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진 한국, 일본다루기
김현구 지음 / 이상미디어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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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스토브리그'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돈이 없어서 졌다. 과외를 못해서 대학을 못 갔다. 몸이 아파서 졌다. 모두가 같은 환경일 수가 없고, 각자 가진 무기 가지고 싸우는 건데, 핑계대기 시작하면 똑같은 상황에서 또 집니다. 우리는 오서환 단장한테 진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주어진 상황한테 진 겁니다."

운동 선수가 경기에서 졌으면 경쟁 상대를 미워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에는 누가됐건 이길 수 있도록 해야하는 것이다. 본질은 지지 않는 것이지, 상대가 어쩐지가 아니다. 공정한 룰과 규칙에 의해 진행되는 '스포츠'와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감정적 대응'이 아니라, 이성적 대응이다. 상대를 미워하는 일이 스스로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냉철하게 확인하고 합리적, 이성적으로 상황을 대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적'은 언제나 '적'이 아니다. '비'는 '홍수'가 났을 때나 '원망'의 대상이지, 가문 날에는 '희망'의 대상이다. 고로 대응은 '상대'가 아니라 '상황'에 해야 한다. 상황이 바뀌었음에도 언제나 '명분'만을 가지고 대응할 수는 없다.

명청교체기에 '여진족'과 화친해야 하는 문제로 조선은 분열되어 있었다. 당시 '여진'은 오랑케였다. 그냥 오랑케도 아니라, 뿌리 깊은 숙적이다. 여진족은 조선뿐만 아니라, 고려 때에도 한반도 내륙과 해안 지역을 침입하고 약탈하곤 했다. '광해'의 실리외교가 당시에는 '친일'에 버금가는 저항을 불러 일으켰음을 짐작케 할 수 있다. 결코 '적'과 화친할 수 없는 명분은 '인조반정'의 원인이 됐다. 기어코 현실을 받아 들이지 못한 '선택'이 결국, 비극이 됐다.

중요한 것은 학습능력이다. 변형 문제가 나오면 와르르 무너지는 겉핥기식 학습이 아니라, 그 '본질'을 파고 드는 일이다. 산과 골이 번갈아가며 진행되는 '시간'과 '상황'의 변화는 '새옹지마'와 닮았다. 모든 것은 그렇게 위와 아래를 번가른다. 그리고 나아간다. 중간단계 없이 건너뛰는 것은 없다. 하루와 하루가 쌓여 이뤄지는 것이다. 바퀴가 땅을 밟고 일렬의 흔적을 남기며 앞으로 나아가듯, 모든 과정을 하나의 선으로 즈려밟고 나아가는 것이다. 고로 하루 아침에 이뤄지는 것도 없고,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것도 없다. 그래서 고대 인도는 '수레바퀴'에 빗대어 우주를 표현했는지 모른다. 경제는 매초, 매분, 매일, 매주, 매년을 숫자하여 기록한다. 수레바퀴가 굴러간 흔적이 여실하게 좌표에 나온다. 그것이 가능한 영역이기에 그렇다. 사람의 일생도 수치화 가능하다면 '분봉', '일봉', '주봉', '월봉'처럼 캔들차트화 가능할지 모른다.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우리는 모두 '우상향'을 바란다. 그러나 단기적으로 급상승하는 그래프가 언제나 우상향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고로 '역사', '경제', '사회', '문화' 무엇을 보거나 단기적인 파동에 눈이 가려져 더 큰 파동을 보지 못한다면 그 수레 바퀴는 '위'를 향한 우상향이 아니라, 때로는 제자리를 헛도는, 혹은 '바닥'을 향해 나아가는 '우하향'이 되지 않을까. 간혹 역사, 국제관계, 경제 등을 보며 스스로에 대한 삶을 생각해 볼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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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유전학
임야비 지음 / 쌤앤파커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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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마음으로 읽다가...

후반부에 '잉?' 하면서 후다닥 넘어가던 소설.

