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무드
조장희 엮음 / 책만드는집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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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요즘 같은 시대라면, 탈무드가 얼마나 무기력한지 느껴진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에서 사망자는 개전 수일 만에 1만명을 넘었다. 이 중 3분의 1이 어린이다. 도덕 교과서를 암기 했다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이론과 실전은 다르다. 결국 '구약'과 '신약', '코란', '토라', '탈무드'는 모두 '중동' 지역에서 나왔다. 구약을 기반으로 유대교, 거기에 신약이 붙으면 기독교, 인질(Injil)이 붙어서 '코란'이다. 세계 3대 종교가 모두 이곳에서 출발했으나 그 뿌리는 점차 뻗어 나간다. 그것이 생물의 진화 과정과 같이 다양해진다.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전쟁을 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결국 '공감' 때문이다. 공감할수록 갈등이 생긴다는 말은 얼핏 모순 같다. 그러나 그러지 않다. 우리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대부분 하나의 뿌리를 갖는다. 그것을 타고 올라가다보면 언젠가 어느 지점에서 만나게 되어 있다. 고로 다르다는 것은 실제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다르다는 착각은 그것을 다시 하나로 합해야 한다는 착오를 하게 된다. 내부적으로 비슷한 것끼리 뭉친다. 결론적으로 모든 것은 비슷하지만, 분파를 달리한 다른 것끼리 뭉치면 그것은 결국 닮지 않은 것을 미뤄 낸다. 고로 공감할수록 적이 많아진다. 다양성은 생존 전략의 필수 요소다. 다양성을 지키는 것은 생존력을 높힌다. 생물의 진화를 보면 매 시기마다 대멸종기가 발생한다. 이때, 모든 생물이 전부 멸종하는 것이 아니다. 많게는 97%의 지구 생물종이 멸종하더라도 일부는 살아남는다. 살아남은 일부가 다시 환경에 적응하며 번식한다. 만약 모두가 똑같다면 생물의 진화는 거기서 멈췄을 것이다. 분화하고 멸종하고, 소수가 다시 분화하는 이런 과정을 겪었기에 우리는 공룡이 멸종한 자리를 채우며 살아가고 있다. 결국 생물종은 하나에서 분화해 뻗어나간다. 바다를 헤엄치던 물고기가 육지로 올라오고 그것은 양서류가 되고, 파충류가 되고 포유류가 되고 영장류가 되듯. 분화는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하여 여럿으로 나눠진다. 이스라엘은 유대교지만, 하마스는 이슬람이다.

우주의 형성 과정을 보면 그렇다. 우주에는 서로 끌어당기는 법칙이 있다. 그것은 모든 것에 적용되기에, '뉴턴'은 그것은 '만유인력의 법칙'이라고 불렀다. 끌어 당긴다는 것은 때로 모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반대로 완전히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은 서로 밀어낸다는 '전자기력'이나 '척력'과는 다르다. 쉽게 말해 이렇다. 지구의 궤도에는 인력이 발생한다. 이 인력은 주변의 것을 끌어 당긴다. 그것을 중력이라고도 표현한다. 이 중력은 작게는 사과, 크게는 '달'과 같은 위성도 끌어 당긴다. 반대로 목성의 주변에는 '유로파'라는 위성이 있다. 이것은 '목성'의 중력에 끌린다. 쉽게 말해, '달'은 지구에 끌리고, '유로파'는 목성에 끌린다. 한쪽으로 끌어당겨진다는 것은 다른 쪽에서 밀려나고 있는 것과 같다. 고로 유로파는 목성의 외부에서부터 밀려나고 있다. '달' 또한 지구의 외부에서 밀려나고 있다. 즉, 궤도에 있는 것끼리는 끌어 당긴다. 다만, 그것을 벗어나면 모든 것은 그것을 밀어낸다. 그렇다고 유로파와 달이 완전히 다르냐 묻는다면 아니다. 이 둘은 '빅뱅' 초기에 아주 가까웠을 것이다. 그것은 빅뱅 직후 서로 멀어지기 시작하며 분화되다가 비슷한 것, 가까이에 있는 것끼리만 모여진다. 그리고 그것의 모양을 형성한다. 다시말해, 그것은 오롯하게 '그것' 같지만, '그것'은 '이것'과 같은 것이며 우주, 생물, 문화, 사회는 전부 비슷 한 매커니즘으로 번영해 나간다.

