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의 우울 - 우울한 마음에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니다
이묵돌 지음 / 일요일오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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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한 수면을 취해야 한다.

밖으로 나가야 한다.

햇볕을 쐐고 규칙적인 생활 습관을 가져야 한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긍정적인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열정을 가질 수 있는 취미생활을 가져야 한다.

이 따위 것들이 어떻게 우울증 극복 방법이 될 수 있나. 표면적인 공감은 얼마나 무서운가 알 수 있다. 우울증의 극복 방법은 전문가와의 상담 및 약물 치료다.

충분한 숙면을 취하는 것은 우울증 극복 방법이 아니다. 충분한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 우울증의 증상인데, 그것을 하지 말라니 모순이다. 불규칙한 습관을 갖는 것도,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도 어떤 것에 무기력 해지는 것도 모두 우울증의 증상이다. 증상을 하지 말라는 것만큼 허무맹랑한 조언이 있을 수 있나.

고열이 나는 몸살 환자에게 '고열을 내지 마라'라고 말 할 수는 없다. 우울증을 질환으로 인식하지 않는 사회가 우리를 병들게 한다. 10대부터 30대까지 우리 사회 구성원을 가장 많이 죽이는 사망 원인 1위는 자살이다. 자살은 병이 아니다. 그러나 '우울증'의 증상 중 하나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병 들었다.

최근 뉴스를 켜면 가장 많이 도배되는 이슈는 '출산률'이다. 가임 여성 1명당 출산률이 0.7명이라는 충격적인 이야기가 매번 도배된다. 욜로족, MZ세대 특징, 카푸어, 영끌 등 젊은 이들을 비꼬는 신조어가 시시각각 나온다. 배부른 MZ 세대에 대한 빈정거림이 사회적 문화가 됐다. 기성세대는 나약한 젊은 이들의 인내력, 열정 따위가 없다고 한탄한다.

대한민국의 자살자는 언제나 1위를 해왔던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대한민국에서 자살을 가장 많이 하는 시대는 MZ 세대다. 그 이전 세대에서 '자살'은 그닥 사회적 이슈가 아니였다. 1983년 한해 동안 총 자살자는 3,471명이 고작이다. 다만 2021년 대한민국의 자살자는 1만3352명이었다. 쉽게 말하면 2021년 겨울 4개월 간 자살한 이가 1983년 총 자살자보다 많다. 이 숫자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2012년부터 2022년까지 10년 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는 13만 명이 넘는다. 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 2기에서 생긴 사망자보다 많다. 쉽게 말해, 대한민국에서는 5년마다 원자폭탄 하나가 투하되는 셈이다.

10대, 20대, 30대, 젊은 세대의 사망 원인중 자살 비율은 거의 50%다. 젊은 세대의 죽음 둘 중 하나는 자살이다. 젊은 세대의 우울증은 왜 방치되는가. 젊은 층에 저렴한 임대 주택을 제공하거나, 강력한 독신세를 부과하겠다는 출산 정책, 다자녀를 출산하면 공용주차장을 무료로 한다는 행정을 보면 젊은이의 우울에 대해 기성세대는 공감하지 못한다.

우울한 이들은 기본적으로 무기력하다. 어떤 욕구나 의욕도 사라진다. 그런 이들이 많아진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 정책은 '우울증 해결'이다. 나또한 우울증을 겪은 적 있다. 그것이 '의지'의 영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몸소 겪지 않았다면 공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울증'이란 심지어 눈앞에 바퀴벌레가 지나가도 손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은 증상이다. 방은 너저분해지고, 무기력해진다. 그것을 사회는 '게으름'이라고 부른다. 어리석게도 젊은이들도 그것을 '게으름' 혹은 '무력함', '무기력', '무능력'으로 받아들인다.

한때, 출판계에서 '반드시 해야하는 시리즈'가 유행했던 적있다. 10대에는 반드시 해야할, 혹은 20대에는 반드시 해야 할, 30대가 되면 반드시 해야 할.. 이런 시리즈가 한참을 인기를 끌다가, 이후에는 '괜찮아' 시리즈가 유행했다. 힐링이나 위로라는 감성적인 키워드가 마케팅이 되면서 젊은이들을 위로 했다. 사회 전체가 번아웃된 시점에서 아직도 '우울증'에 대한 위험성은 아무도 인지하지 못한다.