우생학하면 꽤 전근대적 용어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최근 중국의 허젠쿠이라는 과학자는 특별한 실험을 했다. 그는 에이즈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HIV 바이러스에 아이들이 감염되지 않도록 실험을 했다. 아이들의 DNA를 바꾸어 HIV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는 아이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이 실험은 전 세계에서 크게 논란이 됐고 허젠쿠이는 이후 법적 처벌을 받는다.

비슷한 예는 더 있다. 1996년 일본에서는 '우생보호법'을 폐지했다. 이 법은 우생학적 이념에 기반을 둔 법이다. 쉽게 말해 특정 유전 질환을 가진 사람들 혹은 정신적,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출산을 강제로 제한하는 법이다. 이 법으로 수천 명의 사람들이 당사자 동의없이 강제 불임 수술을 받았다. 이렇게 보면 '동아시아'의 생명 윤리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미국에서도 20세기 중반까지 비슷한 사례가 법적으로 허용됐다. 미국의 여러 주에서도 신체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제 불임수술을 허용했다. 이후 이런 법적 조치들은 대부분 폐지 됐지만 일부 주에서는 여전히 관련 법이 존재한다. 또한 최근까지 실제 실시된 사례가 보고되기도 한다. 유럽도 마찬가지다. 흔히 '복지의 국가'로 알려진 '스웨덴'에서도 우생학 프로그램이 있었다. 스웨덴은 비교적 최근인 1976년까지 우생학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가진 이들과 사회적으로 부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이들에 대한 강제 불임 수술을 시행했다. '생명 윤리'는 '우생학'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문제 제기 된다. 인도는 1970년대에 인구 조절을 위해 대규모 강제 불임 수술 캠페인을 벌였다. 인구를 줄이기 위해 많은 인도 남성들은 실제 강제 불임 수술을 받았다. 1972년까지 미국에서는 수 십 년 동안 매독에 걸린 남성을 치료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관찰하기 위해 흑인 남성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 했으며 나치 독일 또한 앞서 말한 다양한 종류의 실험을 자행했다.

얼핏 우생학은 그럴싸 해보인다. 단순히 생각해보면 그렇게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 논리는 아주 쉽고 단순하다. 특정 유전자가 좋은 특성을 결정한다. 고로 나쁜 유전자를 없애고 좋은 유전자를 남기면 전반적으로 사회에는 좋은 유전자만 남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유전학 실험하면 인간의 건강과 능력을 개선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아주 매력적인 이야기다. 쉽게 말해, 뛰어난 유전자만 사회에 남기고 열등한 유전자를 없애는 일이다. 고로 과거에는 꽤 많은 과학자와 정치인들이 우생학을 지지했다. 실제 조선에서도 우생학의 역사는 존재한다. 1973년 12월 5일, 대한민국 초대 보건부 차관인 '이갑수'라는 이가 사망한다. 그는 1889년 4월에 태어난다. 경성의학전문대학교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 대학에서 유학 후, 1933년 조선 우생학회 창립의 주도적인 인물로 활동한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 국립 우생학회를 재건하여 우생법 재건을 위해 노력한다. 어쨌건 현대 사회가 되면서 윤리와 인권 등의 문제가 되기 전, 당시에는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생학은 어째서 잘못됐을까. 이유는 이렇다. 우생은 기본적으로 '철학'의 문제와 엮인다. 과연 좋은 유전자라고 하는 것을 누가 정의할 것인가. '좋다'라는 것은 또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목이 긴 기린이 '자연의 선택'을 받아 생존한 것은 '환경'에 적합한 유전자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변화무쌍한 환경에 적합한 유전인자를 어떻게 구별할 것이냐는 것이다. 지구는 몇 번의 대멸종기를 맞이한다. 지구의 대멸종 사건은 '탄소'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탄소 순환의 변화가 지구 기후와 대기, 해양의 화학 구성 변화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로인해 공기 중에 '산소농도'가 변화한다. 여기에 적합한 생물종이 살아 남았기 때문에 모든 공룡이 일시에 멸종한 이후에도 '포유류' 같은 작은 종이 생존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종의 번영을 위해서는 '종의 다양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간의 '무지'가 '정치'와 만나면 역사는 어떻게 잔인해지는지 우리는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알았다. 불과 500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는 '농업사회'를 살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불과 얼마 뒤에 '산업사회'를 산다. 시대마다 요구하는 '좋은 유전자'는 다르다. 우리가 제거한 유전인자가 어떤 시대에 어떻게 발현될지 아무도 모른다. 인간을 개조하기 위한 여러 유전적 실험은 대체로 성공하지 못한다. 인간에게 더 많은 우유를 공급하던 '소'는 '우유'를 공급하는 일 밖에 하지 못한다. 불균형적으로 무너진 신체는 다른 상황에서 생존하기 힘들게 됐다. 인간에게 보살핌과 귀여움을 받아야 생존하던 늑대와 여우는 알록달록한 외형을 가진 대신에 자연에서 생존할 수 있는 대부분의 능력을 상실했다. 과연 이것에 올바른 방향으로의 생존인지를 따지고 보자면 우리는 자연이 하는 일에 관여하지 않는 편이 훨씬 현명한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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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 수학 2 - 2015 개정 교육과정 고등 생강 시리즈
김민재.김현준.남치열 지음, 해뜰날 그림 / 스터디하우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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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수학의 벽을 만난 중학생 혹은 고등학생 자녀가 있다면 다음과 같이 물어보자.

