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메의 문단속 신카이 마코토 소설 시리즈
신카이 마코토 지음, 민경욱 옮김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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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면서 감성이 변한 탓일까. 어릴 때에는 만화영화를 좋아했는데 좀처럼 보기 어렵다. 20대에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수 차례 돌려봤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그 속에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 다시 그것을 재해석 하는 재미는 같은 작품을 수십, 수백 번 보게 했다. 그러고 보니 20대 중후반에는 영화에 푹 빠져 살았다. 지금도 영화는 내 여가를 책임진다. 남들과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같은 영화를 여러번 돌려보며 나름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그런 것들에 푹 빠져 지낸 시간이 길다. 그 긴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자면, 같은 것을 여러 각도로 생각해 보려는 습관일지 모른다. 만화는 영화와 다른 부분이 있다. 쉽게 말하면 장면의 모든 부분의 의도된 연출이라는 점이다. 영화의 경우, 모든 것은 연출이 아니다. 우연하게 발생한 바람, 배우의 머리카락 흘림, 지나가는 배역 등이 복합적으로 다양한 우연을 만든다. 다만 만화는 하나 하나가 모두 작가의 의도에 배제되지 않는다. 심지어 주인공의 머릿카락 하나까지, 작가가 의도해야만 움직인다. 작가의 의도는 '영화'보다 '만화'에 더 많이 담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렇게 정형화된 의도는 때로 갑갑함을 줄 때도 있다. 해석의 주체가 '작가'가 아니라 '독자'라는 점에서 '열린 해석'은 때로 그 작품을 더욱 재밌게 하는 순기능을 한다. 언젠가 이런 만화와 영화의 장점과 단점이 서로 단점과 장점이 되어 무엇을 멀어지게 만들고 무엇을 가까워지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만화에 빠져 산 것은 얼마 전인 것 같은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이제는 이 둘에서 더 발전하여 연극처럼 직접 해석자가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는 것에 매력이 느껴진다. 존 케이지의 4'33""는 아마 가장 유명한 쉼표로만 이루어진 음악일 것이다. 이 음악은 존 케이지가 1952년에 작곡한 작품으로 연주자는 악기를 연주하지 않고 4분 33초 동안 무기력하게 앉아 있기만 한다. 이 음악에 참여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청중이다. 청중의 숨소리, 발소리 등 환경 소리를 포착하는 것에 중점이 있다. 실시간으로 과거의 것을 재연한다는 설정은 현대와 과거를 동시에 존재하게 하는 시간여행을 간접경험하게 한다. 그렇다고 연극이나 뮤지컬을 자주 보러 다니는 것은 아니다. 기껏 해봐야 아이와 함께, 혹은 간혹 기회가 됐을 때 몇 번 정도 보는 것이 전부다. 어쨌건 OTT나 극장에서 개봉하는 애니메이션 작품에 선뜻 끌리지 않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사색을 즐기던 과거의 여유가 사라진 탓도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주변에서는 '그거 봤어?'로 알게 된 작품을 만났다. 바로 서점에서다. 이미 사람들은 전부 애니메이션으로 봤다는 작품이다. 당시에는 끌리지 않아 보지 못한 작품이지만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 자꾸 노출되니, 결국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자주 방문하는 서점에서 몇 차례 같은 책을 들었다 놨다. 아무래도 한참 바쁜 시기라 무언가 하나를 보면 오래 걸리는 '독서'의 특징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러다 윌라 오디오북에서 한 작품을 알게 됐다.