정신건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병식'이다. 스스로 그것이 병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정신건강'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요소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병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 뿐만 아니라 '사회'마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사실 자살률과 출산률을 보면, 국가에서 대대적으로 나서서 국민 정신건강을 챙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젊은 이들에게 '정신을 똑바로 차려라'고 다그치기만 한다.

병에 대한 인지와 인정은 그것에 대한 인식의 전환부터 중요하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우울증에 대해 좋지 않은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자신이 우울증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시원하게 알리고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가볍게 이야기 할 수 있는 날이 와야지 않을까.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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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생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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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의 세계에 대한 의심이 시작되는 것은 중학생 부터다. 중학생이 되면 항상 옳던 어른의 환상이 깨진다. 아이의 사회가 넓어지기 때문이다. 아이는 가족 구성원으로 사회를 처음 배운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선택한 이들을 중심으로 사회를 재편성한다. 정신분석학자 '알프레드 아들러'에 따르면 정체성은 사회적 연결로 이루어진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즉, '사회적 연결'이라는 것은 '자아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가정'은 유아기에 정체성을 형성시킨다. 다만 아이가 '학교'라는 사회를 겪으면 정체성은 완전 재편성된다. 선택할 수 없던 '환경'에서 '선택' 할 수 있는 환경으로 사회가 변화했기 때문이다. 맞춰야 하는 환경에서 '맞게 바꿀 수 있는 환경'으로의 변화는 아이의 성향에 따라 환경을 재조성한다. 이 과정에서 '가정'의 역할은 축소된다. 스스로 만든 사회적 소속감은 새로운 자아 형성에 가장 중요한 열쇠 중 하나다. 대부분의 아이는 '친구'로부터 사회를 형성하지만 그 관계망에서 학교 선생님의 역할은 몹시 중요하다.

아이의 사회가 넓어졌다는 것은 새로운 자아가 형성됐다는 의미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부가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한 당연하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기존 자아와 새로운 자아가 충돌하고 몹시 혼란스러운 시기도 겪는다. 어른의 표본이던 부모에 의구심을 갖고 어른도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과정에서 일부는 어른의 세계가 자신보다 유치하고 미성숙하다는 깨달음도 얻는다. 이 깨달음은 가끔 갈등의 씨앗이 된다. 이런 혼란기에 부모는 자녀의 변화한 모습을 마주한다. 그리고 당황한다. 어린 시절과 전혀 다른 자녀를 마주하기 때문이다. 갑자기 달라진 자녀의 태도에 여러 이유를 찾는다. 그 중 하나가, '생물학적 변화'다. 호르몬 시스템의 변화가 아이를 반항하도록 이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를 오롯이 생물학적 영향으로만 취급할수는 없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 '자아'를 바꾸는 일은 성인에게도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2개국어 이상을 구사하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언어마다 각기 다른 '자아'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 그렇다. 각각의 언어마다 다른 자아를 갖는다. 자아 형성에 '언어'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도 있지만, 자아 형성에서 중요한 것이 '환경'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람은 다른 환경에서 다른 자아를 갖는다. 다시 말해, 자리가 사람을 만들고, 의복이 태도가 달라지게 한다. '구스타프 칼 융'에 따르면 정신분석에 '페르소나'라는 개념이 사용된다. 페르소나는 외부적 이미지나 역할을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사회적 가면이라고도 한다. 사람들은 역시 다양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한다. 각각의 환경마다 다른 사회적 가면을 쓴다. 이런 사회적 가면은 인간이 환경의 변화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했다. 쉽게 말해 자아의 변화는 사회변화에 필수적이다. 청소년기의 아이가 겪는 변화는 어른이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만큼이나 큰 격변이다. 이 시기에 형성되는 두 자아에 대해 우리는 다른 잣대를 들이댈 수 없다.