유대교는 '아브라함', '모세'와 같은 구약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시작한다. 유대교의 핵심 성경은 '타나크'로 성경의 구약에 해당된다. 이는 토라를 비롯한 여러 구성으로 이뤄져 있다. 유대교는 역시 단일신을 섬긴다. 그리고 그에 맞는 율법과 윤리, 가르침을 갖는다. 다만 이 종교는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라는 유대교 법학자가 구약을 중심으로 '예수'라는 인물의 가르침을 설파한다. 예수의 가르침을 기록한 것을 '신약'으로 구분한다. 여기서 갈등의 시작이 발생한다. 바울의 편지 중 일부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메시아로 인식한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더 나아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 자신으로 묘사된다.그것이 '삼위일체'라는 기독교 교리로 발전한다. 그러나 반대로 무하매드는 스스로를 '신'으로 설정하지 않는다. 무하매드는 '유일신'를 훼손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성당에는 '마리아'가, '교회'에는 '예수'의 상이 존재한다. 다만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에는 '신의 형상'이 없다. 이슬람에는 '태허'라는 아주 중요한 원칙이 있다. 이는 하나님이 오직 유일하기에 그것을 형상화하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해서 안된다는 원칙이다. 이런 신의 불가시성을 강조하는 원칙은 '코란'에도 기록되어 있다. 코란에는 하나님의 형상과 이미지를 만들지 말라는 명령이 들어간다. 고로 어떤 조각상이나 이미지가 들어갈 수 없다. 이 원칙은 신의 존엄을 의미하고 순수성을 보존하게 한다. 또한 하나님을 묘사하는 형상은 우상 숭배를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창시자인 모하매드 또한 스스로를 그렇게 두었다.

이렇게 서로가 같은 뿌리를 갖고 분파가 달라진다. 고로 이 네 종교는 정통성 문제가 생긴다. 모두가 같은 것으로 시작했으나, 모두가 달라졌으니 개중 하나만 진짜고 나머지는 가짜가 되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모두 같은 성지를 갖는다. 고로 이들에게 영토는 단순히 거주지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모순이 있다. 이 모든 종파를 계속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아브라함을 만난다. 아브라함을 거슬러 올라가면 '테라'라는 그의 부친을 만난다. 그의 부친을 거슬러 올라가면, '나홈'이라는 그의 조부를 만난다. 그를 거슬러 올라가면 '스룩'을 만나고, 다시 거슬러 올라가면 '르엘'을 만난다.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우리는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의 '루시'와 만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어떤 물고기의 뱃속에서 만나고 다시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우리 모두는 '초신성' 혹은 '빅뱅'의 한점에서 만난다. 그것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종교의 뿌리가 '빛이 있으라 하여 빛이 있었다'처럼 '창세기'의 시작점을 갖고 있으니, 우리의 모든 뿌리는 하나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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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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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로드'라는 소설을 알게 된 것은 영화를 보고 난 부터다. 어떻게 영화를 보게 됐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한때,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종말의 세계'에 꽂혔던 적 있다. 모든 것이 다 죽고 사라진 디스토피아에서 느껴지는 적막감과 적당한 긴장감. '생존'과 '삶'의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묘한 쾌감. 그런 것들이 느껴지게 한다. 이 영화는 어떤 이유에서 종말된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종말한 세계에 살아남은 아들과 아버지의 이야기다. 유일한 혈육이된 부자지간은 서로를 의지하고 생존해 간다. 그 적막감이 '아내'가 죽기 전까지 꽤 버틸만한 적막이었다. 다만 아내가 죽고 난 뒤의 적막감은 정말 세계가 무너져 버린 종말과 같다. 영화를 본지 꽤 지나서 소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소설은 세 번은 본 것 같다.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적막감이 더 극하게 다가왔다. 영화에서 '아들'로 나오는 아이는 '창백'하고 '연약하다. 목소리와 피부, 그 눈빛까지 얼음장 같다. 금방 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그 모습은 중성적이다. 목소리와 외형만 보고서, 아들인지 딸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 그 차갑고 연약한 아들과 점점 까맣게 초췌해지고 지저분해져가는 아버지는 완전 극적이면서 닮았다. 영화 속에서 뇌리에 강하게 때려와 박힌 장면이 있다. 우연히 아버지와 아들은 '캔 콜라'를 발견한다. 종말한 지구만 기억하는 아들에게 '콜라'의 맛을 알려주고 싶던 아버지는 '콜라캔'을 따다가 아들에게 건낸다. 아들은 그 톡쏘는 이상한 맛에 재미를 느낀다.