"원주율이 뭐야?"

보통 이 물음에 이렇게 답할 것이다.

"파이(π)요."

"파이(π)가 뭔데?"

"3.14요."

"3.14가 뭔데?

"원주율이요."

"그래서 원주율이 뭔데?"

이 대화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학생들은 '원주율'은 '파이', '파이'는 '3.14' 이렇게 암기한다.

고로 원의 둘레를 구하기 위해서는 '2πr'이라는 공식을 외울 것이다. 다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파이'가 정확하게 뭐냐는 것이다. 수학 성적이 좋지 못한 아이들의 대부분은 그저 진도 나가기 바쁜 수학 선생의 다그침에 머리에 때려 넣는다. 여기서 부터 '수학적 사고'는 사라져 버린다.

그렇다면 다수의 성인도 정확하게 답하지 못하는 '원주율'이란 무엇일가.

원주율을 알기 위해, 그것이 왜 필요한지 알아야 한다. 과거 길이를 재기 위해서 '자'를 사용해야 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직선의 도구로 곡선의 길이를 정확하게 재는 것이 불가능 했기 때문이다. 고로 원형의 무언가의 둘레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줄자'가 아니라, 원의 반지름과 둘레의 '비율'을 알아야 했다.

원형의 트랙이 있다고 해보자. 이 넓은 트랙의 둘레를 측정하기 위해 줄자를 사용할수는 없다. 혹은 축구공에 들어갈 '가죽의 면적'을 구하기 위해, 줄자를 이용하여 측정 할 수 없다. 이때 사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원의 반지름이 길어질수록 원의 둘레는 더 커진다. 야구공 크기의 공을 만들 때와 축구공 크기의 공을 만들 때, 더 많은 가죽이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원의 지름이 커질수록 둘레가 일정 비율로 함께 길어지는데, 그 비비율이 3.14159 정도 된다.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파이(π)다. 지름과 둘레의 비율을 구하기 위해서는 둘레에서 지름을 나눠야 한다. 고로 파이(π)는 지름 나누기 둘레다. 다시 말하면 '등호의 양변에 같은 값을 사칙연산해도 값이 등호의 성질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등식의 성질'을 볼 때, 둘레를 구하는 공식은 이렇게 구한다.

둘레÷지름=π

둘레÷지름x지름=πx지름

둘레=지름π

여기서 반지름을 r이라고 할 때, 지름은 반지름을 두 번 더한 값이기 때문에, 지름은 '2r'이 된다. 고로 둘레를 구하는 공식은 2πr이다.

과연 원의 둘레를 구할 수 있는 학생 중, 이와 같이 설명할 수 있는 이들은 얼마나 있을까. 수학은 '논리'와 '사고'를 위해 공부하는 과목이다. 물론 일정 부분 암기가 필요하긴 하지만, 다른 암기과목과는 교육의 목적이 다르다. 그렇다면 머리가 지끈 거리는 수학문제를 풀기 위한 목적 말고는 원의 둘레는 왜 필요한가.