소설 '동급생'을 집필한 '히가시노 게이고'는 어린 시절, '어른들의 쓴소리'에 불만을 가졌다. 특히나 '교사'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기껏해봐야 '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학교'로 취업한 이들로 '교사'를 평가절하 했다. 그는 학교 선생님이 '사회의 무서움'에 대해 훈계하면, '당신이 사회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가지기도 했다. 따지고보면 교사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어른은 '사회'를 온전하게 겪지 못한다. 의사, 변호사, 판사, 연예인, 댄서, 강사, 공무원 할 것 없이, 대부분의 성인들은 자신의 직업 밖의 세상에 대해 알지 못한다. 성인이 되면 되려 사회가 좁아진다. 개중 사회에 깊은 고민을 해보는 쪽은 '교사' 쪽이다. 교사는 다양한 유형의 인간을 접하고 사회로 내보내는 직업이다. 그들의 진로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지켜본다. 보통의 어른은 비슷한 직업군을 가진 이들과 업무를 한다. 비슷한 직종, 비슷한 소득 수준, 비슷한 학업수준을 가진 이들과 생활하기에 그들의 자아는 되려 좁아진다. 반면 '교사'는 꽤 다양한 수준의 사람을 상대한다. 이것은 환경이 되기도 하고 '사회적 연결'이 되기도 한다. 어른과 청소년의 사이의 환경에서 '자아'를 형성하기도 한다. 어쩌면 청소년와 사회적 연결을 하고 자아의 폭을 공유하는 많지 않은 어른 중 하나다.

'소설 동급생'은 '동급생'의 죽음을 시작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야기는 전개 될수록 그 갈등이 동급생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어른들의 세계까지 확대된다. 따지고보면 '어른'과 '청소년'은 각기 다른 페르소나를 갖는다. 비슷한 성별, 비슷한 사회적 위치, 비슷한 소득, 비슷한 직종으로 점차 나눠지는 어른들의 사회에 비해, 어린 쪽의 사회 경험은 더 폭넓다. 어린 시절, 남녀는 함께 친구가 되고 비싼 옷 입은 아이와 싼 옷을 입은 아이는 한데 섞여 지낸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점차 자신들의 사회를 좁혀 살아간다. 정체성이라는 틀은 어느 쪽이 더 넓은가. 다시 정체성이라는 틀은 어느쪽이 더 확고해지는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각각 다른 사회적 환경에 따라 다른 페르소나를 갖는다. 이는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성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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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8
헤르만 헤세 지음, 박병덕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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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을 이해하는 철학 중 '블록 우주'라고 있다. 시간을 하나의 '블록(Block)'으로 생각하는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과거, 현재, 미래는 블록처럼 고정되어 있다. 시간은 과거,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고정된 하나의 블록 처럼되어 있다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고정된 시간을 경험할 뿐이다. 이 이론에서는 모든 사건과 상태는 동시에 존재한다. 이는 시공간에 대한 철학적 관점을 제시하는 이론 중 하나이며 연구나 검증이 어렵기에 '유사과학'의 범주에 들어가 있지는 않는다. 굳이 '블록 우주론'을 들고 오지 않더라도 현재, 과거, 미래는 동시에 내재되어 보인다. 씨앗을 보면 수박을 볼 수 있고, 수박을 보면 씨앗을 볼 수 있다. 시간이라는 함수값을 지우고 보면 수박과 씨앗은 함께 존재한다. 때로 우리는 '세종대왕'의 어린시절을 보며 '세종대왕'의 업적과 인과관계를 찾으려 한다. 다시, 세종대왕의 업적을 보며 어린시절과의 인과관계를 찾으려 한다. '이도'라는 인물이 태어났을 때, 이미 그 안에는 그의 미래가 이미 함께 존재하는 바와 같다. 조금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가령 아침에 일어나 물을 한 잔 마신다고 해보자. 물은 식도를 타고 신체 내부로 들어간다. 내려간 물은 위를 지나 소장으로 이동한다. 소장 내부 벽면에는 몰을 흡수하기 위한 수송체가 있다. 수송체는 수분과 미네랄을 흡수한다. 이는 모세혈관을 통해 혈류로 들어간다. 소장에서 흡수되지 못한 물은 다시 대장으로 흘러간다. 대장은 수분의 일부를 재흡수한다. 이렇게 흡수된 물은 혈관을 타고 이동하거나 세포에 잠시 머물다가 6시간 정도 지나서 일부 소변이나 대변으로 배출된다. 배출되는 소변은 화장실 변기관을 타고 하수관으로 이동한다. 하수관은 지역내 하수처리 시설로 연결된다. 하수 처리 시설은 오염 물질을 제거하고 다양한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정화 과정을 겪는다. 이후 이는 대략 24시간 정도가 지나서 바다나 강, 하천 등으로 배출된다.

