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부아 에두아르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이혼했다 프랑스 책벌레
이주영 지음 / 나비클럽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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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딱히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닌데, 그렇게 된 일들 투성이다. 어차피 계획하고 의도하는 바대로 되는 것이 없다보니, 계획이나 의도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런 회의감이 마구 들다가 문뜩 다시 떠오른다. 문제는 계획과 의도가 아니다. 그 결과까지 완전하게 자기화하고 싶어했던 욕심일 뿐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결과를 초월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다시 계획을 세우고 의도를 채운다. 원하는 결과를 위해 계획과 의도를 갖고 결과가 원하는 바와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초탈한 마음을 가지려 한다. 다만, 그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다면 세상 어떤 사람이 좌절을 경험하고 미련이라는 '단어'가 사전에 등장하게 되나.

역시 인생은 끊임없는 배움의 연속이고 배움이라는 것은 '뇌'라는 신체기관에 '인'을 새기는 작업이다. 같은 자리를 수 백 만 번 떨어져 자리에 '인'은 새기고 나면 그것은 딱 새긴 기간만큼만 인이 박혀 있다. 고로 중요한 것은 이 말랑거리는 '뇌'라는 신체에 얼마만큼의 '인'을 새길 시간과 정성이 있느냐다.

모든 그렇다. 그러려고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다보니 그렇다. 20대 초반, 해외로 유학을 떠났을 때, 그곳에서 10년을 살게 될 거라고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그곳에서 나는 얼마 정도를 살다가,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싶었다. 역시나 그러려고 그런 것은 아닌데, 그곳에서 대학을 다니고, 첫 직장을 얻었다. 단순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일은 점차 '직업'으로 굳어졌다. 그러려고 그랬던 것은 아닌데, 어쩌다보니 '영주권'을 신청하느냐, 하지 않느냐, 그런 이유로 갈등을 하는 나를 발견했다. 내가 그 나라에 갔던 이유는 '이민'을 위해서가 아니다. 어머니께, '3개월 영어 좀 공부하고 올께요.' 4년을, 다시 일주일 휴가를 왔다가 나머지 수 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생각보면 황당할 노릇이다. 그런데 어찌 된 것이 얼마 뒤에는 해외생활과 그렇게 몇번의 인연을 갖다가 지금은 다시 '제주'로 내려와 있다. 이처럼 말할 수 없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을 영어에서는 'fortune'이라고 부른다. force라는 말이 '힘'이라, 어원을 공유하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운'이라고 부르는데, 흔히 우리는 그것을 '행운'과 같은 의미로 상용한다. fortune이 아니라 luck에 가깝다. luck은 라틴어에서 기원한 빛, 즉 light와 어원을 같이 한다. 다시말하면 luck은 반짝이는 것이고 fortune은 거대하게 무더기 같은 것이 웅장한 움직임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거기에 그래서 동양에서는 이런 운에 '움직이며 돌아다니다'라는 의미의 글자를 사용한다. 그러한 '운'의 거대한 목적, 그것이 '운명'이다.

살다보면 만나고 스쳐지나가는 무수하게 많은 인연들이 있다. 한때는 그들과 영원할 것 같아, 미워했고 극성 맞았고, 시기했고, 안달했다. 그 순간이 영원이라고 여기던 그 당시의 그 모습은 지금 돌이키면 풋내기 어린 아이의 치기 같은 것이다. 마치 '돌아오는 길에 사줄께'라는 말로도 견디지 못하는 어린 아이의 고집 같은 것이다. 그때보다는 몇 시간 정도 더 성숙한 내가 그때의 나를 봐도 그리 어린데... 라고 여기다가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더 성숙할 시기가 남았기에, 결국 언젠가 생각은 돌고 돌아 그때가 맞다는 더 깊은 성숙의 시기를 맞이하게 될 것 같다. 가장 멀어지면 결국은 다시 가장 가까워지는 원형의 시계 바늘 같은 것이다.

'끝'이라는 말을 종종 사용한다. '끝'이라는 것이 '시작'과 가장 멀리 있는 지점이라 여겨지는 때가 있다. 그러나 끝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끝은 '마무리'다. 아무리 좋은 책도 '마무리'가 되지 않으면 출고되지 않는다. 어떤 음악도 '마무리'가 되지 않으면 '이름'이 붙어지지 않는다. '펜'을 잡으면 '펜'을 놓으며 작가의 글이 완성되고 잠자리에서 일어서면 다시 잠자리에 누으며 하루는 완성된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마무리'다. 마무리의 어원은 '끝 말'이라는 한자에 '무리'라는 순 우리말이 붙은 단어다. '무리'는 다시 말하면 '모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다시 말해, 끝은 '시작'을 포함하여 모든 과정을 '모은' 완성체다.