만약 대한민국 어딘가에서 지진이 일어났다고 해보자. 지진이 일어나면 지진파가 발생한다. 지진파는 진원에서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고로 각각 다른 지진 관측소에서 관측되는 지진의 시간차를 이용하면 그 지원이 어디인지 알 수 있다.

한 단계 더 나아가보자. 만약 누워서 낮잠을 자고 있다고 해보자. 방 천장에 파리 한마리가 붙어 있다. 우리는 그 파리의 위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과거에는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수학적인 방식이 없었다. 이후 '프랑스의 수학자 데카르트'는 17세기가 되면서 실제 세계를 수학적 개념을 통해 시각화 할 수 있도록 했다. 그것이 바로 '좌표평면'이다. 좌표평면을 이용하면 공간을 '수학화'할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GPS를 통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는 이유는 지구를 '구'라고 가정하고, 그것을 구형 좌표 시스템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즉, 위도와 경도를 이용하여 위치를 파악한다. 고로 지구에서 '대한민국'의 위치를 좌평면화 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앞서 일어난 지진의 진원은 정중앙일 가능성이 적다. 고로 좌표평면상의 위치를 (a, b)라고 했을 때, 지진의 크기를 예측할 수 있다. 이때는 삼각형의 빗변의 길이를 구하는 '피타고라스의 정의'가 사용된다. 이것을 설명하면 너무 길어지기에, 밑변 곱하기 높이의 제곱이 빗변의 길이의 제곱이라는 '비율'의 성질을 사용한다고 알자. 그렇다면 원의 둘레에 있는 한 지점과 중심점 사이의 거리를 구하는 공식은 (x-a)의 제곱 더하기 (y-n)의 제곱은 반지름의 제곱이라는 공식이 나온다. 여기서 r을 구하기 위해서는 좌변의 값에 루트를 사용하면 된다.

막연하게 그저 숫자를 외우고 공식을 외우면 어느 순간에 우리의 뇌는 '혼돈'에 쌓인다. 마치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의 명사를 잊어버리고, '그... 뭐냐..', 그.. 있잖아.. 저번에...'라고 말하는 것 처럼 말이다. 우리의 뇌는 꾸준하게 망각한다. 고로 모든 정보는 시간이 지나며 퇴색해 간다. 물론 구구단처럼 완전히 각인된 정보는 잘 변하지 않지만, 우리가 학업을 준비하는 기간에 꾸준하게 준비해야 하는 수업 진도의 양을 따라가기란 쉽지 않다. 고로 그것을 기억해내기 위해서 그것이 왜 그렇게 되는지를 먼저 확인해 봐야 할 필요가 있다. 수학은 반은 암기과목이지만, 분명하게 절반은 암기과목이 아니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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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마인드 - 무의식이 이끄는 부의 해답
하와이 대저택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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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로또 명당자리에서는 1등 당첨자가 많이 나온다. 고로 사람들은 로또 명당을 찾는다. 그리고 여지 없이 그 자리에서 1등이 나온다.

이것은 그 자리가 풍수지리적으로 좋기 때문이 아니다. 특정 장소에서 로또 판매량이 많을 경우, 자연스럽게 그 곳에서 더 많은 당첨자가 나올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는 '확증편향'이 있는데, 특정 장소에서 당첨자가 여러 번 나왔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 이유로 그 곳이 '행운의 장소'라는 인식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다만, 이런 관찰은 일반적인 확률 분포와 무작위성의 일부일 뿐, 실제 그 장소가 다른 장소보다 더 높은 당첨 확률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그저 무작위성과 관련된 통계적 우연이며 사회적, 심리적 요인들의 복합적 결과일 뿐이다. 로또 당첨 확률은 구매장소와 상관없이 동일한 확률을 갖는다.

