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나더 경제사 1 - 자본주의 어나더 경제사 1
홍기빈 지음 / 시월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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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아토스라는 인물이 여관방에서 노름판을 벌인다. 아토스는 있는 돈을 모두 날린다. 돈이 떨어진 아토스는 이때 데리고 있던 하인을 걸고자 했다. 노름판의 판 돈에 비해 하인의 가치가 더 높자, 아토스는 하인의 소유권을 다섯 개로 쪼개는 소유권을 분할을 제안한다.

다른 이야기가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견된 최초의 기록 문자는 '회계 장부'다. 수메르인들은 기원 전 4,000년에서 2,000년 경 사이에 점토판에 문자를 기록한다. 내용은 대체로 경제 혹은 거래 관련 내용이다. 빛과 상관에 대한 이야기, 무역과 교역에 대한 이야기, 노동과 임금에 대한 이야기 등이 적혀 있다. 농업 혁명이 일어나고 최초의 문명은 농경 사회였다. 이후 사회는 고민한 적 없는 문제에 직면한다. '농경'은 채집과 수렵처럼 즉각적인 보상이 이뤄지지 않는다. 동물을 사냥하고 열매를 채집하면 보상은 즉각적이다. 그 자리에서 식량을 나누고 분배하면 그만이다. 반면 농업은 그렇지 않다. 오늘 내일 노동력을 투입해도 즉각적인 보상이 없다. 고로 식량을 미리 지급 받고 노동력으로 되갚거나, 노동력을 미리 투입하고 식량을 일시에 받아야 했다. 지급 지연은 신용이 필수적이다. 다시 말해 현대 경제의 특징이라고 말하는 '신용경제'란 비교적 최근이 아니라 꽤 오래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식량이 먼저 필요한 수메르인은 식량을 먼저 지급 받고 내용을 점토판 위에 기록했다. 이후 그 가치만큼 노동력으로 되갚았다. 누군가는 노동력 투입 내역을 기록해 두었다가 수확 시기에 더 많은 식량을 배급 받았다. 다시 말하면 고대인들은 단순한 물물교환이 아니라, '복식부기'를 통해 차변과 대변에 들어갈 내용과 금액을 분개하여 기록한 것이다. 장부상으로 부채나 자본 증가, 이익 등이 기록되면 사람들은 실재하는 물물이 아니라, '미래의 보상'에 대한 권리를 주고 받을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철수와 영희가 있다고 해보자. 철수와 영희는 매년 열 한 개의 사과가 열리는 사과 나무 씨앗을 심기로 한다. 이후 씨앗이 자라서 사과가 열리면 그것을 나누기로 한다. 철수는 영희보다 일을 귀찮아 한다. 고로 철수는 1년 간 30일을 일하고 영희는 300일을 일한다. 이때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 한 개가 열린다면 몫을 어떻게 나눠야 할까. 노동력 대비 보상이 합리적이다. 이 둘의 노동력 투입비는 1대 10이다. 고로 철수는 사과 하나를, 영희는 사과 열 개를 가져 간다. 이런 규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장부'다. 장부를 얼마나 신용할 수 있는가. 그것을 권력이 보장한다면 그것을 신용할 수 있지 않을까.

이번에는 다른 상황을 이야기 해보자. 1년이 되어갈 때 쯤, 사과를 하나만 받게 될 철수는 사과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고로 영희로부터 네 개의 사과를 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희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한다. 사과 열 한 개는 혼자서 다 먹을 수도 없다. 다먹지 못한다면 썩는다. 영희는 철수에게 사과 네 개를 빌려주겠다고 말한다. 다만 다음해에 수확한다면 사과를 다섯 개로 갚을 것을 요구한다. 영희는 철수가 열심히 일하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됐다. 고로 그의 상환능력에 의심을 갖는다. 그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리스크의 가치로 사과 하나를 더 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실제 사과나 화폐가 오고가지 않으면서 영희와 철수는 신용거래를 한다. 신용거래에서 위험 부담에 대한 가치가 이자가 된다. 이 또한 장부에 기록된다.