자, 이제 나의 몸의 일부였던 물이 바다나 강, 하천으로 갔다. 배출된 물은 머물지 않는다. 지구가 자전하며 생성되는 바람의 영향으로 수표면을 이동한다. 혹은 바다로 간 물은 달과 태양의 조석력으로 마구 섞인다. 혹, 지구의 중력으로 오르락 내리락 하며 섞인다. 바다의 다른 물과 섞여 어디론가 흘러가거나 바다 생물의 몸에 들어가 일부가 되기도 한다. 바다의 온도 차이로 열도 현상이 일어나면 위 아래로 섞이며 해류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해류는 태양 에너지에 의해 기체로 바뀐다. 이것이 상승하는 공기와 대류가 되면 수증기를 삼킨 공기는 상승하며 차가워진다. 공기가 차가워지면 수중기는 응축된다. 응축되면 작은 물방울이 형성된다. 증기 분자들은 작은 물방울로 모여 구름 형태가 된다. 구름은 지구 자전의 영향으로 대기를 타고 다니다가 크고 무거워지면 중력에 의해 지면으로 떨어진다. 이렇게 떨어지면 지표면에 스며든다. 이중 일부는 흙과 지반을 통과해 지하수가 된다. 일부는 강이나 강물, 호수가 된다. 이 과정에서 다른 동물과 식물의 식수로 사용되기도 하고 일부는 정수 처리가 되어 주택, 학교, 회사 등의 소비자에게 배급된다. 이것이 다시 한 잔의 물이 되어 나의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이렇게 돌고 돈다. 물은 때로 나를 채우기도 하고, 남을 채우기도 한다. 물의 순환 과정을 살피면, 나를 채우던 물이 고양이를 채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는 때로 나무가 되거나 풀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자동차가 되거나, 핸드폰이 되기도 한다. 가끔은 내가 소중하게 여기던 어떤 것이 되기도 하고, 가끔은 내가 갖더 버린 쓰레기가 되기도 한다. 인간의 70%는 물로 이뤄져 있다. 인간은 이처럼 돌도 도는 순환의 과정에서 임시적으로 고여있는 형태일 뿐이다. 들어왔다가 나가고 외부를 돌고 돌아 다시 들어온다. 그것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는 순환하는 어떤 커다란 유기체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 반대로 그 커다란 유기체는 모두 '나'이기도 하다.

윤회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들었던 물의 순환의 예를 들었다. 비약이라면 비약이다. 어쨌건 우리는 돌고 도는 유기체의 일부이며, 그 유기체 자체이기도 하다. 고로 사람은 사람이라고 규정할 수 없고, 물은 물이라 규정할 수 없으며, 나는 나라고 규정할 수 없다. 불교철학에서는 이처럼 구별할 수 없는 하나의 덩어리를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으로 설명한다. '나'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착각, '너'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착각, 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착각. 그런 것들이 모두 착각이라는 것이다. 실제 우주는 하나 덩어리가 끝없이 움직이며 형태를 변형하는 유기체일 뿐이다. 고로 우주에는 '나'도 없고 '너'도 없으며, '슬픔', '악', '선', '기쁨' 따위는 없다. 모두 그저 하나의 덩어리일 뿐이다. 이처럼 구별할 수 없는 큰 덩어리에 인간은 구별 지어 이름 짓길 좋아한다. 구별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는 동양철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개념이다.

'노자' 철학에서 커다란 하나의 덩어리를 '도'라고 한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범'이라고 한다. 그것을 '도'라고 이름 지엇지만, 혹은 '범'이라고 이름 지엇지만 그것이 가르키는 대상이 너무 모호한 하나의 덩어리다. 서양 철학에서는 이를 '신'으로 규정하는데 이 전체를 '하나'라고 부르며, 기독교 철학에서 이를 '유일신', '하나님'으로 규정한다. 하나는 전체이고, 전체는 각각의 조합이다. 고로 각각은 모두 전체이다. 이것은 언어로 형용할 수 없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이를 가르켜, '도가도 비상도'했다. 이는 '도를 도라고 부르면 도는 더 이상 도가 아니다'라는 의미다. 언어가 가진 한계성을 명확하게 하는 일이다. 언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불완전하다. 언어는 인간의 작디 작은 지성으로 '우주'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고로 완전한 '우주'라고 하는 일원적인 덩어리를 인간의 지성 크기로 난도질한다. 고로 언어는 우주를 온전히 담을 수 없다. 쉽게 말해 인간이 가진 '종이'가 2차원 평면이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리 정확한 지도를 제작한다손 치더라도 구형의 지구를 표현 할 수 없다. 아무리 정확한 지도도 그 왜곡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은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의 한계 때문이다. 진리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 진리는 경험이며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면 그것은 더이상 진리가 아니다. 고로 지식은 언어로 얻을 수 있지만, 진정한 지혜와 깨달음은 언어로 얻을 수 없다. 그저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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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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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

끓는 물 속 개구리는 어떻게 죽어가나. 자신이 익어가는지 모르는 채로 개구리를 익히는 방법은 물 속의 개구리를 서서히 끓이는 것이다.