대치동에서 서울대학교 합격 비율이 높은 현상에도 비슷한 이유가 있다. 대치동은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교육 열풍의 핵심 지역이다. 이곳은 다양한 학원과 사설 교습소가 많다. 입시 컨설팅과 학습 자료 구입에 용이하고 이 곳에 학생을 보내는 학부모의 평균 소득과 학력도 평균적으로 높은 편이다. 이들의 다수는 서울 혹은 경기권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고 학업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높다. 고로 대치동에서 서울대학교 합격비율이 높은 것은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몰리기 때문'이지, 공부에 관심 없는 이들이 대치동으로 이사를 간다고 자연스럽게 학업 성적이 오르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이런 현상들이 꽤 많은데, 아마 다수의 집단 심리에 의해 벌어지는 일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예를들어 실리콘 밸리는 기술 기업들이 다수 포진되어 혁신의 중심지로 인식될 수 있지만, 이는 투자 환경과 인재 풀, 네트워킹 기회, 정부 정책 등의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결과이지, 실리콘밸리라는 '지역'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다시 말하자면, 사회는 다양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무작위적이고 산발적으로 존재하는 곳이다. 특정 컨텐츠가 이 산발적인 사람들 중 관심이 비슷한 사람들을 모으면 당연히 그곳에서는 네트워크가 발생하고, 다른 장소에 비해 '성공' 확률이 높아질 뿐이다.

이것은 마케팅에서 자주 활용되는 방법이다. 가령 로또 명당은 최초에는 타의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이후에는 '자의'에 의해 홍보된다. 이렇게 홍보되면 이곳의 로또 판매량은 더 높아지고, 판매량이 높아지면 로또 1등 당첨자 비율 역시 더 높아진다. 학원의 경우에도 몇몇 합격자생이 배출되면 더 많은 학생들이 그 학원을 다니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 많은 학생이 학원을 다니면 명문대 배출 비율은 더 높아진다. 이것은 단순한 논리다.

끌어당김의 법칙을 행하는 사람, 100명을 모아서 이들에게 성공 확률을 물어보자. 이들의 성공확률은 일정 비율을 가질 것이다. 다만 끌어당김의 법칙을 믿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목표의식'이 분명하기 때문에 다른 비교군에 비해 더 많은 '성공 비율'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 또한 내부에서 선순환적인 네트워크와 정보공유가 이뤄지며 그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다만 이것은 '끌어당김의 법칙' 때문이 아니라, 관심사가 비슷한 이들의 집단이 더 높은 확률의 성공률을 보였기 때문이다. 같은 집단에서는 반드시 성공하지 못하는 집단도 생긴다.

'니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행운에 속지마라'라는 책을 보면, '생존자 편향'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쉽게 말해, 러시안 룰렛이라는 게임을 예로 들 수 있다. 러시안 룰렛은 한 개의 총알을 리볼버의 여섯 개 총실 중에 넣고 무작위로 회전 시킨 후, 사람이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게임이다. 러시안 룰렛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극도의 운을 가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다만 이는 생존자 편향의 예다. 즉, 살아남은 사람만이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생존자의 이야기는 실제 위험성에 대해서는 간과되는 경향이 있다. 당연하다. 실패한 이들은 이미 총을 맞고 죽었기 때문에 '발언의 기회'가 사라진다. 고로 생존하는 사람의 경험만 전승된다. 또한 생존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그 게임에서 이길 확률은 100%다. 고로 그 게임의 위험성에 대해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경향이 생긴다.

생존자가 자신의 생존 노하우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 게임자에게 말한다고 해서, 게임의 확률은 변하지 않는다. 즉 살아남은 한 사람의 '스타'는 일정 확률로 만들어진다. 그렇다고 생존자가 의도적인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생존한 '스타'의 발언에 주목하는 일에 조심해야 한다.