'위상동형'이라는 말이 있다. 복잡한 공간이나 네트워크를 '단순화'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말이다. DNA라던지, 단백질 구조, 서울 지하철 노선처럼 실제 구조가 복잡한 것에서 형태와 공간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사용되는 개념이다. 실제로 강남역과 양재역은 노선도 상에서는 매우 가까워 보이지만 실제로 그 두 역 사이의 거리는 꽤 멀다. 홍대입구역과 신촌역도 노선도에서는 가깝지만 걸어 이동하기 쉽지 않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과 종로3가역도 그렇다. 정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실제를 왜곡하여 거리를 늘이고 줄인다. 그래도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위상동형'에 따르면 강남역과 양재역의 거리가 축소된 것처럼 간소화하고 축약하고 직선화하는 등 바꿀 수 있다. 즉 붙이거나 자르는 행위없이 늘이거나 줄이는 등의 행위만으로 모양을 바꿀때 서로 같다고 말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에 따르면 반지와 빨대의 모양은 서로 같다. 반지를 길게 늘이면 빨대와 같아진다. 즉 반지일 때는 하나였던 구멍이 빨대가 되면 2개의 구멍인 것처럼 보이는 일이다. 영국과 프랑스에 연결된 해저터널을 보면 흥미롭게도 켄트 주 폴크스턴에 있는 영국측 입구와 노르드파드칼레 지방의 코켈에 있는 프랑스 측 입구가 두 개 있지만, 이것은 그 길이만 늘였을 뿐 실제 구멍은 하나다.

만남과 이별이라고 다르지 않다. 만남과 이별은 별개의 무언가처럼 보여진다. 시작과 끝처럼 보여진다. 다만 이는 '과정'을 늘였을 뿐 결국 하나의 구멍이다. 입구가 출구이고 출구가 입구일 뿐이다. 들어가기만 하고 나가지 못하는 구멍은 없다. 나가기만 할 수 있고 들어갈 수만 있는 구멍은 없다. 결국 모든 것은 1과 마이너스 1사이의 길이를 늘이고 줄이는 0의 위상동형이다.

사람이 그렇다. 길이가 짧을 때는 하나로 여겨지는 무언가가, 길이가 길어질수록 둘이라고 여길 뿐이다. 그것은 그것의 본질이 아니라 '길이'의 차이일 뿐이다. 고로 이별이 있는 이유는 만남이 있기 때문이고, 만남이 크다면 이별도 크다. 이별이 크다면, 그 상처로 견디지 못할 아쉬움과 그리움이 사무친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나는 이만큼의 사랑을 이미 받았었구나..."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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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남은 시간 - 인간이 지구를 파괴하는 시대, 인류세를 사는 사람들
최평순 지음 / 해나무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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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피아노 건반 아랫부분은 검정색이었다. 윗부분이 흰색이었다. 초기 피아노에서 흰색 건반은 반음을, 검은색 건반이 전음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흰건반이 아래로 내려오고, 검정 건반은 위로 올라갔을까. 초기 피아노에서 흰색 건반의 재료는 '코끼리 상아'다. 그 당시에도 코끼리 상아는 꽤 비싼 재료였다. 이는 귀족들의 부와 지위의 상징이었다. 품질과 가공기술의 차이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코끼리 한 마리를 잡으면 대략 20개의 피아노 건반을 만들 수 있었다. 고로 코끼리의 상아는 희소성 있는 재료였다. 코끼리의 상아는 일단 자르고 나면 다시 자라지 않는다. 물론 상아를 잘랐다고 해서 코끼리가 생명을 잃지는 않는다. 다만 인간의 욕심에 따라 너무 밑기둥부터 잘라낼 경우, 코끼리는 심한 출혈로 인해 죽는 경우도 있었다. 문제는 인간이 코끼리의 상아를 잘라내고 다시 방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상아를 채취하기 위해 코끼리를 죽인다. 상아는 코끼리의 두개골에 깊숙하게 박혀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상태의 코끼리에서 상아를 채취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나 기술적으로 힘들었다. 그것을 살려두고 방생한다고 하더라도 코끼리 상아는 코끼리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던 신체부위다. 코끼리는 상아를 이용하여 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식물을 파헤친다. 방아와 공격에도 상용한다. 그런 상아가 사리지 코끼리 개체수는 점차 줄어갔다. 개체수가 줄수록 희소성의 가치는 더 높았다. 흰색 상아를 이용한 건반 피아노는 '부와 지위'의 상징이었다. 상아색의 흰색 건반이 고급의 상징으로 자리잡자, '상아색' 건반의 수요를 불러 일으켰다. 이후에는 건반의 다수를 상징하는 아랫부분이 흰색으로 자리잡는다. 19세기가 되면서 피아노 제작은 산업화되고 대중화 되었다. 피아노 제작자들은 더 경제적이고 지속가능한 생산 방식이 필요했다. 코끼리를 죽이지 않고 더 많은 인간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14세기 이후, 당구는 유럽의 귀족 문화였다. 이 문화는 19세기 미국 상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째서 당구는 유럽 귀족들과 미국 상류사회에서 각광받았나. 물론 이 이유만으로 그렇다고 단정할 수 없다. 다만, 당구는 꽤 고급진 스포츠다. 이유는 당구공의 주재료가 '코끼리 상아'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피아노 건반과 같이, 코끼리 상아의 수요는 코끼리 개체수 감소 대비되며 가격을 불러 일으켰다. 이는 역시 수요 공급에 따라 높은 가격을 만들어냈다. 코끼리 상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당구공의 갯수가 고작 6개 내지 8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상아를 채집하기 위해, 인간은 코끼리를 죽인다. 당구와 피아노 건반으로 코끼리를 죽이는 일을 막기 위해 1863년 뉴욕타임즈는 다음과 같은 광고를 실었다.