자본주의는 여기서 특이점이 발생한다. 영희는 사과 네 개를 빌려주고 사과 다섯개를 요구한다. 그러나 위험의 가치로 요구한 사과 한 개는 실재하지 않는다. 매년 열 한 개가 열리는 사과에서는 2년 간 스물 두 개의 사과가 열린다. 다음해에도 철수와 영희는 사과를 똑같이 분배한다. 그러나 철수는 존재하지 않는 사과 하나를 갚을 방법이 없다. 고로 사과 하나에 대한 미수가 발생할 여지가 더 커진다. 철수는 방법을 고민한다. 그러다 옆 마을에 사는 길동을 찾는다. 그리곤 함께 사과 나무를 기르자고 제안한다. 먼저 사과 두 개를 줄테니 수확 후에 셋으로 갚으라는 것이다. 길동은 일단 이 조건을 받아드린다. 일하지 않았음에도 사과 두 개가 생겼고 이후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열리면 갚으면 된다는 논리다. 이렇게 길동은 일하지 않고 사과 두 개를 얻었다. 자본주의의 꽃은 주식이라지만 열매는 '인플레이션'이다. 자본주의는 결코 후퇴하지 않고 반드시 성장을 기본값으로 가진다. 자본주의는 성장하지 않으면 무너진다. 바로 존재하지 않는 '사과'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사과를 빌린 이들은 받은 사과를 통해 새로운 수입원을 만들어야 한다. 사업이 확장되면 인플레이션은 아래로 내려가며 확장된다. 중앙은행이 일반은행으로 돈을 빌려주고, 일반은행이 기업에 돈을 빌려주고 기업은 성장을 담보로 주주를 찾는다. 다시 이들은 시장에 흩어진 사과를 모아다가 중앙은행으로 보낸다. 즉, 전세계인을 상대로 한 다단계, 피라미드와 닮았다. 유럽에서 시작한 자본주의는 아시아와 유럽으로 시장을 넓혔다. 이후 시장 점유에 대한 다툼으로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홍기빈 작가의 어나더 경제사는 경제를 설명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 종교, 사상, 철학, 역사의 이야기를 빌린다. 어떤 생물이 진화하는 과정이 일방향이 아닐 수 있다는 점. 물물교환에서 점차 신용거래로 금융의 형태가 변해갔다는 환상이 거짓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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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 스타터 - 느림보들이 어떻게 전문직이 될 수 있었을까?
강준 외 지음 / 박영스토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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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와 거북이'에서 거북이가 승리한 것은 더 빠르기 때문이 아니다. 상대가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토끼는 상대가 거북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거북이는 상대가 토끼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이 토끼를 게으르게 하고 거북이를 부지런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성패를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불리함을 아는 이들은 상대적으로 더 빠르게 성취한다. 반어적이지만 느리게 출발하면 더 빠르게 도달한다. 마감날짜가 가까울수록 엄청난 집중력은 발휘된다. 시험일이 다가오면 공부량은 더 많아진다. 자신이 늦었다는 조급함은 채찍이 되어 게으른 엉덩이를 내려 칠 것이다.

시련과 역경은 성장을 돕는다. 장애를 마주칠 때마다 숨겨진 약점은 불쑥 나온다. 꽁꽁 숨겨진 약점은 장애를 만나야만 확인할 수 있다. 약점을 확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시련을 만드는 것도 방법이다. 이긴 전쟁에서는 이긴 원인에서 배우고 진 전쟁에서는 진 원인에서 배운다. 승리한 이는 자신이 토끼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진 이는 자신이 거북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장작 위에 누워서 쓸개의 쓴 맛을 보며 패배를 곱씹는다. '자이가르닉 효과'가 있다. 마치지 못한 일일 수록 마음속에서 더 오래 지속되는 것이다. 미완성은 마음속 어딘가에서 불편함과 긴장감을 주며 잊지 않도록 해준다. 꿈과 미래를 위해 나아가라는 말보다는 와신상담(臥薪嘗膽), 결초보은(結草報恩), 각골난망(刻骨難忘), 권토중래(捲土重來)처럼 복수든, 은혜든, 실패든, 미완으로 덜 마무리 되면, 사람은 반드시 마무리 짓겠다는 의지를 '자이가르닉 효과'를 엎고 활활 태운다. 그것은 성장으로 나아간다. 실패의 원인과 성공의 원인에 대한 데이터를 쌓지 못한 얼치기 성공은 반드시 사상누각(沙上樓閣)이 되어 반드시 무너진다.