소설로 접한 '스즈메의 문단속'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평은 이렇다. 갑작스러운 전개, 너무 빠른 감정 변화. 그 진도를 따라가기에 나는 오롯하게 애니메이션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표현을 애니메이션은 어떻게 구현했을까.' 하는 궁금증이다. 그만큼 소설로 이미 완전했다. 다만 처음 만난 사람과 급격하게 사랑에 빠지는 일과 그 감상에 쉽게 젖어 들어가는 것을 볼 때, 8시간의 오디오북에서도 느껴지는 당황감이 2시간 러닝 타임의 애니메이션에서는 어떨지 궁금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이런 류의 애니메이션 중에 가장 인생에 깊은 것은 '시간을 달리는 소녀'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유학 시절에 처음 접했는데 그 분위기가 좋아서 꽤 여러번 본 기억이 있다. 개인적으로 '일본' 소설을 좋아한다. 간결한 문체와 직관적인 표현이 마음에 든다. 이 소설을 처음 접하고 난 뒤부터 '신제주 북앤북스'에 들려 일본 소설 몇 편을 더 빌렸다. 예전에 한참 좋아했던 일본소설이 었는데 이런 저런 여유가 없어서 소설을 많이 보고 있진 못하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워낙 다이나믹한 상황에서 본 책이라, 정확하게 집중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사실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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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컨스피러시 옥성호의 빅퀘스천
옥성호 지음 / 파람북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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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최후의 만찬'에는 특이한 일화가 있다. 1491년 로마 교황청이 새로 지어진 수도원 벽화를 그릴 때 일이다. 로마 교황청은 이 벽화를 그릴 화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 부탁하게 된 것이 '다빈치'다. 그는 예수 님과 제자들의 만찬을 그리기 위해 그림에 들어갈 인물 모델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1492년 예수의 모습을 떠올리는 19세의 선한 청년을 찾게 된다. 이후 6년 간 이 그림에 들어가는 11명의 제자를 모두 완성한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예수를 배반한 유다의 얼굴을 찾지 못했다. 한참을 찾지 못하자 로마 시장은 다빈치에게 이런 제안을 한다.

"로마의 지하 감옥에는 사형을 기다리는 수 백의 사형수가 있으니 그곳에서 찾아보시오."

그 제안으로 다빈치는 잔혹한 사형수들을 만나게 됐다. 거기서 배반자 유다의 모습을 한 죄수를 발견하고 유다의 모델로 결정한다. 작업이 진행되고 유다의 그림 또한 완성됐다. 이어 다빈치는 죄수에게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말한다. 그때, 그는 다빈치에게 되묻는다.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다빈치는 이에 '당신과 같은 사람은 내 생애 만난 적이 없소'라고 답한다.

이때, 그 죄수는 말한다.

"저 그림 속에 6년 전, 예수 모델이 바로 나였소."

예수와 유다의 차이. 선과 악의 차이. 모든 것은 동양의 철학과도 닮았다. '도'는 모든 것의 근원이자,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뜻하는 도교의 도, 모든 것은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는 유교의 대이, 모든 존재는 상호 연결되어 있고 상호 의존적이며 '무'라는 것의 '양극형'이라는 '불교.

선은 선이고 악은 악일까. 혹은 그 모든 것이 하나의 큰 흐림일까.

마가복음 14장 3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베다니'라는 여인이 '나드'라는 향유 오일을 가져온다. '나드'는 자연에서 추출되는 식물성 오일로 매우 값비싼 향유다. 브랜드나 상품에 따라 다르지만, 지금도 아마존에서 구매하려면 1ml당 최소 7불, 많게는 수십 수백 불은 주어야 구매할 수 있다. 여인은 예수의 머리에 이 향유를 붓는다. 성경에 기록되기를 그 가치가 300 데나리온이라고 한다. 300 데나리온이면 당시 일반적인 노동자의 연봉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다. 이렇게 값비싼 나드를 예수의 머리에 붓자, 곁에 있던 누군가는 그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데 낭비한다며 몹시 화를 냈다.

"어찌하여 그 향유를 낭비하느냐?"

그때 예수는 말한다.

"가만히 두라. 어찌 그녀를 괴롭히느냐. 그녀는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주변에 있으니, 언제든 도울 수 있지만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다. 그녀는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나의 장례식을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이에 대한 해석은 다를 수 있다. 다만, 해석이 다를 수 있는 만큼 고개가 갸우뚱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여인이 예수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부은 것은 여인의 존경심과 가르침에 대한 보답일 수 있다. 그 헌신과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부분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다만 자신의 장례를 위해 사용하는 일이기에 나무라지 말라는 부분, 예수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나드를 보며 주변인이 '낭비' 혹은 '허비'라고 말하는 부분. 가난한 사람은 언제든지 도울 수 있지만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고 말하는 부분에 의아함이 생기기도 한다.