'그 장면'

그 장면 하나 때문에 나는 콜라를 몹시도 좋아하게 됐다. 모든것이 끝이 난 '회색빛 색깔'에 빨간색 콜라캔은 너무 매력적이고 독보적이었다. 그 장면은 마치 '희망'을 닮았다. 모든 것이 망해버린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희망. 그것은 달콤하고 톡쏘고, 새빨갛다. 그 장면은 영화의 시작이자, 끝이고 전부였다. 나는 그 장면 하나만으로 그 영화를 사랑하게 됐다.

아버지와 아들은 온갖 고생을 하다가 우연히 음식이 가득 있는 벙커를 발견한다. 그때 느껴지는 대리 만족감은 그것이 영화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 정도다. 그곳에서 풍족하고 행복한 삶을 아주 짧게 보내다가, 다시 그들은 그 벙커를 버리고 고행을 한다. 그 아쉬움. 다른 대안이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 그것이 인생을 닮았다. 이 영화는 손꼽는 명작 중 하나다. 그런 탓에 이 책도 그렇다. 원작이 있는 영화를 볼 때가 있다. 대체로 그것은 짜임새가 있고 훌륭한 편이 많았다. 되려 원작을 읽을 때, 그 감성이 온전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렇지 않다. 물론, 빨간색 콜라 캔을 따며 들리는 소리, 그것을 삼키는 소리 등 영화가 나에게 남겨 주었던 강한 임팩트는 없다. 그러나 잔잔하게 흘러가는 서사가 그에 합하는 매력을 준다. '더 로드'라는 소설은 가끔 한 번씩 떠오른다. 가끔 복에 겨워, '삶' 이외의 무언가를 더 원하게 될 때가 그렇다. 무언가를 더 원할 때, 이미 모든 것이 종말한 세계와 그 결핍이 가져다주는 감사의 마음은 삶을 다시 살게 한다. 마치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린 세계를 겪고 난 뒤, 시간을 돌려 과거로 온 것 처럼, 이런 디스토피아적 소설과 영화는 삶을 두 번 살게 만든다. 오랫만에 읽은 '더 로드'라는 소설. 잔잔하지만 임팩트있고, 적막하지만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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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의 잭 설산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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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보통 온전하게 그 자리에서 모두 읽어야 몰입할 수 있다. 그러나 소설 하나를 읽으려면 대략 6시간은 있어야 하는 듯하다. 그러나 6시간이 온전하게 붙어 있기는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잠에 들기 직전에는 갈등한다.

'지금 시작해 버리면 흐름이 끊길 텐데...'

흐름이 끊이면 온전하게 몰입하여 읽을 수 있는 작품 하나를 놓치게 된다. 그러다 어쩔 수 없이 시작하면 최단시간 내로 책을 읽고자 한다. 대략 3일 전, 잠자리에 들기 전에 우연히 들게 된 책이다. 책을 읽고 몇 장을 넘기고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어. 재밌네."