"상아를 대체할 당구공 물질을 가져오는 이에게 1만 달러를 주겠소."

당시 1만 달러면 우리돈으로 대략 2억 5천만원 정도의 가치가 있는 상금이었다. 이렇게 '존 하이엇'은 '셀룰로이드'라는 물질을 만들어냈다. 셀룰로이드는 열을 가하면 모양을 변형할 수 있다. 식으면 이것은 단단해지고 탄력 있어졌다. 이처럼 '변형가능한 물질'은 한 가지 단점이 있었는데, 충격을 받으면 폭발한다. 이런 이유로 '존 하이엇'은 상금의 일부만 받게 된다. 이렇게 폭발하는 셀룰로이드의 단점을 보완한 사람은 '베이클랜드'라는 화학자였다. 그는 1909년 포름알데히드와 페놀을 이용하여 최초의 합성수지를 만들고 폭발하지 않는 물질을 만들었다. 그로써 상아를 상용하지 않는 당구공을 대량 생산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변형가능한 물질'은 그리스어의 '변형가능한'이라는 단어인 '플라티코스'에서 이름을 따서, '플라스틱'이 됐다. 결국 '코끼리를 살리자'라는 구호와 '북극곰을 살리자'라는 구호가 정확하게 대치점에 서 있는 모습이다.

인간의 편의성의 최정점인 '플라스틱'은 인류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다. 오죽하면, 현대 시대를 '석기, 청동기, 철기' 이후인 '플라스틱기'로 정의하는 학자들도 있을 정도다. 플라스틱의 발명은 이처럼 '환경'에서 먼저 시작했다. 다만 이것이 다시 돌고 돌아 '환경 위협'의 상징이 됐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환경을 위해 뻗은 인간의 손이, 환경의 목을 조르는 형태로 바뀐듯 보인다. 사실 환경에 있어서 사람들마다 다양한 견해가 있다. 누군가는 '인간이 자연환경'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입장이 있고, 누군가는 인간의 산업화가 만든 변화가 환경에 재앙적 위험을 초래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모두 주장이고 의견이다. 실제로 인간이 자연환경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믿는쪽의 입장은 이렇다. 지구의 기온은 '태양의 흑점활동과 화산활동'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19세기 탐보라 화산이 폭발했을때, 지구 기온은 급격하게 내려갔다. 이런 기후 하락으로 역사적 입장에서 나폴레옹의 워털루 전쟁의 패배가 있었고, 전 지구적으로는 농작물 재배의 실패와 대기근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조선 순조 당시에는 흉작으로 인한 대기근과 역병 창궐로 인한 인명피해에 대한 기록이 있다. 고로 지구 기온이라는 것은 내려가서도 문제고, 올라가서도 문제라는 의미다. 지금에서야 산업화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기후 변화에 대해 많은 세계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런 기후변화를 줄이기 위해 각국에서는 역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문제는 다만 각국의 '이해관계'와도 얽혀있다. 우리 대부분은 '기후변화'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갖고 있지만, 사피엔스 출현 이전에도, 이후에도 지구의 기온 변화는 다양한 원인에 의해 꾸준하게 있어왔다. 따뜻한 기온으로의 미래가 기정사실화 되는 현재, 우리는 물론 기후변화의 속도를 줄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다만 변화의 속도를 줄이는 것만이 미래를 대비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지구가 따뜻해졌을 때, 과연 인간에게는 재앙만 되는가. 분명 그렇지 않다. 최근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러시아의 일부 동토에서 농사가 가능해졌다는 뉴스기사가 떴다. 다시말해서, 기존 산업국에게는 재앙이 일부 국가에서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는 의미다. 뿐만 아니라, 기후변화는 일부 지역에서 농업 기간을 연장하도록 한다. 일부 냉대 지방에서는 더 긴 선장과 생산성 증가를 갖게 된다. 또한 현재 비옥하지 않은 지역에서 농업이 가능한 형태로 또다른 의미의 개간이 가능하고 농작물을 재배하기 위해 사용하던 '에너지 비용'이 줄어든다. 쉽게 말해,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 했던 '탄소배출'이 따뜻해지니, 줄어든다는 의미다. 간혹 북극곰의 살 곳을 지켜달라는 자극적인 문구가 우리를 자극하지만, 사실 기후변화는 새로운 종에게도 기회를 준다. 생각해보면 기후가 따뜻할수록 더 번식하는 종이 많아진다. 우리는 매년 몇 종과 몇 목의 생물이 지구상에서 사라졌는지를 듣고 있지만, 반대로 새롭게 생겨나는 종과 새롭게 생겨는 목은 그 자리를 열심히 채우고 있다. 물류 이동에도 다양한 변화가 일어난다. 현재 인간은 물류를 이동하기 위해 불필요한 해상 교통 경로를 이용한다. 다만 기후변화 이후의 세계에는 북극 해빙의 감소로 인해 북극항로를 이용할 수 있게 된다. 북극 항로의 개발은 무역에 긍정적인 영향이 되고, 아주 극적으로 에너지와 시간 효율을 줄여준다. 물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모든 지정학적 이로움이 특정국가에게 귀속된다는 위험성은 있다. 다만 이는 이해관계의 충돌일지 모른다. 우리는 간혹 '환경'을 위한다는 생각을 하지만, 사실 더 근본적으로 갔을 때, '환경'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일이다. 공룡이 살던 시대, 즉 중생대 시대에는 현재보다 훨씬 더 높은 기온이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우리는 지구의 원래 기온으로 회기한다고 말장난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사실 인간의 기술 변화는 꽤 환경에 긍정적인 편으로 진보한 부분도 있다. 앞서 말한 플라스틱의 발견도 그렇다. 다만 문제는 '폭발하는 인구'와 성장하는 경제다. 그렇다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인구를 강제로 줄일 수도 없고 잘 나가는 경제를 일부로 제동 걸수도 없다. 이 모든 것은 다양한 이해관계로 충돌하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철학'을 만나게 된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환경을 생각하는 이유는 이 또한 '우리'를 위한 일이다. 고로 사람마다 처한 위치와 상황, 가치관에 따라 다양한 이해관계, 입장의 차이가 발생한다.

