는 몇 일이 지나도 그 초콜렛을 먹지 않았다. 이후 왜 그것을 먹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상대를 위한다는 것은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내주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소중하게 여길만한 것을 내주는 것이다. 키우고 있는 율마나무에게 가장 아끼던 수 백만원 짜리 위스키를 비워 준다고 한들. 율마나무에게 그것은 쓸모가 없다. 위스키를 받은 율마나무는 어쩌면 얼마 뒤 시들어버릴 것이다. 사람은 각자 취향이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이 꼭 나에게 소중하라는 법은 없다. 누군가는 호랑이는 고기를 좋아하지만 코끼리는 풀을 좋아한다. 취향은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상대가 원하는 것 중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을 잘 선택해여 주면 된다.

사람을 상대할 때 다른 원칙도 있다. 결코 거짓으로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짓으로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내가 거짓으로 나를 상대하는 이를 좋아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이타적인 것은 타인에게 이로움을 주는 일이다. 타인에게 이로움을 주기 위해선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된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에 흥미를 가져주는 이에게 호감을 느낀다. 타인의 이야기에 반응해주고 웃어주고 흥미가 있다는 듯 말해주는 것도 꽤 좋은 방법이다. 그것은 자신을 잘 알 때, 그리고 상대를 잘 알 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즉 이기심이라고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자신을 위해 본 적 없는 이는 상대가 무엇을 좋아할지 알 수 없다. 고로 이기적인 이타심이 필요하다. 이것은 이타적인 이기심 보다 낫다. 지피지기면 백전 백승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비록 '적'에게 사용하는 말이지만 '친구'를 얻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잘 알고 상대를 하는 것이다. 인간관계는 무엇보다 스스로도 속이지 말고 그것을 상대도 원할 것이라는 기본적인 확신 그리고 원하는 것에 취향이 다를 수 있다는 포용력만 있으면 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