소설 '동물농장'의 독재자는 동물의 권리를 신장하고 평등한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해 집권한다. 그 최초의 선의가 '모두 악을 위한 계획'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최초의 의미가 선량하다손 치더라도,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며 점차 퇴락하기 시작한다. 흔히 말하는 권력의 횡포는 고인 물이 썪기 때문이지, 썩은 물이 고이는 것이 아니다. 모든 혁명이 다수의 지지를 통해 시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혁명은 다수를 설득할 '명분'을 갖는다. 조지 오엘의 소설 '동물농장'은 '나폴레옹'이라는 돼지가 '타도 인간'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농장 내에 혁명을 통해 인간을 몰아낸다. 이들을 몰아낸 것은 주동자는 '나폴레옹'이라는 리더지만, 그에게 사상적 영향을 끼친 '메이저'라는 정신적 지주가 그 씨앗이 된다. 프랑스 혁명에서는 그 역할로 '루소'가 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을 통해 불합리한 왕정을 비판했다. 정부는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고 국민의 동의를 기반으로 정당한 정부가 형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명분은 프랑스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끄는데 중요한 사상이 되지만 결과적으로 '나폴레옹'이라는 '황제'를 등극시킴으로써 더 상황을 더 악화시키기도 했다. 소설의 돼지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이자 '스탈린'으로 보여진다.

소설은 프랑스 혁명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다. 다만, 조지 오웰은 소설 '동물농장'에서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리더 돼지의 이름을 '나폴레옹'으로 명명함으로써 그 전개와 결과를 시작부터 암시했다. 배경지식을 모르고 본다면 도입 부분에서 최소 '프랑스 혁명'을 떠올리게 한다. 이 소설은 '나폴레옹'의 혁명이 성공하면서 '민중'의 평등과 자유를 보장한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혁명의 가치를 유럽 전체에 전파하여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퍼트린 것은 사실이다. 다만 이렇게 집권한 나폴레옹이 다시 제정을 탄생시켜 스스로 왕보다 더 높은 '황제'가 된 것은 혁명의 아이러니다. 이 소설이 담고 있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이렇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다. 소설 '동물농장'은 대체로 1917년 러시아 혁명을 비판한다. 소설은 독특하게도 독자의 해석 방향을 열어 두기보다는 거의 1대 1 대응이 가능할 정도로 러시아 혁명을 비유한다. 앞서 말한 '메이저'는 프랑스 혁명에서 '루소'를 닮았지만, 러시아 혁명에서는 '레닌'과 '칼 마르크스'를 닮았다. 철학은 그 씨앗으로 시작해 '혁명'의 명분이 된다. 다만 '철학이 담던 순수함'은 시간이 지나며 점차 사라진다. 혁명의 지도자는 점차 독재적으로 변한다. 이 과정에서 혁명의 이상과 목표는 아주 조금씩 변화한다. 그 변화는 아주 사소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완전한 방식으로 대중을 배신하게 된다. 조지 오웰은 전혀 다른 시대적, 공간적 배경의 두 사건을 거의 동일하게 다룬다.