한나라 시절 위대한 철학가 한비자에는 우연히 토끼 한마리를 발견한 농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농부는 우연히 토끼가 달려가다가 밭 가운데 있는 그루터기에 부딪혀 목이 꺾여 죽는 관경을 본다. 그 뒤로 농부는 밭은 갈지 않고 그루터기나 지키고 앉아 다른 토끼가 또 달려와 죽기를 기다리며 세간의 웃음거리가 된다. 얼치기 성공이 보기 좋은 떡이 되고 때로는 저주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대한 목표를 가진 이들은 때때로 하찮은 것을 하찮게 본다. 자신의 꿈이 워낙 위대하고 화려하기에 하찮은 것을 가볍게 여긴다. 많은 책과 사람을 만나며 바라 본 결과,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위대함은 지루함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위대함을 꿈꾸는 이들은 스펙타클한 무언가를 희망한다. 매일이 새롭고 가슴 뛰는 사건이 벌어지기를 고대한다. 다만 바라보건데, 위대함은 지루하고 반복적이고 시시한 것에서 나온다. 겉보기에 유유히 떠다니는 백조의 자태는 우아함을 상징하지만, 그 아래에서는 수십, 수백 번의 발길질을 하고 있다.

빌게이츠는 말했다.

"공부벌레들에게 잘해두세요. 나중에 그 사람 밑에서 일하게 될수도 있습니다."

영화 '더킹'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권력을 가지고 폼나게 살고 싶던 주인공은 학창시절, 학교 안에서의 힘이 주는 권력의 한계를 본다. 영화의 설정은 주인공이 뒤늦게 공부를 시작하여 '검사'가 되면서 시작한다. 세계의 정치, 경제를 움직이는 이들의 학창시절은 역시 시시하고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의 결과물이다. 가만히 앉아서 공부나 하던 이들은 역동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곤 한다.

후발 주자가 역전하는 이유는 상대가 토끼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꽤많고 빠르고 능력있는 경쟁자를 곁에 둔 긴장감은 반드시 집중력과 목표의식을 불타게 한다. 더 젊고 능력있는 이들 사이에서 뒤늦게 시작한 이들의 이야기는 책' 슬로우 스타터'를 보면 나온다. '슬로우 스타터'에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후발주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당연히 시작부터 우수했던 이가 독보적으로 치고 나가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야기는 느리지만 목적에 도달한 이들의 이야기다. 목적에 도달하는 방식은 역시 '공부'다.

사람마다 공부법은 있다. 개중 '샷건 공부법'이라는 내용이 있다. '샷건'은 탄약이 산발적으로 퍼져 나가는 무기다. 흔히 산탄총이라고 부른다. 정확도는 적지만 넓게 방사형으로 퍼져 나가며 '아무데나 맞아라'라는 식으로 발사된다. 같은 이유로 전쟁보다는 사냥에서 사용되는 총이다. 이 공부법은 집중적으로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폭넓게 반복하는 방식이다. 이 이야기에 공감한다. 이는 내가 해외에서 마케팅, 경영 공부를 할 때 했던 방식이기도 하다.

단순히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흰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 넣는다는 느낌으로 책을 들여다 보는 것이다. 그림을 그릴 때, 한 번의 붓칠로 완성되지 않는다. 수 백 수 천 번을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색을 입히고 덧칠하고 덧칠하며 그림은 완성된다. 폭넓게 수차례 덧칠하는 과정이 반복되면 드디어 그림은 완성된다. 빠르게 목적지에 도달하고 싶은 이들은 과정을 생략하는 극단적인 방식을 선호한다. 그 방법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슬로우 스타터들이 더 빠르게 도달하는 것을 보자면 생략해야 하는 것은 '단순 반복'이라는 지루함이 아니라, 쉽게 도달해야겠다는 '욕심'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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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출근길
법륜스님 지음 / 김영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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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플라스는 말했다.