읽기 시작한 시간이 10시. 분명 완독을 하지 못하고 잠에 들 것이고, 끊어 읽으면 그 몰입이 떨어진다. 역시나 이 책은 3일에 걸쳐 읽었고 책은 충분히 재밌었고 다만완전하게 즐기지 못한 것이 아쉽다.

최근 읽었던 '백은의 잭'은 단순히 '재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스키장에 묻혀진 폭탄으로 금전을 요구하면서 벌어지는 서스펜스다. 이는 자칫 뻔한 소재일 수 있다. 다만 흔한 소재라는 것이 때로는 흥행을 보장하기도 하고, 보장된 흥행은 재미를 보장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번 소설이 여타 뻔한 소재의 이야기와 흐름을 같이 하진 않는다.

소설 중간에 '게이고'는 너무나 뻔한 '범인'을 설정해 놓고 독자에게 그 미끼를 대놓고 물기를 기다린다. 너무나 뻔하게 흘러 갈듯 싶은 전개지만, 그 뻔함 때문에 의심스럽고 때로는 대안이 없음에 당황스럽기도 하다. 그럼에도 결국 게이고는 역시 완전히 다른 류의 결말로 이야기를 뒤집어 놓는다.

최근 아이들과 도서관을 다니며 읽었던 소설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역시 재밌다고 생각한다. 그의 책을 처음으로 본 것은 '군시절'에 읽었던 , '편지'라는 소설부터다. 편지는 그 뒤로 한 번을 더 읽었다. 편지라는 소설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느낌이 많이 나지 않는 소설이었다. 그때 그 소설을 읽었을 때의 충격이 지금도 선한다. 그 소재의 신선함. 그와 더불어 그때 내가 어떤 자세로 책을 읽고 있었는지, 어떤 시간에 어떤 일을 하다가 읽었는지,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의 풍경이 어땠는지도 모두 기억이 난다. 그 시절의 향수가 항상 떠올라서 게이고의 소설을 언제나 집는다.

게이고는 다작하는 작가다. 고로 그의 소설이 전부다 재밌다고 할 수는 없다. 때로는 공장에서 찍어내듯 비슷한 식으로 흘러가는 소설도 있다. 물론 이 책도 완전하게 신선하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춘분히 시간을 삭제할 만큼 재미있었으며 소설로써 그것이면 충반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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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 수학 확률과 통계 - 2015 개정 교육과정, EBS 김현준 선생님 고등 생강 시리즈
김현준 지음, 해뜰날 그림 / 스터디하우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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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에서 한 아이가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는 법률가 였으나 일찍 돌아가시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그 뒤로 그는 가난하게 유년생활을 보낸다. 어린 시절부터 가난하게 생활했던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카드게임'이나, 주사위 놀이, 체스와 같은 내기 도박을 하곤 했다. 그는 결과적으로 이런 도박에는 많은 경우의 수가 존재하고 그것을 토대로 '승리의 가능성'을 수학적으로 표현했다. 그것이 확률, 통계다. 그것이 본격적으로 체계화된 것은 그 뒤로 100년이 지나서 였지만 그가 확률을 연구한 것은 최초의 개념이었다. 그의 이름은 '지롤라모 카르다노'다. 지금은 현대의 초등학생도 사용하는 용어지만, 원래 '확률'이나 '통계'는 이렇게 쉬운 용어가는 아니였다. 앞서 말한대로 이 개념이 다뤄지기 시작한 역사도 비교적 최근이다. 앞서 말한대로, '지롤라모 카르다노'가 확률이라는 개념을 처음 이용했지만 그것이 체계화 된 것은 100년이나 지난 이후다. 17세기 프랑스의 수학자인 '블레즈 파스칼'과 '피에르 드 페르마'가 확률 이론을 정리했다. 이 두 인물은 확률 분포와 편차에 대한 중요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확률과 통계는 앞서말한 바와 같이 '도박'이나 '내기'에서 승률을 계산하기 위해서만 사용하진 않는다. 확률과 통계는 현대에 와서 다양한 '수학적 이론'과 함께 사용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인공지능의 딥러닝' 기술에도 사용된다. 초기 인공지능이 '개'와 '고양이'를 분류하는 방법을 보면 알 수 있다. 인공지능은 인간과 같은 '직감'을 가질 수 없다. 고로 철저히 '수학적' 기반으로 대상을 분류해야 한다. 예를들어 고양이와 개의 특징을 살펴보자. 가령 어떤 대상이 '고양이'인지 '개'인지를 살피기 전에 그것이 '동물'인지 확인하는 방법은 이렇다. 동물의 사진을 분석하면 각 픽셀마다 그 위치가 있다. 이 위치는 '좌표'로 표현할 수 있다. 가령 가로의 x축, 세로의 y축을 이용하여 각 픽셀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또한 사진은 '점묘법'처럼, 엄청나게 많은 픽셀의 조합이다. 이 픽셀들은 각기 다른 색상값을 갖는다. 그러나 어떤 좌표에 위치한 픽셀의 색상값이 유독 몰려있는 경우가 존재한다. 그 몰려 있는 색상을 한 점으로 하고 그 값에 평균적으로 비슷하도록 대칭된 값을 다른 점으로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두 점은 눈동자로 인식한다. 눈동자는 둘다 '검정'과 비슷한 색상값이 특정 좌표평면에 몰려 있게 된다. 이 두 눈동자의 거리를 산술평균으로 찾는다. 이와 같은 과정을 무수히 반복하면서 그 '평균값'을 찾으면 인공지능은 드디어 '고양이'나 개'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수많은 사진의 평균값을 찾는 것이다.