즉, 환경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너무 감성적이어서도, 너무 무관심해서도, 때로는 지나치게 이성적이어도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전 인류가 대적해야 하는 커다란 '과제'에는 댜앙햔 생각과 의견, 경제적, 정치적, 지정학적 입장차이가 있다. 심지어 거의 대부분의 국가가 '민주주의' 국가이자, '산업화 국가'인 시대, 모든 사람이 다른 생각을 할 때에는 하나의 답론을 내리기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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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 영어 문법 2 - 주민혜 선생님과 함께 만화로 쉽게 공부한다! 고등 생강 시리즈
주민혜 지음, 해뜰날 그림 / 스터디하우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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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 한마리가 있다. 원숭이가 타자기를 두들긴다. 'qwdf' 임의로 두들긴 알파벳의 조합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다만 알파벳 조합이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 경우가 있다. 'your', 'is', 'name', 'what'처럼 말이다. 이처럼 의미가 있는 알파벳의 조합을 '단어'라고 한다. 이 최소 단위의 알파벳 조합은 각기 의미가 다르다. 'your'가 하는 역할은 그 소유주를 밝히는 역할이다. name은 그것의 '이름'이다. 즉, 알파벳이 어떻게 배열되느냐에 따라 하는 역할이 달라진다. 동작을 가르키면 '동사', 상태를 설명하면 '형용사', 이름을 가르키면 '명사'다. 이렇게 단어가 어떤 역할은 다르다. 단어가 하는 역할로 분류한 것이 '품사'라고 한다. 영어에는 8개의 품사가 있다고 배운다. '명사, 대명사, 동사, 형용사' 그리고 '부사, 전치사, 감탄사, 접속사'가 있다. 눈치를 챘겠지만 모두 '사'로 끝난다. 또한 나열하는 과정에서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사용했다. 접속사 '앞'에 있던, '명사, 대명사, 동사, 형용사'는 축구로 치면 '선수'에 속한다. '그리고' 뒤에 있는 '전치사, 접속사, 감탄사, 부사'는 선수로 뛰지 않는다. 다만 축구 경기에서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 즉, 치어리더나 심판, 관중 같은 걸 의미한다. 다시말하면 '품사'는 '사람'이다. 개중 '명사, 대명사, 동사, 형용사'만 축구선수다. 이들은 팀을 이뤄 경기를 뛴다. 이렇게 특정 단어들이 팀을 이루면 그것을 '문장'이라고 한다.

단어를 만들다보면 단어의 갯수는 끝도 없어진다. 고로 우리는 이미 있는 단어를 재활용한다. 예를들어 '아름다움'을 가르키는 beauty는 명사다. 이 명사의 뒤에 ful이라는 접미사를 붙어 beautiful이라는 형용사로 재활용하는 것이다. 다시 여기에 ly라는 접미사를 붙어 beuatifully라는 부사로 재활용한다. 이처럼 원래 단어에 뒤나 앞에 무언가를 붙여서 새로운 품사로 바꾸는 경우가 있는데, 그 시작점이 '동사'라면 우리는 이것을 '준동사'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 work라는 동사가 있다고 해보자. 이것은 '일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다만 이 뒤에 ing 나 ed를 붙이면 형용사가 된다. 'working 일하는', ' worked 일이 되어진', 처럼 말이다. 동사의 뒤를 붙여 형용사로 바꾼 것을 '분사'라고 부른다. 앞에 to를 붙이기도 한다. to work처럼 앞에 to를 붙이면, '일하는 것, 일할, 일하기 위해서', 처럼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다. 정해지지 않고 다양하게 해석된다. 이처럼 정해지지 않은 to로 시작하는 단어를 to부정사라고한다. 정해재지 않아다는 의미다. 마지막으로 ing를 붙여 'working 일하는 것' 이렇게 명사로도 활용할 수 있다. 이것은 동명사다. 다시말해, 동명사, 분사, to 부정사, 이 셋을 통틀어 준동사라고 부르는데, 영어는 문장의 순서가 어떻게 배열되느냐, 문장이 어떻게 앞과 뒤의 형태가 어떻게 변화되는냐, 극서으로 품사와 성분을 구분해낸다.