"모든 원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안다면, 다양한 운동법칙을 활용하여 그것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알 수 있다."

내년 이맘때쯤 지구는 태양 둘레 어느 부분에 있을까. 꼭 미래를 가보지 않아도 우리는 알 수 있다. 속도와 방향을 알면 말이다. 속도와 방향을 알면 가속도를 알 수 있다. 가속도를 알면 시간과 속도 그래프를 작성할 수 있다. 이로써 속력과 이동거리를 구할 수 있게 된다. 갑자기 웬 물리학인가 싶지만 어쨌건 원인과 결과는 연결성이 있다는 의미다. 인과관계를 따라가다보면 물리학이 아니더라도 미래와 과거는 들여다 볼 수 있다. 무조건 맞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략적인 모습은 알 수는 있다. 사람도 그렇다. 사람도 방향과 속도처럼 시작이 되는 인자를 찾으면 과거와 현재, 미래를 파악할 수 있다. 집안, 학력, 말투, 행동. 다양한 것을 살펴보면 그 사람을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런 법칙을 불가에서는 '과보'라고 한다. 진행방향과 운동량은 다음을 예측하게 한다. '과'를 통해 '보'를 보는 방법이다. 과거에 쌓아놓은 '과'가 '보'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은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한다. 사람도 우주의 법칙에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지금을 보고 과거를 알 수 있다. 또한 미래도 알 수 있다.

과거는 어떻게 현재가 되는가. 현재는 어떻게 미래가 되는가.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예를 들어보자. 병원에서 진료하는 유능한 의사가 있다고 해보자.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대략적으로 그의 학창시절에 유추해 볼 수 있다. 아프리카에서 염소를 치는 학창시절은 갖지 않을 것이다. 우연히 능력있는 가수를 만났다고 해보자.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의 과거를 유추해 볼 수 있다. 그에게는 어떤 과거가 있나. 물리학이 현재를 통해 과거를 추론하듯 추론할 수 있다. 적어도 음악을 경멸하는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능한 의사는 학업에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을 것고 능력있는 가수 또한 적잖은 연습과 감성을 키웠을 것이다.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대략적인 파악은 가능하다. 원인을 따라가보면 반드시 거기에는 출발점이 존재한다. 뉴턴의 '운동법칙'에 따르면 무언가를 바꾸려면 거기에는 반드시 저항이 생긴다. 진행 방향을 바꾸거나 속도를 바꾸기 위해서 그에 상응하는 에너지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냥 그렇게 된다는 것은 없다. 움직이는 물체를 멈추게 하려면 반드시 힘을 가해야 한다. 이처럼 습관이나 현상을 바꾸려면 반드시 저항을 맞이 한다. 매일 9시에 일어나던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갑자기 7시에 일어나겠다고 다짐하면 그것은 가능할까. 가능하다. 다만 바로는 아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저항이 생긴다. 뉴턴의 법칙에는 관성의 법칙이 있다. 외부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물체는 일정한 속도로와 방향으로 움직인다. 사람이 식습관을 고치기 어려워 살이 빠지지 못하거나 글을 보는 습관이 글들여지지 않아 학업성적이 좋지 못한 것 처럼 말이다. 지속된 습관은 현재의 나를 만들고 미래의 나도 결정한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스스로 결심해도 언제나 저항이 생긴다. 현재의 모습은 과거의 내가 진행시킨 방향이다. 그것은 저항을 주지 않으면 언제든 같은 방향과 속도로 움직인다. 다만 거기에 저항을 주거나 다른 에너지를 준다면 그것은 언제든 변화한다. 현재의 직업, 능력, 소득은 고로 과거의 내가 지은 '과'에대한 '보'다. 지은 인연에 대한 과보는 벗어날 수가 없다. 이는 현재의 나를 보고 과거의 나를 반성하고 후회만 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미래의 나 또한 현재의 나로 인해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거기에는 적잖은 에너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저 그렇게 되도록 두는 것은 진행방향을 바꾸지 않으며 다른 곳에 도달하겠다는 욕심이다. 그것이 욕심이다. 이것은 인간관계에서도 적용된다. 누군가의 작은 습관을 고치는 것은 어떤가. 우리 스스로도 작은 저항에 이기지 못하여 진행 방향을 지속한다. 반면 때로 우리는 타인의 작은 습관을 고치려 한다. 모든 원자가 각자마다 진행방향과 속도가 다르듯, 우리 인간도 각자 다른 삶의 방향과 시선을 갖고 산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우리는 사소한 문제를 문제 삼는다. 누군가의 작은 습관을 고치려다가 큰 싸움으로 번지곤 한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그들 또한 아주 오랫동안 지속해왔던 관성대로 살아갈 뿐이다. 그 관성을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지금 당장 자신을 보면 알 수 있다. 자신과 맞지 않는 이를 바꾸려는 것은 고로 큰 욕심이다.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 뿐이다. 타인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자신을 살펴보자. 바뀌지 않는 타인을 바라보며 다시 자신을 바라보자. 타인을 불편하게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조차 바꾸지 못하면서 타인이 바뀌기를 바라는 것은 얼마나 모순되는 일인가. 고로 자신이 오직 바꿀 수 있는 것은 자신 뿐이다. 시선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관성을 갖는다. 관성은 진행방향을 지속한다. 어떤 시선을 가지고 살고 있느냐는 결국 운동 방향이다.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밝은 방향? 혹은 어두운 방향? 방향과 속도를 알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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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 말 - 작고 - 외롭고 - 빛나는
박애희 지음 / 열림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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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하나 마디를 한 치(寸)라고 한다. 한 치(寸)는 3cm 정도되는 길이인데 다른 음으로 '촌(寸)'이라고 한다. 단위에서 가장 짧은 단위에 속하기 때문에 '한 치(寸) 앞도 모른다', 혹은 '세 치(寸) 혀가 사람 잡는다' 등의 속담으로 사용된다. 얼마나 가까운지를 말하는 '치(寸)'가 곧 '촌(寸)'이니 1촌(寸)을 뜻하는 부모 자식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운지 알 수 있다. 인간관계에서 부모 자식만큼 가까운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