기하학에서는 '합동'과 '닮음'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두 도형이 서로 크기와 모양이 완전히 같은 경우에는 '합동'이라고 말한다. 이는 각도와 변의 길이까지 모두 같다. 반면 두 도형이 서로 크기만 다를 때, 이를 '닮음'이라고 부른다. 닮음은 각도는 동일하지만 변의 길이가 일정 비율로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 경우 변의 길이에 대한 비율만 조절하면 두 도형은 완전히 일치 하는 하나의 모양이 된다. 다시 말해,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은 서로 닮은 각도와 모양을 가졌다. 그 비율적인 부분만 조절을 한다면 이 두 사건은 기하학적으로 합동이다. 이런 두 사건의 평행이론적 일치를 조지 조웰은 말하고자 했다. 이는 두 사건에 대한 예시만은 아니다. 모든 혁명이 일어나는 매커니즘이 이와 닮았다. 다수를 설득할 '철학'을 등에 엎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혁명이 일어나면, 혁명은 다시 부패하고 부패한 권력은 혁명에 의해 무너진다. 대체로 인류의 역사는 이처럼 반복한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은 명칭은 다르지만 이 둘을 관통하는 이론이 있다. 그것은 기하학의 '합동조건'을 닮았다. 쉽게 말해 자연과학에서는 '대류 현상'이 있다. 온도가 높으면 기압이 낮아진다. 기압이 낮아지면 위로 올라간다. 온도가 낮아지면 반대로 기압이 높아진다. 기압이 높아지면 아래로 내려간다. 쉽게 말해 물을 끓이면 뜨거운 물은 위로 올라가고, 차가운 물은 아래로 내려가며 물이 순환하게 되는데, 이를 '대류현상'이라고 한다. 인간의 사회도 이와 닮았다. 다수 분자의 활동량이 많아지면 밀도는 낮아진다. 밀도가 낮아지면 온도가 높아진다. 온도가 높아지면 위로 올라간다. 반대로 활동량이 작아지면 밀도가 높아지고 밀도가 낮아지면 온도는 낮아진다. 온도가 낮아지면 아래로 내려간다. 다수의 열망은 혁명이 되어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며 역사는 진행한다. 고로 완전히 옳은 것도, 완전히 그른 것도 없다. 어떤 혁명은 어떤 혁명을 뒤집은 것이고, 반대로 어떤 혁명은 어떤 혁명을 닮았다. 그 물고 물리는 닮음의 조건 안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끓는 물에서 서서히 익어가는 개구리이기도 하지만 그 끓는 물 자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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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준의 말하기 수업 - 말하기에 자신이 생기면 인생이 바뀝니다
한석준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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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는 쓰기와 다르다. 단순히 정보만 담는 '쓰기'와 다르게 말하기는 '다양한 비언어적 요소'를 필요로 한다. 말하는 속도, 표정, 눈빛, 발성, 제스처 또한 듣는 자세 등.

'쓰기'가 정제된 정보를 담는 그릇이라면, '말하기'는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글로 읽었을 때와 말로 전달 받았을 때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 '쓰기'와 '말하기'는 모두 중요한 소통방식이다. 다만 어떤 면에서는 '쓰기'보다 '말하기'가 더 효과적인 전달 방식일 수 있다.

일단 '말하기'의 가장 큰 장점은 '실시간 소통'이다. 요즘처럼 커뮤니티의 활성화로 실시간 댓글 소통이 가능한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말하기'는 독보적인 실시간 소통 방식이다. 실제로 문자를 주고 받다가 답답해지면, 우리는 1차로 전화를 걸어 목소리로 대화를 하고 2차로 직접 만나기를 희망한다. 그만큼 '글'보다 '말'이 주는 힘이 어떤 면에서 강력하다.

둘째, 말하기는 비언어적 표현을 담는다. 가령 사람은 거짓을 말할 때, 무의식적 특징을 가진다. 눈을 피한다거나, 과정된 손짓을 이용하기도 하고, 음성의 높낮이가 지나치게 높아지고 빨라지는 경향도 있다. 이런 비언어적 특징을 '글'은 숨길 수 있다. 이는 말하기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셋째, 상호작용이 가능하다. 앞서 말한 '실시간 소통'과 일맥한다. 대화에 대한 즉각적인 호기심을 해결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책읽기'라는 소통보다는 '대화'를 통한 학습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를 '소크라테스적 대화'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질문하고 답하는 과정에서 상대가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검토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이 과정에서 학습자는 비판적 사고력을 키우고 자기 인식력을 촉징할 수 있다.