축구 팀에는 반드시 골키퍼가 한 명 들어간다. 한 명도 없을 수도 없지만, 두 명이 나올 수도 없다. 축구장에는 '명사, 형용사, 대명사, 동사'가 들어간다. 이 선수들은 간혹 정해지기도 했지만 다른 포지션에 들어 갈 수도 있다. 다만 동사는 무조건 동사의 위치에만 들어간다. 모든 축구팀에서 한 명의 역할을 하는 '골키퍼'를 '동사'라고 해보자. 골키퍼는 다른 포지션에서 뛰지 않는다. 무조건 골키퍼 포지션에서 뛴다. 그래서 골키퍼가 들어갈 자리는 '골키퍼 자리'다. 모든 선수는 공격수, 수비수 등의 포지션에 배치 받는다. 명사는 공격수, 형용사는 수비수 이런식이다. 이처럼 공격수, 수비수처럼 팀에는 '포지션'이 있다. 이 자리이름을 '성분'이라고 부른다. 문장의 성분에는 '주어, 동사, 목적어, 보어'가 있다. 눈치를 챘겠지만, 모두 '어'로 끝이 난다. 간혹 품사와 성분을 헷갈리는 경우가 있지만 품사는 '사'로 끝나고, 성분은 '어'로 끝난다. 이제 의문이 있다. 어째서 다른 품사는 모두 '사'로 끝나는데, '동사'는 '사'로 끝날까. 이유는 이렇다. 동사의 자리에는 무조건 '동사'만 들어가기 때문이다. 굳이 다른 이름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간혹 축구 해설 위원들은 '골키퍼'를 '골키퍼'라고 부른다. 대체로 다른 선수들은 이름을 불러주는 반면, 골키퍼는 '골키퍼'라고 부른다. 고로 골키퍼의 자리는 골키퍼가 들어가는 것처럼 동사의 자리는 동사가 들어간다. 지금까지 축구를 예로 영어 문법에 대한 설명을 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영어문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말에는 '조사'라는 것이 있다. 흔히 말하는 '은, 는, 이, 가, 을, 를'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단어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정해준다. 쉽게 말해서 '철수'라고 하는 명사 뒤에 '는'이라는 조사를 붙이면 '주어'라는 의미다. '영희'라는 명사에 '을'이라는 조사를 붙이면 '목적어'라는 의미다. 이런 조사의 역할 덕분에 우리는 문장을 뒤죽 박죽 섞어도 의미를 전달하는데 문제가 없다.

"영희는 철수를 사랑한다."

"철수를 영희는 사랑한다."

"사랑한다. 철수는 영희를"

"사랑한다. 영희를 철수는"

심지어 우리말은 '조사' 덕분에 더 다양한 어감을 조정할 수 있는 이점을 얻게 됐다. 다만 영어에는 '조사'가 없다. 즉 어떤 단어가 어떤 성분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저 '어느 위치'에 있는지로 파악을 할 수 밖에 없다. 이런 문제 때문에 영어는 문장을 뒤죽 박죽 섞으면 의미가 바뀐다.

"영희 loves 철수"

"철수 loves 영희"

"love 철수 영희"

"love 영희 철수"

고로 영어는 문장의 순서가 매우 중요하다. 쉽게 말해 우리말의 문법에서는 '조사'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다. 또한 이 명사 뒤에 어떤 조사를 붙이는지 그 구분도 굉장히 다양해진다. 명사가 '할아버지'라면 여기에는 '께서'라는 조사가 붙는다. 반면 영어의 문법은 조사에서 자유로워진다. 그저 어떻게 단어를 배열하는지가 훨씬 중요해진다. 이렇게 영어 단어를 어떤 순서로 배열해야 하는가. 그것이 바로 '문법'이다.

앞서 예를 들었던 'your', 'is', 'name', 'what'라는 단어는 그저 나열하면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이것이 문법 구성에 맞는 순서를 배열하면 비로소 '문장'이 된다. "What is your name?"

이렇게 완전한 자리배치가 완성된 단어 배열을 '문장'이라고 부른다. 문장은 두 단어 이상이 붙어 문장의 구성을 이루는 것이다. 즉, 거기에는 문장의 위치만으로 '조사'와 같은 '격'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최소단위로 형태를 이룬 문장을 '절'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단어가 둘 이상이 배열되어 있으면서 의미는 있지만 '형식'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은 무엇이라고 부르나.