결국 확률과 통계는 현재 우리의 삶에서 이미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앞으로의 삶에서도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한다. 수학은 순수학문이다. 고로 그것의 실용성에 대해 어떤 이들은 의문을 갖기도 한다. 다만 수학이 우리 일상 생활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은 '확률'과 '통계'의 역할이 크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미래에 대한 예측을 할 수 있게 됐다. 미래란 본디 '불확실성'이다. 다시 말해, 엔트로피 법칙처럼 미래는 언제나 불확실하고 무질서하다. 또한 그 방향으로 확장된다. 다만 확률은 그것을 수학적으로 표현하게 해준다. 여름철 태풍경로를 살펴보면 적도에서 출발한 태풍이 북상하며 점차 커져가는 모양으로 태풍이 그려질 때가 있다. 이것은 실제로 태풍이 북상하며 규모를 키워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태풍의 영향력에 대한 그 확률을 표현한 것이다. 태풍경로가 진행될 수록 그 예측은 빛나갈 가능성이 높다. 고로 기상예측에서는 확률을 사용하여 그것의 예상 범위를 가늠하게 한다. 고로 점점 꼬깔모양으로 벌어지는 태풍경로 모형은 태예상 경로에 대한 예측확률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확률은 불확실성을 다루는데 사용되는 도구다. 불확실성은 인간의 '두려움'과 가장 관련된 단어 중 하나다. 고로 '확률과 통계'가 얼마나 인류를 위해 기여했는가를 보자면 꽤 엄청 나다고 볼 수 있다. 확률은 최소 0에서 최대 1사이의 값으로 표현된다. 0이란 사건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고, 1이란 반드시 일어날 확률이다. 이는 다시말해 '존재와 무존재' 사이의 중간값을 구하는 논리다. 다시말해 동전 던지기를 한다고 해보자. 확률이 존재하기 전의 과거에는 그것을 단순히 '알 수 없다'고 정의했다. 다만 현재에 와서는 그것이 일어날 확률에 대해 0.5라는 숫자로 정의한다. '모름'에서 '존재'로 정의가 확대 된 것은 결코 단순한 사건은 아니다. 이는 사회가 복잡해 질수록 필수적으로 사용되고 불안할수록 더 중요해진다.