'유다'에 대한 해석도 여럿으로 볼 수 있다. '누가복음 22장 36절'에는 예수의 이런 말이 있다.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서라도 살지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가 이루어져 감이라."

이 부분은 기존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신학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 예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암시하는 부분이라고 여긴다. 이 과정에서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고 구원하는 역할을 강조한다고 본다.

기독교 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인류 구원과 관란한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하나님과의 화해와 구원을 가능케 한다. 고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없었다면 인류는 죄의 상태에서 구원 받지 못하고 영적으로 분리된 상태에서 머물게 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다. 커다란 맥락에서 볼 때, 유다가 예수를 은화 30에 배반한 것이 그 큰 흐름중 하나가 된다.

다시말하면 유다는 예수를 로마 정부에 넘겼다. 이로인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형을 받는다. 성경에서는 이를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것으로 여긴다. 다시말해 자신의 아들 예수를 희생함으로써 인류를 구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유다의 배반과 로마 정부의 결정 등의 여러 사건들은 서로 상호작용하며 신의 계획을 실현했다. 유다의 배반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필수적인 사건이라면, 유다 또한 예수와 마찬가지로 '희생'이라는 성격 다른 두 개의 모습은 아닐까. 세상에는 참 하나가 보여주는 극적인 두 모습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예수와 유다의 모델이 같은 사람이었던 것 처럼 말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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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혼자 던져졌다
다니엘 슈라이버 지음, 강명순 옮김 / 바다출판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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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문제에 해결책이 있다는 착각은 인생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만든다. 다만 인생이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지향점이 삶의 목표일 필요는 없다. 각자 자신만의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실현해 나가는 일종의 놀이와 닮았다. 스스로 목적의 본질을 지우면 모든 것은 행위만 남는다. 행위만 남은 행위는 본질이 없기에 그저 행위일 뿐이다. 쉽게 말하면 1891년 YMCA 훈련학교에서 한 교수가 복숭아 바구니에 축구공을 던져 넣는 게임을 발견하지 않았다더라면 '마이클 조던'의 재능은 그저 빨래통에 빨래를 기가 막히게 집어 넣는 사람의 능력과 하등 다르지 않게 된다. 삶이란 그렇다. 그것에 이렇다 할 철학과 명분을 집어 넣어야 그것은 본질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하면 본질의 유무는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가 그것에 이름을 부르기 전에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김춘수'의 꽃이 떠오른다. 그것에 '그것'이라는 이름을 정의하기에 '그것'은 '그것'으로 정의된다. 흘러가는 강물을 가르키며 강물에 이름을 짓는다면 그것은 정말 그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가 '한강' 혹은 '소양강'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때, 그 찰라의 순간, 그것에는 다른 것들이 채워져 있을 것이고 어느 한 순간도 같은 모양과 위치였던 적이 없다. 모든 것은 빠르게 흘러가 버리고 거기에 이름을 붙이고 나면, 대상은 사라지고 대상을 닮은 흔적에 관념만 남아, 그것은 우리의 '인식' 상에서만 존재하게 된다. 문제는 그것을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들어가는 순간부터만 '문제'다. 그것을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걷어내면 '문제'는 더이상 '문제'가 아니다. 중국 고사에는 이런 말이 있다.

'문제를 삼으면 문제가 되는데, 문제를 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앉고 살아가는 것은 고통을 수반한다. 고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실제 문제인지를 화두를 던져보면 '문제 해결'의 수준을 넘어 '문제 소멸'이 된다. 가장 완벽한 문제 해결 방법은 때로 문제 소멸이다. 그것을 누군가는 '정신승리'라 부를지도 모른다. 가령 해결할 능력이 없기에 그것을 외면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것이 '도피성' 혹은 '외면', '무능', '무책임'이라 불려질지도 모른다. 다만 다시 돌이켜봐라. 누가 가장 완벽하게 문제를 없앴나.