예전처럼 '말하기 능력'이 1대 1이거나 1대 상대적 소수인 경우에는 '말하기 능력'이 한계를 가진 적도 있다. 다만 현대 영상매체의 시대가 오면서 '말하기 능력'은 점차 중요해지고 있다. 예전에는 다수를 상대하기 위해서 무조건 '쓰기 능력'이 중요했다. 책을 쓰거나 '컬럼'을 작성하는 이들이 다수를 상대 할 수 있었다. 다만 유튜브가 활성화 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말하는 방식'으로 대중을 상대할 수 있게 됐다. 1회성이라 증발되고 마는 '말하기'의 또다른 단점이 '유튜브'라는 저장 매체의 도움을 받으면서 '글'과 같이 기록어 같은 파급력을 갖게 됐다. 바야흐로 '말하기의 시대'가 열렸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유창하게 말하는 다양한 유튜버들을 만나게 된다. 예전 같으면 강연장에서만 볼 수 있거나 술자리 친구들 앞에서만 이야기하던 내용들이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되면서 말하기는 더 빠른 속도로 생각이 같은 이들을 모울수 있는 수단이 됐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말하기를 잘 할 수 있을까. 이에 스피치 코치 '한석준' 아나운서는 그의 저서 '말하기 수업'에서 말 잘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말 잘하는 방법은 한 두 가지는 아니다. 말이라는 것은 너무나 다양한 능력을 복합적으로 보여주는 행위다. 고로 단순히 성대를 떨어 정보를 전달하는 일은 아니다. 그것이 분명한 이유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맞는 말을 하더라도 내용에 의심이 생기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실없는 소리를 해도 말에 무게가 느껴지기도 한다.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컨텐츠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발음에 대한 부분이다. 우리는 대부분 발음을 연습할 때, 자음에 대해 신경을 쓰곤 한다. '시옷'이나 '히읗'과 같이 발음하기 어려운 자음에 대해 애를 쓰기도 하지만 대체로 뭉게지는 발음의 경우, 그 문제점은 자음이 아니라 '모음'에 있는 편이 많다. 실제로 영어와 한국어 뿐만 아니라 다양한 언어에서 음절을 나누는 기준은 '모음'이다. 훈민정음을 살펴보면 한 음절의 구성요소를 '자음, 모음, 자음'으로 구성한다. 이에 첫머리에 자음을 '초성'이라고 부르고 가운데 모음을 '중성', 끝의 자음을 '종성'이라고 한다. 여기에 '초성, 중성, 종성'은 천지인 체계를 따른다. 다시 해서 초성은 하늘, 중성은 인간, 종성은 땅을 가르킨다. 이렇게 하늘과 땅, 사람을 자연적 구성 요소의 대표로 두는데 이것이 삼재론이라는 유학사상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하늘, 땅과 그 지위가 같고 되려 중심이기도 하다. 이 삼재론은 동양 철학에서 균형의 상징으로 '인간'이 설정된다. 다시말해 모음은 '균형'을 상징하고 사람을 상징한다. 말장난 같지만 실제로 모음은 음절의 기준이 되어 명확한 전달을 가능하게 하고 초성과 종성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준다.

모음을 조금 더 신경써서 말하는 일 뿐만 아니라 말하기에는 눈빛과 행위도 포함된다. 말을 할 때 사람을 쳐다보지 않는 일은 현대인들이 자주하는 실수다. 사람의 말은 입을 통해 나가지만 그 방향은 '눈'에 있다. 말은 공간으로 퍼져 목표점을 잃는 '떨림' 즉, '파동'이다. 다만 '빛'은 직진하는 성질을 가진다. 다시말해 빛은 파장이 짧아 '직진성'이 강하고 소리는 파장이 길어 '전파성'이 강하다. 말은 '파장'을 갖고 있"기에 '전파성'이 강한 반면, 직진성이 약하기에 눈빛으로 그 방향성을 정해 주어야 한다. 다만 현대인의 대부분은 사람과 대화하는 일에 서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과 대면할 때, 스마트폰을 함께 쥐고 있다. 이들은 무의식적으로 스마트폰에 눈을 두고 말하는 습관을 갖는데, 이런 경우, 소리의 전달에 반향을 상실한다. 이런 경우는 적잖다. 이는 내가 가장 신경쓰는 부분 중 하나다. 사람을 만날 때, 나는 제일 먼저 스마트폰을 뒤집어 놓는다. 될 수 있으면 상대가 보는 앞에서 스마트폰을 뒤집어 놓는 경우가 많다. 이는 상대에게 '당신의 이야기에 경청할 준비를 하겠습니다'라는 표시로 전달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화하며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경우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하기 힘들 여지가 있다. 간혹 중요한 정보가 아니기에 스마트폰에 신경을 두는 경우가 있다고 할 지 모르겠다. 다만 인간은 반복적인 행위를 학습하는 경향이 있다. 아주 사소한 행위는 반복과 습관이 되고 결국 그 행위는 무의식에서 학습한다. 결국 사소한 대화 조차 우리는 '말하기 훈련'의 일부이며 사소한 대화에서도 자신의 습관을 관찰하고 고치려는 노력이 필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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