과거 조현병에 걸려 있던 '스트리머'가 이었다. 그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자산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을 것이고 이어 세계 유명인들과 어깨를 나란하게 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끌어당김의 법칙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에 확신을 갖고 있었으며 매일 같을 읊고 읽고 쓰기까지 했다. 책이 말하는 바와 같이 '확언'을 했다. 이미 이루어진 것 처럼 말하고 다녔다. 항상 좋은 기분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분명, 믿어 좋을 컨텐츠는 분명하다. 그러나 수많은 조현병 환자의 망상이 그들 앞에 실현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증명할 방법이 없다. 망상증 환자의 경우는 정상인에 비해 자신의 망상을 확고하게 한다. 그러나 어째서 그들에게만 '끌어당김의 법칙'은 냉혹한 것일까. 일론 머스크나 워렌버핏, 빌 게이츠가 자리에 앉아서 '고급 승용차를 타고 싶어요.', '빨리 은퇴하고 싶어요. 자산이 10배가 늘었으면 좋겠어요.', '주식이 30%는 올랐으면 좋겠어요.'를 쓰고 읊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잘못됐다. 이들의 대부분은 '목표의식'을 분명히 한다. '상태'가 아니라 '행위'에 집중한다. 즉, '고급차와 저택을 갖고 싶어요'가 아니라, 오늘은 어떤 목표를 이뤄야 겠다.는 다짐을 한다.

혹시 '끌어당김의 법칙'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더시크릿'의 저자, '론다 번'의 다른 성공작에 대해 알고 있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고 있지 않다. 성공하는 방법을 판매하여 성공에 이르는 이들이 간혹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스티브 잡스', '아인슈타인', '뉴턴', '빌 게이츠'의 이름을 빌린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성공에 이른다. 다큐멘터리와 책의 판매수는 급격하게 올라간다. 다만 생각해보면 이렇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 사'를 창업했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정리했다. 뉴턴은 프린키피아를 저술했고 빌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 사를 창업했다. 누구나 쉽게 말과 글이면 '끌어당김의 법칙'으로 성공에 이를 수 있는데 왜 그들은 그 쉬운 길을 돌아가야만 했을까. 어째서 스티브 잡스는 투병생활 중에서도 출근을 했고 아인슈타인은 논문을 쓰면서 특허청 직원으로 일해야 했을까.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착각은 언제나 '우상'을 만든다. 김연아 선수는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로 세계 최고가 됐을 것이고 스티브 잡스나 워렌버핏, 일론 머스크, 핸리포드 또한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을 것이라는 착각이 항상 '숭배 대상'을 만든다. 우리는 어떻게하면 살을 뺄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돈을 벌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 할 수 있는지, 모두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더 쉬운 '시크릿'을 찾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더 쉬운 길이 아니라, 더 많이 하는 길이다. 일론 머스크는 지금도 주당 80에서 100시간은 일한다. 빌게이츠 또한 주당 80시간과 100시간을 일했으며 토마스 에디슨은 잠자는 시간을 극도로 줄였다. 마르코 피사노는 JP모건의 고의 투자 은행가로, 주당 100시간을 일했으며, 제너럴 모터스의 CEO인 메리 바라는 주 80에서 100시간을 일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수면을 최소화하고 더 많은 시간을 작업에 할애하기 위해 폴리파식 수면을 했다. 니콜라 테슬라는 하루 15시간 이상을 작업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끌어당김의 법칙이고 상상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그들이 성공을 위한 노력에 대한 폄하다. 예전 백종원 대표가 한 자영업자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필요하다면 발품 팔아서, 음식의 무게도 측정하고 분해도 해보고 맛도 보고, 수 백, 수 천 번을 만들어 봐야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기분 좋은 상상'이나 했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꾸준한 상상이 행동으로 발현되는 '상관관계'를 따지고 들자면 그럴 수 있다. 개인적으로 '파이어족'을 좋아하진 않는다. 최대한 빨리 벌어서 일을 때려 치우는 것이 목적인 것에 응원하진 않는다. 백종원 대표의 '자산' 때문에 가려진, '요리'에 대한 철학, 박진영 프로듀서의 '자산'에 가려진, '음악'에 대한 철학을 깡그리 무시할 수는 없다. 그저 자신의 일에 철학 없이 '자산에 집중하세요.'는 장기적이지 않다. 돈이란 다수에게 흩어져 있는 '영향력'을 모으는 일이다. 즉, 뭘 했는지, 무엇을 이루었는지, 무엇을 사회에 남겼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자산'을 가늠하기에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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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루는 세 번 시작된다 - 30대 배달 알바에서 100억 사업가가 된 초성장의 비밀
유근용 지음 / 다산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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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불여일성 천사여불여일행(百技不如一誠 千思不如一行), 백 가지 기술도 한 번의 지극한 정성만 못하고, 천 번의 생각도 한 번의 실행만 못하다.