인생은 다양한 문제를 직면하고 그것을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능력을 키우고 다음 문제 해결을 하는 방식으로 성장한다. 다만 생각해보면 이렇다. 문제를 해결하는 이보다 때로 문제를 소멸시키는 것이 현명하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천붕지괴를 걱정하던 '기우'는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늘에 어떤 일을 해야 하고, 땅에는 어떤 일을 해야 하며, 스스로는 어떤 대비책을 가져야 하나.

그렇다. 모든 문제는 정답이 필요하지 않다. 때로 문제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경우도 많다.

과거 '조현병'을 앓고 있는 이로부터 깨달음을 얻은 적 있다. 조현병을 앓고 있던 그는 스스로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 믿음의 크기는 그 무엇보다 강렬했다. 스스로 가장 커다란 부자가 될 것이라 믿었고 그 믿음에는 확신이 있었다. '끌어당김의 법칙'이라던지, '잠재의식'이라던지, 하는 이론들을 보면 이런 조현병 환자가 꿈꾸는 세상이 세상에 펼쳐질 확률도 적잖다. 다만 그들은 스스로 자신만의 우주를 창조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되려 세상과 단절되어 고립을 선택한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 삼은 문제가 합리적인지 판단하고 그것에 해답이 필요한 경우. 그것의 해답이 가능과 불가능의 구분점을 갖고 있는지, 혹은 '난이도'의 구분점을 가지고 있는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문제를 가지고 있다. 때로 그것은 해결 가능한 영역에 있기도 하지만 해결 불가능한 영역에 있기도 하다. 가장 이상적인 연애 상대를 나의 반려자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 일도 그렇다. 그들을 원하는대로 만들 수 있다는 착각은 때로 '로맨스'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범죄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는 해결하지 못할 문제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에 쌓여 살기도 한다. 무언가에 정답이 있다는 착각에 빠져, 정답 없는 것에 정답을 짓고 그것에 삶을 맞추기도 한다.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에게 사랑에 빠져, 그 문제를 해결해 내고자 하는 열망이나 사형수가 죄를 짓고도 처벌을 피하기 위해, 그 문제를 해결해 내고자 하는 욕망, 너무나 보고 싶은 자녀를 잃은 부모가 딱 한 번만 자녀를 보고 싶다고 여기고, 그 문제를 해결해 내고자 하는 욕심.

그것에는 '문제 해결의 방법'이 아니라 '문제 소멸의 방법'이 필요하다. 모든 것에는 정답 있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문제가 문제가 아닌 경우가 그것을 소멸하는 것이 그 첫번째 단계이다. 세상에는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피할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에는 해결법이 아니라, 소멸법을 찾는 것이 문제를 더 빠르게 잊어버리게 한다. 잊혀진 문제는 더이상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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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노화 - 젊게 오래 사는 시대가 온다
세르게이 영 지음, 이진구 옮김 / 더퀘스트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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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구는 110억까지 늘 예정이다. 단, 2020년 '란셋'에서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세계 인구 성장은 앞으로 40년이면 멈춘다. 심지어 2064년에는 97억, 2100년에는 88억으로 감소한다. 세계 23개국의 인구가 절반 이상으로 줄어들 예정이며, 같은 시기 대한민국의 추정 인구가 2400만이니, '대한민국 소멸'이라는 저출산은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캐나다 사회학자 '대럴 브리커'와 언론인 '존 이빗슨'은 '텅빈 지구'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인구 폭발이 아니라 인구 소멸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인간이 장수하지 않으면 소멸하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출산률' 만큼이나 '의료', '보건', '기술'이다. 심지어 베트남이나 중국과 같은 고성장 중진국들 또한 이미 저출산 문제를 마주하고있다. 다시 말하면 출산률 저하는 세계적인 추세이다. 그 원인은 '집값상승', '과도한 교육비'가 아니라 지구적 이유다. 비슷한 예를 들어보자.