혀 끝도 세 치나 밖으로 나가 있으니, 한 치라면 내 몸보다 가깝다. 비유적인 표현이겠지만 그만큼 가까운 존재인 것만은 틀림없다. 요즘은 아이를 잘 낳지 않는 추세지만 보통 아이를 낳는다면 서른쯤 아이를 갖는다. 그 정도부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나라는 하나 자아로 살아가는 듯 하지만 아니다. 어린 시기의 나와 현재의 나는 전혀 다르다. 개구진 아이가 조용해지거나 조용한 아이가 야무진 아이로 바뀌기도 한다. 외형만큼이나 내형도 바뀌는 것이 사람인지라 개구리가 올챙이적 생각 못하는 과거를 잊는 일에는 인간도 다르지 않다. 아이를 키우면 과거의 내가 떠오른다. 마치 시험 문제에서 틀린 오답노트를 들춰보는 것 같다. 잊어버린 기억이 새록 새록 떠오른다. 어느 날 편의점에서 아이가 불량식품 하나를 골랐다. 성인이 되고 결코 사먹어 본적 없던 불량식품이었다. 사실 성인이 된 뒤에 그 존재를 잊고 지냈다. 항상 들리는 편의점인데 나에게는 그 불량식품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가 그것을 가져오니 그것이 다시금 상기하게 했다. 어린 시절 나는 그 불량식품을 좋아했다. 아이가 아니라면 잊혀졌던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오르면서 바쁘게 지나 온 과거를 그제서야 떠올리게 됐다.