예를들어 의료 분야에서 환자의 건강상태를 평가하고 치료 효과를 예측하기 위해 가장 객관적인 논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통계적 분석이 필수적이다. 비즈니스에서 시장의 동향을 예측하고 경영 의사를 내리는 데에도 이는 필수적이다. 인간은 쉽게 인과관계의 복잡성으로 인해 인지 왜곡상태에 빠진다. 다만 확률과 통계는 이런 편향을 균형잡도록 돕는다. 누군가는 더하기 빼기만 해도 충분하다는 '수학'이지만 수학은 실제로 '논리'를 통해 불확실한 것을 확실의 영역으로 던져 놓음으로써 심리적 안정과 희소한 도전에 대한 리스크를 획기적으로 줄여준다. 요컨데 확률과 통계는 우리의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필수적이다. 이 두 분야를 이해하고 활용하면 더 많은 현실 세계를 이해할 수 잇다. 고로 이는 우리의 인지능력을 보조하고 판단력을 향상시키는 열쇠다. 고로 '영어', '국어', '수학'이 주요 과목이어야 한다는 것은 역시나 진리에 가깝다. 그리고 그것을 확률이 증명한다.

* 본 도서는 EBS 김현준 선생님의 책이다. '스터디 하우스'에서 출간된 이 책은 만화를 바탕으로 개념을 설명하고 간단한 문제를 통해 학습을 확인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확률과 통계'는 분명 수학이지만 단순히 식을 두고 이해하기는 힘들다. 영상이나 '만화'와 '그림'과 같은 보조적인 도구가 이해력을 높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분야이기도 하다. 책은 아주 쉽게 쓰여져 있고 이해하기도 쉽다. 스터디 하우스에서 출판한 '생강' 시리즈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만화'로 구성되어 이어 가볍게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심화학습을 위해선 분명 많은 문제와 유형을 접하는 것이 학습에 도움이 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 개념'이다. 고로 가벼운 마음으로 다회독하면 '수험생'들에게 꽤 유용할 듯 하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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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좋아하는 것들 - 작고 소중한 수채화 관찰일기
김이랑 지음 / 책밥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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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거짓말을 한다'의 저자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에 따르면 모두 거짓말을 한다. 혹은 정말 스스로가 스스로를 모른다. 이것을 증명해주는 것이 '빅데이터'다. '인스타그램'을 보면 너무 멋지고 예쁜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상당하지만, 대체로 SNS 사진들은 '필터'와 '보정'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즉, 여러 사진 중에서 가장 잘 나온 사진을 편집적으로 찾아내서, 그 원본을 편집하여 올리는 것이다. '편집'이라는 것이 그렇다.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들,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잘 추출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만 남긴다. 이렇게 편집된 것은 '원본'과 다르다. 자연에는 위와 아래, 차가움가 뜨거움, 어둠과 밝음이 있다. 즉, 자연스러움이란 편집되어 고농도 추출물과 다르다. 화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는 '농축'과 '추출'의 역사다. 정제하고 걸러내고 추출하고 농축하여 순도 높은 것을 골라내는 작업이다. 즉 이것은 굉장히 인위적이다. SNS는 모두의 삶에서 자신이 편집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부분을 추출, 정제, 농축한 '고밀도 인공물' 덩어리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일상을 저장하는 공간을 'SNS'에 둔다. 남에게 보여 주고 싶은 모습 뿐만 아니라, 스스로 간직하고 싶은 모습도 이처럼 가장 행복하고 좋은 장면을 골라 올리다보니, 올라간 모습과 실제 모습 간의 간극이 생긴다. 남들이 봤을 때,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스스로 자신의 모습이라고 착각하는 사는 삶이 많아진다.