대상어, 고래상어, 팬더독, 왕도마뱀, 펭귄 등은 적은 번식률로 인해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이다. 다시 말해서 적은 번식률로 개체수가 줄어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은 '사피엔스종'이 유일하진 않다. 그렇다면 앞에 언급한 동물들의 멸종을 막기 위해 우리가 해야 일이 무엇일까. 앞서 말한 동물들의 출산률이 낮은 이유는 종마다 다르지만, 주로 서식지 파괴, 생태계 변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언급한 멸종위기 종들은 대체로 수명이 길고 번식 주기가 느리다. 서식지가 불안정하거나 먹이 부족, 동물 사회 구조와 계급에 따른 번식 제한도 한 몫 한다. 다시말해, 높은 집값이 문제가 아니라, 불안정한 집값이 문제다. 서울 아파트은 10년 간 140%나 상승했다. 쉽게 말해, 돈이 없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가격의 불안정성이다. 인간은 어제 100원하던 사탕을 오늘 140원에 주고 사먹을 만큼 우매하지 않다. 가격이 안정되기까지 구매를 보류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다. 다만 이 과정에서 주거지 불안과 빈부의 격차는 벌어진다. 동물 사회에 존재하는 계급과 사회 구조 또한 개체수를 줄이는데 한 몫 한다.

사회 구조란 무엇일가. 일부 지역에서 수컷 사자는 여러 암컷을 동시에 거느린다. 드물지만 능력있는 수컷의 독식은 사자 군집 크기를 축소 시킨다. 또한 이로인해 발생하는 유전 다양성이 감소하게 되고 환경 변화에 취약하게 된다. 자연선택설을 주장한 다윈에 따르면 종은 환경 변화에 적응해야 살아 남는다. 다시 말하면 1만 년 전, 신석기 시대에는 노래를 잘 부르는 이, 공을 차서 목표한 곳에 잘 집어 넣는 이 등 굶어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들 중 일부가 살아 남아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면 언제고 그 능력이 인정되는 시기에 살아 남게 된다. 과거 우월한 유전자만 남기고 열등한 유전자를 골라 강제 불임 수술하게 하던 '우생학'이 힘을 잃은 이유도 비슷하다. 현재의 우월인자가 차세대의 열등인자가 될 수 있고, 현재의 열등인자가 차세대 우월인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 혁명은 18세기와 19세기에 일어난다. 19세기가 되면 공립학교가 창설되고 교육을 의무화하는 국가가 늘어난다. 20세기가 되면서 세계적으로 교육의 기회가 확대된다. 이후 보편적 교육이 서구를 중심으로 확산된다. 이는 유엔의 교육 받을 권리도 한 몫했다. 모두가 일괄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노래를 잘하는 이, 축구를 잘하는 이, 미술을 잘하는 이, 구별할 것 없이 모두 같은 기준으로 교육하고 평가 받는 시대가 왔다. 이로인해 우월인자와 열등인자가 나눠지고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이에 적응하지 못하는 과거 우월인자들의 도태가 개체수 축소에 한몫한다. 대체로 동물은 유전적 다양성을 유지하기 위해 출산률을 낮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체 사회가 출산률을 낮추면 사회는 다양한 유전적 정보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그것인 '동물 사회'에 존재하는 이론이지만 인간 사회에서도 충분히 적용된다. 개체수가 줄어가는 시대는 '사피엔스종'의 문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 단위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굳이 따져 보자면 극단적인 예시를 들어 볼 수 있다. 만약 당장 오늘부터 수명이 1000살이 되는 알약이 나왔다고 해보자. 국민 전체가 그 알약을 복용했다고 해보자. 이제, 국가는 어떤 정책을 실시해야 할까. 죽지 않는 사회가 오면 국가는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다. 생산인구를 예로 들어보자. 인구 구성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인구는 16세에서 64세로 알려져 있다. 다시말하면, 국가 단위에서 필요한 것은 1세에서 15세가 아니라 그 이후 인구다. 덜 낳고 덜 죽는 사회가 더 많은 부를 축적 할 수 있다. 수명이 늘면 생산인구는 더 늘어난다. 물론 '대한민국 인구소멸'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가 하루를 멀다하고 나오는 와중에, 아이를 덜 낳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효용없는 수 조원에 해당되는 국가 세금을 어느 곳에 분배하여 사용해야 하는가의 문제다. 가파른 인구 절벽이 문제가 되기에 그 속도를 낮추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다만 더 중요한 것은 죽지 않는 시대에 대한 준비다. 인구가 꾸준하게 늘어나는 인구 인플레이션은 자본주의의 핵심이다. 자본주의는 '인플레이션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인구가 축소되는 과정에서 꾸준한 '인플레이션'은 일어나기 쉽지 않다. 가치는 '희귀' 할수록 오른다. 사람이 줄어 사람보다 돈이 많아진 시기에는 돈의 가치, 생상품의 가치, 부동산의 가치는 당연히 줄어든다. 고로 소비해도 소비되지 않는 생산품을 국가 경쟁 산업으로 전환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령, 문화 산업이나 예술 산업과 같는 무형 산업 말이다. 100명이 100개의 연필을 만들어 100명에게 전달하는 또한 판매되지 않는 재고품을 쌓아두고 가격하락을 맞이하는 사회가 아니라, 한 명의 가수, 작가, 배우가 1편의 작품을 만들어 100명에게 전달하고 재고를 남기지 않는 산업 말이다. 우리는 앞으로 재수없으면 120세 200세까지 살게 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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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자본주의 - 개정판
윤루카스 지음 / RISE(떠오름)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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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라는 단어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소비되고 있다. '자본주의'는 돈이 최고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資本主義)는 개인의 재화 소유권과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제도다.