5년 간, 책을 읽고 블로그에 독후감을 쓰기 시작했다. 오늘 날짜로 889권의 도서 목록이 블로그에 기록되어 있다. 2020년에는 236권, 2021년에는 226권, 2022년에는 231권이다. 2023년이 다 저물어가는 12월 오늘을 살펴보니 184권이 기록되어 있다.

나의 블로그는 오롯하게 '나만을 위한 기록'이었다. 2019년에도 그랬고, 2020년에도 그랬다. 그러던 것이 어느 날부터, 댓글에 이런 내용이 올라왔다.

"이런 식으로 글을 쓰시면 스마트폰으로 글을 읽는 사람들이 불편합니다. 개선해주세요."

나의 글은 '무더기'처럼 쌓여 있다. 적당하게 사진을 섞고 알록달록 색상을 넣지도 않는다. 친절하게 '말하는 투'로 쓰여 있지 않다. 그저 생각한 것을 '무더기'로 쌓아 올려져 있다. 그러니 가독성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쓰여진 글은 '퇴고'도 없다. 그저 '일필휘지' 자리에 앉아서 '후다닥'하고 PC를 꺼버린다. 그러니 어느 날, 원서를 읽은 뒤의 글을 썼을대는 이런 댓글도 달렸다.

"작가라는 사람이 맞춤법, 띄어쓰기도 못하나요? 책임감 좀 가지세요. 영어 전에 국어부터 공부하시죠."

얼굴이 붉어졌다. 이유는 실제 나의 무지로 발생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이 들었다. 나의 글을 보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구나. 언젠가 블로그에 유입하는 경로를 확인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구독알림'을 통해 들어 왔다. 일부는 자신이 마음에 드는 문장을 가끔 필사한다고도 했다.

참으로 희안한 것이 나의 블로그는 특별하게 꾸미지도 않고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이슈성이 강한 글은 일부러 시기를 놓쳐서 쓰기도 한다. 내 블로그의 제목이 '개인 해우소'인 것을 있어 보이게 말하면, '걱정을 해소하는 곳'이고, 말 그대로 하면 '똥을 싸질러 놓는 곳'이기도 하다. 블로그 이름을 지을 때에는 특별한 철학을 담은 것도 아니다. 그냥 '막 싸질러 놓겠다'는 생각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나를 알았다. 나는 깨끗한 책을 보존하기 위해, 책을 깨끗이 보려는 편이었고, 새로 산 연필, 지우개, 공책도 모두 깨끗하게 사용하고 싶어했다. 그러다가 중학생 정도에 '아차' 싶었던 적이 있었는데, '공책'을 깨끗이 사용하기 위해, 첫장부터 과도한 노력을 기울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글씨체가 흐트러지면, 처음 몇 페이지를 찢고 새로운 공책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멍청한 일이던가. 나는 그 이후로 '새것'을 사면 그 바로 첫날, 일부러 막 다룬다. 새 옷을 사건, 새로운 스마트폰을 구매하건, 새책을 사건, 새차를 사건 그렇다. 그것의 본질이 사용이라면, 그것을 편하게 사용하기 위해 '길들이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대상에게 '주종' 관계를 확실하게 잡아주고 그것을 편하게 사용하길 바랐다.