부모는 자신이 결핍했던 부분을 아이에게 투영한다. 때로는 그것이 아이에게 부담이기도 한다. 이런 욕심은 아이가 부모의 과거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확실히 아이를 보면 과거의 내가 보인다. 아이에게 나무라거나 혼내키는 것은 어찌보면 과거로 돌아가 과거의 나에게 상처를 남기는 행위와 같다. 아이와 나의 관계가 한 치 밖에 되지 않으니, 나에게 묻은 똥이 같이 묻고, 나에게 묻은 겨가 같이 묻었을 뿐이다. 한 번은 출강을 나가서 아이에 대한 이야기 중 큰 후회를 하는 분을 뵌 적 있다. '교육'에 관한 내용이었다. 좌우 반전되어 있는 아이의 글과 그림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이의 그림은 종종 좌우 반전된 혹은 위와 아래가 반전된 경우가 있다. 다만 그것은 교육으로 바로 잡을 수 없다. 키가 다 자라지 못하고 몸무게가 늘어나지 않은 것 처럼 아이는 미성숙한 상태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아이의 뇌 또한 완전히 자란 상태는 아니다. 아이의 뇌가 성숙하지 못한 것은 단순히 신체의 미숙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는 인지능 능력이 성인처럼 완전하지 못하다. 고로 뒤집어 있는 컵과 바로 서 있는 컵을 바라보고는 구별하지 못한다. 우리와 똑같은 것을 보고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받아들이는 세상이 완전히 다르다. 교육을 하겠다고 아이의 잘못을 지적한다면 아이는 몹시 당황해 한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구별할 수 없는 무언가를 보고 잘못했다고 지적 받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이의 인지능력을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부모의 공감능력을 문제 삼아야 한다. 영화 '사도'를 보면 공감 능력이 부족한 아버지와 그것을 못견뎌 하는 아들 사이의 갈등이 나온다. 이 갈등이 현대 우리 사회에서도 비슷하게 있다.

언제부터인가 아이돌의 숫자는 늘어나더니 TV를 켜면 비슷하게 생긴 이들이 늘어났다. 마치 안면인식 장애가 생긴 것처럼 '누가 누구던가' 하는 시기가 나에게 온 것이다. 어린 학생들은 이런 나를 보며 '어른'으로 생각할 것이다. 결국 아이라서 미성숙한 부분도 있지만 어른이라서 미성숙한 부분도 존재하는 것이다. 노화의 기준은 성장 이후부터라고 한다. 성장은 절정으로 치솟아 오르는 과정이고 노화는 절장에서 내려가는 과정이다. 이 두 과정에는 비슷한 '미숙'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결국 아이의 미숙에 답답해 하는 모습은 이제 닥칠 자신의 미숙을 받아드리는 자세와 다르지 않다. 한 번은 아이와 미로찾기책을 하고 있었다. 아이는 연필을 꽉 붙잡고 미로를 따라 줄을 긋고 있었다. 아이는 뻔하게 막혀 있는 미로의 끝까지 갔다. 벽에 부딪친 뒤에야 아이는 돌아나왔다. 아이에게 물었다.

"막혀 있는데 왜 끝까지 가?"

아이는 말했다.

"그게 나는 보이지가 않아. 그러니까 일단 가보는거야. 아빠는 답답해도 기다려줘."

그냥 봐도 막힌 벽인데 아이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예전 내 모습이 떠올랐다.

'제가 아직 영어가 완전하지 못해요'

이렇게 말하고 다니던 유학시절이 떠올랐다. 아이는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상대에게 인지 시켰다.

''그렇구나. 아이가 부족한 것을 보느라 내가 부족한 것을 보지 못했구나.' 아이에게 배웠다.

막 성인이 되어 성장이 완전하다고 착각하는 시기에 아이는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아이의 말은 아이의 입에서 나왔기에 무심코 놓칠 뿐이다. 때로 아이는 어른 보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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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EOUT 유럽예술문화 - 지식 바리스타 하광용의 인문학 에스프레소 TAKEOUT 시리즈
하광용 지음 / 파람북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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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재주가 열 두 가지면 굶어 죽는다."

시대가 달라졌다. 다방면에 박학다식한 이들이 살아 남는다. 과거에는 다양한 재능과 지식이 있는 사람은 굶어 죽는다고 했다. 알맹이 없고 앞가림을 못하는 사람으로 여겼다. 지금은 아니다. 판단하는 잣대가 과거에 한 가지 였다면 지금은 다양하다는 의미다. 폭넓은 지식이 새로운 생각을 융합하고 다양한 사람을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이 현대에 와서 굉장한 무기라는 것은 사람들은 안다.