"Oh my god!"

우리는 이렇게 구성된 영어 단어를 만난다. 이것은 분명 문장은 아니다. 다만 둘 이상의 단어가 붙어 있고 의미가 있다. 이런 문장의 조합을 '구'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 언어는 '구'와 '절'로 이뤄져 있다. 이것을 '구절'이라 한다. 구와 절은 번걸아가며 최소단위의 의미를 전달하고 그것이 일관성 있는 하나의 소주제를 갖게 되면 그것은 '문단'이 된다. 문단은 대체로 작은 하나의 단위를 갖고 있다. 수능에서 나오는 짧은 지문들은 대게 '도입, 본론, 결론'처럼 세단계 문단으로 나눠진다.

수능에 나오는 지문의 경우에는 꽤 짜임새 있는 방식으로 여러 형식의 글을 만날 수 있게 해준다. 대체로 18번 문제의 경우는 '편지글', 19번 문제의 경우, '수필'이나 '일기문' 그 밖에 주장문, 설명문, 알림문, 통계문 등이 나온다. 글을 많이 읽다보면 대체적으로 이런 글의 종류에 따라 중요한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편지글'의 경우에는 목적없이 쓰는 경우는 없다. 고로 편지글에서는 어떤 목적으로 편지를 썼는지를 빠르게 파악해야 한다. 일기문의 경우에는 '필자'의 감정과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주장문의 경우에는 필자가 주장하는 바를 알아야 한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가 반드시 있다. 주장문은 '팩트'가 아니라, '의견'이 등러간다. 설명문은 독자가 모를만한 사실에 대한 설명을 한다. 고로 대부분 어려운 명사를 도입에 던지고, 그것에 대한 설명을 하는 방식이다. 대체로 첫문장을 접하고 좌절하는 경우는 그것의 도입이 당연히 모를만한 단어로 시작하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통계문은 당연히 도표를 보고 비교한다. 알림글은 정보를 빠르게 찾아낼 수 있는지를 살핀다. 여기서 도표와 알림과 같은 글들은 '내용이 일치하는지'를 묻는다.

수능이나 모의고사에 나오는 영어 지문은 대체로 '좋지 못한 글'이 많다. 문법이 어그러져 있고, 불필요하게 어려운 단어를 사용한다. 쉽게 Think라는 단어로 '생각하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을 'suppose'라는 가정하다 혹은 'deliberate' 혹은 'consider' 등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대체적으로 이 단어가 더 세밀한 어감을 갖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밖에도 불필요하게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어휘를 집어넣는다. 뿐만아니라 괜스레 수동태 문장이 많거나, 간혹 아예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도 많다. 고로 모든 문장을 정확하게 문법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대체로 '문해력'은 언어를 통해 말과 글의 표면적인 의미를 넘어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파악해내는 능력을 길러낸다. 우리는 언제나 완전하게 다듬어진 글만 만나고 사는 것은 아니다. 특히 '논문'과 같은 글은 다듬어지지 않은 경우도 많다. 고로 영어에서 중요한 것은 '번역'하는 능력이 아니라, 글을 읽고 글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빠르게 파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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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류이치 사카모토 (Ryuichi Sakamoto) 저자, 황국영 역자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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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히 빛나며, 덫없는... 모두가 그렇다. 별처럼 빛나는 시한부 삶을 산다. 그것은 타버리며 소멸해 가는 과정이다. 빛은 본질을 두고 수 억 광 년을 날아온다. 날아 온 빛은 본질이 사라진 순간에도 여전히 빛난다. 그것이 여기에 닿아 어떤 싹을 틔우고 어떤 에너지가 되는지 본질은 알지 못하지만 역시 그것은 이곳에 심어져 새로운 싹으로 생명을 만들어낸다. 빛은 생각을 닮았다. 찰라의 순간만 스쳐 지나간다. 잡을 수도 만질 수도 없다. 잠시 닿고 사라질 뿐이다. 그 찰라의 순간을 위해, 빛은 수억 년의 시간과 수억 광년의 과정이 필요하다. 짧은 만남을 하고 곧바로 사라져 버린다. 빛과의 만남, 생각과 감정이 전달되는 과정은 그래서 아주 고귀하다. 별빛은 얼마나 달렸을까. 얼마나 무수한 공간과 시간을 얼마나 홀로 내달렸을까. 그러니 여기 지금 이순간, 그것들을 허투루 할 수 없다. 모든 순간이 일회성이다. 빛처럼 멀고 길다. 시공간을 달려오며 스치듯 지나간다. 다가오는 인연과 운명, 시간도 그렇다. 우리는 앞으로 몇 번의 겨울을 맞이할까. 몇 번의 오전 10시를 맞이할 것이며, 몇 번의 월요병을 앓게 될까. 모든 것은 유한하다. 유한한 것은 희귀하다. 희귀한 것은 필요로 할 때, 가치 높아진다. 고로 모든 것을 필요로 하면 모든 것은 가치 있어진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모든 것은 고귀해진다.