블로그에 '똥간' 같은 이름을 지어 놓은 이유도 그렇다. 아마 조상들이 자신의 아들 이름을 '개똥이', '소똥이'라고 부른 것과 같은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막써야 편해지고, 편해야야 막쓰게 된다. 그런 시작으로 나의 글에는 언제나 똥을 싸질러대는 마음으로 쓴다. 그것이 내가 블로그를 5년 간 유지할 수 있던 원동력이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열심히 하면 안된다'라는 이상한 철학을 갖게 됐다. '열심히'라는 추상적이고 주관적이며 감성적인 단어 때문에, 간혹 우리는 그 자체에 심취한 자신에게 기대와 이상을 심는다. 그 자아도취가 완전하게 자아의 형상을 만들어내면 언제나 그에 합당하지 않은 결과를 받아 들인다. 모든 것은 '지속적인 우상향'이다. 고로 자신의 '열심히'하는 모습에 '도취'되어 '열심히'라는 착각에 빠지면, 결과라는 현실의 잣대에 몽둥이질을 당한다. 결과가 어찌됐던, 그냥 아쉬울 것 없이,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그냥 결과가 주는 몽둥이가 '매값'이 없어야 한다. 어떤 결과가 나오던, 그냥 아무런 심리적 데미지 없이,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그냥 해야 한다. 그냥 변소간을 드나들 듯, 대단한 일을 해냈다는 도취 없이, 그것이 커다란 변화를 줄 것이라는 기대도 없이, 그저 해야 한다.

인일능지 기백지 인십능지 기천지(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남이 한 번에 잘하거든, 나는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에 잘하거든, 나는 천 번을 한다. 이는 중용에서 나오는 말이다. 남들과 비교할 것도 없다. 결과에 연연할 것도 없다. 남들이 화장실 한 번 더 갔다고 기를 쓰고 화장실을 더 가지 않는 것처럼, 나의 생체적 리듬에 맞게 그것을 해내면 그만이다.

그것을 사람들이 대단하게 여기던, 사람들이 대단하지 않게 여기던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스스로 하는 일을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던, 하찮지 않게 여기던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똥간을 갔다오듯 해 낼 뿐이다. 그저 읽고 그저 쓴다. 그저 먹고 그저 싸는 것처럼 말이다.

블로그에는 읽은 책만 기록하지 않는다. 내가 알아야 할 내용을 기록하는 '메모장'이기도 하고 다짐을 다잡는 다짐장이기도 하다. 감사일기를 쓰는 '감사일기장'이기도 하고 스스로 긍정적이도록 독려하는 확언장이기도 하다. 아이를 키우는 일상을 적는 육아 일기이자, 나만의 육아 노하우를 공유하는 육아컨텐츠이기도 하다. 내 투자에 대한 공부를 하는 '투자일지'이기도 하고, 사회 현상과 경제를 분석하는 '컬럼'이기도 하다. 출판사가 출간 문의를 해오면 사용할 '컨텐츠 출처'이기도 하고 나를 홍보하는 브랜딩 홍보장이기도 하며 유튜브의 대본이자, 출간 도서의 원고이기도 하다.

블로그에는 어렵게 얻게 된 노하우와 기술, 정보를 가감없이 기록한다. 여기에는 자의적이거나 타의적인 '선행'이 1도 없다. 다만 누군가가 도움을 받으면 좋은 일이고 오직 스스로를 위할 뿐이다. 성장하는 이는 아무리 막아서도 어떻게든 성장하고, 정체할 이들은 아무리 끌어내도 정체하게 되어 있다. 나만의 노하우와 비밀을 아무리 틀어먹아도 성장할 이들은 성장해 낼 것이며, 멈춰 있으려는 이들을 아무리 밀어도 그들은 정체할 뿐이다. 여기서 나의 역할은 감사하게 성장하는 이들의 자양분으로써 사용될 뿐이며, 그것이 좋게 쓰여지는 '퇴비'이자 '똥'의 선순환이지 않을까 싶다.

나의 독후감은 '책'의 요약이 없다.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도 없다. 책에 대한 내용이 조금도 들어가 있지 않을 때도 있다. 그저 나는 책을 읽으며 무엇을 느꼈는지를 기록할 뿐이며, 그저 잘 씹고 소화하여 뱉어버린 똥 같은 글일 뿐이다. 고로 나의 글을 욕하더라도 나의 글에 대해서는 단 1의 정신적 데미지도 입지 않는다. 내가 싼 똥들이 좋게 사용되어 세상에 거름이 된다면, 다시 그것이 나를 키워내는 퇴비가 된다면, 이 얼마나 순도 높은 효율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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