'경제'라는 단어 또한 다른 방향으로 소비되고 있다. 경제는 '개인의 부'에 초점이 맞춘 것이 아니다. 경제는 재화, 용역을 생산, 분배, 소비하는 활동이다.

최근 '경제'라는 키워드의 소비가 늘었다. 그래서 경제학에 여럿 오해가 있다. 경제학은 기본적으로 철학의 분류다. 경제를 '돈'과 떼어 낼 수는 없지만 부의 증식이 오롯한 목적은 아니다. 애덤 스미스는 기본적으로 '도덕철학과 교수'였다. 스스로도 자신을 철학가라고 여겼다. 인간의 행동을 양식 연구하는 학문에 애덤 스미스는 '경제'를 매개체로 두었다. 그것이 국부론이다. 그게 경제학의 시초다. 고로 경제학은 경제를 매개로 한 사회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지, 개인의 부를 증식 시키기 위한 이론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경제학은 순수학문에서 원리와 이론을 기반으로 한다. 이것으로 문제 해결과 이해를 목적으로 한다. 고로 순수학문을 기반으로한 응용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학문으로써 경제학을 좋아한다. '수요 공급'이라는 명쾌한 논리적 원리를 이용하여 다양한 현상을 설명한다. 마치 '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 의 네 가지 기본 힘으로 자연세계의 물리학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물리학에서도 가장 중요한 개념은 '보존 법칙'이다. 보존법칙은 에너지, 운동량, 전하 등의 물리량이 변하지 않고 보존되는 원리를 말한다. 고전물리학 뿐만 아니라, 양자역학에서도 이런 '보존의 법칙'은 피할 길이 없다. 즉 다시말하면 등호를 두고 한쪽 변에 어떤 임의의 수를 곱하던 더하던 나누던 빼던, 다른 한변에서도 정확하게 같은 수를 연산하여 등호가 파괴되지 않도록 유지하는 것과 같다. 이런 보존의 법칙은 더 쉽게 말하면 '균형'을 닮았는데, 그것이 인간 활동에도 정확히 적용된다. 고로 경제학도 '균형'이 가장 중요하다.