안타깝게도 인간에게는 80만 시간 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어머니 뱃속에서 빛을 본 이후로 이 유한한 카운타다운은 시작된다. 남은 시간은 줄어들고 희귀해진다. 채워짐 없이 매순간 소비해 버리는 이 유한한 가치는 매순간이 더 고귀해지는 까닭이다. 유아기를 지나고 청년기를 지나며 의식없이, 그것을 소진해 버리지만 그것을 후회하는 그 순간에도, 그것을 의식하는 그 순간에도 그것을 소진하고 있다. 잡을 수도 멈출 수도 없다. 어쨌건 매순간은 소진으로 전속력을 달리는 과정일 뿐이다.

그렇다. 대부분 눈을 뜨고 있는 것 같은데, 눈을 감고 있다.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생각하지 않고 있다. 살있는 것 같은데, 살고 있지 않다. 인생 80만 시간중 30만 시간은 자는데 사용하고 눈 깜빡거리는데에도 9년이나 사용한다. 평생의 40퍼센트를 눈감고 있는데 무엇을 보고 있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말할 수 있나. 나머지 60퍼센트를 무엇으로 채우고 있는가. 인지하지 못하는 매순간에도 별빛은 끝없이 날아온다.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어떤 별은 죽어 버렸을 것이고 어떤 별은 새로 태어났을 것이다. 어둠을 없애기 위한 최선의 빛도 있고, 밝히기 위해 발악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작고 하찮아서 신경에 쓰여지지 않는다. 모든 것은 의식하던, 의식하지 못하던 타버린다. 의식하지 못하는 모든 순간에 그것은 전부 소멸 중이다. 더 태울수록 빨리 소멸하고, 열정적으로 탈수록 수멸한다. 소멸하는 순간도 마저 소멸 중이다. 최선의 타오름으로 소멸해 버린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은 여운으로 잠시 남았다가, 그것마저 소멸해버린다. 모두는 시간이라는 진통제를 치사량까지 투여 받 소멸해 버리는 죽음을 향한 여정 중이다. 책장에는 이미 소멸해버린 별의 여운들이 있다. 그것이 타버려 남겨진 흔적이 몇 백 페이지 위에 있다. 인간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한정된 순간을 살고 한정된 공간을 살며 소멸하는 대부분의 것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스스로도 소멸해버린다.

시간의 유한성과 삶의 허망함은 잠시남아 머물다가, 그마저 소멸해 버릴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기억으로 앉고 사는 듯 하지만, 그것을 몇 번 떠올려 보지 못하고 죽는다. 특히 골똘하게 과거를 돌이켜보지 않는다면 경험한 대부분은 죽음과 함께 한줌의 재가 되어 흔적도차 사라진다. 그것은 '빛'과 같이 멈추지 못하고 잡지 못한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고 살고 있는가. 얼마 전, '사카모토 유이치'라는 인물이 별이 됐다. 함께 시대를 같이한 인물 중 누군가의 생이 마감됐을 때, 그가 곧 '역사'가 될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어린시절, '정주영 회장'이 생을 마감했을 때, 아버지는 대한민국이 끝났다고 생각하셨다. 8년 뒤에는 마이클잭슨이 죽었고, 다시 2년 뒤에 스티브 잡스가 죽었다. 지금은 '죽은 후'가 더 익숙한 인물들이지만, 그들의 생과 함께 살고 있을 때, 나는 일상에 치여 살다가 불현듯 그 죽음을 봤다. 어쩐지 알고 지냈던 누군가의 죽음 같아, 믿겨지지 않으면서 때로는 그 본체를 떠난 빛이 시간과 공간에 남겨 놓는 흔적들로 마치 그것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의 음악을 듣고, 그들이 생각을 읽으며, 그들의 삶에 영향을 받는다. 이미 사라져 버린 채, 빛만 가지고 수 십 억 광년을 날아온 빛의 흔적들처럼 영롱하게 빛나지만 만질수도, 가질 수도 없다. 그저 그것은 그것으로 완전하게 존재하며 아주 멀어져 버린 느낌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거의 모든 것들에서 어떤 것은 사라져가고 있고, 어떤 것은 만들어가고 있다. 소멸하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도 언젠가 소멸하겠지만, 그것이 어두운 어딘가를 얼마간 빛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늘은 단 한번도 완전히 어두워진 적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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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독서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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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꽃이 피는 시기가 있으면 지는 시기도 있다. 지는 시기가 있으면 피는 시기도 있다. 지는 시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피는 시기만 있는 것도 아니며 꽃이 꽃이 아닌 시기도 있고, 꽃이 꽃인 시기도 있다. 그것이 그것이 되는 시기는 분명히 있다. 고로 서두르거나 조급해 할 것 없다. 가끔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두려움이 올 때가 있다. 꽃이 피는 시기에는 한없이 필 것만 같고, 지는 시기에는 한없이 질 것만 같다. 꽃이 꽃인 시기에는 한없이 꽃일 것 같고 꽃이 꽃이 아닌 시기엔 한없이 아닐 것 같다. 다만 지금 보이지 않는다고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이 보이다고 지금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하늘에 떠 있는 별은 수 억 광년을 날아온 빛의 흔적이며 그것이 보인다고 지금 존재하는지는 알 수는 없다. 반대로 어떤 별은 수 억 년 전에 만들어져 빛의 속도로 날아오고 있지만 아직 도달하지 않은 것도 있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빛의 속도로 날아오고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고, 그것이 보인다고 하더라도 환영일 수 있다. 우주가 한 점에서 터져 나올 때, 사방으로 그 파편이 튕겨 나갔으니 우주의 모양은 '구'를 닮았다. 그것은 빙글 빙글 돌아가며 시작과 끝점을 같도록 하고 위와 아래가 없으며, 옆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밟고 있는 땅도 둥글기 때문에 이는 우주를 닮았다. 둥근 것은 위도 아래도 없으며 옆도 없다. 어느 쪽으로 굴려도 그 모양은 같고 뒤집어도 세워도 그것은 그 모양이다. 지구의 곡률이 1도당 111.32킬로다. 그것은 360도로 나누어 조금씩 아래로 휘어지고 있다. 고로 우리가 바라보는 시선이 '곧'고 세상이 둥글기 때문에 우리의 시선은 14.58km 밖의 세상을 보지 못한다. 그 지평선이 시선의 끝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세상의 끝은 아니며, 바라보지 못한 세상의 범위가 더 넓게 펼쳐져 있다. 그것 공간을 더 넓게 보는 유일한 방법은 그저 바라보고 싶은 방향으로 한 걸음 더 걸을 뿐이다.