우리는 '정답'을 찾는 것이 익숙하다. 학교에서12년 간 받는 교육이 '정답 찾기'다. 고로 우리는 '삶'에도 정답이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즉, 자신의 모습에도 '정답'을 정해 놓는다. '행복'이라는 것에 '정의'를 맞춰 스스로 그 틀안에 들어 가거나, 남들이 인정해주는 정답에 가장 가까운 모습을 찾아내고자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답은 분명 현실과 다르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특별히 있는 특징이다. 즉, 우리는 '평균'이나 '보통'의 것을 찾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 한다. 다면 '평균'에는 언제나 함정이 있다. 이것은 사실 굉장히 간단한 논리로 증명할 수 있다. 우리동네 마을 버스에 빌게이츠가 탄다고 해보자. 그 마을 버스에 탄 승객의 자산은 평균 수조원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모습이 아니다. 모두가 자신의 값을 SNS라는 바구니에 던져두고 마구 흔들어 평균값을 낸다. 분명 거기에는 평균을 훨씬 상회하는 이들이 있고, 개중에는 보정과 편집을 통해 평균 수치를 올려 놓는 이들이 상당수다. 이들과 함께 평균을 산정하여 자신의 값과 비교하니, 언제나 초라해 질 수 밖에 없다. 평균은 '거짓말쟁이'다. '보통'이라는 것도 환상이며, SNS는 허상이다. 나 또한 간혹 아이들과 생일 케이크 위의 촛불을 부는 장면을 가끔 SNS에 올리지만, 현실적으로 우리 아이들과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반찬은 2,000원 짜리 분홍 소시지에 계란을 묻힌 소시지전이다. 그것은 당연히 일상의 상당수에 속한다.다만 그것은 당연히 SNS에 저장되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현실이 점차 과거로 변색되며 기억보정이 들어갈 때가 되면, 아름다운 과거와 현재의 간극차만 더 벌어진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자신의 모습을 자신의 모습이라 착각한다. 실제로 일부 고양이는 스스로 자신을 '호랑이'처럼 거대한 포식자로 착각한다. 그들은 자신의 착각에 취해 자신보다 몇 배나 큰 상대에게 덤비기도 하고, 자신보다 아래로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차이는 '자신감'을 만들어내는 좋은 재료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주제를 모르는 자불양력(自不量力)이라는 고사성어를 떠올리게 한다. 가만 보면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지 못한다. 고로 객관적인 자기는 '자기'를 벗어났을 때, 알 수 있기도 하다.

예전 한 손님이 '대형마트'에 항의를 했던 적이 있다. 그는 '매니저'를 찾으며 자신의 딸에게 '아기옷, 침대와 같은 유아용품 쿠폰을 보내는 이유를 따져 물었다. 자신의 딸이 고등학생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쿠폰을 보냈다는 사실에 대한 항의였다. 그러나 이후 그는 자신의 딸이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어 그는 마트에 사과를 한다. 부모보다 더 자녀를 잘 알기는 힘들 것 같지만, 빅데이터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앞서 말한 이야기는 미국의 '타겟'이라는 점포에서 일어난 일이다. 딸의 검색 내용이나 물품구매 이력으로 구매 형태를 분석하여 추천상품 할인 상품을 보내는 것이다. 타겟의 빅데이터 전문가들은 이처럼 고객의 25 형태의 구매 패턴을 분석한다. 고로 고등학생 딸의 임신과 출산에 대한 예측을 가능하게 했다.

부모 뿐만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우리를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포장한 포장지의 모습으로 우리를 기억한다. 자신이 진짜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알기 위해 자신을 관찰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는 스스로를 관찰하기 보다는 우리 외부에 벌어지는 일들에 훨씬 더 관심이 있다. 좋아하는 연예인의 취향이나 목소리, 성격, 외형에 대해 자신보다 더 관심있게 들여다 본다. 즉 자기 자신에 대해 왜곡된 시선을 가진 채, 살아가며 타인을 관찰하는다. 삶을 풍족하게 하기 위해서는 진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진짜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충분하게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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