가령 물이 담긴 컵에 빨대를 꽂고 음료를 마신다고 해보자. 음료를 마실 때 음료는 빨때를 타고 위로 올라간다. 다만 임의적인 힘을 빼주면 빨대 속에 있는 음료는 재빨리 컵에 음료 수위만큼 내려간다. 정확하게 균형을 맞춘다. 즉, 상황에 따라 어느정도의 시차는 발생할 수 있으나 경제는 반드시 물과 같이 자신이 갖고 있는 기본 속성을 따르고자 한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거나 균형을 찾아 안정적인 상태가 되는 것 처럼 말이다. 다시말하면 이렇다. 미국의 금리가 올라가면 대한민국에 있는 돈은 자연스럽게 미국으로 빨려 간다. 고로 대한민국의 금리가 올라가는 것은 불가피하다. 태평양에 생수를 넣는 것과 같다. 태평양에 생수를 넣으면 민물이 짜게 되는 일과 태평양이 담수화 되는 중 어떤 것의 차이가 클까. 양과 크기의 차이가 절대적일 때, 일방적으로 동화되는 일은 자연계에서도 흔한 일이다. 해외에서 '경제학'을 배울 때, 거대한 인간 사회 활동이 자연계 법칙처럼 맞아 흘러가는 것에 희열을 느꼈다. 사람은 모두 각기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가질텐데, 경제학이 만들어 놓은 논리에 집단이 무서울 정도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사회는 역시 '자연'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꼈다. 이것이 우리가 '사회'가 비정하다고 말하는 것과 닮았다. 사회가 비정하다고 말하면 어쩐지 사람들은 '인간'의 '비인간성'에 대해 꼬집는 듯 하여 자기 반성을 독촉한다. 그러나 비인간적인 것은 어쩌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간이 인간을 너무 '이상적'으로 그렸기에 '인간적' 혹은 '인간성', '도덕'이라는 이상향을 만들었지만 자연계에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불은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별하여 태우지 않고 비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별하여 내리지 않는다. 애초에 인간은 호르몬, 뇌의 신경회로망 등의 환경, 경험 등 다양한 요인과 상호작용으로 '감정'이라는 모호한 내적 반응을 갖는다. 그것은 오롯이 인간 내부에만 존재한다. 항성, 행성, 암흑에너지, 전자기력 이런 것에는 감정이 없다. 대체로 인간의 감정은 '죄책감'이나 '두려움' 등과 크게 연관이 있으며 이런 것들은 '자연 현상'과 크게 이질적이다. 고로 인간이 자연이나 '시스템'에 이질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자연을 닮았으니, '피'도 '눈물'도 없다. 자연은 연약한 영양이 사자에게 잡혀 먹히도록 그대로 두고, 아이를 않은 어미를 폼페이의 화산재 속에 묻어 버린다. 인간 또한 어미소를 도륙하여 가죽을 벗겨내 의복을 만들고 그 살갓은 불에 구어 그슬린 뒤 삼켜 버리며, 피를 응고하여 탕을 끓어먹고 빼를 우려 그 속에 칼슘과 인을 흡취한다. 고로 인간의 비인간성은 지극히 자연을 닮았으며 자연은 차갑고 인간이 뜨겁다. 고로 자본주의는 인간의 표면 일부를 추출 가공하여 '시스템화'한다. 나치의 공무원들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근시안적인 업무를 통해 유대인들을 선별하고 기차에 실고 학살했으며 미국과 유럽이 만든 아프리카 노예 삼각무역 또한 '피도 눈물도 없는 시스템'의 업적이다. 고로 개인이라면 하지 않을 일을 '법인' 혹은 '집단', '국가'가 되면 서스럼 없이 하게 되며 약육강식이 반드시 법칙이라 할 수 없어도 이를 따르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다. 다만 인간에게 고유하게 있는 '감정'은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역시 법치는 이처럼 무섭게 자연을 닮아가는, 혹은 차가워져 가는 사회의 냉각속도를 조절한다. 국가는 '법'에 '윤리'를 섞어 상호 보완하고 중복과 충돌을 찾아 수정해가며 합의점을 찾는 중재자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는 차갑지만 500년도 되지 않은 '자본주의'는 다양한 합의점을 찾으며 최초의 경제학의 탄생처럼 '인본주의'를 닮아 갈 것이다. 다만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세계 최고 부자들을 보라. 그들은 왜 돈이 아닌, 철학과 순수학문을 즐겨 했나.

스티브 잡스 철학

조지소로스 철학

빌게이츠 수학, 법학

마크주커버그 심리학, 컴퓨터 공학

일론 머스크 물리학, 경제학

마윈 경제학

이재용 사학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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