고로 서둘지 마라. 그러나 쉬지도 마라. 그저 한 걸음씩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이 설정한 방향으로 걸어가라. 한걸음 뗄 때마다, 지평선 끝도 한 걸음만큼 넓어진다. 세상을 바라보는 넓이는 몇 걸음을 떼었는지로 결정될 뿐이다. 앞으로 나아가면 반대로 과거는 지평선 아래로 사라진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에 내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에 따라 사라지고 나타날 뿐이다. 모두 환영 같은 것이다. 움직이지 않고 서 있으면, 과거도 미래도 사라지지 않고 생겨나지 않으며, 그것을 만들어내는 유일한 창조의 시간은 오로지 지금, 여기일 뿐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존재의 두려움을 겪고 존재하는 것에 허상의 불안함을 갖지마라. 보아주지 않아도 스스로하고 알아주지 않아도 무소처럼 자신의 길을 걸어라. 묵묵하게 걸어가면 그것은 비록 잘못된 길이라도 언젠가 제자리가 될 것이다. 그러면 다시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라. 우주가 둥글고 지구가 둥글기에 거기에서는 잘못된 방향도 잘못된 길도 없다. 방위가 서로 같고 상하가 서로 같다. 고로 자신이 믿는 방향을 향해 묵묵히 걸으라. 세상이 나를 몰라줘도 원망하지말고 세상이 나를 잘못 알아줘도 탓하지 마라. 그저 가기로 했다면 생각은 자리에 내려놓고 그 자리를 벗어나라. 세상이 나를 몰라준다고 원망하기 전에 내실보다 더 알려졌음을 두려워 해라.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본능'이며 '흉내'가 아니라 '본질'이다. 세상이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확인하려면 그저 둥근 달을 바라보라. 그것이 반달이 되었다고 반이 사라졌는가. 그것이 구름에 가려졌다고 존재하지 않는가. 차지 않은 달을 채우는 유일한 방법은 그저 묵묵하게 자신의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일일 뿐이다. 지워진 달의 반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 보다,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최선을 다하라. 어느 순간 그것이 가득차 있다면 그것은 모든 것이 둥글다는 증명이다. 고로 지금 바라는 무언가가 무슨 모양을 하고 있는지 걱정하지마라. 그것이 반달의 모양이든, 하현의 모양이든, 초승이나, 심지어 삭의 모양이든 그저 그것의 원형이 머리 위에 떠있음을 기억하고 보여지지 않는 부분이 채워지는데는 적당한 시기가 있다고 믿어라.

조금씩 조금씩, 자신이 하는 일을 하라. 의문도 품지말고 좌절도 하지말고 열심히 하지말고 그저 숨 쉬듯이 해라. 특별하게 의미도 부여하지 말고, 하고 있는 중에는 자신이 그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망각하도록 해라. 세상 위대한 일은 모두 '귀찮고 하찮고 피찮고 시시찮다. 그것을 꾸준하게 해내는 것이야 말고 진정한 해냄이다. 하루 아침에 이뤄지는 것은 없다. 마찬가지로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도 없다. 조금씩 조금씩 꾸준하게 나빠지고, 조금씩 조금씩 꾸준하게 좋아질 뿐이다. 그저 하고 있는 일에 몰입하라. 현재와 지금에만 몰입하라. 그 밖에 모든 것은 환영이고 거짓이고 착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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