교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그런 것을 의미한다. 교양이란 여러 분야에 일정 수준의 지식과 상식을 갖고 있는 것을 말한다. 특히 음악, 미술, 문학, 역사 등이 그렇다. 이런 교양은 상황과 사람에 대한 이해력을 높여준다. 우리나라 대학에서 전공을 배우기에 앞서 '교양'을 배운다. 대학교 첫 해에 교양을 배움으로써 다른 분야를 전공으로 선택한 사람들과 섞인다. 전공에 앞서 교양을 배우는 이유는 역시 교양의 중요성 때문이다. '음악'이라던지, '미술'이라던지, '기술'이라는 과정들은 초등학교 시절 중요하게 다뤄지다가, 점차 수업 일수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지식이 교양이라는 것을 우리 사회는 이미 알고 있다.

교양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문화는 유럽에서 왔다. 유럽은 전통적으로 귀족사회다. 이들 상류 계층은 사교계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영감을 얻고 사업과 권력을 나누고 확장시켰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기술은 '대화 능력'이다. 만난 사람과 즐겁게 대화하고 배우고 나누는 과정은 사회 생활의 필수 요소였다.

현대 우리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유럽을 배워야 한다. 유럽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이렇다. 우리의 뿌리가 동쪽에 있어도 실생활 문화는 대체로 유럽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것이 어쩌면 '잉글리쉬 호른'을 닮았다. 클래식 악기 중에 '호른'이라고 있다. 호른은 길기 늘어난 나팔이 안으로 둥글둥글하게 말려져 있는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는 악기다. 이 금관악기는 대체로 '호른'이라고 부르지만 이것의 전체 이름은 '프렌치 호른'이다. 이 호른이 프렌치 호른이라고 불린 이유는 '프랑스'의 역할이 대단히 많이 작용했을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 호른이 현대의 모양을 형성하는데 독일의 공로가 더 컸다. 현대 프렌치 호른은 1720년 독일에서 만들어진 신생악기에 속한다. 호른의 정체성은 매우 모호하다. 호른은 동물의 뼈인 혼(horn)에서 나온 말이다. 현대의 호른에 동물의 뼈는 없다. 모양과 재질이 완전히 다른 악기다. 우리도 그렇다. 우리의 뿌리가 한국이라고 하지만 대체로 현대인들은 유럽의 역사에서 더 공감력을 가질 수 있다. 굽이 높은 힐을 신거나 양복을 입는 등. 지금의 우리의 모습을 잘 알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유럽의 역사를 아는 것이 중요해졌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교묘하게 섞여 뿌리와 정체성이 모호해졌다. 그것이 호른을 닮았다. '프렌치 호른'은 그나마 납득이 가능한 수준에 있다. 놀라운 것은 '잉글리쉬 호른'이다. 일단 잉글리쉬 호른을 보면 그것을 접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것을 호른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 외형은 '호른'이 아니라 '클라리넷'을 닮았다. 더욱 재밌는 것은 '호른'은 금관악기인 것에 반해 '잉글리쉬 호른'은 목관 악기다. 더 가관인 것은 이름이다. 잉글리쉬 호른 역시 '영국'과 전혀 관련 없다. 영국은 '잉글리쉬 호른'에 어떠한 관여도 하지 않았다. 이 호른 역시 '독일'인들이 발명하여 사용한 학기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를 닮았다. 우리는 뿌리를 이야기한다. 유럽을 우리와 다른 곳으로 취급한다. 다만 우리는 5000년 간 틀었던 상투를 틀지 않는다. 피아노 베이스 음악을 듣고 면으로 된 옷을 입는다.

유럽을 이해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의 우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특히 앞서 말한대로 교양이란 사람과 사람을 융합 시키는 매우 좋은 매질이다. 과거의 사람들도 비슷한 교양을 가졌다. 가령 사서오경이나 한시를 읊고 난을 치는 노하우를 이야기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영국 작가 셰익스피어가 왜 영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은 한 작품만 남기고 방문해 보지 않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열 작품을 남겼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상대의 호기심을 더 자극할 것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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